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5.水. 비
우중답사의 터닝 포인트, 뜨거운 칼국수와 가리비 구이를 앞에 둔 담소談笑.
인생이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하루였다. 물론 우연偶然이 쌓이면 필연必然이 되고, 필연必然이 쌓이면 현재現在가 되어가겠지만 서도 말이다. 어느 날 오후 느지막이 모놀 카페에 들어와 보았더니 제118차 서산 황금산 답사는 이미 매진되어버렸고, 그나마 요즘 하는 일 때문에 답사 대기자 명단에 올릴까말까 몇 차례 망설이다가 보고 싶은 얼굴들도 좀 보고, 또 토요일 하루쯤 서해 바람에 나를 맡기는 것도 일의 연장 아니겠나하는 생각에 에잇! 하는 마음으로 기대 반 무심 반으로 대기자 신청을 했다. 그러던 것이 답사신청 취소가 줄줄이 나오는 바람에 답사에 참여하게 되어 비오는 황금산과 몽돌해변을 돌아다니다보니 온몸이 봄비에 푹 젖은 채 주린 배를 안고 점심식사가 예약된 식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식당은 추연한 봄비와 애닯은 바닷바람이 허공을 가득 메운 오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거대한 포장마차였다. 며칠 전 대기자 신청을 할까 말까 했을 때 에잇, 이번에는 관두지 뭐! 했더라면 내가 어찌 우중雨中의 황금산 풍경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한경희 가리비집의 즐거운 점심식사를 맛볼 수 있었을까?
황금산 정상을 다녀오느라 하산이 조금 늦어진 일행과 함께 저 안쪽 비닐장판이 깔려있는 마루로 올라가야했다. 젖은 등산화를 벗고 마루로 오르는 일도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했다. 양말은 말할 것도 없고 상하의가 몽땅 젖어 있어서 우선 아쉬운 대로 상의를 벗어 옆에 놓고 물이 흥건한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 나서야 엉거주춤 마루에 올라가 네모난 식탁 앞에 주저앉았다. 밖에는 비바람이 여전히 몰아쳤지만 식당 안의 훈기로 우리들 몸에서는 훈훈한 김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은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평소에는 대개 잊고 살아가지만 사람이란 정情과 따뜻한 온기溫氣를 이웃과 나누고 살아야하는 인간난로人間煖爐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을 푸근한 김을 통해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우리는 김 오르는 상대방의 몸을 보면서 하하거리며 웃었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네모난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처음에야 당연 오늘 답사와 운치는 있었으나 성깔 고약한 날씨로 운을 떼었다. 대화의 시작은 언제나 공동관심사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다가 다른 식탁에 비해서는 몇 박자 늦게 연탄불이 들어오고 연이어 막걸리와 가리비가 들어왔다. 아쉬운 대로 깍두기 안주에다 종이컵에 막걸리를 가득 채워 건배를 한 뒤에 가리비를 불판 위에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입을 철석같이 다물고 있던 가리비가 제 몸이 뜨거워지면 입을 쩍쩍 벌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매우 미안했지만 그것도 여러 차례 같은 모습이 반복되자 미안한 마음보다는 껍질 안에서 익어가고 있을 가리비 속살 맛이 궁금해져왔다. 잘 익은 가리비 속살을 초장에 찍어 막걸리 안주가 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을 무렵 해서는 미안한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어떤 놈이 입을 활짝 벌리는지 눈여겨보게 될 만큼 나는 뻔뻔해져 있었다. 막걸 리가 몇 순배 더 돌자 우리들의 이야기는 또 여행이라는 공동관심사로 옮겨가고 있었다. 지난 3,4월에 걸쳐 한 달 여간 호주와 뉴질랜드 트래킹을 다녀오신 용문댁 님이 트래킹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고, 우리들은 주로 궁금하거나 호기심이 가는 대목에 관해 질문을 했다. 아메리카가 신대륙이라면 호주나 뉴질랜드는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신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구대륙인 유럽은 역사와 전통이 볼거리이자 배울거리이지만 신대륙인 호주와 뉴질랜드는 자연自然 그 자체를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 통째로 관조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어서였다. 창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가리비 구이 안주에 막걸리는 맛났고, 대화는 유익하고 즐거웠다. 용문댁 님이 적절한 어휘력과 다양한 제스처로 감성 넘치는 여행담들을 조근조근 하게 설명을 잘 하시는 줄은 또 점심식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보통 식사시간에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식사를 하면서 말을 하기는 불편한 점이 있을뿐더러 말과 음식을 씹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없어서인데, 그래서 두 가지 중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음식을 먹는 쪽을 대체로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봄비라는 거대한 물풍선 안의 작은 피난처인 포장마차에 둘러앉아 가리비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하는 담소는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와 식사가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와 즐겁고도 행복감 넘치는 식사시간이 된다는 것을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된 셈이다. 함께 자리한 라일락 님, 명수기 님께도 즐거운 식사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데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주식사인 펄펄 끓는 해물칼국수가 나왔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뜨거운 국물에 자붓히 씹히는 칼국수의 맛이 괜찮았다. 칼국수 국물이 몽땅 떨어질 때까지 즐거운 담소는 계속되었고, 창밖의 봄비는 내릴 만큼 내렸던지 잠시 멈추는 듯 했지만 오후답사를 시작하자 또 강풍을 등에 업고 퍼붓기 시작했다. 못 믿을 건 여자女子의 마음이 아니라 봄날 봄비의 심사心思였다.
(- 우중답사의 터닝 포인트, 뜨거운 칼국수와 가리비 구이를 앞에 둔 담소談笑. -)
첫댓글 모놀답사에서 긴울림님과 그리 긴 얘기를 나누기는 처음이었지요
여행이라는 공동관심사가 있기에 우리는 누구와도 곧잘 통하는 길벗인것 같습니다
함께 나누었던 대화도 살살녹던 가리비도 궂은날 먹어서 더 맛있었던 칼국수도 모두 행복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조금더 횐한 웃음으로 만날수 있겠지요~
라일락님도 명수기님도 함께라서 행복했던 날~^*^
여행기 넘 부러웠어요
나중에 가게 되면(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꿈구면서ㅎ~ ) 문의 할 께요
긴울림님이 대기자 명단 저 끝에 계실 때 "오랫만에 신청하셨는데 이번에도 뵙지 못하겠구나" 했는데
신청조차 안하셨으면 이런 멋진 후기도 보질 못했겠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ㅎ ㅎ
긴 이야기는 못 나누었어도 뵙는 것만으로도 따듯함을 주시는 긴울림님이십니다.
그날의 가리비와 칼국수는 정말 몰아치는 비와 아주 환상적인 궁합이었습니다. ㅎ ㅎ
낭만이 있었던 거대한 포차의 추억도 길게 기억될 것 같아요.
따끈따끈한 후기 즐겁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만히 후기글을 대하여 보니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다시 한번 느껴보는 과정이 되네요ㅎ~
답사을 하면서 (자주는 못하지만 ) 처음 자리한 담소에 즐거웠습니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지요....
떠난다는 설래임이............ 날씨가 좋은 면 더 즐겁고 .....
비를 좋아해서 그리 나쁘지 아니한 봄 바람과 비 였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