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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계절이 돌아왔다.
헌데 난 지난 주말 집에서 부득이하게 신록의 나무를 없애게 된 일을 한 가지 하였다.
20년 넘게 자란 은행나무를 벤 것이다.
하긴 내가 벤 것이 아니라 작년부터 웃자라며 피해가 염려되던 나무를 얼마 전 남산면사무소를 통해
위험수로 시에 신고를 했었고, 산림과에서 하필 그제서야 나와서 방곡리의 다른 위험수들 작업과 함께
장비를 써서 잘라준 것이었다. 여든이 넘으신 부모님들께선 더 이상 농사에 욕심을 내시지 않지만,
어쨌든 매년 철따라 조금씩이라도 농사일을 거들며 지켜봐온 나무였다. 늠름하게 자라서 풍경의 한켠을
차지한 나무를 벤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비바람이 세지면 치켜 자라기만 한 나무가
휘청거리며 밭둑 아래의 건물에 위험하다는 말들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봄비가 온다는 소리에 잘라 뉘여놓은 은행목 등걸을 우선 일부나마 서툰 지게질로 집안 그늘로
옮겨놓았다. 몇 년 잘 마르면 현판재이든 서각재이든 좋은 목재가 될 터였다. 그래도 나무가
서 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버리고 시선은 그냥 바람에 일렁이는 바로 건너편 앞산의 수목들에
가 닿고 만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이 되었다.
해마다 초파일경이 되면 연중 가장 밝고 청명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나무 자른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이런 기분을 거스르는 일을 저질렀다는 자책 탓이기도 하다. 신록은 이제 연두에서 차츰 녹색을
더해간다. 옛 시인들이 말한 '녹비(綠肥)'를 향해서 말이다.
나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매년 초파일이 될 즈음이면 밝은 햇살로 청명한 날이 이어지곤 했는데
올해는 비가 오고 기온도 뚝 떨어진 날씨여서 하늘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생노병사를 거침을 어려서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의미가 깊이 느껴짐을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이 날의 밝은 청명함을 기억하고 기리며, 크진 않더라도 공덕 쌓는 삶이 되기를 소원함은
깨달은 자라는 '부처'님의 너른 보살핌과 자비의 한자락이라도 닮고자 하는 중생 누구나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듯, 그게 곧 맑은 정신으로 천지에 태어난 자로서 한껏 생명의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 시절의 생각 아닐까.
예년보다 연휴로 짜인 날들에 가족들도 모였고, 이날 형님네와 어머님을 모시고 영화관을 찾았다.
노인대학 친구분들과 간간이 영화를 보신다는 어머님과는 다르게 아버님은 영화에 취미가 없으시다.
요새 화제인 이재규 감독의 <역린>을 봤다. 영화관에서는 사진연구소의 작가인 김남호님 가족들도
만났으니 뭔가 생각이 통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역린(逆鱗)'이란 용의 목에 난 거꾸로 된 비늘이란 말로 반역을 의미한다. 정조 임금 초의 실화를
다룬 역사물이며 멀티 캐스팅이라는 광고도 보인다. 나 역시 정조를 좋아하였고 또 그만큼 글도 꽤
많이 찾아 본 터였기에,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앞섰다. 사도세자의 일과 함께 정조의
독살설이니 뭐니 하면서 그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온 임금이기도 하다.
우선 정조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학자 임금이어서 '철인군주'라고 치켜세워지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를 뒤적여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임금이 경연에서 공부한다고들
하여 누구나 임금도 공부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정조의 사서삼경 수준은 당대의
어느 학자보다도 결코 못함이 없을 정도였고 스스로 그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정리하려고까지 했던
임금이었던 것이다. 영정조의 문예부흥이라는 말처럼 정조는 학자군주답게 인쇄나 출판문화에서도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조선왕조 최고수준의 책들을 찍어냈던 임금이기도 하다.
그처럼 열심히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불운의 가족사가 있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움을 어려서
지켜보며 세손(世孫)이 되었고, 왕실의 그런 불운을 넘어서서 경전에서 가르치는 정치를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대비했던 것이다.
영화는 이른바 '정유역변(丁酉逆變)'이 일어났던 하루의 일을 다룬다.
거기에 살수(殺手)들의 이야기가 겹쳐 있다. 왕실에는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에 대비인 혜경궁홍씨가
어른으로 있고, 정조 곁에는 홍국영이있다. 정유년은 정조의 즉위 다음해 1년인 1777년이고, 그날은
7월 28일이었다.
밤늦게까지 정무에 골몰하던 정조에게 암살조가 침투한 것이고, 이들을 물리친 일을 다룬다.
<정조실록>의 기록은 이렇다(국사편찬위 사이트에 올려진 번역본).
28일 : 궁궐내에 도둑이 들어 사방을 수색하게 하다
29일 : 대신들에게 도둑 든 일을 일러주고 궁궐을 숙위케 하다
30일 : 금중의 변괴로 이어(移御)를 윤허하고 수비를 더할 것을 명하다
너무 소략하게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원래 실록이란 것이 임금의 사후에 다음 임금의 조정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는 이날의 기록이 자세하여 사실감이 넘친다.
그날의 마지막 2경3점(二更三點)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작은 내시 한 사람만 곁에 두고 홀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보장문의 동북변의 월랑 위에서 발 밟는 소리가 나는 것이 들렸고, 언뜻 일어났다 멈췄다 하면서
북쪽에서 동쪽으로, 동쪽에서 남쪽으로 점점 내가 있는 옥상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으니, 일이 심히
놀랍고 괴이하였으나 나는 가벼이 움직이지 않고 잠잠히 꽤 오랫동안 듣고만 있었다. 또 기와를 뒤집고
깨뜨리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어지러이 모래나 자갈을 던지며 그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치 고리를
치거나 옹기그릇을 깨는 소리 같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너댓 차례나 되었고 지척지간인지라
우려됨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忽聞寶章門東北邊月廊上, 有踏脚聲, 乍起乍止, 自北而東, 自東而南,
漸近於所御屋上, 事甚驚怪, 而予不輕動, 潛聽良久。又有飜瓦剝啄之聲, 繼以亂投沙礫, 厥聲漸大, 或如打環,
或似破甕, 如是者四五次, 咫尺之地, 慮在不測。]"
대충 번역해본 글만 봐도 실감있게 느껴진다.
물론 영화에서는 다르다.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고 말 것이기에 그치기로 하자.
영화를 본 뒤에 식사를 하며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약간의 이야기도 필요할 것 같아 이처럼 글을
올리기로 하였다. 정조 당시의 즉위초 정국이라든지 왕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마침 설민석이라고 하는
역사 대중강의에 능한 이의 동영상이 보여서 여기에 소개해본다. 그가 낸 책 소개 페이지에 10여 분의
동영상이 올려져 있으니 들어들 보시기 바란다.(언제까지 올려져 있을지 모르지만!)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24707
또한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최근에 학계의 논쟁도 있었다.
역사 대중물을 많이 내는 이덕일이 너무 당파싸움으로 치중해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며 서울대의 정병설이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을 풀어쓰면서 네이버에 연재도 했던 <권력과 인간>이란 책의 논란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역사서에서 흔적을 감춰버린 사도세자의 결점, 즉 정신병과 패악행위들을 증거로 내세우고자
하였고 혜경궁조차도 사도세자의 처형을 승인하였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영화에서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이런 이해가 필요하다.
영화를 본 내 느낌을 말하자면, 살수들이 활개치는 이야기 위주의 흥미보다는 좀 더 내용을 채워서
정조 임금을 그려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는 것이다. 현빈의 연기는 일부의 평가처럼 꼭 그렇다기
보다는 뭔가 선이 얇아 보였다. 학자군주인 정조는 원래 경전에 충실하리만치 이상적 정치를 구가하려고
노력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면서도 군주다운 위엄과 덕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임금이었다. 복수심
이라든지 조급한 의협심, 초조함 따위와는 거리가 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선포조차 그
정치적인 의미 뒤에는 그만한 '효심'이 있었다. 즉위 초년의 의기양양하고 늠름한 군주의 모습을 그리기
에는 모자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물의 연출에서 정순왕후가 무슨 양귀비라도 되는 양, 야외에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나, 정조가 책을 보다가 나인계집에게 곁눈질을 하는 장면 등을 스스럼없이 내보임은 아무리 영화
에서 재미를 위해 넣은 것이라고 해도 편의 위주로 쉽게 쉽게 만들자는 적당주의라고 할밖에 없을 것이다.
정적들을 평정해내는 정조의 힘은 그의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곧 '정성[誠]'이란 말이다.
영화에서는 <중용> 23장의 말이 끼어들면서 마지막에도 멘트로 소개되어 나온다. 그것이 정조의 정치철학
이자 믿음이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은 분량도 작아서 벼슬에 나간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비록 몇 장
몇 장이라고 해도 그것을 훤히 꿰며 알고 있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수백 수천 번을 읽으며 왼, 어쩌면
기본 지식이었다고도 해야 할 것이었다.
이곳은 동양 최고의 진리라고 할 언급이 나오는 대목이다.
"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性이라 이르고 明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敎라 이르니,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참으로 지극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는 '지극한 정성[至誠]'을
말하는 언급이 나오고 아래와 같이 23장이 나온다.
"한쪽(한 가지 일)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變하면 化할 수 있으니, 오로지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化할 수 있다.[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이처럼 <중용>에서는 '지극한 정성'은 마치 '신과 같다[如神]'고 말하며, 또 "誠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화에서 정조 임금이 이와 같은 경전의 말을 되뇌이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고루해진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경각심의 촉구가 아닐까. 누구나 아는 경전의 말이지만
그것을 실생활 속에서 몸으로 닦으며 깨우치고 여실하게 체득함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였다는
점이다. 정조의 세손 시절 공부하던 계방의 서연에는 우리가 아는 실학의 비조 홍대용이 스승으로
나왔었다. 근래 그의 <계방일기>가 소개되어 나왔었기에 함께 추천하고 싶다.
이 책(2012년)은 잘 된 책이다. 스승이 세손과 나눈 대화와 공부 내용들이 잘 소개돼 있고 설명도
잘 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 경전공부를 허투로 하지 않고 제대로 하는 것인지, 바로 그 점을 정조가
담헌 홍대용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정조의 혁신적인 정치는 이런 데서부터 자라며 뿌리를 내려갔고
든든한 믿음으로 자랐던 것이다.
지금 곧 지방선거도 다가오고 있지만,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할 수 있다"는
말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이때 개봉된 것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극한 생각을 가진 성실한 사람, 곧 정성을 아는 사람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올 초파일은 그렇게 우울한 상념 속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간 마음을 후벼판 상실감이 커서겠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는 잠시 졸기까지도~!
고맙습니다.
위에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 <승정원일기> 역시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 원문이 링크되어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아직 우리말로 옮겨지지 않은 한문자료이며, 오류가 섞여 있어 현재 대교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장차 다시 올려질 자룝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