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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세계 박람회 기념품을 수집해 온 백성현 명지 전문대 교수는
15년간 세계 박람회 기념품을 수집해 온 백성현 명지 전문대 교수는
"내 수집품들이 우리나라 박람회의 디자인 솔루션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곽아람 기자 (2008년 11월 20일 강남의 어느빌딩전시장에서)
chosun.com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20/2008112001900.html
[다른 자료]
[감귤색의 자금성 지붕]
[의의]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대조선에서 만든 카드가 대륙풍이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사진은 희미하지만 위 자금성 지붕의 색깔과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기와가 짙은 노란색, 감귤색,주황색, 혹은 주홍색이다.
서안에 있던 경복궁도 대륙풍의 북경 자금성과 같은 건물형태로 존재해 있었지 않겠는가?
지붕이 감귤색으로..
그런데 한반도 서울의 경복궁건물의 지붕은 검정색이다.
모든 서울시내 황궁의 지붕기와는 검정색뿐이다.
이는 대조선의 황궁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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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00년 파리박람회 한국관그림엔 청인도 있었다.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alon.interview365.com/1
1900 (파리)박람회 (한국관그림) ^ 청인 ^ 한국관 사진
윗그림 왼쪽은 하단에 조선의 귀수댁여인,
갓쓴 양반과 감투를 쓴 대감이 자리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청인이 서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지게를 진 평민이 있고, 저 멀리 삿갓, 갓쓴 조선인들이 지나간다.
[의의]
한국관을 그리면서 그 주위의 사람들은 분명 한국, 조선인이 분명하다.
조선인만 있어야 하나 북방인, 청인도 있었다.
바로 대조선에는 중원의 조선인 뿐 아니라 북적의 청인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에 있던 외국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나라의 성격을 대변하는, 그나라를 대표하는 조선관으로 볼 때
외국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윗 그림의 청인도 바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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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8~10>
대조선의 꽃중의 꽃인 모란꽃은 대륙의 꽃이다.
8.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모란이 우리나라꽃중의 하나로 뽑혔다.
국립중앙박물관내 전시판에 보면 모란이
현재 우리나라꽃중에 하나로 당당히 뽑혔다.
이는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나 그림에서 모란이 많이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모란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사람들중 모란을 평생 한번도 보지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모란이 많이있는 곳은 바로 대륙이다.
고려, 조선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모란이 흔한 우리꽃으로 뽑힌 것이다.
모란꽃 문양 고려자기
모란꽃 문양의 만주국 동전
혼례식 때는 대례병(大禮屛)으로 모란병풍이 많이 사용되었다.
모란꽃 문양의 병풍
오죽헌에 전시된 조선시대 모란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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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치허련은 낙양의 꽃, 모란을 그린 대륙조선인의 증거
[근거]
.
"1839년, 전라도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였다. ...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다.
참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29/2008122901717.html
그만큼 소치는 "모란"을 잘,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그림 설명에서도 "소치 허련의〈모란〉.
그는 외딴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추사에게 발탁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가가 됐다.
스승이 숨지고 스승의 세력마저 스러진 뒤
소치는 전국을 방랑하며 숱하게 모란을 그렸다.
부유한 중인들이 그의 모란꽃 그림을 다투어 샀다."고 했다.
소치 허련의 <모란> 소치 허련의 <산수>
그의 그림속의 글속에
"昔年我是洛陽客看畵繁華寫牧丹. 泓碧波慧賞 小痴居士."
[지난해 나는 낙양의 나그네가 되어 활짝 핀 꽃을 보고 모란을 그렸다. 소치거사 허련.] 고 나온다.
"소치가 낙양 나그네"였다는 말이다.
그가 32살(1839)에 추사 김정희를 서울에서 만났건, 아니건, 별세한 때가 1893년이니,
그 동안 54년이란 세월 속에서 낙양의 나그네가 되었었다.
낙양은 하남성 낙수와 황하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도시이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 소치가 조선을 벗어나 어디엔가 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출처: 대륙조선사 연구회 , 최두환지음 소치 허련의 "모란"에 대하여
*해설: 허모란 소치허련은 대조선의 동경 낙양에서 모란꽃을 즐겨 그린것으로 풀이된다.
[모란의 등급]
양화소록의 부록인 화암수록에 꽃을 9등급으로 분류했다
1등은 높은 풍치와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로 하였다.
2등은 부와 귀를 취하여 모란, 작약, 왜홍(왜철쭉), 해류(海榴), 파초로 하였다.
3등은 운치를 위하여 치자,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으로 하였다.
4등은 역시 운치를 취하여 화리(華利), 소척, 서양화, 포도, 굴로 하였다.
5등은 번화한 것을 취하여 석류, 도화,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로 하였다.
6등은 역시 번화한 것을 취하여 두견(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枾),오동으로 하였다.
7등은 각가의 장점을 취하여 배, 정향, 목련, 앵두, 단풍으로 하였다.
8등은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목근(무궁화), 석죽(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 두충으로 하였다.
9등은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해바라기, 전추라, 금잔화, 석창포, 화양목으로 하였다.
출처: 정재훈, 한국전통의 원 중에서
[낙양의 모란축제]
하남성 낙양시에서는 매년 4월 15일부터 25일까지
낙양시를 대표하는 꽃축제인 낙양 모란꽃축제를 개최한다.
낙양은 현재 중국인들에게는 모란꽃으로 유명한데,
중국인들은 모란을 「꽃중의 꽃」으로 꼽는다.
수나라 때부터 모란의 재배가 시작되어
당나라 때 급속하게 확산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송나라의 문인 歐陽詢(구양순)는 「洛陽牧丹記(낙양목단기)」에서
「낙양의 흙은 꽃에 가장 어울려 모란이 세상에 제일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낙양의 별칭은 牧丹城(목단성)이다.
낙양의 시화인 모란꽃은 전국에서도 가장 왕성하여
모란의 재배와 감상이 이곳에서는 오랜 풍습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현존 품종만도 3백 50여종에 이르고,
그 중에서도 요황(姚黃)과 위자(魏紫)는 모란의 왕과 왕후라 불린다.
지난 1983년 첫 번째 축제가 개최된 이래로 계속 개최되고 있는 낙양 모란 꽃 축제에는
꽃놀이, 연등전시, 서화, 사진전 등 다채로운 이벤트와
모란품종개발에 관련된 각종 세미나,
무역 상담회 등이 펼쳐져 비즈니스의 장이 마련된다.
특히 왕성공원 식물원에서는 아름다운 모란꽃이 그 멋을 뽐내며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원문보기:
http://www.nocutnews.co.kr/news/4371348#csidx8aab6c62f2187eb93b92b2afa103472
[의의]
1. 한반도에선 거의 모란을 찾아볼수가 없으나,
옛조선의 사서나 그림을 보면 모란이 많이 등장하고,
양화소록에도 2등급을 차지할 정도로 모란은 대조선의 꽃중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모란그림의 일인자, 소치 허련도 결국 낙양에서 일생을 마감하였고,
그 낙양이야 말로 모란의 주산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모란이 많고,
매년 모란축제도 성대히 열린다고 한다.
2.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물에도 모란을 대조선의 대표적인 꽃중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는 대조선이 낙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진 대륙국가임을 보여주는 실예인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모란을 가장 많이 그렸던 소치허련은 대륙조선의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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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낙양의 모란꽃축제는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뜻이다.
[자료의 근거]
고려 예종황제때 정습명(鄭襲明) 의 시 石竹花 (패랭이 꽃) 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世 愛 牧 丹 紅 세상사람들 붉은 모란꽃을 사랑하여 裁 培 滿 園 中 정원에 가득히 심어 기르네
誰 知 荒 草 野 뉘라 알리 황량한 들판위에도 亦 有 好 花 叢 또한 좋은 꽃 떨기 있음을
色 透 村 塘 月 그 모습은 연못에 달빛이 스민 듯 香 傳 壟 樹 風 언덕 나무 바람결에 풍기는 향기
地 偏 公 子 少 외진 땅 찾아주는 귀공자 적어 嬌 態 屬 田 翁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기누나
* 이 詩는 작자가 사람들이 화려한 모란은 많이 재배하지만
이 石竹花의 고상하고 아늑한 멋은 모르고 있음을 자신의 처지 와 비교하여 읊은 詩로
패랭이꽃의 고결한 자태를 이야기할 뿐 모란을 시샘하지도 귀공자들의 안목 없음을 탓하지도 않는
"哀而不怨" 즉 슬퍼하되 원망하지 않는 君子의 의연하고 늠연함을 보여준 絶唱이다.
이 詩를 예종이 읽고는 玉堂으로 불러 올렸다고 傳한다 (풀잎피리 참조)
* 해설:
세상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집집마다 모란꽃을 많이 심어 기른다는 것은 한반도이야기가 아니다.
대륙이야기이다.
[의의]
1. 대륙 하남성 낙양시는
고려의 개경( 숭산기슭에 고려의 황궁이 있다고 서긍의 고려도경에 나온다.) 에서 가깝다고 한다.
고려시인 정습명의 시에서 보듯이 고려에는 모란꽃을 많이들 재배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현재 대륙의 낙양시에 모란꽃 축제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2. 이뿐만이 아니라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았더니
모란을 소재로 한 자기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려인들은 모란을 즐겨심었고 흔히 보았던 모란을 소재로 도자기에 그려놓은 것이다.
그 모란이 낙양에 많았고, 낙양은 고려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3. 모란을 주제로 한 자기는 조선시대에도 역시 나온다.
조선도 대륙에 계속 있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정리하면
낙양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 인근에 있던 곳으로 모란재배가 성행했고,
그 모란은 고려 조선의 도자기에도 나온바,
고려, 조선은 다같이 대륙에 대대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한반도는 축제를 지방단체마다 많이들 하는데 모란을 주제로 하는 것을 못보았다.
이것은 모란이 한반도에 많이들 재배 하는 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고려의 황도 개경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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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1~14>
한반도지명의 허구성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은 조선의 지명과 다르다. )
11. 한반도의 천마산은 고려의 천마산이 아니다.
[자료의 근거]
고려시대 이규보의 시 <천마산天麻山>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산속에 들다 길 잃어 숲속에 떨어졌는데, 높은 바위 쳐다보니 몇 백 길이 되는가. 나무를 헤집고 가니 원숭이들이 서로 싸우네. 창바위에 말을 세웠으니 누구를 치려는가. 북바위소리 없으니 무엇에 놀라리, 사람소리에 산골자기가 응락하는 것 같네.“
[의의]
1. 윗의 시에 보면 천마산에 원숭이가 나온다. 그러나, 한반도의 천마산에는 원숭이는 커녕 어느 열대동물도 보이질 않는다. 2. 한반도 천마산은 경기도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에 있다. 겨울에는 천마산스키장으로 유명하다. 3. 한반도에는 천마산을 포함하여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다. 이는 대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4. 한반도는 생물도감에서도 예부터 원숭이가 살수 없다고 하였고, 원숭이가 서식할 만큼 아열대기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5. 이규보의 시의 천마산은 대륙의 천마산을 말하는 것이다. 6. 대륙의 황하이남은 아열대에 속하고, 원숭이도 많이 산다고 한다. 그 대륙의 천마산은 바로 하남성 숭산의 북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숭산은 물론 황하이남에 위치해 있다. 7. 그래서 대륙의 천마산에는 원숭이가 많이 있다고 한다.
8.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현재 천마산은 대조선의 사서에 나오는 그런 천마산이 아닌 것이다.
[천마산의 비교] 1. 한반도의 천마산
한반도 천마산은 온대성기후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천혜의 스키장으로 유명하다.(조용진님 사진참조)
2. 대륙의 천마산 인근의 숭산 (=사서에 나오는 대조선의 천마산)
하남성인근의 숭산의 북쪽 봉우리가 천마산이다. 깍아진듯한 낭떠러지에 조선에서 유명한 잔도가 어렵게 설치되어 있다.(유호용님 사진 참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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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백제의 하남위례성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중국 하남성 숭산에 있다.
[자료의 근거]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신동아 1997년 11월호
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이하 하남성 : 河南省)의 숭산(崇山)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허난성의 수도 정주에서 대절버스를 빌려 낙양 방면으로 2시간 남짓 달리다가
소림사 입구 쪽에서 10분간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데,
승객을 실은 일반버스가 마침 우리 일행 앞에 멈춰 섰다.
『저 버스 좀 봐. 「百濟(백제)」라고 씌어 있네』
누군가 소리쳤다.
분명히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우리의 고대나라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하남성 소속인 그 중국버스는
분명히 인근의 백제쪽에서 소림사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소림사행을 취소하고 그 버스로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을 찾아
그 연유를 캐고 싶었지만, 단체 행동의 제약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숭산 소림사에서 무술시범을 보면서도 내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황하강 남쪽 하남(河南)의 숭산에서 만난 「백제」라는 단어.
그 옛날 우리의 선조 백제인들은
한강 이남의 땅을 역시 「하남」이라고 불렀다고 배웠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하남 위례성 인근에는 중국의 숭산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숭산도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
(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황하의 남쪽을 의미하는 하남」과 산(숭산)이
한반도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나타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또,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으로는
중국 허난성 숭산 인근에 백제라는 이름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숭산과 가까운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0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615~682년)의 묘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일까?
[의의]
1.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중국 하남성 숭산에 있다.
한반도 서울 강남의 위례성 발굴지는 허구이다.
그곳에서 성곽의 흔적도 나오질 않는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례성은 숭산이 있는 곳이고 한강의 남쪽이었다.
그 한강은 패하이고 패하의 남쪽이라 해서 하남이다.
즉 하남성에서 였다.
2. 하남성은 어디겠는가?
중국대륙의 하남성이다.
패하는 패수이고, 패수는 황하의 중류지점이다.
그 황하는 위수와 합쳐 대동강을 이루고
낙양으로 내려와 낙수(낙동강)와 합류된다.
그 지점의 남쪽에는 하남성의 숭산이 있다.
그 숭산은 후대에 고려의 수도 개성이 자리잡게 된다.
3. 이처럼 하남성은 백제의 땅도 되다가 신라의 땅도 되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그리고, 후대의 고려, 조선의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 하남성은 대한민국사에서 역사적인 주무대로 자리잡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하남땅에 백제의 지명도 나오고, 백제의 무덤도 나오고,
백제로 가는 버스푯말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백제의 유적지가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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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울의 사라진 저자도에 백제의 성터가 없었다.
서울의 저자도에 백제의 성터가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문학가 이덕무가 그의 저서 청장관저서에서 이렇게 전했다.
"저자도에는 백제온조왕의 옛성터가 있고, 그 아래에는 창해 허격이 살던 집이 있다.
나는 10년전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적이 있다.
<긴 강물(한강물)은 처사가 주 周나라를 받드는 절개요,
옛 성 城은 나약한 왕(온조)이 촉 蜀을 의지하던 심정이라네.> (이하생략) "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엮음),사군자출판사,444p
<해설>
조선의 사서에 보면 옥수동 한강변을 넘어 저자도가 옛날 있었는데,
그곳이 백제온조왕의 옛성토였다고 하네요.
저자도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단지를 짓느라고 모두 없어졌지만,
과연 백제의 성터(위례성)가 있었을까요?
만약 백제의 성터, 위례성
(서울 강남에 백제의 성터가 발견되었다지만, 백제성인지 아직도 확인이 안되고 있다)이라면
문화재청은 무얼하고 있었을 까요.
그냥 내버려두었을까요?
그러나 그곳이 성터가 있었다고 알고 있는 부처는 없는것으로 보이네요.
사실 백제의 성터는 없던 것이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서울의 저자도는
조선의 사서에 나오는 저자도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죠.
한강이 원래 주나라를 받드는 절개라고 문헌에는 나오네요.
이것은 이 한강이 주나라가 있던 땅이라는 소리이고,
그 후예국가 조선이 그나라를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이지요.
따라서 저자도는 한반도 한강에 있었던 섬이 아니라
대륙 섬서성 위수(옛 패수,한강)에 있었던 섬이라면 모든것이 이해됩니다.
조선의 한양(한성,서안,장안)인근의 한강(위수)에 있었던 섬이 저자도이고,
이곳에 백제의 옛성터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주나라가 있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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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은 조선의 지명과 다르다.
14.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의 아차산이 아니다.
<조선시대 아차산 峨嵯山모습>
조선때 문인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 내에 실려있는
아정유고 제3권, '문(文)'에서의 협주기(=한강을 거슬러 가며)의 내용이다.
<1776년, 내가 3월25일 정사원과 동자와 함께
청교에 사는 심경문의 집에 이르자, 여문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출발하여 광희문을 나와
전관의 고개에서 쉬면서 동쪽에 있는 아차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은 붉은 쇳물을 내리부은 듯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산 밑의 평원에는 풀이 푸르고 무성하여 역마들이 꼴을 뜯고 있으며,
밭의 보리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같은 비단 필목처럼 훤한데 공중에서 메추리의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이하 생략)>
<서울의 아차산모습>
서울의 아차산은 강북의 동쪽끝에 위치하며
구리시와 서울시 동대문구,광진구와 접해있는 산이다.
높이 287m이다.
산이푸르르고, 후대에 고구려 유적지가 발견되어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떠들썩하다.
아차산남쪽 한강변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워커힐호텔이 있다.
<해설>
그러나 조선시대의 아차산은 서울의 아차산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 문헌속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녹음이 우거져 있는 그런 아차산이 아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나지 않는 사막기후의 산을 말한다.
비록 나무와 풀이 없다함이 산불이 일어났다면 잠시 그럴 수도 있으나,
그것도 겨울이 아니라면 풀,나무들은 다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만 산 밑의 평원에는 풀만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아차산은 신당동 야산(전관의 고개)에서
나무와 말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1km이내거리)로 나온다.
그런데 서울의 신당동에서 아차산을 본다면
산의 테두리는 볼 수 있어도 어느 물체를 볼 수는 없다.
양쪽의 거리만 해도 7여 km나 된다.
그래서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시대의 아차산이 아닌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기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곳이다.
비가 자주 오지 않고, 토질이 나무와 풀이 잘 자랄수 없는 곳이다.
건조지대와 접해있는 스텝류기후지역이다.
비가 와도 1년에 조금씩 내려 풀만 자랄 수 있는 곳. 고산지역은
그남아 빗물이 모아질수 없는 곳. 반사막지역, 황토지역이다.
옛 독립문사진의 뒷산의 그런모습이다.(서안일대로 추정)
산은 거의 돌산의 모습.
나무가 있다하나 어쩌다가 한 두개 보이고... 문헌속의 아차산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동안 조선이 대륙에 있음을 여러번 밝히면서 서울도 대륙의 서안에 있음을 점쳐왔었다.
그런 도중 아차산이 만약에 서안일대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가정해보면 거의 일치한다.
사진= 일제당시의 독립문 (대륙조선사 연구회참고)
아차산은 섬서성 서안인근에 있다.
서안의 섬서성 중남부일대는 황하지류인 위수가 흐르고 있고,
위수 이북, 서쪽의 감숙성으로 가는 산골쪽은 모두 황토로 이뤄진 산악지대이다.
이곳은 필자가 2007년 12월에 방문한 적이 있다.
겨울에 가서 그런지 나무한그루, 풀한포기가 없었다.
사진- 섬서성일대의 황토산 (MBC 황화6부작 참고)
그러나, 물을 끌어들여 밭농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물을 대면 풀, 야채류는 자랄 수 있다고 해석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거의 몇그루밖에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산악지대가 계단식 밭모양으로 정상에서 아래까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에 바람이 불것 같으면 황토가 먼지가 되어 온 동네를 휩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섬서성 이지역은 건물이 모두 이곳 황토로 만든
황색벽돌로 지어졌고, 동네가 항상 뿌여했다.
사진= 해발1700여m 의 섬서성 황토고원 (함께여는 세상/천둥산참조)
고산지대의 협곡을 넘어 서안시내쪽으로 가면 위수(패수)를 따라 드넓은 초원이 전개된다.
조선시대 아차산이 바로 이런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한반도 서울의 지형하고는 전혀 맞지않는다.
<지은이 이덕무 약력>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조~정조)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자가 무관이고, 호가 형암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박지원, 유득공과 친하다.
박학다재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는 <청장관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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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5~17>
[물소가 대조선의 동물인 증거]
15. 대조선의 물소뿔이란 공물은 동남아대륙의 공물이다
물소의 뿔은 대조선의 주요한 생산품이다.
그래서 최고의 정부기관인 의정부에서 조선황제께 물소뿔을 바쳤고,
그 물소뿔을 재료로 조선의 각궁이 만들어졌다.
에 이렇게 나온다. " 의정부에서 물소뿔 16척개를 바치다. " | |||||
의정부(議政府)에서 수우각(水牛角) 16척(隻)을 바치었다. 【원전】 1 집 626 면 | |||||
-------------------------------------------------- 각궁은 길이 120∼130cm의 단궁(短弓)이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는 복합궁이다. 물소 뿔,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료가 사용된다. | |||||
[의의]
1. 물소뿔은 한반도에서 생산되지 못하는 조공공물품목이다. 물소는 대륙의 중남부지방에서 흔한 열대지방의 동물이다. 2. 조선은 대륙국가의 대국이었기에 ,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에는 물소의 뿔이 있었고, 신사임당의 동물그림에도 우리나라 조선에서 흔한 물소가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그린 삽화에도 대조선의 물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3. 대조선의 명품 각궁의 재료로서 신토불이 물소뿔이 있었다함은 물소가 조선에서 흔한 동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4.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후 전리품으로 바치라는 물품중에 물소뿔로 만든 각궁이 있었다고 하니, 물소는 명백한 대륙조선의 증거물중의 하나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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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청나라군인이 잡아가는 조선의 소는 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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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사임당은 열대동물 물소를 그렸다.
[자료의 근거]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내 전시관에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가 있다.
화가: 신사임당. 시기: 조선 (16세기). water buffalo.
* 설명서
" 경사진 물가에서 한가로이 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을 포착하였습니다.
좌측하단에 짙은 먹색의 바위를 배치하여 구조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소의 몸체에 X자형의 콧구멍,
검은눈동자 주위에 두른 흰색테등 당대의 시대양식이 잘나타나 있다."
[의의]
1. 조선시대 여류화가인 신사임당이 물소를 그렸다고 함은 큰 의미가 있다.
그 당시 동물원이 있어 동물원의 물소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없다.
물가에 있는 물소, 조선의 남부지방은 아열대, 열대지방이어서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가 바로 물소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이다.
2. 조선의 남부지방의 강에는 악어가 우글거린다는 내용이 있듯이
물소는 조선에서 흔한 동물일 것으로 기대된다.
오죽헌 전시장의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 (Water Buffalo)- 우측그림
오죽헌 전시장의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 (Water Buffa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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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8~20>
[대조선에서 그린 지도는 조선의 세계영토를 표현했다.]
18. 한국본여지도는 대조선본토의 지도이다.
[자료의 근거]
한국본여지도
대조선에서 그린 지도지만 원본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다.
지도이름이 한국본여지도 즉 한국을 나타내는 지도이다.
한국본토지도, 대조선본토지도, 한반도,열도,
중국대륙, 동남아가 모두 대조선의 본토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동아시아지도라면 아세아지도라 했을 것을 왜 한국~ 지도라 했을까?
이 땅이 모두 대조선의 영토였기에 한국본여지도라 했던 것이다.
[의의]
이 지도에는 한국이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시아임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중국지역의 지역표시무늬가 한반도에 축소되어 비슷하게 표시된것 같은데요.
원본에는 천하여지도라 한다.
이는 대조선인 대한민국(corea)이 아시아임을 다시한번 증명하는 꼴이 된다.
귀중한 자료다.
원본은 프랑스국립 도서관에 있다.
한국여지전도는 조선대륙 강화(강도)에서 프랑스가 빼앗아 간 대조선의 지도입니다.
대륙조선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참고: 대륙조선사 홈페이지
한국본 여지도(韓國本 輿地圖)는 17세기 즈음에 (1637년에서 1644년 사이 ) 대조선에서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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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대조선국토의 지도이다.
[자료의 근거]
1. 조선초 1402년(태종 2)에 권근(權近)·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薈) 등이 제작한 유라시아 대조선의 국토지도이다. 정화제독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는 세로 158.5㎝, 가로 168.0㎝.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 필사본. 원본은 일본 교토[京都]의 류고쿠대학[龍谷大學]에 있으며, 규슈[九州] 시마바라 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도 유사한 본이 있다
2.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당시 알고 있던 세계인 구대륙 전체를 그린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도이다. 지도 하단에 있는 양촌(陽村) 권근이 쓴 발문에 의하면, 대륙에서 만든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우리나라·일본의 지도를 합하여 새로 제작했다고 기록했다 3.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이전의 지도로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세계지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지도제작술의 수준은 세계최고였다. 대조선의 기술로 그린 유라시아, 바로 대조선의 강토를 잘 표현해 냈다. 유라시아는 국경이 없다. 오직 대국 대조선이 관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20. 태평양은 대조선의 동해로서 원래 대동양이었다.
[지도의 증거] 1669년(조선 19대 숙종)에 송이영?이 제작한 자명종식 혼천시계는 국보 제230호로 지정된 것이고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혼천시계에는 지구의가 있는데 그 지구의는 대조선의 세계 영토지도를 나타낸다. 이 안에는 태평양이 대동양으로 나온다. 그림= 시계의 지구의(문중양 교수의 역사과학기행,동아시아,325p,2006 참조)
<해설> 조선의 동해인 태평양은 원래 대동양大東洋이라고 표기했다. 조선의 서쪽은 대서양大西洋, 동쪽은 대동양, 남쪽은 태평양이다. 그래서 조선은 삼면의 바다로 둘러쌓여 있다는 것으로 통한다. 조선이 서쪽바다 대서양을 만들었으면, 동쪽바다 대동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조선의 4해란 유라시아,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북해은 북극해, 동해는 대동양(후에 태평양으로 고침), 서해는 대서양, 남해는 태평양(후에 인도양으로 바꿈)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볼때 서쪽의 대동양은 맞지 않으므로 조선의 남해인 태평양을 가지고 대동양의 이름을 바꾸어놓았고, 그 태평양자리는 영국이 차지한 인도에 가깝다하여 인도양으로 바꾼것으로 보인다. 대조선은 지구촌을 다스리는 초대형 국가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대양 육대륙의 명칭이 모두 우리말(한자)로 표기되어 있고, 1669년도 대조선은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세계는 그당시 어르신들이 말하는 조선천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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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1~24>
[대륙은 대조선의 땅이다]
21. 양자강은 고려, 조선 고유의 강이었다.
[자료의 근거]
조선시대 문집 동문선 권22 김구용의 시 < 양자강에 배를 타고(夜拍揚子江)>
" 달은 양자강에 가득하고 밤은 맑은데,
배는 남쪽 언덕에 매고 조수나기 기다리네,
봉창에 잠깨어 보니 어딘지는 알겠거니,
오색구름 깊은 곳에 백제성이 보이누나 "
月滿長江秋夜淸 繫船南岸待潮生 봉窓睡覺知何處 五色雲深是帝城
월만장강추야청 계선남안대조생 봉창수각지하처 오색운심시제성
[해설]
1. 양자강은 장강이라고도 하며 백제성은 사천성 봉절현 동쪽 백제산에 있다.
2. 호북성의 양자강을 따라 상류로 가다보면 장강삼협을 지나다 보면 백제성이란 고성이 나온다.
3. 고려의 시인 김구용이 지은 이 시구는 한반도가 아니라,
고려의 양자강에 밤배를 타고 한수 지은 것이다.
김구용은 사신으로 대륙을 간것도 아니다.
4. 고려의 본토, 전라도 접경지대인 양자강에서 배를 탔던 것이다.
5. 양자강은 즉 고려 대조선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강이었다.
[참고]
이사람을 보라2권 (金鍾潤)
[참조사진] 제공:명화
양자강의 야경
백제산인근 백제성의 백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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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양자강이남도 고려땅이었다는 고전문학의 증언
조선시대 문학지 동문선 권69 기(記) 운금루기(雲錦樓記) (이제현저, 주1)에 나오는 내용이다. |
" 산천을 찾아다니며 구경할 만한 명승지란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은 있다(주2).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게 되니, 비록 형산 衡山, 여산 廬山, 동정호 洞庭湖, 소상강 瀟湘江(주3)이 반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안에 있어 우연히 만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이 보이지 않고, 금을 얻게 되면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털끝만한 것을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은 나무짐은 보지 못한다. 이곳들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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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주1)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고려 충렬왕~공민왕). 고려의 문학가. 호는 역옹,익재,실재이고, 1301년 문과 장원에 급제함. 문화시중에 오르고 당대의 명문장가였으며, 외교문서에 뛰어남. 정주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역옹패설이 있다.
주2) 참고도서: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엮음.사군자. 2005. 276쪽.
그때도 명승지는 백두산, 금강산(황산)이었지만, 황궁주위의 가까운 곳에도 찾아보면 좋은 명소가 있다는 말이다.
주3) 형산(조선의 지리산)은 대륙 호남성에 있고,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으면서 양자강과 연결되어 있고, 소상강은 양자강지류를 뜻한다.
주4) 등잔밑이 어둡다고 신경을 못쓰면 가까운곳도 못본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가까운데서도 미를 발견하여 만족할 수 있다는 비유의 내용이다. |
<의의>
1) 조선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서 소국사내지는 제후국사로 축소발전되었다. 대륙적인 요소들을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철저히 반도적인 것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 그런데 문학서적만큼은 사서가 아니라서 완전히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의 대륙적인 요소가 곳곳에 남아있다.
3) 동문선 운금루기에서는 고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대륙의 산과 강과 호수의 명칭을 고스란히 표현하고있다. 명승지는 먼곳뿐만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 임금은 하남성 황도(중악,숭산,낙양인근)에 계시는데, 양자강이남의 호남성 지역의 형산(지리산,남악), 여산, 동정호, 소상강이 반발자국만 나서면 곧바로 찾아 볼수 가 있다고 했다.
4) 그만큼 호남성이 주위에서 엎어져 코닿을 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고려의 명승지는 수천거리의 먼거리에 있었지만, 호남성은 고려의 중심지 중원,경기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곳은 고려의 산하에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즉 고려는 대륙에 있어 하남성, 호남성 등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5) 동문선은 조선 성종때 처음으로 서거정이 고려,조선의 문집들을 엮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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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고려사에 현중국의 오악이 고려산으로 나온다.
고려말기 공민왕, 즉 공민황제때 몽골의 중원장악을 막기위해 고려의 산하의 이름을 지정한 일이 있었다. 그 이름하여 다섯개의 산 오악과 4개의 바다 사해와 4개의 강 사독, 그리고 오진이 있었다. 그 중 오악을 살펴보자.
<문헌의 증거> ' 고려사(김종서,정인지등저)' 공민왕 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중악숭산지신 中嶽嵩山之神 = 고려의 가운데산 숭산의 신 남악형산지신 南嶽衡山之神 = 고려의 남쪽 산 형산의 신 서악화산지신 西嶽華山之神 = 고려의 서쪽 산 화산의 신 동악태산지신 東嶽泰山之神 = 고려의 동쪽 산 태산의 신 북악항산지신 北嶽恒山之神 = 고려의 북쪽 산 항산의 신 "
그림= 중국 중원의 5대산
이 오악의 산 이름을 보면 한반도에는 전혀 없는 산으로 대륙의 중원지방에 틀림없이 존재해 있는 산이다. 현중국의 오악이 모두 고려의 산인 것이다. 그 고려산이 있던 곳이 고려가 본토로 위치해 있던 곳이다. 이 고려의 오악은 조선의 5대명산이 되었고, 현재 중국의 5대명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오악은 바로 하남성 낙양인근의숭산, 호남성의 형산, 섬서성의 화산, 산동선의 태산, 산서성의 항산 이다.
오악중 숭산은 송악산, 형산은 지리산, 화산은 삼각산으로 불리우면서 후대에 대륙에서 한반도로 지명이전을 해 놓은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오악은 현중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똑같이 고려땅에서 조선땅에서 같이 존재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똑같고, 지역도 똑같다.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단지 나라만 서로 다르게 나뉘어져 있을 따름이다. 모두가 고려인,조선인의 후예들이다.
-------------------------------------------------------- 참고: 고려사 고려사는 대조선때인 1449년(세종 31)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을 보고, 1454년(단종 2)에 간행했다.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 등의 관료들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책의 구성은 기전체 방식을 따랐으며 세가 46권, 지 39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과 짝하여 편년체로 구성된 고려시대사인 <고려사절요>가 1452년(문종 2)에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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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여지승람은 고려가 대륙에 있음을 나타냈다.
[자료의 근거]
여지승람의 당고의 시를 보면
" 평양과 개성이 하늘과 바다를 함께 덮었는데,
성루에 올라보니 거친 연기 일어나네.
옛 궁터는 기자의 오랜 옛터요.
은나라부터 염유(유방)에 이르기 9백년이라,
산을 의지한 누대와 전각이 하늘을 뚫었는데,
숲에 묻히고 연무에 잠겨 와력만 남았구나."
[해설]
여기서 평양은 서경으로 지금의 서안이고,
개성은 개경,동경으로 고려의 황도를 말하는데
위치는 대륙하남성 숭산인근에 있었다.
옛궁터는 기자조선의 서울인 장안,서안,서경을 말하며
대륙의 중원지방이 은나라부터
한나라 유방(염유)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영역이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고려는 기자조선의 영역에 있었으며,
은나라, 한나라의 영토와 같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고,
아울러 기자조선, 은나라, 한나라가 고려의 선대국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대륙조선이 한반도로 축소왜곡되기 전에는
기자조선이전의 하나라, 은나라(은조선), 주나라,
그이전의 단군조선, 배달,
그리고 최초의 국가 환국, 기자이후의 한나라, 북부여, 삼한(마한,진한,변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대륙 중원에서 어우러져 대대로 같이 내려온 나라, 같은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실예이다.
당연히 한반도지역도 대륙의 한 일부분으로서 이들나라의 영역에 같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본여지도>를 포함하여 대륙의 고지들을 보면 한결같이
반도를 크게 표시하고 항상 대륙과 같이 그려 놓은점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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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으로서 조선시대의 지리서이다.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풍속과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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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5~27>
[우리나라국토크기는 삼천리가 아니다.]
25. 고려사에 고려의 강토가 만리가 된다고 씌여있다.
우리나라영토는 한반도의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로 삼천리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무궁화 삼천히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만세"
라고 하여 삼천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나라도 자국의 규모가 얼마라고 규정한 애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삼천리라는 말을 써 넣어야 하는 이유가 무얼까?
이는 일본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반도사관, 한반도우선주의, 단일민족, 한반도 안에 모든역사를 다 넣겠다는 의도로
아예 애국가마져 헌법마져 정해버린 이유이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우리스스로 대한민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한민국사에는 분명히 우리나라영토가 만리라고 여러군데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국사교과서상에는 전혀 집어넣지도 않고, 교육도 시키지 않으니,
국민들은 까맣게 모를수 밖에 없다.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고려사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겠다.
북한국역 고려사 제5책, 권 제56 지제10 지리1편을 보자.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있고,
1면만이 륙지에 련결되어 있는바 강토의 넓이는 거의 만리나 된다.
고려 태조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항복받았으며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개경에 수도를 정하니 3한의 땅이 이제 통일되었다. ....."
그림1= 고려사의 책표지
그림2= 북역 고려사내 고려의 강토가 만리라고 표현된 증거
위글 둘째줄에 만리라고 분명이 나와있다.
이래도 거짓이라고 하면, 말도 않되니,
서점에 가서 고려사 책을 사보고 확인하면 더 정확하겠다.
한자로 원문은 좌측하단 둘째줄에 보면 於萬里 라 나온다.
만리라 함은 10리가 4~6km이므로 4000~6000km정도이다.
1리가 요즘은 0.4km,
조선시대에는 0.5~0.6km로 계산되었다는 말도 있다.
지도상에 만리라 함은 1리가 0.4km일 경우 4000km를 말하며
아래 아시아 전도의 척도 800km의 5배가 된다.
이거리는 한반도 부근에서 중간좌측의 검은 선부분까지이다.
즉, 동서로 한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의 거리가 만리이다.
이것이 고려의 영토란 소리이다.
1리 0.6km일 경우 아래 척도800km의 7.5배가 되어
한반도 부근에서 사우디아라비아건너 홍해,지중해까지이다.
실지로 지도로 보니 눈에 확들어 온다.
우리나라 고려의 영토가 적게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많게는 지중해연안 까지 였다는 사실,
참 쇼킹한 내용이다. 만리가 이렇게 넓은 땅이다.
남북으로 보자
1리가 0.4km라면
만리는 중국남부 하이난섬에서 북쪽으로 바이칼호수위까지이다.
만약 1리가 0.6km라면
만리는 하이난섬에서 시베리아를 넘어 북극해까지가 된다.
이럴 수가? 고려의 영토가 북극해까지라니..
그러나 사서에 1면이 육지고 삼면이 바다라고 했으니,
범위는 북쪽이 시베리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 삼면의 바다는 어디인가?
동쪽바다는 동해다,
동해는 현재 황해, 한일사이의 동해, 동중국해, 태평양을 말한다.
남쪽바다는 남중국해, 인도양,남극해이다.
서쪽바다는 어디인가?
서쪽바다는 지도에서 보듯이 홍해,지중해, 흑해이다.
여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영토가 더 넓어져 대서양이 서해로 증명이 된다.(후일에 설명)
일만리(1리=4km)
<--------------------------------------------------------------------->
일만리(1리=6km)
<-------------------------------------------------------------------------------->
그림3= 아시아전도, 고려는 만리다. 바로 아시아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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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우리나라는 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됩니다.
[자료의 근거]
성종실록 134권 12년 10월 17일 에서 남원군 양성지가 상언하기를,
“우리 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백두산,지금의 음산)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나 됩니다. ”
[의의]
대조선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된다함은 바로 아시아대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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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선 세조때 상소문에 조선은 만리지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료의 근거]
세조실록1권 1년에서
"우리 동방(조선)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이라 불렀습니다. ."
[의의]
조선이전의 고려도 만리지국이었는데,
북한역고려사 제5책 지(志) 56권 지제10 지리1편 첫줄에 보면,
“우리나라는 ~ 강토의 너비가 거의 만리가 된다.” 고,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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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8~30>
[우리나라 국토크기는 삼천리가 아니다.]
28.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은 세계 가운데서 큰나라이고,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주1) 독립신문(1896.4.7 창간 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설)에서
"조선의 호수는 348 만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로 12만 방리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다 ~
아메리카합중국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고~~
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12만방리를 환산하면 1만리정도 나온다.
이 정도면 만리장성이 있는 대륙이 조선의 지면이요 크기라고 볼수있다.
고려사에 고려의 강토가 만리가 된다고 씌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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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조선의 지방은 고구려보다 2배 더 크고 산천이 험준하다고 한다.
(주) 숙종실록 38권 29년 그 기록을 보면, "
고구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한탄하 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을 잘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당의 백만 군 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조선)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이 같은데도..."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큰영토를 확보했던 나라가 고구려인데,
그 고구려 영토의 2배가 조선의 영토라고 하니 과연 그 크 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수서 81권 열전46 동이고려에
‘안시성은 산서성 남쪽을 흘러가 는 패수근처에 있다’ 고 나오는데,
안시성에 이른 황제의 위치가 바로 대륙조선임을 증 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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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광개토황제(AD 391~412)는 아시아를 제패했다 (고구려 영토고찰 )
1. 대륙사에 대하여
1) 현재 반도(지금의 대한민국)에서의 한국사(大韓民國史)는
대륙사(아시아대륙사)에서 중원사(중국사)를 발췌하여
한일합방(1910년)이후 반도로 옮겨온 것이고,
제후국사는 현중국(지금의 중국)과 렬도(지금의 일본)와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국가들로 나눠어져 꾸며져 있다.
2) 즉 대륙사는 모두 우리겨레의 력사이다.
특히 현중국사는 더 친밀한 우리의 역사이다.
현중국사는 中原史중원사
(배달, 단군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를 포함할때,
완전하게 되고, 우리겨레의 력사가 된다.
현중국사는 중원사(중요한 력사)를 빼고,
일부중원사(삼황오제, 황제, 하, 은, 주, 漢한)와
제후국사(춘추전국시대국가, 진, 後漢후한, 삼국(촉,위,오),
연, 후연, 서진,남북조국들,
북위, 동진 ,수 ,당, 5호16국,
명, 청, 장개석의 중화민국)와
기타제후국사(말갈, 거란, 서하, 요, 금, 몽골. 티벳, 위구르, 동여진, 서여진)를 포함하고 있다.
3) 중원사에 현중국사를 포함할 때 진정한 우리 겨레의 력사가 된다.
특히 부여에서 독립한 고구려는
내몽골에서 남진하여 中原중원에 자리 잡으면서 漢한을 멸망시킨다.
漢한은 이전에 단군조선이 소멸되면서 어부지리로 中原중원(중국)을 차지했고,
다시 고구려에 중원을 넘겨준다.
한의 광활한 영토는 모두 고구려의 땅이 되었고, 中原중원(중국)이 곧 고구려였다.
추모(광개토황제릉비에서 나온 이름, 주몽(삼국사기), 동명성 황제)이후
배다른 자식(소서노?의 아들들, 비류와 온조)들이 고구려에서 떨어져나와
십제(후에 백제로 고침)를 중원(중국)남부에 건국한다.
漢한이 망한뒤
피난민(후한)이 서나벌(후에 신라)에 와서 신라건국에 막대한 공을 세운다.
고구려가 차지했던 中原중원이
삼국(백제와 신라는 제후국의 일종임)으로 나뉘었고,
기타 제후국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2. 광개토 황제시절의 고구려 영토고찰
1) 광개토 황제가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개국당시시절로 돌려졌다.
우선 중원내 토호세력들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주위의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천자국 고구려의 위용을 다시 과시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정복하는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거란 옆 비려와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서토의 후연과의 종속관계를 확고히 한다.
廣開土皇帝陵碑광개토황제릉비(주1)에 보면
제후국(속국) 백제를 百殘백잔이라 비하시키며 정벌하는 내용과
제후국 신라를 도와 왜를 정복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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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廣開土皇帝陵碑 광개토 황제릉비 전경
(주2) 廣開土皇帝陵碑광개토황제릉비
"백잔(=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來朝貢,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에는 왕(황제)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백제)을 토벌했다. "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 왕(황제)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한수)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백제왕에게 항복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왕(황제)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왕(황제)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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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은 이를 왜곡하여
오히려 왜가 신라를 정복하여 任那임나(일본부)를 반도에 세웠다고 한다.
신라가 중국에 있었으므로 실제로의 의미는 대륙에 임나가 있어야 한다.
임나는 광개토 황제비를 비밀리 수정하여 만든 나라라는 의혹이 있다.
재야학자들 사이에서는 임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분들도 있다.
2) 광개토황제릉비도 문제다.
진품인지의 여부도 불분명하다.
일본인이 먼저 발견해서 수정했던 흔적이 있고,
위치도 반도북부에 있음이 어울리지 않다.
원래는 내몽골지역이나, 중앙아시아등지에 있어야 타당하다.
일본인이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반도북부(동북삼성)지역에 옮긴것도 의심해야될 사항이다.
그러나 그당시 세워진 비석이 맞다면 삼국사기를 포함한 문헌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 된다.
3) 광개토황제의 고구려를 보면 근세조선과 흡사하다.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中原國중원국(천자국)과 동이,
서융,남만, 북적을 포함한 제후국들이
서로 이로 물듯이 톱니바퀴처럼(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이로는 신라, 반도, 렬도,
서융으로는 후연, 북위, 동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만으로는 백제, 가야, 왜, 동남아시아,
북적으로는 말갈, 숙신, 비려, 거란, 몽골고원, 시베리아가 있었다.
4) 광개토황제때 각 국가의 임금들 비교
위치 | 국가 | 국명 | 임금명 | 임금호칭 | 연대 | 비고 |
중국 | 천자국 | 고구려 | 광개토 | 천자,황제 | AD 391~412 |
|
동이 | 제후국 | 신라 | 내물 | 이사금 | AD 356~402 |
|
실성 | 이사금 | 402~418 |
| |||
서융 | 제후국 | 후연 | 모용성 | 황제 | 398~401 |
|
모용희 | 황제 | 401~407 |
| |||
모용운 | 황제 | 407~409 |
| |||
제후국 | 북위 |
| 황제 | 386~535 |
| |
제후국 | 동진 |
| 황제 | 317~420 |
| |
남만 | 제후국 | 백제 | 진사 | 황제 | 385~392 |
|
아신 | 황제 | 392~416 |
| |||
제후국 | 왜 | 닌토크 | 천황 | 313~399 |
| |
리츄 | 천황 | 400~405 |
| |||
한제이 | 천황 | 406~410 |
| |||
제후국 | 가야 | 이시품 | 황제 | 346~407 |
| |
좌지 | 황제 | 407~421 |
| |||
북적 | 제후국 | 말갈 |
| 왕 |
|
|
제후국 | 숙신 |
| 왕 |
|
| |
제후국 | 거란 |
| 칸 |
|
| |
기타 | 인접국 | 인도 굽타왕조 |
| 왕 | 320~ |
|
3. 고구려사 지도의 비교
1) 왜곡된 한국사(고구려사) 고등학교 교과서 역사부도
2) 새롭게 고찰된 광개토황제(AD 391~412) 때 고구려 지도
결론적으로 보면
광개토황제때의 고구려는 중국(중원)에 위치하여 천자국으로서
사방에 제후국(소국)들을 거느린 아시아의 대제국이었다. 끝
http://www.siddham.kr/board3/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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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감사 합니다.그러면 삼국시대 왕릉과 고려 왕릉 조선시대 왕릉의 위치가 궁금하네요?
http://cafe.daum.net/sisa-1/f8lD/731
한민족의 중원 지배…中·日 학자들도 인정했다
이글에서 이을형 교수가 백제왕릉 수백기가 중국에 있다고 발언..
특히 중국땅 요하지방이나 만주지방에 찾으면 많이 잇다고 봅니다.
현재 영릉도 세종무덤이 아니고
기타 수도권에 잇는 왕릉도 임금 무덤이 아니라고 봅니다..
경주 왕릉도 마찬가지..
우전 님, 감사합니다. 아주 귀한 자료를 올려 주셨네요.
회원들이 많이 퍼날라서 알리면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겠지요.
차는
우전차가 참 좋다는데
글도 참 좋네
감사합니다.
우전차는 은은한 향기와 쌉쌀한 맛이 정신을 맑게해서 기분이 참 좋지요.
곡우때가 되면 조그만 밭에 심은 우전을 따러가지요.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단(모란)은 중원의 꽃이 아니고 서역의 꽃인데
한무제 때 장건이 서역에서 들여온 꽃으로
중원에 퍼진 것으로 알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선덕여왕때 나비없는 모란화(牡丹畵 )를
받아 되돌려 보낸 기록이 있으니 이미 이때에
들여 왔다고 봅니다
꽃말이 부귀이니 귀족가에서는 필수로 선호했겠죠
간혹 모란꽃이 잇겠지만,
7~80년대나 지금이나 모란꽃 구경하기가 힘들지요.
문제는 소치 허련이 모란꽃을 자주보고 그림을 그려 대가가 됐고
자신은 낙양객이라고 밝혔다는것이 조선이 아닌 중국 낙양에 살았다고 바야지요.
목단꽃 흔합니다
꽃말이 부귀라 부귀해 질려고
백목단,돈색인 황금목단,화경30cm 특대종,재래종
정작 갖고 싶은 종 "관세묵옥" 종는 구매해 심었으나
실패하고 지금 있는 종은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갈 수록 꽃상여의 꽃 모습과 향기도 좋지 않아
파내 버리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유기질 비료와 송엽부식토를 주어볼까
"불수감"에 비하면 목단은 잡초수준으로 흔한데
특히 뿌리껍질은 목단피로 강심제 한약제라
대단위로 밭에다 재배도 하는데
요즘도 목단꽃이 흔한 모양이죠.
저는 어릴때 시골에서 목단꽃을 보고 이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집에 목단꽃이 있군요.
목단도 종류가 많군요.
그리고 재배해서 한약재로 쓰이는군요.
다닐때 한번 유심히 바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