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내 녀석들은 뙤약볕 아래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고, 계집아이들은 그늘아래서 공기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같이 놀 상대가 없었던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즐거운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서러움이 복받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 내렸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펑펑 울어버리고 말 것 같은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고아원 정문으로 원장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공을 차던 아이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공터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원장의 뒤로 처음 보는 아이가 따라 오고 있었다.
키로 봐서는 내 또래 정도로 밖에 안 돼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원장은 그 아이의 손을 잡아끌더니 나와 서로 인사를 시켰다.
“정희야, 오늘부터 고아원에서 같이 살 민석이다. 둘이 동갑이니깐, 앞으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
더 이상 더위를 견디지 못하겠던지 원장은 이 말만 남기고, 서둘러 선풍기가 있는 원장실로 사라졌다.
원장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민석이가 손을 내밀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반갑다. 나 김민석이야. 앞으로 잘 부탁한다.”
방에서 몰매를 맞은 날 이후 누가 먼저 말을 걸어 주는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서먹함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덥석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응, 그래 반갑다. 나는 박정희라고 해.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
서로 인사를 마친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원장이 사라진 후 다시 공을 차기 시작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 키 큰 애가 여기 대장이니?”
가만히 공을 차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민석이가 입을 열었다.
“응, 나이는 아홉 살인데, 힘이 장사라서 동네에 열 한두 살 먹은 애들도 함부로 못 건드려.”
“음. 그래?”
그 순간 민석이의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깐 앞으로 너도 웬만하면 대장한테 찍힐만한 짓 같은 거는 하지 마. 안 그랬다가는 나처럼 돼.”
내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자, 민석이가 의아한 듯,
“참, 그러고 보니깐 너는 왜 쟤들이랑 같이 공 안차?”
하고 물어왔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올라 거의 울먹이다시피 그 동안의 일들을 털어 놓았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민석이는 내가 이야기 하는 내내,
“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고 대꾸를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나의 긴 하소연이 끝나자,
“짜식 사내자식이 뭐 그런 거 가지고 질질 짜고 그러냐? 볼썽사납게 시리.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깐 걱정 말고 나만 믿고 있어.”
하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이로 보나 덩치로 보나 민석이는 대장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믿음이나 확신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고아원 실정을 잘 모르는 민석이가 행여 사고나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날 저녁 내가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숙직실에 사감이 잠든 것을 확인 하자 신고식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사감들도 이런 관례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귀찮아서 그런지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나와 민석이를 제외한 모두가 대장의 뒤로 가 섰다.
나는 침상 구석에 쭈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민석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장이 기가 차다는 투로 말했다.
“어이, 신삥! 너 이 새끼 빨리 이리 안 튀어와?”
민석이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자리에 이불을 까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뛰어가 그의 그런 행동을 말리고 싶었지만, 괜히 끼어들었다가 내게까지 불똥이 튈 것 같은 생각에 잠자코 구석에 박혀있었다.
“나 참, 어디서 완전 또라이 새끼가 하나 굴러들어 왔구만. 야, 너 이 새끼 귀 먹었어? 빨리 일루 안 튀어와.”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 졌고, 대장의 뒤에 서있던 아이들도 겁을 먹었던지 대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민석이는 진짜 귀머거리라도 된 양, 대장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불 위에 누워 아예 자려고 눈을 감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 이제 죽었구나.’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뒤의 일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으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으~ 내발. 내발. 저 개 씨팔 새끼가 뒈질려고 환장했나? 아, 내발~”
신음하며 침상 위를 구르던 것은 다름 아닌 대장이었다.
어찌된 영문이지 몰라 둘러보니, 민석이가 피가 뚝뚝 흐르는 돌을 손에 쥔 채 살기등등한 눈으로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처럼 돌에 찍히고 싶은 새끼는 앞으로 한 발짝만 나와 봐. 이번에는 대갈통에 바람구멍을 내 줄 테니깐.”
피를 보고 겁을 먹었던지 아무도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던지 대장이 피가 철철 흐르는 발을 움켜잡고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 씨팔 새끼들 뭐하고 있어? 지금 구경만 하고 있는 새끼들은 내가 다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죽을 줄 알어?”
대장의 엄포가 떨어지자 한둘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서는가 싶었으나, 이미 민석이의 예상치 못한 기세에 눌려버린 아이들은 아무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민석이가 주위에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거 잘 봐둬. 그리고 앞으로 나 건드리는 놈들은 다 이 꼴로 만들어 줄 테니깐 알아서들 해.”
그리고는 아직 피가 흐르는 발을 움켜잡고 신음하고 있는 대장에게로 걸어갔다.
대장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만 한쪽 발을 디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민석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을 움켜진 손으로 넘어진 대장의 다른 쪽 발을 내리 찍었다.
슬슬 겁을 먹은 대장이 울부짖으며 이제 그만 해 달라고 빌었지만, 민석이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오른 손, 그리고 왼손을 마저 찍어버리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대장의 비명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침상 위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는지 나를 포함해 지켜 본 아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민석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민석이가 자리에 없었다.
어디 끌려가서 몰매라도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고아원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혼자 공터를 거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런 마음에 얼른 뛰어가니, 민석이가 잘 잤느냐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태평스러운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나는,
“너는 어쩜 이렇게 천하태평일 수 있냐? 어제 그 난리를 치고선.”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민석이는 씨익 한번 웃고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같이 걷다가, 답답함을 못 이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도대체 어떻게 한 거니? 돌은 또 언제 가지고 왔어? 대장이 복수하려고 할 텐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야,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라. 머리 아프다, 임마.”
“미안해. 근데 너 어제 정말 대단하더라. 넌 나처럼 겁쟁이가 아니라서 좋겠다.”
내 말이 뭐가 그리 우스웠던지 민석이가 한참을 웃더니 대답했다.
“아니, 나도 너처럼 겁쟁이야. 단지 안 그런 척 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준비만 잘 되어있다면 겁먹을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자니, 민석이가 말을 이었다.
“어제 일만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어제 밤 분명히 신고식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예상했어. 그래서 미리 주머니에 뾰족한 돌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제 니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대장 녀석이 힘은 셀지 모르지만 머리는 나쁠 거라고 생각했지. 보통 힘으로 대장이 된 녀석들은 자기 힘만 믿고 통 머리를 쓰지 않게 마련이거든. 그래서 녀석을 방심하게 만든 후 한 방에 해치울 작전을 세운거지. 우선 녀석이 무슨 말을 하건 못 들은 척해서 녀석을 내 쪽으로 유인해야만 했어. 내가 그 쪽으로 가면 당연히 쪽수가 딸리니깐 말야. 그리고는 녀석을 방심하게 하기 위해 자리에 누워 자는 척 연기를 했지. 내 눈이 감긴 걸 확인한 녀석은 아무 의심 없이 내 쪽으로 걸어왔고,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나는 기회를 잡아 단번에 돌로 녀석의 발등을 찍어 버린 거지. 그 다음부턴 어제 니가 본 그대로야.”
“너 무지 똑똑 하구나. 어제는 진짜 대단했어. 그런데 너 잠든 사이에 다른 애들이 덮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랬니?”
“사실 그것 때문에 어제 한 숨도 못 잤어. 내가 어제 그렇게 엄포를 놓았지만 한두 녀석은 분명히 내가 잠든 틈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다들 겁을 집어 먹었는지 아무도 노리는 놈이 없더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니 앞으로 한 일주일정도는 매일 낮잠을 조금씩 자둬야 할 것 같아.”
녀석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녀석이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민석이가 내 어깨에 두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꼭 명심해둬.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때려 줘야 할 일이 있거든 어제 내가 한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짓밟아야만 해. 안 그러면, 언젠가 분명히 또 기어오르려고 하거든. 대장 녀석도 완전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복수 같은 건 안 할 거야.”
하지만 나는 대장이 언제고 복수하려 들지 모른다는 걱정에 민석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옆에서 보초를 섰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민석이의 말대로 대장은 복수하려는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민석이와 마주치면 눈을 피하거나 아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대장에게 복수할 뜻이 없음을 알게 되자, 아이들은 민석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굽신대기 시작했다.
첫댓글 민석이와 대장도 고아원에서 만날거 같아요. 저는 왠지 대장도 주요인물일 것 같다는..^^;;
음...케로로님 때문에 스토리를 급수정해야할 것 같네요...^^
헉.. 그렇다면 제가 틀렸나봐요. 왠지 대장이 등장한 반전이 있을거라(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도 안됐는데ㅎㅎ) 제 맘대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 구상 속에 민석의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만 대장은 민석을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수 있죠. 앞으로 더욱 흥미 진진해질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재미있네요^^ 계속 써 주실 꺼죠??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