아버지와 막내아들 원택이의 재판 비용
아버지는 1927년 1월생이다.
1940년에 치문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리중학교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반대로 학업을 포기하고 공부를 더하고자 치문학교 소사(小師)가 되어 6학년 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무보수로 2년 동안 물을 끓이고 교무실을 청소하고 시간마다 학교 종을 치는 일꾼으로 살았다.
중학교에 진학할 길이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1943년 16살에 친구들과 함께 만주국 수도인 신경 (현재 이름 장춘 )에 노무자로 일하러 갔다. 이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신의주로 갔고 안동에서 신경 가는 기차를 탔다고 한다. 어떤 공장에서 일을 하였는데 보수도 작고 날씨도 너무 춥고 사글세방을 두 번이나 도둑에게 털리게 되어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 후 1944년 여름 이리기관차사무소 임시직 노무자로 취업하였다.
아버지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6.25 때와 1977년에 두 번이나 겪었다.
그 후 1985년 6월 29일에 은퇴하실 때 까지 무려 41년 동안 기관차 사무소에서 기관차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엔지니어로 사셨다. 단 한 번 부산 초량기관차사무소에서 5년 정도 근무 한 것을 제하고 아버지는 36년의 세월을 이리기관차사무소에서만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으셨다.
그러나 그 퇴직금을 거의 절반을 막내아들 원택이 재판비로 사용하였다. 나는 당시 순천지검에 계신 어떤 선배의 조언을 받고 아버지에게 관선 변호사를 쓰시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내 아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아비 된 자로서 어찌 관선에 아들을 맡기겠느냐?
민선 변호사를 쓰는 것은 아비로서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의 행위가 옳다는 신뢰의 표시다.
돈이 수중에 있는데 어찌 나 편하자고 국선 변호사를 쓰겠느냐!”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남은 퇴직금을 아낌없이 바친 아버지는 전업 농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것을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고 정치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아들을 도와주지 못함을 크게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나 아들이❰경천애인❱의 지도자로서 청렴, 정직, 최선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모두가 함께 사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기를 무시로 기도하셨다.
아버지는 기관차사무소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농부셨다. 가난한 살림을 일으키고자 출근 전, 출근 후에 거름을 나르고 물코를 트고 닫는 일을 하셨다. 그러나 정년퇴임 후, 특별히 막내아들 재판에 퇴직금을 다 쓴 후부터는 노구를 이끌고 집 농사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농사일에도 일꾼으로 가서 일하시며 품앗이를 하였다.
나는 이원택 출마 후보자에게 41년 한 자리를 지켜온 아버지의 끈기와 근성이 있음을 본다.
아버지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퇴직금을 고난 중에 있는 아들에게 쾌척하였듯이
이원택 후보는 고난 받는 전라북도, 새만금 그리고 전북도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쾌척할 것이다.
2026년 3월 12일목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아버지가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