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벌어진 노을 틈에 서서 젖고 있었지요
들소들의 영혼이 투욱투욱 흙 파는 소리가 들리면
적막 구덩이에 옥수수 알갱이가 몇 알 떨어지구요
아카시아 나무가 반 살다 놔둔 아카시아 가지들
그 위에서 첫 우기를 놓친 새끼 새도 한쪽만 살아 있으려나봐
이렇게 경사로로 둘러싸인 인생이 구릉을 넘을 때
애기처럼 부드러운 물이 남아 있는
벗은 나무 하나에 기대어 물어 봤습니다
가자,
들을 수 없는 슬픔으론 붉은 구릉을 하나씩 지어놓고
그 위에서 바람 지나가는 소리를 지르는
죽은 나무들은 지난해보다 더 낮아져 있습니다
길이 아니어도 넝쿨을 뻗는 꽃구름이
운동화 끈처럼 풀어진 새들이 앉아 있는
마지막 늪지로 벌써 들어가 있었습니다
나무들을 밀고 들어간 수련이 목만 내놓고 떠 있습니다
꿈이 있는 한엔 길을 보았다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났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노을로만 된 가슴으로 가고
잘 엎어진 구릉만으로 저 길을 갈 수 있을지
무진 애를 써서 더 휘청거려야 하는 거겠지요
돌 하나를 달고 가는 물방울처럼
붉은 하늘에 흰 달이 떠 있습니다
우리가 노을로만 된 가슴으로 갈 수 있을지 / 황학주
그 우물은 ‘들여다보지 말 것’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무심한 척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는데 어느새 내 곁에 있다
소용돌이를 가진 울음은 밤이 두렵다 작은 소리에도 두근거리는 숨,
한 맺힌 곡성을 길어 올리는 저 둥근 폐가가 내 안에 둥지를 튼다
들여다보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번져가는 파문, 파문, 넘쳐나는
입들이 눈들이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누가‘들여다볼까 봐’두꺼운 옷을 입는 내가 오늘도 거울 앞에 선다
또 하나의 길 저 아득한 지점, 둥근 우물을 발견한다 우물 밑바닥과
거울 먼 곳은 서로에게 닿는 긴 통로를 가지고 있어, 지구 반대편
빈집에 앉아 우는 울음도 수시로 드나든다
지구에는 수억만 개 걸어 다니는 우물이 산다
그 우물은 보이지 않는 깊이를 가졌다 돌멩이가 떨어져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스스로를 발견하기 위한 앙다문 울음 밤마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낸다 흐린 날의 빗물과 흐리지 않는 날의 빛살로 고요해 질 수 없는
숙명이 찰랑거린다
걸어다니는 우물 / 안효희
늙어가는 개의 등에 날개를 달아줬지
지상의 것에만 킁킁거리던 개가 멀건 구름에 코를 박고 전생을 더듬어
초승달 같은 꼬리조차 뜯어먹을 수 없는 기억
먼저 태어난 개띠의 고향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세상에 영원한 유약함은 없어 물리고
물리는 게 탄생의 법칙, 달에 생겼다 사라진 검은 가족사야
개가 소리 없이 삭(朔)을 건너
형제의 난이 블랙홀에만 있는 건 아니야
하늘의 병동은 파랑이거나 검정
아무리 피가 붉어도 달은 쌍둥이 동생이 없어
달의 그늘에는 손목을 붙잡아 맬 침대도 헝겊도 없어
손을 감싼 달의 장갑은 무표정해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것들은 쉽게 늙어가지
휴일의 면회는 무료할 뿐이야
후생의 가족은 말이야,
날개 달기 전과 후가 다른 타로점 같은 거야
상처는 건드릴수록 덧나는 건 알고 있지
지상으로 추락한 돌은 다시 허공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날개를 달았다고 뭐 다를 것도 없긴 해
하늘에 머물러도 뒷다리 들고 오줌 누는 건 여전하더군
소식 없이 잘 사는 것도 중병이야 늙은 개의
죽음 뒤가 걱정이야 날개에 불을 달아 하늘로 올려 보내면
기억은 점점 사라져 전생으로 흘러가지
킁킁거리는 지상 / 김정수
1
펜슬이 일기장을 읽는다 포장한 미소가 세탁 방으로 숨어들고 크리넥스의 사생활이 일렁이는 식탁의 목소리가 포도처럼 청붉다 햇살이 커튼자락에 기하학적으로 무늬를 그리고 끄트머리 달랑거리는 주말의 그네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오줌 마려운 길들과 휘청거리는 얼굴이 울음소리를 낸다 늙은 잎사귀를 매달고 벽은 서 있다
2
태양에 붙잡힌 오후가 뒤뚱거린다 옆구리가 간지러운 구름은 파랑파랑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당신이 늙었으면 좋겠다 녹슨 문장 뒤에 숨어 빨갛게 녹아내릴 때까지 열 수 없는 당신을 들고 있다 물에 젖지 않는 물고기가 있다 소리를 잃어버린 물고기, 젖지 않은 거리에 당신을 내려놓는다 출렁이는 벽, 붉게 물들어가는 몇 광년의 인연이 시간의 경계에서 허물어진다
3
두근거림과 고요가 손을 잡으면 밤은 물컹해진다 잡담이 수북한 잠의 파편들, 어둠은 마술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웅얼웅얼 옷을 갈아입는 푸른 유리잔이 토요일을 건너다가 쿵! 바닥으로 떨어진다 외다리 그림자가 위험하다 움푹 파인 토요일이 녹아내린다 포인세티아가 핏빛을 물었다 당신의 주말에 경보음이 울린다
채플린 영화처럼 인생을 빨리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토요일이 지나간다 / 박지우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 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수선집 근처 / 전다형
-------------------------------
노을처럼 산다는 것
구절이 너무 좋아서 곱씹어보고 있어요
첫댓글 마지막 주민님 말씀에 홀렸네요... 노을 처럼 산다는 것. 좋은 시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