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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량대표아적심'은 '달빛이 내 마음을 비쳐주네'라는 뜻입니다. 등려군은 첨밀밀로 많이 알려진 가수입니다.
* 푸구이 아들 장례식
[ 영화, 인생 ]
영화 <인생>은 1994년, 중국의 명장 장이머우가 감독하고, 궁리와 거유가 주연을 맡은,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한 가족의 일대기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장이머우 감독에 의하면 작가 위화가 이 소설을 완성하고 발표하기 전 그에게 한번 읽어 보라고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으로 그 책을 다 읽은 장 감독은 이 소설을 바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장이머우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평범한 인간들의 인생철학과 인생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태도가 무척 흥미로웠고 이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거유는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했습니다. 1995년 영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묵묵히 견뎌내는 강인한 힘, 인내심 그리고 숱한 고난 속에서도 투덜거리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결국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영화 속 주인공의 낙관적인 태도야말로 전형적인 중국인의 태도와 인생임을 영화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지주로 큰소리치면서 살았을 주인공 푸구이의 삶은 도박으로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많은 사건, 사고를 통해 어린 자식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모든 불행의 이유를 시대나 사회에 돌리지 않습니다.
몰락한 지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현실이, 그를 도박에 빠지게 한 사회상이, 딸아이의 병과,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하게 한 국공내전의 이념적인 전쟁이, 피곤해 하는 아들을 어쩔 수 없이 학교로 보내어 죽게 만들었던 사회의 암묵적인 폭력이, 딸아이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문화대혁명이 그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를 불행으로 이끌었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 내 탓이오”라는 그의 처절한 절규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던 시대의 아픔을 더 덤덤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40년대부터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70년대까지 격동의 중국 현대사 속의 주인공 푸구이의 인생을 조망합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위화의 중편소설인 活着(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절이 아닌 지속을 의미합니다. 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가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푸구이는 아들 유경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경아 잘 들어라. 지금은 우리 집이 비록 병아리같이 작지만. 병아리가 크면 닭이 되고, 닭이 크면 양이 되고, 양이 크면 소가 된단다...." 유경이가 묻습니다. "소가 크면 뭐가 되죠?" "음.. 소가 크면 공산주의가 된단다. 공산주의가 되면 매일 고기와 만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단다."
하지만 유경과 봉하는 공산당 치하에서 죽어갔고 봉하의 아들 만두에게 푸구이는 유경에게 했던 믿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장이머우의 마지막 메시지는 아주 진솔하게 전해지는데 그동안 그가 중요한 모티브로 보여줬던 역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따스한 희망을 보여줍니다.
거칠고 험난한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장이머우는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우린 끊임없이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는 대지주들이 점점 몰락하던 시대로 돌아갑니다. 몰락한 지주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삶의 터전이었던 집 이외에는 남지 않았던 시기, 몰락한 지주 집안 출신인 주인공 푸구이는 단 하나 남은 삶의 터전인 집마저도 도박으로 날려버리게 됩니다.
“바람난 남편, 때리는 남편, 도박하는 남편과는 절대로 살지 말라”라고 했던가요? 아내인 궁리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설상가상 집문서가 넘어가던 날 푸구이의 아버지인 쉬 노인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노모를 모시고 갈 곳이 없어진 푸구이는 집안의 살림을 팔아 간신히 집을 마련하게 돕니다. 곧 남편의 소식을 접한 아내는 출산 후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철이 들게 된) 푸에이는 인형상자를 빌리게 되고, 이를 이용해 그림자놀이를 하며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합니다.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시작됩니다.
동료 춘생과 그림자놀이를 하며 살아가던 푸구이는 영문도 모른 채 국민당 패거리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국민당,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조차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전쟁터에 나서게 됩니다. 어느 추운 겨울,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국민당 군인들이 전멸하고 공산당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푸구이와 춘생은 공산당 군인들에게 그림자놀이를 보여주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푸구이는 멀리서 우유배달을 하고 있는 아내와 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버린 딸 봉하와 상봉하게 됩니다.
항일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낡은 중국"을 통치하던 세력인 자산계급인 국민당과 이에 맞서 중국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무산계급인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휩쓸려 무고한 백성들이 아픔을 겪던 시대였습니다.
시대는 그를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푸구이는 "낡은 중국", 즉 봉건제도가 무너진 옛 중국 사회에서의 몰락한 지주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춘생과 국민당 시절 동료 등의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생존을 위해 살아가던 시기였습니다.
* 그림자 놀이
50년대 :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대약진운동
중국 공산당에 의해 1949년 중국은 해방을 맞이합니다. 전쟁의 흔적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었지만, 이를 기점으로 하여 중국인들의 삶도 점차 생기를 띠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도 잠시 마오는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름 아래 대약진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푸구이의 마을 또한 이러한 시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됩니다.
대약진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온 마을은 철을 모으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철을 모으는 일을 도와야만 했습니다. 한편 새로 부임한 구청장이 철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마을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공산당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던 시대, 이를 위반하면 무조건 반동으로 몰리던 시대에 푸구이는 잠에 취해 있는 아들의 안쓰러움을 뒤로 한 채 학교에 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큰 절망으로 다가올 줄 푸구이는 몰랐습니다. 피곤에 지쳐 길거리에서 잠이 푸구이의 아들이 그만 후진하던 구청장의 차에 치여 죽게 됩니다. 구청장은 다름 아닌 푸구이의 형제와 같던, 동료 춘생이었습니다. 가엾은 아들 유생은 한번쯤 배불리 먹어보지도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힘든 생활고와, 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푸구이와 아내는 불행한 기억 속에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The show must go on’ 그렇게 인생은 계속 그들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60년대 : 문화대혁명
세월이 다시 흘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화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따라 책임지고 물러난 마오의 후임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 성장에 집중하게 되고, 성공적인 경제 정책은 마오의 위기의식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마오는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학생들 중심으로 한 홍위병을 조직하여 문화대혁명을 진행합니다.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네 가지의 낡은 악을 없애자고 합니다. 푸구이의 인생이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상징적인 그림자놀이도,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림자놀이 상자를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반동으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푸구이는 그 상징적인 그림 인형을 봉하의 손에 태워 버리게 합니다. 계급적인 출신이 중시되는 60 년대, 푸구이의 딸 봉하는 노동자 계급의 절름발이 청년 만이희와 결혼, 임신을 하게 됩니다.
문화대혁명은 온 거리를 대자보와 홍위병으로 가득 채우고, 학교 선생님, 의사들을 부르주아적 주자파로 몰아가고, 평생을 마을의 평화를 위해 힘썼던 이장과 푸구이의 동료이자, 공산당 당원으로 출세한 춘생까지 주자파로 몰아 인민비판을 하며 죽음으로 내몰았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병원에는 간호학생 출신의 홍위병들이 의사들을 주자파(자본주의자)라고 가두어놓고 아마추어들이 마구 시술하게 되는 막장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출산을 앞둔 딸 봉하는 의사가 없는 간호학생들(홍위병)으로만 가득 채워진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못받고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
마오의 시대는 가고 덩샤오핑이 집권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봉하가 죽으면서 낳은 아이는 어느새 어린 아이가 되었고 아이의 생일을 맞이하여, 푸구이와, 부인, 사위 만이희와 아이는 유생과 봉하의 무덤을 찾아가게 됩니다. 병아리를 통해 새로운 시작, 희망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자는 병아리를 키울 수 있는 집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푸구이는 옛 시대의 상징이었으며, 그의 삶의 지침이 되었던 그림자놀이 상자에 병아리 담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소박하지만 행복한 푸구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떠나갔지만, 그의 아내와 손자, 사위가 남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삶의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대약진 운동 ]
1950년대 초반까지 100만∼300만 명을 처형해가며 사상개조를 끝낸 마오쩌둥은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담당 조직으로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빠른 성과를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57년 11월 6일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 및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마오쩌둥도 1958년에 “우리 중국 경제도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합니다.
이와 함께 1958년 8월29일, 중국 공산당의 한 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이 결정되었고, 결과적으로 중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더해지게 되었다. 인민공사는 농업을 기본으로 공장, 상점, 병원 등을 경영하고 교육기관과 자체 민병대까지 갖춘 종합조직이었습니다. 토지, 농기구, 가축은 인민공사 소유로 하고 생산은 집단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미 사상개조까지 마친 터라 농민들의 초반 호응은 열광적이었습니다. 3개월 후 전국에 2만6000여 개의 인민공사가 생겨나고 전 농가의 99%가 인민공사로 조직될 만큼 전국의 인민공사화는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마오는 '중국을 어느 때보다도 빨리'발전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이른바 대약진운동)을 펼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약진운동은 트랙터 한대가 농민 100명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농민 100명이 트랙터 한대를 대신하는 식이었습니다.
아무튼 마오는 대대적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기술이 없으면 있는 기술을 활용해 발전시키고 무엇보다 중국이 갖고 있는 최대의 자산인 노동력을 활용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오는 다음과 같은 말도 안되는 여러 가지 뻘짓 정책을 펼칩니다.
1.토법고로(土法高爐)
“산업화를 하려면 철이 필요하다. 철은 이른바 산업의 쌀이니까. 당연히 중국은 철이 많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철을 만들 제철소가 없다는 거였다. 그럼 제철소를 만들어야지”
그런데 제철소 건설에는 엄청난 돈과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했고 중국은 두가지가 다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과학과 공학에 무지했던 마오는 기상천외한 철강 생산 증대 계획을 세웠습니다. “거대 제철소를 세울 수 없다면 마을마다 소규모의 재래식 용광로(이른바 토법고로)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 용광로로 철을 생산하라.”
* 인민공사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립니다. 어쨌든 마오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100만 개가 넘는 토법고로가 만들어집니다. 마을마다, 자신의 집 뒤뜰마다 하나씩. 물론 코크스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연료는 산에서 벌목한 장작이고 철광석도 썼지만 주로 고철을 많이 썼습니다.
그 결과 불순물이 잔뜩 들어간, 어디에도 쓰지 못하는 쓰레기철, 이른바 똥철이 잔뜩 만들어졌습니다. 재래식 용광로에 불을 때서 좋은 강철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숙련된 대장장이가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100만 명씩 있을 리 없으니 투입된 사람은 당연히 대장간에서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똥철을 산더미처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다 관리들은 목표한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해 양철지붕도 뜯어 녹이고, 인민공사에서 식사가 제공되니 더 이상 식기는 필요없다며 식칼도 죄다 녹이고 나중에는 농기구까지 녹여댔습니다.
농기구가 없어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을 지경까지 되었고 들판에 벼가 익어도 낫이 없어 수확을 할 수 없었습니다. 멀쩡한 철기구를 녹여서 만들어진 철은 쓸 수 없는 불량 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용광로의 불을 지피기 위해 나무를 잔뜩 베 숲이 줄어들어 산들은 죄다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홍수와 산사태가 잦아져 농사에 극심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2.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
어느 날 농촌을 시찰하던 마오는 참새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감히 인민이 먹을 곡식을 먹어치우다니! 저 새는 해로운 새다!" 그 뒤 마오는 중국에 사는 참새가 먹는 곡식의 양을 계산하라는 명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참새 때문에 매년 70만 명분의 한 해 양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생태학에 무지했던 마오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참새, 들쥐, 파리, 모기를 잡아들여라. 이 사해(四害)를 박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중 들쥐, 파리, 모기는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민들은 전부 참새를 잡았습니다.
1958년 중국 정부는 드디어 참새 섬멸 총지휘부를 베이징에 신설하고 참새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몽둥이, 새총, 독극물이 든 과자를 준비하고 매일 참새 박멸의 성과를 축하하는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운동의 결과 2억 1,000만 마리의 참새를 박멸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참새는 중국에서 거의 멸종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 참새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참새 박멸 운동이 성과를 거두었으니 벼농사도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그렇치 않았습니다. 참새가 사라지자 1959년부터 중국에는 해충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에는 메뚜기의 대습격이 일어나 전체 쌀 생산 추정량의 절반이상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참새는 사해에서 복권되어 소련 연해주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공수해 왔습니다, 당시의 여파가 얼마나 심했는지, 지금도 중국에는 참새의 개체 수가 부족한 편이라고 합니다.
참새를 어떻게 잡느냐?
1) 인민들을 참새가 모이는 곳에 모아놓는다.
2) 솥, 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큰소리를 낸다.
3) 참새들은 내려앉지 못하고 날다 죽는다.
당시 소련 고문이었던 미하일 클로치코는 다음과 같이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새벽에 나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여인의 고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젊은 여자가 옆 건물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하얀 천을 매단 대나무 막대기를 미친 듯이 휘두르고 있었다. 잠시 후 고함 소리가 그쳤다. 숨을 돌리기 위함인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북소리가 들려오자 또다시 거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 대며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은 족히 몇분간 지속되었으며, 북소리가 그치면서 조용해졌다. 나는 그제야 호텔 옥상에서도 흰옷을 입은 여인들이 건물에 참새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침대보와 수건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루 종일 북소리와 총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들렸고 침대보가 공중에 휘날렸다. 마치 전투를 하고 있는 듯한 장면은 정오까지 계속 이어졌고 벨 보이, 매니저, 통역관, 청소부 등 호텔의 전 직원이 동원되었다.
참새와 맞붙은 이번 전투의 전략은 참새가 지붕이나 나무에 앉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참새가 공중에 4시간 이상 떠 있으면 그만 지쳐서 떨어져 죽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마오는 참새들을 자지 못하고 괴롭혀서 멸종시키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모든 인민들이 쏟아져 나와 막대기와 빗자루를 휘두르고 미친듯이 악을 써대며 참새를 괴롭혀 죽였습니다.
북을 두드리고 냄비와 징을 치는 인민들이 도시엔 건물 지붕마다, 농촌에선 산과 숲마다 가득했습니다. 결국 너무도 지친 참새들이 땅바닥에 픽픽 떨어져 죽었습니다.
[ 벼를 빽빽하게 심기 ]
논에다 벼를 아주 빽빽하게 심었는데, 이는 미국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지에서 교수를 역임한 첸쉐썬 박사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첸박사는 생산량 증분을 수학적으로 증명해서 마오쩌둥에게 보고서를 냈고, 이를 본 마오쩌둥이 손뼉을 치며 "참으로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면서 실험도 안 해 보고 전국적으로 실시토록 했습니다.
문제는 농업분야에서는 문외한인 첸쉐썬 박사가 내놓은 계산은 전혀 농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첸박사가 제시한 모와 모의 간격은 10cm × 15cm이다. 이게 얼마나 병신짓인지 부연설명을 곁들이면, 모와 모의 간격은 최소한 12cm × 20cm은 유지해줘야 합니다.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심으면 벼와 벼끼리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됩니다. 결과는 벼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일부는 말라죽기까지 합니다.
어느 정도 간격까지는 벼를 촘촘히 심으면 생산량이 늘어나지만 그 이상으로 간격을 좁히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다 아는 이런 사실을 첸쉐씬 박사와 마오쩌둥만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래서 쌀 수확량은 또 한번 꼬꾸라집니다.
* 동네마다 용광로
[ 비참한 결말 ]
결국 1960~1961년에 홍수와 가뭄의 자연 재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온통 민둥산으로 만들어서 생겨난 인재였습니다. 결국 이 자연재해는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결국 대기근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와 비슷한 3,000~5,000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한방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독소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를 능가한것입니다.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이 600만명 정도, 독소전쟁 사망자가 소련인만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9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합계만큼이 한방에 죽어간 것입니다.
사실 중국이었으니까 이런 대참사에도 인구손실을 딛고 일어날 수준의 회복을 보였지, 타국 같았으면 그냥 국가가 절단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숫자가 실감이 안 난다면 대한민국 5,000만 인구가 모조리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면 됩니다.
이런 마오쩌둥에게는 연일 중국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국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인배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결국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아니면 그냥 굶주림 속에서 죽어나갔습니다. 경제와 산업에서 일자무식인 마오가 단숨에 중국을 지상낙원으로 만든다고 이런저런 뻘짓을 벌이면서 중국을 생지옥으로 빠트려버린 일대 참극이었던 것입니다.
[ 대약진 운동과 마오쩌둥의 성격, 사상 ]
대약진 운동의 참극은 마오의 성격이나 사상과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급격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마오 특유의 정신력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력에 대한 집착은 그가 살아온 경로나 이룬 업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빠져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오는 수십명의 게릴라 부대로부터 출발해서 끝내 500만을 거느린 장제스를 패퇴시키고 중일전쟁때는 400만의 일본군을 애먹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출병한 중공군은 마오 특유의 전법으로 장제스나 일본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술적으로 우월한 미군과 호각을 다투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마오쩌둥은 사상적으로 각성한 병사들의 자발성과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는 기술적으로 우월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오는 정신력 과신의 함정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마오는 이것이 경제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했고, 사상성,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정신력만 있으면 객관적인 조건을 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논리로 경제면에서 도저히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돌진한 것입니다.
사실 중공군이 군사적으로 성과를 이루었던 것은 단순히 정신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적절한 전략, 전술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화력을 보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대약진 운동은 아예 방식부터 잘못 되었고 그것을 그냥 밀어 붙였으니, 정신력 운운하는 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인민 3-5천만이 굶어죽는 참극으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 후의 문화대혁명이 겹쳐지면서 중국의 성장이 20년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문화 대혁명 ]
문화대혁명은 한마디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스타일이 왕창 구겨지고 권력에서 밀려난 마오가 어린 청소년들을 홍위병으로 무장시켜 10년간 중국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상실한 권력을 쟁취하려는 뻘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 배경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3~5천만에 달하는 인민이 아사하고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파멸적인 결과가 초래되자 이를 주도한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공식적으로 마오는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국가주석직을 사임했고, 후임으로 류사오치가 선임되었습니다.
마오는 당 중앙위원회의 주석직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을 맡고 있었음에도 마오는 계속 "주석"이라고 불렸습니다. 마오의 권위와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과는 반대로, 대약진운동의 여파가 차츰 잦아지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마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류사오치의 경제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반 인민들은 물론, 중국 공산당 안의 고위 간부들에게까지 류사오치의 명망이 높아져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류사오치는 마오의 권력을 점점 줄이고, 자신이 최고권력자가 되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때, 류사오치는 마오를 뒷방 늙은이, 즉 상징적인 존재로 남겨둘 계획을 세웠습니다. 입헌군주제 국가에서의 국왕처럼, 마오를 실권은 없지만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인민들에게 존경받는 명목상의 최고지도자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그러나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넘겨준 건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오는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고 있었습니다. "요놈들! 두고보자!"하며 이들을 손봐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 홍위병에게 당하는 류사오치
*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그런 가운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는데, 그것은 <해서파관>이라는 역사 연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 직에 있던, 명대(明代)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청화대학의 역사학 교수를 지내기도 한 사람인 우한이 해서파관을 발표합니다. 이 연극은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직언을 하다가 폭군 황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폭군 황제는 청나라 가정제를 말합니다.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연극을 발표하기 전부터 마오쩌둥은 해서를 높이 평가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애초에 이 연극을 제작하도록 의뢰한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 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나중에 4인방의 일원이 되는 인물)이 1965년, '문회보'라는 신문에 "이거 우리 마오님 까는 얘기이네요?"라는 칼럼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장칭에 의하면, 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1959년, 여산 회의에서 대약진운동과 관련해서 마오에게 직언을 하면서 대들다가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산회의에서 펑더화이와 마오가 충돌한 얘기는 이글 마지막에 보완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을 것을 우려한 베이징 시장 펑전은 우한을 옹호하고, 이 문제를 학술적인 분야에 사태를 한정시켜 논란을 가라앉히려 했습니다. 그러자 장칭은 펑전과 우한을 싸잡아 비난했고, 여기에 마오도 직접 여기에 뛰어들어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습니다.
여기에 마오의 딸랑이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 식의 일장연설을 했고,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 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습니다.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합니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 모조리 부셔라!
마오는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사건의 발단이 된 우한은, 문화대혁명 때 감옥에 갇혔다가 1969년, 옥사했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방이 실각한 뒤 복권되었습니다.
* 전개
1966년 8월 8일, 마오의 논평에 맞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위 16개항을 발표합니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 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습니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절,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공안(경찰)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마오는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도,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라는, 개념을 밥 말아 처먹은 것 같은 발언을 지껄여댔습니다.
* 천안문에서 마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남쪽의 창시성)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입니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습니다.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습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는 어느 누구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 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습니다.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납니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집니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홍오류라 하여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습니다.그런데 홍위병 사이에 만연하던 혈통주의에 대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발표하면서 핍박받던 흑오류, 회오류 출신 홍위병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을 조반파라고 합니다.
조반파였던 사람들은 홍위병들의 패악질은 보수파들이 한 짓이고, 자신들은 그런 일에 별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고 반대로 보수파들은 나쁜 짓은 조반파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출신 배경의 차이라던가 여러 복잡한 사회, 정치적 문제가 얽히긴 했지만 악행에 있어서는 그놈이 그놈이었습니다.
베이징에선 4인방(마오가 문화혁명을 추진하면서 그 동력원으로 이용하는 4명을 말합니다. 장칭, 장춘차오, 야오웨안, 왕흥원)과 박자가 잘 맞는 비밀경찰 두목이자 마오의 딸랑이인 악당 캉성이 부총리 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습니다.
* 왼쪽부터 마오,린바오 그리고 누렇게 떠있는 류사오치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습니다.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장칭은 문혁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맙니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합니다.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元帥)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습니다.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펑더화이는 홍위병 비판장에 불려다니는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비참하게 사망합니다.
대원수 허룽은 1966년 12월 30일 장칭이 칭화대학에서 허룽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겁에 질려 저우언라이에게 피신처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저우언라이가 미처 손을 쓰기에는 늦어버렸습니다.
결국 허룽은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했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단식 하다가 1969년 6월 9일 사망했습니다. 그는 "나는 단지 마오쩌둥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라고...'"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겼습니다. 천이도 공장 노동자로 좌천당했습니다.
* 참군인 허룽
좌천까지는 아니었지만, 주더와 녜룽전도 실각당한 뒤 몇 년 동안 찬밥 신세가 되었고, 그나마 피해를 입지 않은 원수들은 문혁 이전에 사망했던 뤄룽환, 장님이 되어 있었던 류보청, 고도의 처세술을 발휘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쉬상첸, 예젠잉 정도였습니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홍위병이 인민해방군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마오가 편을 들어주면서, 심지어는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고 홍위병들이 군구 부사령관 급의 고급 장교들을 끌어내서 중태에 빠질 정도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중국의 안보와 전시상황에 존립을 책임지는 인민해방군이 겨우 개인의 사병에 불과한 홍위병에게 털렸다는 건 이때 얼마나 나라의 기본틀이 무너졌는지를 보여줍니다.
* 악당 캉셩, 문혁시절 4인방과 짝짜쿵이 되어 온갖 패악질을...문혁말기 암으로 죽습니다.
연안 시절 상하이에서 공산당 거처로 찾아온 장칭을 마오의 침대로 들이밀어 마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비밀경찰 두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여 마오 외에는 그를 미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도 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과 보호소를 오랫동안
전전(문혁 이전)했습니다. 또한 연안 시절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죽인 장본인이기도
했는데.. 그때 님 웨일즈라는 미국 여류작가가 김산의 일생을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남겼습니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애초에 출신에 따라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부터 통일된 조직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조직인지라 한 지방이나 학교에도 여러 홍위병 분파가 존재했습니다. 홍위병의 각 병단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온갖 패악질을 하고 다녔으며 급기야 대포,바주카포 등 온갖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사생결단으로 전투까지 치렀습니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 류사오치는 시골에 내려가 일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마오쩌둥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이리저리 곤욕을 치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자신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습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농촌 하방(下放) 활동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 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여버렸습니다.
*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사라진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습니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사실 그럴 만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으로 전락한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린바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2인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이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습니다.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습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 8월 23일, 여산에서 열린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전체회의에서, 린바오와 짝짝쿵이 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습니다. 눈치가 100단인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습니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자주 징징댔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특히 공군)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천안문으로 운집하는 홍위병들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계획되었습니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열차로 순시 중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의 열차가 상하이로 진입하기 직전 바로 비행기로 폭격을 할 예정이었는데 마오측에서 눈치를 채고 상하이를 비껴가면서 베이징으로 전속력으로 내빼버렸습니다.
이렇게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습니다. 추락원인은 연료부족이나 조종사의 실수가 아니었을까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 4인방의 등장과 몰락
* 장칭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습니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점차 관장해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에게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합니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해대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전개해 나아갔습니다. 비림비공은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습니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우려하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니다.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반대움직임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 마오와 저우, 저우는 문혁당시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을 구제하였습니다
대중들은 4인방의 난동에 신물이 나 있었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덩샤오핑
그러자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습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살짝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습니다.
4월 5일이 청명절(淸明節)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습니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습니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연금되었습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습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습니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 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어수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실각했지만 아직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젠잉 원수가 화궈펑을 포섭하여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써 끔찍했던 문화대혁명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잡혀가는 장칭
* 참혹했던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에 이은 문화대혁명은 중국을 극도의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의 인권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오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바로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습니다.
그리고 비행기태우기라고 해서 두팔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머리를 앞으로 확 밀어내면서 조리돌림을 하곤 했습니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한때 런던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비판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습니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관직을 맡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말살당했습니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은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하여,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습니다.
* 50년대 말,대약진운동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하나씩 둘씩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오는 이점에 착안하여 당,정 우두머리들을 여산으로 불러 모아 한번 허심탄회하게 토의해 보자고 회의를 엽니다. 그런데 여기서 국방부장(장관)이었던 펑더화이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겉잡을 수 없이 문제가 확대됩니다. 자세한 내막을 아래에서 살펴봅니다.
* 중국의 명산, 여산(루산)
[ 여산 회의 ]
*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던 펑더화이
* 한국전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
대약진운동 시기 어느 누구라도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풍조로 볼 때 일반 백성들은 효과적으로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알릴 방법이 없었으며 또한 그럴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중앙의 지도층 주변의 사람이나 고위관리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중국공산당도 서서히 대약진 운동의 심각한 결과를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내에서 대약진운동을 다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59년 중국공산당의 여산회의는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거행된 것이었습니다. 회의석상에서 명의상 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마오는 아예 다른 사람의 비평을 들을 성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여산회의 동안 개인편지의 형식으로 조용히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마오는 자신의 과오를 들으면 받아들여야하는 아량을 잃고 왜 여산회의를 개최하였는지 조차도 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산회의는 당초의 목표를 바꿔 펑더화이 등 반당 인사들을 비판하는 집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 펑더화이와 마오쩌둥, 펑더화이의 비참한 최후 >
5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펑더화이(이하 펑)을 애석해하는 중국인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내용도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신중국 수립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통증이 심했다. 의사가 진통제를 권하면 마오의 약은 먹지 않겠다며 호통을 쳤다. 관우와 장비를 합쳐놓은 사람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 여산의 펑 숙소
맞는 말입니다. 마오가 등장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난도질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없어도 레닌이 있다. 신중국은 마오가 아니면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다. 펑은 이런 마오에게 대들었다가 비극을 자초했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마오는 싸움을 즐겼습니다. 도전을 좋아했고, 누가 도전을 해오면 혼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피하기는 커녕 얼굴에 생기마저 돌았습니다. 투쟁철학이 곧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나는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 단, 나를 먼저 해치려는 자는 상대가 누구건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
전략도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상대가 찧고 까불게 내버려두고 잠복해 있던 적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느지막하게 나서서 일거에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한 가지만 구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중공 공산당 초기의 왕밍, 대장정 때의 장쿼도, 신중국 시절의 류사오치, 지금 얘기하는 펑더화이, 문혁시절 기고만장하여 설치던 린바오 등이 대표적으로 마오에게 당한 인간들입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한번 혼쭐이 난 이후 무척 조심스럽게 처신하면서 끝까지 살아 남은 케이스입니다.
여산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9년 7월 14일, 펑이 놓고 간 편지를 본 마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별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회의 기간 동안 펑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내버려뒀습니다.
“실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된다. 마오 동지를 포함해 책임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인민공사 운동을 너무 일찍 시작했다. 밥은 돈을 내고 먹어야 한다. 하루 세 끼를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먹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항가리 공산당을 봐라, 매년 매달 한 사람에게 고기를 40킬로그램씩이나 나눠줬지만 폭동이 일어났다.”
이 정도는 용납이 가능했습니다.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마오 주석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단, 남용해서는 안된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보자. 주석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다 보니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잘못된 것은 반대해야 한다.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숭배는 위험하다.”
나가도 너무 나갔습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마오는 내색은 안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펑을 우경 기회주의자의 반당행위로 규정했습니다.
방 안에서 칩거하던 마오는 사흘이 지나서야 당 최고멤버들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를 불렀습니다. 펑의 서신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습니다. 세 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펑더화이답다”며 웃어넘겼습니다.
마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토론에 부치자.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들 하라고 해라. 편지의 성격이 궁금하다.” 세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슨 싸움이건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게 마련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성질 급한 펑은 마오의 돌발행동에 분노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주석에게 참고하라며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다. 토론에 부치자고 요구한 적도 없다. 내 의견이라는 표제까지 달아서 모두에게 토론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펑의 편지가 조별 토론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습니다. 펑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많았습니다. 동북조는 한 명도 빠짐없이 펑을 지지했습니다. 밖에 얼씬도 안하며 회의 내용을 보고받던 마오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습니다.
국내보다 소련 측에서 먼저 반응이 먼저 왔습니다. 후일 중공 선전부장을 지낸 등력군이 생생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중국의 대약진운동 관련 기사를 보내왔다. 펑의 의견과 대동소이했다.”
북경을 지키고 있던 부총리 천이의 전화보고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방금 북경 주재 소련대사를 만났습니다. 농담조로 정변을 일으킬 생각이 있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웃어넘기기에는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보고 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흐루시초프와의 관계로 소련과의 분쟁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마오가 난리를 치면서 시작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이어지자 흐루시초프는 “모택동이 방귀 한번 시원하게 뀌려다 똥을 쌌다”고 놀려대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소련을 다녀온 펑에게 마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1959년 여름, 여산회의 도중 펑이 마오에게 보낸 편지는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펑이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마오는 농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정권을 탈취한 혁명가였습니다. 권력기반이 군대이다 보니 군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인민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펑은 중공 정권의 창출에 공이 큰 개국원수였습니다. 그리고 아뭇소리 않고 한국전쟁을 맡아 그런대로 성공하고 돌아왔습니다. 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조인하는 펑
“펑이 산으로 들어갈 결심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 올라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노동자가 아니라면 농민이라도 좋다. 홍군 복장을 입힐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말도 평소 자주 했습니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 “펑의 편지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며 속닥거리자 마오를 더욱 불편하게 했습니다.
펑이 보낸 편지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한 마오는 3일간 침묵했습니다. 펑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안휘성 서기 증희성을 펑에게 파견했습니다. 대장정 시절, 중공의 비밀문건과 정보를 담당한 적이 있는, 마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습니다.
펑을 찾아간 증희성은 차 한잔 마시러 왔다“며 세 가지를 물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남아 있습니다.
“주석에게 편지는 보낸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펑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럴 때 편지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오랜 관습 아니냐.”
“소련 방문 기간 중 흐루시초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흐루시초프와는 대약진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린바오가 부주석이 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생각해본 적 없다.”
* 한국전 당시 펑
증희성의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펑의 단독소행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펑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7월 23일 전체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단상에 오른 마오는 “그간 참석자들이 많은 발언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차례다”면서 좌중을 한 차례 둘러봤습니다. “그간 착오를 저지른 동지들이 많았다.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배운 게 많았다.”
마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자아비판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지난 2년간 뭐든지 빨리 이루기 위해 큰소리만 쳤다. 공자가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멸종했다. 아들 한 놈은 전쟁터에서 죽고, 한 녀석은 미치광이가 됐다. 동생들도 모두 맞아 죽었다. 마르크스도 적지 않은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혁명의 그날이 올 거라고 했지만 서구에 혁명다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마오의 발언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신문이 우리의 잘못을 열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일 년 내내 보도해도 불가능할 정도다. 앞으론 내 이름을 직접 거론해라. 꼭 떠나야 한다면, 나는 떠나겠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뒤집어 엎어버리겠다. 해방군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해방군을 만들겠다.”
이날 마오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발언을 3시간 동안 했습니다. 펑의 이름은 거론조차하지 않았습니다.
마오의 발언이 끝나자 산회했습니다. 펑은 맨 뒷줄에 있었습니다. 마오가 부르자 못 들었는지 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마오가 달려갔지만 떠난 후였습니다. 회의장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마오가 내려가자 공안부장 나서경과 상해 서기 가경시 등이 수행했습니다.
저만치 앞서가던 펑이 갑자기 몸을 돌려 회의장 쪽으로 올라 왔습니다. 물건을 놓고 온 것 같았습니다. 마오와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마오가 펑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시뻘개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은 “말하고 싶지 않다”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오가 몸을 돌려 펑을 다시 잡았습니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이야기 좀 하자.”
펑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습니다. 수행원들 앞에서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봐서는 안 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나서경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가경시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습니다. 저우언라이(이하 저우)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마오는 저우를 숙소로 불렀습니다. 8월 2일부터 2주간 여산에서 중공 중앙 전체회의를 열라고 지시합니다.
1959년 7월 23일, 마오는 3시간 동안 펑의 우경화를 비판했습니다. 그날 밤 여산의 산책로는 평소보다 북적거렸지만 침울했습니다. 펑과 마주치면 다들 피해갔습니다. 원수 녜룽전만은 예외였습니다. 황혼 무렵 오솔길에서 만난 펑이 “오늘 모 주석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너는 당과 인민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주석은 원칙을 강조했다. 옳고 그른 것은 세월이 지나야 밝혀진다”며 옛 전우를 위로했습니다.
총리 저우는 폭풍이 닥쳐올 것을 예감했습니다. 펑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밥맛이 없다며 저녁도 거른 펑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저우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석은 너를 대약진운동 실패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 나도 한때 그런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대장정 시절부터 저우를 대수롭지 않게 보던 펑은 듣는 둥 마는 둥 표정이 없었습니다.
저우는 목이 탔습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너는 군인이다. 경제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 모두에게 화살을 돌려라. 주석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지만 우리가 집행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국가가 재앙이 닥쳤다고 우리를 비판해라.”
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펑은 벌떡 일어나 그냥 자리를 떴습니다.
24일 오후부터 회의가 속개됐습니다. 소조마다 전날 있었던 마오의 발언에 대한 입장 표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마오가 좌경화를 포기 할 줄 알고 펑에 줄을 섰던 사람들일수록 펑의 비판에 열을 올렸습니다. 팽덕회의 의견에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놀고 먹는 회의가 아니라, 열띤 토론의 계기를 만든 것 하나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내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가 주석 류사오치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평소 잘하던 하품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하게 될 “펑의 원래 이름이 득화(得華)다. 어릴 때부터 중국을 먹을 야심이 없었다면 이런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다”는 말 같지 않은 비판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한때 착오를 범해 혼난 적이 있는 저우와 진운은 몸을 사리느라 말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총서기 덩샤오핑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력이 부족하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는 뭐가 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7월 31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마오와 펑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마오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지난 31년간 우리는 합작과 모순을 반복했다. 너는 30퍼센트만 나를 지지했다." 펑도 물러서지 않앗습니다.
"에이 지에미 씹할! 연안에서 당신은 40일 동안이나 지랄했잖아. 내가 소란을 벌인 지 이제 겨우 18일밖에 안됐는데, 지에미 씹할! 나한테 그만두라고 명하다니, 엿장수 맘대로는 안 될 거요." 그들은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홍군 시절에 썼던 농부들의 막말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펑이 언급한 연안에서의 40일이란 그가 오래 전에 마오와 벌였던 떠들썩한 언쟁과 관계된 것입니다.
마오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고 기분이 나쁜가 본데, 그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너는 네 멋대로 처리했지 내게 편지를 보내거나 의논한 적이 없다. 이번 편지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군중을 취합하고, 대오를 정비하려는 게 아니고 뭐냐."
다음날 회의는 7시간 가량 계속됐습니다. 주더가 먼저 발언에 나섰습니다. 주더는 평소에 말수가 적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눈치 없이 주책을 떨 때가 많았습니다. 마오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구두끈이나 똑바로 매라고 면박을 줬습니다. 주더가 구두를 향해 허리를 숙인 틈을 타 린바오가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마오를 구원하기 위해 병상에서 달려온 사람다웠습니다. 거두절미, 펑을 야심가, 음모가, 군자의 탈을 쓴 소인배로 몰아붙였습니다. 품위는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마오의 비판이 다시 이어지자 펑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날 밤 마오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경호원 중 한 사람의 구술에 따르면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인간들처럼 상황에 따라 변화가 빠른 동물도 없다. 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뭐라고 할까! 어처구니없는 것들끼리 모여서 한바탕 희극을 벌이다 갔다며 조롱할 게 분명하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도 예외일 수 없다."
8월 15일 밤, 여산회의 폐막을 하루 앞두고 마오는 당 중앙위원들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비판은 엄하게 하되 처리는 관대하게 해라. 착오를 저질렀지만 펑과 장문천, 황극성, 주소주는 혁명성과 반동성,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있다."
다음날 마지막 회의에서 반당집단인 '군사구락부'를 만들고(어거지로 누명을 씌움) 외국과 내통한 펑을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펑은 군과 관련된 모든 직무를 정지당했습니다.
1959년 8월 18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전군의 지휘관 1,061명이 베이징에 운집했습니다. 국방장관 펑과 총참모총장 황극성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 자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류사오치가 거품을 물고 펑을 비난합니다.
* 사이 좋았던 시절의 류사오치와 펑 부부, 중난하이에서...
"군사구락부" "외국과 내통" "여산에서 난을 모의했다"며 펑을 가혹하게 몰아세웠습니다. 잠자코 듣던 펑은 들고 있던 연필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류사오치 자신도 몇 년 후 벌어지는 문화혁명 때 마오에게 잔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인간사 내일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우는 신중했습니다. "펑 동지는 생각이 깊지 못했다. 우리가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펑 동지가 잘못을 저질렀다." 보고를 받은 마오는 픽 웃으며 "저우는 원래 그런 놈"이라며 냉소를 지었습니다.
진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입도 뻥긋 안 했습니다. 린바오가 마오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 바쳤습니다. "진운은 꼿꼿이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마오는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건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다. 진운은 우파로 일관한 인간이다."
9월 9일 펑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30여 년간 베풀어 준 인내에 감사한다. 베이징을 떠나겠다. 인민공사에 가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다." 펑 후임으로 린바오가 국방장관에 임명됩니다.
국방장관에서 쫓겨난 펑은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후 7년 간 살았던 중남해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황혼 무렵만 되면 영복당 주변을 산책하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하루는 양상곤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며 내게 해라. 그대로 마오 주석에게 전하겠다." 평소 친한 사이였지만 펑은 차만 마실 뿐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주석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당행위나 자살을 하지 않겠다. 농촌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자력기식하며 살고 싶다."
이젠 필요 없다며 원수 복장도 반납했습니다. 9월 30일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펑은 중남해를 떠났습니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오는 "스산한 가을 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동지들을 모두 알고 있던 주더는 나중에 이 사건들을 곰곰이 되돌아보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전에 한솥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펑은 베이징 서북쪽, 북경 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해갑촌(解鉀村)이라는 마을에 있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오(吳)씨 가문의 정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은 펑의 신세와 어울리는 장소였습니다.
해갑촌은 '갑옷을 벗어 걸라'라는 의미였습니다. 마을 이름은 야만족 정벌에 나선 한 장수가 이곳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갑옷을 벗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펑이 이사 왔을 때 오씨 정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안뜰에 집이 두 채 있었습니다. 펑과 아내, 그리고 비서 두 명이 한 채에 살았고 펑의 운전사와 경호원들이 다른 한 채에 살았습니다. 가택 연금 상태는 아니었으나 정치와 정부, 그리고 군과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와 이혼한 것은 어쩌면 '선을 그으라'는 정치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펑은 복숭아를 재배하고 정원을 어정어정 거니는 일로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항상 적극적인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한가로운 시골 생활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1965년 9월 23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날 모택동이 펑을 중남해로 불러들여 쓰찬성으로 가서 제3선 건설(처음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한다고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방벽 구축)의 부책임자 직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마오와 얘기를 나눈 팽은 그 임무를 맡고 충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3선 계획을 실행에 옮겨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문화혁명이 시작된 직후 1966년에 체포되어 홍위병의 손에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내장이 다 짓이겨지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는 무려 130번의 심문을 받은 후 1974년 11월 29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 홍위병에게 당하는 펑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그는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다.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너희들이 설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들이 날 심문하면 심문할수록 난 입을 더 굳게 다물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펑더화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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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택동 이잉간 쳐죽일놈이구만
마오라는 중국집 단골이엇는데
중국근대사 잘읽었읍니다
홍위병 잔인한 놈들
일부성에선 살해한 사람고기도 즐겨 먹었더구만
권녁의속성 동서고금 막론하고 여히같음
마오는 군벌들이 갈기갈기 찢어 갈라먹고 있는 중국을 통일했고, 수천년동안 뿌리박힌
봉건주의를 뽑아버린 공로가 높이 평가되지만 위에서 상술한 대약진운동과 문혁은 그에
게 있어 큰 과오로 남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업적을 공이 7이요, 과는 3이라고 했지만서도...
마오의 초상화가 아직도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는 것은 그가 오늘날의 공산당을 건설한 장
본인이기 때문에 마오를 부정하면 공산당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대약진운동과 문혁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져 마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일
부 지식인들 외에는...실제로 그들도 대놓고 비난은 못하고 있지요.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가 득세하면서 양극화가 심해지는 오늘날에는 가난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은 평등을 주장했던 마오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약진 운동을 벌이면서
수천만명이 죽어 나갔지만 중국 정부는 지독한 홍수와 가뭄때문이었다고 얼머부리며 넘어
갔고, 문화혁명 때는 주로 지식인들이 왕창 당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아픈 기억
이 없기에 시끄럽지 않게 넘어갔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대약진 운동과 문혁에 대해서는 지금
도 왈가불가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아닙니다. 아직도 이런 정치적인 얘기(현재는 물론 과거
도)는 가급적 쉬쉬하고 있는 중국의 오늘날입니다.
으흠! 문화혁명 지식인 숙청으로 서민들에겐 직접적 피해가 없엇군요,,,
아뭇튼 마오 시절 중국에 안 태어난게 다행입니다
마오와 우리와의 관계에선 착잡한 심정입니다. 한국전쟁때 마오는 당,군 주요인사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해서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은 철천지 원수로 남아 있습니다. 반
면에 우리가 박통이 앞장서서 수출을 통한 산업화에 매진할때 마오는 대약진운동,문혁 등 뻘짓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큰 경쟁자없이 산업화에 성공할수 있었는데...만약에 마오가 뒤로 물러나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싼값의 인건비로 우리처럼 수출을 통한 자국의 산업화에 매진하였다면?
아찔한 생각이...
아!! 국제 정세가 그렇게
돌아가는군요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도 중국에 편입하는 못된
민족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