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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보고서나 백년전쟁 컨텐츠,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찾아봤습니다.
실재로 존재하네요.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1/100 정도 밖에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원본 링크(유튜브 영상 아님, '한미 관계 조사' 문서 링크)를 올려드리니 궁금하신 부분은 찾아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짬짬이 흥미로운 부분, 백년전쟁 컨텐츠에 나오는 부분들 번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내용 중 오역의 소지가 있거나, 추가 검토 필요한 부분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도널드 맥케이 프레이저(Donald MacKay Fraser, 1924년 2월 20일 ~ 2019년 6월 2일)는 미네소타 출신의 미국 정치인으로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미네소타주 제5하원의원 선거구에서 미국 하원의원을 지냈고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미니애폴리스 시장을 역임.
1954년, 프레이저는 미네소타 상원으로 선출되어 8년 동안 일했다. 1962년, 그는 미네소타 제5 선거구에서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1월 3일부터 1979년 1월 3일까지 제88대부터 95대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프레이저는 현재 국제기구 및 운동 소위원회 의장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소위원회는 그가 미국 동맹국들의 인권 침해에 대한 청문회를 열 때 사용했던 직책이다. 역사학자 바바라 키스가 보여주었듯이 프레이저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엄청난 인권 침해" 패턴에 연루된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줄이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는 데 의회의 핵심 리더였다.
그는 "그의 노력은 지미 카터의 인권 문제에 대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미 국무부가 인권에 관한 연례 국가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외교 직책을 인권 문제에 주목하도록 하는 등 미국 국무부의 운영 방식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 REPORT
한미 관계 조사 - 보고서 (총 468 page)
https://archive.org/details/investigationofk00unit (pdf 링크)
https://archive.org/stream/investigationofk00unit/investigationofk00unit_djvu.txt (텍스트 버전)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 APPENDIXES VOLUME 1
한미 관계 조사 - 부록 제 1권 (총 940 page)
https://archive.org/details/investigationofk00unit_0 (pdf 링크)
https://archive.org/stream/investigationofk00unit_0/investigationofk00unit_0_djvu.txt (텍스트 버전)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 APPENDIXES VOLUME 1
한미 관계 조사 - 부록 제 2권 (총 614 page)
https://archive.org/details/investigationofk00unit_1 (pdf 링크)
https://archive.org/stream/investigationofk00unit_1/investigationofk00unit_1_djvu.txt (텍스트 버전)
송달장
하원의원,
국제 관계 위원회,
1978년 10월 31일 워싱턴 D.C.
혼, 클레멘트 J. 자블로키
의장, 국제관계위원회,
미국 하원, 워싱턴 D.C.
친애하는 의장님께: 국제기구 분과위원회를 대표하여 국제관계위원회의 한·미 관계 조사 보고서와 함께 소수의 추가 견해를 제출합니다. 한·미 관계의 성격과 관계 수행상 의심스러운 각종 의혹에 관한 소위원회의 조사결과와 결론, 권고사항이 담겨 있다.
그 보고서는 20명의 뛰어난 직원들이 부지런히 일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조사 내내 그들은 한미 관계에 있어 긍정적인 요소와 문제가 되는 요소 모두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이 조사는 두 개의 가까운 동맹들 사이의 관계의 진화와 최근 몇 년 동안 그들의 관계를 교란시킨 문제에 무엇이 기여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소위원회는 이번 연구가 미국과 다른 나라 간의 관계에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보고서가 한미 양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파트너십에 기여하는 것이 소위원회의 희망이기도 하다.
도널드 M. 프레이저,
위원장, 소위원회
국제 기구.
목차
파트 A: 소개 및 요약 1
소개 3
보안 및 정치 문제 3
정보 활동 및 계획 5
의심스러운 한국 활동에 대한 집행부의 인식 5
경제 관계 7
교육정보문화활동 8
주석 9
파트 B: 한미 관계의 리뷰 11
서론 13
전후 시대: 1945-61 14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15
한국 전쟁 15
한국 전쟁 이후: 1953-60년
이승만 정권 몰락 17
무장 정부: 1961-63 18
1961년 군사 쿠데타 18
미국과의 관계 20
KCIA 설립 22
민주공화당의 기원 23
박 대통령의 첫 임기 25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25
1967년 선거 27
달 기구의 출현 28
박 대통령 연임 29
3기 수정안 31
한국 경제의 발전 32
주한미군 감축 33
한국의 영향력 행사 조정 노력 33
1971년 선거와 대한민국 국내 불안 35
북-남 대화 상자 37
유신 헌법 38
유신에 대한 해외 반응 41
김대중의 괴롭힘 및 납치 42
박동선과 미국대사관 43
유엔 한국 문제 43
석유파동 44
니데커 사건 44
KCIA를 위한 달 시연 44
미 의회, 군사 지원 삭감 45
스캔들 발생 46
Part C: 조사 결과 49
I. 보안 및 정치 문제 51
지역의 역동성 51
주한미군의 역할 52
현대 한미관계 요인 53
베트남 전쟁 53
청와대 압수수색 54
미국 푸에블로 호 나포 55
밴스 미션 57
ㅡ 중략 ㅡ
Report 3~5p. 도입부
Security and Political Affairs
(1)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ROK) resorted to extraordinary measures to influence American policy and opinion for two reasons:
(a) The Government perceived a waning of the U.S. commitment to defend South Korea. In 1968, it regarded as too weak the American responses to the North Korean commando raid on the Blue House, the Presidential Mansion, and capture of the U.S.S. Pueblo.
More importantly, it was alarmed over the withdrawal of 20,000 U.S. troops from Korea and was uncertain that Congress would appropriate funds for the $1.5 billion compensatory aid package offered by the Nixon administration for modernizing the ROK Armed Forces [pp. 67-71].
(b) After President Park Chung Hee instituted measures of strict internal and political control in 1972, the image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as damaged in the United States.
(2) The initial objectives of South Korea's influence operations were to insure congressional approval of the $1.5 billion military aid package between 1971 and 1975 and to prevent further withdrawal of U.S. troops. From 1972 onward, there was another important objective—to convince Americans that Park's new system of government was justified for reasons of national security and economic development [pp. 70-71].
(3) In the fall of 1970, meetings were held in the Blue House, some attended by President Park, to discuss centralizing and coordinating activities in the United States designed to influence American policy and officials in favor of South Korean policies. At the first meeting, a plan was proposed for putting Tongsun Park at the head of all ROK lobbying in the United States. Those to be placed under Tongsun Park's control were: Lee Sang Ho, also known as Yang Doo Won, KCIA representative in Washington; Kang Young Hoon of the Research Institute on Korean Affairs; and Pak Bo Hi of the Korean Cultural and Freedom Foundation. The plan to put Tongsun Park in charge was abandoned because of factional rivalries and President Park's desire to maintain centralized control through regular official channels. A special Blue House review panel was established for the latter purpose. However, it was unable to centralize the activities due to the tangle of Koreans involved in lobbying in Washington for reasons of both patriotism and personal profit [pp. 124-125].
(4) Government officials in Seoul with responsibilities for Washington lobbying included Prime Minister Chung II Kwon, KCIA Director Lee Hu Rak, and Presidential aide Park Chong Kyu. The separate lobbying operations sometimes competed with each other. Generally, they sought to use parliamentarians, scholars, businessmen, and other persons of potential influence. There were frequent paid trips to Korea. In Washington, Tongsun Park's George Town Club, established with KCIA assistance, became a lobbying center for the Korean Government [p. 125ff].
(5) In Seoul in 1974, Presidential aide Park Chong Kjru had an envelope containing $10,000 delivered to John Nidecker, an aide to President Nixon. U.S. Ambassador Philip Habib returned the money at Nidecker's request. A few months later, Nidecker received from Korean National Assemblyman Row Chin Hwan an offer for congressional election campaign contributions to candidates to be chosen by the White House. Nidecker declined [pp.150-151].
(6) By 1975, the Korean Government judged Tongsun Park's usefulness to be declining as a result of publicity alleging ties between Park and the Government. Accordingly, Hancho Kim, a Baltimore businessman, was chosen to replace Park as a lobbyst [p. 151].
(7) The South Korean Government desired to export weapons made in Korea under U.S. license. Between 1974 and 1978, requests were made to the State Department for permission to export to 11 countries; most were not approved. Between 1976 and 1978, Tongsun Park negotiated unsuccessfully with an American arms producer for a joint venture to export ROK-produced weapons which required U.S. Government approval [pp. 82-83; 85-86].
안보 및 정치
(1) 대한민국 정부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미국의 정책과 의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a) 정부는 한국을 방어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1968년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습격과 대통령 관저 습격, 미군 푸에블로호 나포 등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너무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 20,000명의 철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고, 의회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닉슨 행정부가 제공한 15억 달러의 보상 지원 패키지에 대한 자금을 적절하게 사용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pp. 67-71].
(b)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엄격한 내·정치적 통제 조치를 취한 후 미국에서 한국 정부의 이미지가 훼손되었다.
(2) 한국의 영향력 작전의 초기 목표는 1971년과 1975년 사이에 15억 달러 규모의 군사 원조 패키지에 대한 의회의 승인을 보장하고 미군의 추가 철수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1972년부터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인들에게 박정희의 새로운 정부 체제가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이유로 정당화되었음을 확신시키는 것이었습니다[pp. 70-71].
(3) 1970년 가을,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렸고, 일부는 박 대통령이 참석하여 미국 정책과 한국 정책에 찬성하는 관리들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미국 내 활동을 중앙 집중화하고 조정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첫 번째 회의에서 박동선을 미국 내 모든 한국 로비의 수장으로 삼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박동선의 통제 하에 놓일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문제연구소 강영훈; 그리고 한국문화자유재단의 박보희. 박동선을 집권시키려는 계획은 당파적 경쟁과 정규 공식 채널을 통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유지하려는 박 대통령의 열망 때문에 무산되었다. 후자를 위해 청와대 특별검토단을 꾸렸다. 그러나 애국심과 개인의 이익을 이유로 워싱턴 로비에 한인들이 얽혀 활동을 중앙집중화하지 못했다[pp. 124-125].
(4) 워싱턴 로비를 담당하는 서울의 정부 관리에는 국무총리 권정일, KCIA 이후락 국장, 대통령 보좌관 박종규가 포함되었다. 별도의 로비 활동은 때때로 서로 경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국회의원, 학자, 사업가 및 기타 잠재적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에 유급 여행을 자주 갔다. 워싱턴에서는 KCIA의 지원으로 설립된 박동선의 조지타운 클럽이 한국 정부의 로비 센터가 되었다[p. 125ff].
(5) 1974년 서울에서 대통령 보좌관 박종규가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인 존 니데커에게 1만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다. 필립 하비브 미국 대사는 니데커의 요청에 따라 돈을 돌려줬다. 몇 달 후 Nidecker는 Row Chin Hwan 국회의원으로부터 백악관이 선출할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의원 선거 캠페인 기부 제안을 받았습니다. Nidecker는 거절했다[pp.150-151].
(6) 1975년까지 한국 정부는 박동선의 유용성이 박정희와 정부 사이의 유대를 주장하는 홍보의 결과로 감소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볼티모어 기업인 김한초가 박동선의 뒤를 이어 로비스트로 선출됐다[p. 151].
(7) 한국 정부가 미국 허가를 받아 한국산 무기를 수출하기를 원했다. 1974년과 1978년 사이에 국무부에 11개국으로의 수출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대부분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1976년과 1978년 사이에 박동선은 미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한 한국산 무기를 수출하기 위한 합작 투자를 위해 미국 무기 생산자와 협상에 실패했습니다. 82-83; 85-86].
무장 정부 18~19p.
Park Chung Hee was born in a rural village in southeastern Korea in 1917. After graduating from normal school, he attended the Japanese military academies in Manchuria and Tokyo and then served as an officer in the Japanese Kwangtung Army.
In 1946, he attended the Korean Military Academy, a member of the 2d class. Sentenced to death in 1948 for participation in the Com-munist-led Yosu rebellion, he was eventually released through the intervention of Gen. Paek Sun Yop, chief of G-2 military intelli-gence.
He was given a job as a civilian intelligence officer at G-2 in Army headquarters. There he met Kim Jong Pil and Suk Jung Sun, who played key roles in the military government. They them-selves were graduates of the 8th class and among the 15 members of that class chosen by General Paek to work at G-2. *Shortly after
박정희는 1917년 한국 남동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와 도쿄에 있는 일본군 사관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일본 광둥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6년, 그는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1948년 공산당이 주도한 여수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결국 백선엽 G-2 군사정보국장의 개입으로 풀려났다.
그는 육군본부의 G-2에서 민간 정보 장교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종필과 군사정권의 핵심 역할을 한 숙정선(Suk Jung Sun)을 만났다. 이들은 8기 졸업생으로, G-2에서 근무하기 위해 백 장군이 뽑은 15명 중 한 명이다.
* Shortly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Park was reinstated in the Army.
As was the case with many other ROK military officers, Park at one point attended an advanced military course in the United States. He was transferred 25 times in 11 years and was not promoted as rapidly as he might have been, apparently because he remained aloof from Army politics.
Resentment over this treat-ment may have played a role in his decision to participate in the coup.
*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박정희는 육군에 복직되었다.
다른 많은 한국군 장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정희는 한때 미국의 고급 군사 과정을 다녔다. 그는 11년 동안 25번이나 전근했고 육군 정치에 초연해 있었기 때문에 진급이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이러한 대우에 대한 분노가 쿠데타에 참여하기로 한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Kim Jong Pil, who was related to Park by marriage, was born in south-central Korea in 1926. He graduated from teachers college where he was rumored to have been involved in leftwing student politics. After teaching for a short time, he entered Korean Military
Academy and graduated in the 8th class in June 1949. He spent his entire military career in G-2 military intelligence.
김종필은 1926년 대한민국 중남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좌익 학생 정치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던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짧은 기간 교편을 잡은 후, 그는 한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1949년 6월 8번째 반에 졸업하였다. 그는 G-2 군사 정보국에서 군 경력을 모두 보냈다.
One of the first acts of the coup leadership on May 16 was to declare martial law, dissolve the National Assembly, and ban political activity.
Power was placed in the hands of a military revolutionary council which pledged, among other things, to fight communism; observe the U.N. Charter and Korea's international agreements; strengthen ties with the United States and other friendly nations; reestablish morality in government; make Korea economically self-reliant; work toward reunification of the peninsula;
and, those goals accomplished, turn over the reins of power to new and conscientious civilian politicians.
The timing of the coup caught both the U.N. Command and the U.S. Embassy by surprise. Both promptly expressed their disapproval in the following public statement, without waiting for authorization from Washington:
5월 16일 쿠데타 지도부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계엄령 선포, 국회 해산, 정치 활동 금지였다.
권력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에 맞서고, 유엔 헌장과 한국의 국제 협정을 준수하고, 미국과 다른 우호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정부 내에서 도덕성을 회복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 군사 혁명 위원회의 손에 맡겨졌다. 반도의.
그리고 달성된 목표들은 새롭고 양심적인 민간 정치인들에게 권력의 고삐를 넘겨주는 것이다.
쿠데타의 시점은 유엔군 사령부와 미국 대사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양측은 미국 정부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통해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General Magruder, in his capacity as Commander-in-Chief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calls upon all military personnel in his command to support the duly
recognized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aded by Prime Minister Chang Myon. General Magruder expects that the chiefs of the Korean Armed Forces will use their authority and influence to see that control is immediately returned to governmental authorities and that order is restored in the armed forces.'
Speaking on behalf of the U.S. Embassy, Charge d'Affaires Marshall Green reiterated that stand and confirmed U.S. support of the constitutional government.
마그루더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지휘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적법한 지원을 요청한다.
장면 국무총리가 이끄는 공인 대한민국 정부 마그루더 장군은 한국군의 수장들이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이용하여 정부 당국에 통제권이 즉시 반환되고 군내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샬 그린 책임자는 미 대사관을 대표해 이 같은 입장을 재확인하고 입헌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인했다.
Much of the opposition from American officials in Korea stemmed from ignorance about the backgrounds of the coup leaders and a suspicion, because of U.S. Government reports, about past involvement in Communist activities.
In these reports, it was noted that Park had flirted with communism while an Army officer in the mid-1940's before it became clear which of several groups would assume control in South Korea.
Evidence suggested that Park was indeed a Communist during the 1948 Yosu revolt, and he was later tried, convicted, and given a death sentence because of this charge. He won a reprieve, evidently because he provided information that led to the apprehension of approximately 300 Communist agents. It was said that Park's sentence was reduced to 10 years because of efforts by Chung II Kwon and others.
주한 미국 관리들의 반대는 쿠데타 주동자들의 배경에 대한 무지와 과거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미국 정부의 보고로 인한 의혹에서 비롯되었다. 이 보도들에서, 1940년대 중반의 육군 장교가 남한에서 어떤 집단이 통제권을 갖게 될 것인지가 명확해지기 전에 박정희가 공산주의에 시시덕거렸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증거는 박정희가 1948년 여수 반란 기간 동안 실제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암시했고, 그는 나중에 이 혐의 때문에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300여명의 공산당 요원들을 체포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집행유예를 얻었다. 권(Chung II Kwon)씨 등의 노력으로 박정희의 형량이 10년으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김대중의 괴롭힘 및 납치 p42.
HARASSMENT AND KIDNAPING OF KIM DAE JUNG
KCIA headquarters had been extremely upset about Kim Dae Jung's activities in the United States in the first half of 1973. Kim was speaking to groups of Korean residents and was in frequent contact with the Korean desk at the State Department. He was also writing letters to and meeting with Members of Congress, journalists, and professors. The KCIA closely monitored his movements and tried to disrupt events in which he was participating.
Normally, each KCIA station in the United States reported directly to Seoul headquarters, but for these operations all were placed directly under the control of the station chief in Washington, Lee Sang Ho. In mid-1973, the State Department received intelligence information containing the allegation that the KCIA had contemplated having Kim killed by hired criminals in the United States.
As a result of this report and various accusations of harassment of Korean-Americans, the State Department began to pressure the Korean Government to stop such activity and to recall the KCIA station chief, whom the State Department regarded as the principal cause of trouble.
In July 1973, Kim Dae Jung traveled to Japan, intending to return shortly to take up a fellowship at Harvard. During the daytime on August 8, he was kidnaped from his hotel room in Tokyo by the KCIA. On August 13, he was released near his home in Seoul, and 3 days later was placed under house arrest.
Although the details of Kim Dae Jung's release are not yet known, American and Japanese Government reactions to the kidnaping definitely played a role. As soon as Kim's disappearance became known in Washington, the U.S. Government expressed strong interest in his welfare. A nationwide public outcry swept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voiced concern about Kim.
There is circumstantial evidence that KCIA officials stationed in the United States may have been involved in the kidnaping. Lee Sang Ho, Choi Hong Tae, and Park Chung Il (all from the Washington station) were in Tokyo or Seoul at the time of the kidnaping. Other KCIA officers stationed in the United States traveled to Tokyo and Seoul at the same time.
A State Department memorandum dated August 17, 1973 said, "'while the present ROK CIA chief remains in Washington he will continue to be the source of contention in the Korean community and embarrassment to the United States."
In December 1973, KCIA station chief Lee Sang Ho was recalled to Seoul as a result of U.S. Government pressure. Shortly thereafter, using his real name Yang Doo Won, he was promoted to Deputy Director for Security.
김대중의 괴롭힘과 납치
KCIA 본부는 1973년 전반기 김대중의 미국 활동에 대해 극도로 화를 냈다. 김은 한인 단체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국무부의 한국인 데스크와 자주 접촉했다. 그는 또한 의회 의원, 언론인 및 교수들에게 편지를 쓰고 만났습니다. KCIA는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그가 참여하는 이벤트를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각 KCIA 스테이션은 서울 본부에 직접 보고했지만, 이러한 작업을 위해 모든 작업을 워싱턴의 이상호 국장이 직접 통제했습니다. 1973년 중반, 국무부는 KCIA가 미국에서 고용된 범죄자들에 의해 김대중을 살해하는 것을 고려했다는 주장이 포함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 보고서와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괴롭힘에 대한 다양한 비난의 결과, 국무부는 한국 정부에 이러한 활동을 중단하고 국무부가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는 KCIA 국장을 소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7월, 김대중은 하버드에서 펠로우십을 하기 위해 곧 귀국할 생각으로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8월 8일 낮 동안 그는 KCIA에 의해 도쿄의 호텔 방에서 납치되었다. 8월 13일 서울 자택 인근에서 풀려났고 3일 만에 가택연금됐다.
김대중의 석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납치에 대한 미국과 일본 정부의 반응이 한몫했다. 김대중의 실종이 워싱턴에서 알려지자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복지에 강한 관심을 표명했다. 전국적인 대중의 항의가 일본을 휩쓸었고 일본 정부는 김대중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에 주둔한 KCIA 관리들이 납치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정황 증거가 있습니다. 이상호, 최홍태, 박청일(모두 워싱턴 지점 출신)은 납치 당시 도쿄나 서울에 있었다. 미국에 주둔한 다른 KCIA 장교들은 도쿄와 서울을 동시에 여행했다.
1973년 8월 17일자 국무부 각서에는 "현 한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워싱턴에 있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한인 사회의 논쟁의 근원이 되고 미국을 당혹스럽게 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1973년 12월, 이상호 KCIA국장은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서울로 소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명 양두원으로 보안부 차장으로 승진했다.
지역의 역동성 p51.
I. Security and Political Affairs
In the international political setting, security has been the dominant aspect of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ROK). The subcommittee examined security and political issues to determine what led South Korea to take extraordinary measures to influence U.S. policy; to understand the steps the ROK took to meet its security needs, given a reduced U.S. presence; and to describe the foreign policy context within which the so-called "Koreagate" scandals occurred.
THE DYNAMICS OF THE REGION
Because of Korea's strategic location, its history has been marked by extended periods of control or strong influence by four powers — China, Japan, Russia, and the United States. However, its present division is unprecedented. The invasion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in 1950 and the subsequent 3 years of warfare involving both Chinese and American forces served to solidify the post- World War II political division and sustain the animosity and distrust between the two Koreas. In the 1960's and 1970's, however, certain events outside Korea changed the cold war premises on which North-South hostility had been based.
The Sino-Soviet split was one of the factors which encouraged the United States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PRO to move toward normalization of relations in the early 1970's. Japan, the other regional power with a strong interest in the Korean Peninsula, developed trade relations with the PRC during the 1960's and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in 1972.
Detente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underlined the gradual shift from a bipolar world system to a multipolar system. It was now conceivable that certain groupings of traditional rivals could act together to achieve common goals (for example, United States and Japan with the PRC). In the view of many experts, the Sino-Soviet split made it nearly impossible for those two powers to pursue a joint policy in support of North Korean aggression. Furthermore, the military confrontation between China and the Soviet Union at their border increased the desire of each to see a stable situation in Korea. Others have pointed out that the Sino-Soviet rivalry gave North Korea's Kim II Sung an opportunity to play one Communist power off against the other. However, the fact that the Soviet Union had not provided any military aid to North Korea since 1973, while the PRC had continued to do so, indicated that the Soviet Union did not feel compelled to compete with the PRC in North Korea.
I. 안보 및 정치
국제 정치 환경에서 안보는 한미 관계의 지배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소위원회는 안보 및 정치적 문제를 조사하여 한국이 미국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한 이유를 결정했습니다. 축소된 주한미군을 감안할 때 한국이 안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취한 조치를 이해하기 위해; 소위 "코리아게이트" 스캔들이 발생한 외교 정책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지역의 역동성
한국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한국의 역사는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4개 열강의 오랜 통제 또는 강력한 영향력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현재의 분할은 전례가 없습니다.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과 이어진 3년 간의 중미군과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분열을 공고히 하고 남북한 사이에 적대감과 불신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북한 이외의 어떤 사건들은 남북한의 적대감의 기반이 된 냉전 전제를 변화시켰다.
중소 분단은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고무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PRO가 1970년대 초 국교 정상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반도에 강한 이해관계를 가진 또 다른 지역 강대국인 일본은 1960년대에 중국과 무역 관계를 맺었고 1972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간의 데탕트(Detente)는 양극 세계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의 점진적인 전환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전통적인 라이벌의 특정 그룹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예: 중국과 미국 및 일본). 많은 전문가들은 중소 분열로 인해 두 세력이 북한의 도발을 지원하는 공동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국경에서의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 대결은 한국의 안정적인 상황을 보고자 하는 염원을 증폭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중국과 소련의 경쟁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공산주의 세력을 상대할 기회를 주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1973년 이후 대북 군사원조를 하지 않고 있는 반면 중국은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련이 북한에서 중국과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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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Gate - "스캔들 발생" 부터 업데이트 예정
Korea Gate, Report 51p, 부록 2권 1354p.
첫댓글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네요.
pdf 파일이 글자가 아니라 그림파일 같은데,
일일이 타이핑하신 것인지...
고생하셨습니다.
자료 모두 확인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본문에서 Ctrl+F 누르셔서 '텍스트 버전'으로 검색해보시면 각 보고서에 대한 텍스트 파일 링크가 있습니다.
PDF 파일인데다 분량이 어마무시하다보니 결국 원문과 대조해봐야 오타 해석이 되더군요.
다행이 텍스트 파일이 있어서 ㅎㅎ 없었으면 직접 타이핑 할 각오였지만요 ^^
수고하셨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도 있더군요.. ㅎㅎ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WWG1WGA
분문-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복지에 강한 관심을 표명했다. 전국적인 대중의 항의가 일본을 휩쓸었고 일본 정부는 김대중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1년 후 영부인 저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일본의 대중 항의는 사라지고, 한일 관계가 반전됩니다....
의문의 이 사건은 아래 영상을 보면 감이 잡힐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Lzdn4ACGNM&t=460s
https://cafe.daum.net/trumpandtheknight/nCMB/1273
PLAY
프레이저 보고서가 다 '거짓'이라 "들었는데" 직접 찾아봤고 그 분량에 전율했습니다.
사사한 것은 감을 잡을 것이 아니라 명료하게 알려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울러, 아직 저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아래 영상에 대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https://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4F4AF1C89763D409DA50338657EE98C82B52&outKey=V1233a0d103dcd5fc10b6dc1be2c1fcd92e55ddcae1a92628b839dc1be2c1fcd92e55&width=544&height=306
감사합니다.
김대중이 미국에서 정치 활동을 한 것에 대한 박 정부의 괘심죄로 일본에 잠시 머물던 그를 납치한 사건이죠.
그리고 그는 배에 태워져 태평양에 던져버릴 계획인데 미국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헬기를 보내 구조한 것 같습니다.
이사건으로 일본은 자기 나라의 손님을 납치 살해하려는 것에 반한 감정이 폭발한 것이며 한청련은 반한, 반 박정희
운동이 강렬해 졌습니다. 이때 중정 요원(Y)이 이 운동에 가장 앞장선 문세광에게 접근한 것 같습니다.
그의 지원으로 영부인 저격 사건까지 지원을 받습니다. 그의 목표는 박통이었지만 서투른 사격으로 실패합니다.
그리고 행사장에 배치된 저격수의 사격으로 단 1발의 총격으로 영부인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사건으로 문씨와 관련된 조총련과 한청련은 된서리를 맞게 됩니다.
또한 일본은 파출소에서 탈취된 총과 한국 잡입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곤경에 처하고 수상이
사과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인해 반 박통의 선봉인 문세광이 제거되고 한일 관계는 역전되게 됩니다.
아래 영상은 무엇인지 잘 못알아 듣겠네요... 뭐가 궁금하신지?
감사합니다. 뜬금없이 일본이 김대중의 납치를 피력하려 했다는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세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사드가 딥스테이트라는 관점이 있는 것 같은데, 트럼프는 왜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첫 부분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유원화 덕분에.. 박통의 업적으로만 알았던 비약적 경제 발전의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정치 경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딥스를 모르고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또한 딥스를 제거하기 위한 신의 군대(은하연합)의 활동을 모르면 악당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천대 중반부터 서서히 악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그자리에 25,000명의
은하요원을 동일한 모습의 클론으로 대체 시켰습니다.
이러한 개입이 없었다면 딥스 제거는 불가능 했을 겁니다.
CIA, 모사드의 변화는 은하요원의 활동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신은 빛의 세력인 트럼프와 푸틴, 13TH 기사님을 보내어 지구인 스스로 딥스를
제거하도록 하고 후원하고 있기에 현재의 딥스 몰락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힘을 쓸수 없는 지경이고 남은 잔당들도 모조리 제거될 것입니다.
대박 발언이네요
천천히 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단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국문제연구소(Research Institute on Korean Affairs)가 민족문제연구소인가 했더니 정반대 성격의 단체임을 알았습니다.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중앙정보부(KCIA)의 돈으로 미국 학계와 언론계에 친박정희 여론을 조성하려고 활동, FBI로부터 강제 소환되어 한국으로 도망."
민족문제연구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7219&cid=42140&categoryId=42140
친일인명사전 편찬.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공약이었던 친일재산환수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Snake Park이라는 문구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아직 검색되지는 않았습니다. 검색되는 내용만 대조해서 올려드리려고 합니다 ^^
프레이저 보고서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들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번역본으로 책도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changshuk/221349004053
@유원화 감사합니다 천천히 보겠습니다
@유원화 정말 귀한 일을 하십니다. 진실과 정의를 밝히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로 애국 운동입니다.
'백년전쟁' 후편을 기다린 지도 벌써 십년이 넘어가고 있지요.
동영상을 다시 봐도 울분은 나지만, 유원화님 덕분에 다시한번
전의를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 ~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