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창(鄭汝昌, 1450~1504) - 조선시대
(http://www.hygn.go.kr/hamyang/inmul/content.asp?idx=72)
- 공의 호는 일두(一履)이며 자는 백욱,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본관은 하동이다. - 세종32년(1450년)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서 태어났고 연산 10년(1504년) 유배지인 함경도 종성에서 영면 하였다. - 동국 18현이며 조선조 5현중의 한분이신 공은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로써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이며 도학자이다.
※ 본 내용은 정재경이 1987년 저술한 "정여창 연구"를 근간으로 하였습니다.
1. 선생의 가계
ㅇ선조 정씨의 시조인 지백호(知伯虎)는 부족국가이던 삼한시대 진한의 사로육촌중의 수장격이다. 지백호는 경주 동남쪽에 위치한 진지부(珍支部)의 촌장이었으며 기원전 69년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국왕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 3대 유리왕때 진지부가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지백호는 낙랑후로 봉해졌고 5세손에 이르러 동충과 군산 형제가 있었는데 동충에게는 정(鄭)이라는 성씨가 군산에게는 양(陽) 이라는 성 씨가 내려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정씨에 대한 기원설이다 정이라는 성씨는 지백호로부터 동충에 이어 현재 58세까지 계대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는데 신빙성은 희박하며 그 동안 분관하여 28관으로 되어 있다.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 3파로 나누어졌는데 선생은 그중 평장사공파에 속한다. 선생의 8대조 정국룡은 봉익대부(종2품)였으며 7대조 정지연은 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정2품)를 지냈고 묘소는 하동군 적량면 하곡(새우골)에 있다. 선생의 증조부인 정지의 때에 함양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증조부는 고려 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는 종부시의 수장인 판종부시정을 지냈으며 함양땅에 살고있는 하동 정씨의 시조인셈이다 선생의 할아버지인 정복주는 고려말 궁중의 큰 제사때 쓰는 곡식을 관리하는 관청인 전농시의 수장인 판전농시사를 지냈다. 정복주는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으로부터 효행 정명을 받았다. 선생의 가계에서는 대대로 문관을 배출하여 왔으나 부친인 정육을은 무예에 관심이 많아 일찍이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의주통판을 거쳐 함길도 병마우후를 지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다 전사하였으니 조정에서는 한성부좌윤을 증직하고 공신록을 내렸다.
ㅇ후손들 선생은 4남매중 맏이로 태어났으며 둘째는 여유(汝裕)요, 셋째는 여관(汝寬)이며 마지막이 누이 동생이다. 여유는 현감을 지냈으며 여관은 생원이었고 누이동생은 영인군 이순 에게 시집을 갔다. 선생은 아들 둘 딸 넷의 6남매를 두었다 큰 아들은 희직이라 이름했고 직장(종7품) 벼슬을 했으며 현령 방귀화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일찍 죽어 종사를 동생이 맡았으며, 서자로 여산이 있었다. 둘째는 희설이라 했는데 정랑(정5품)을 지냈다. 역시 아들이 없어 사촌동생인 희삼의 아들 언남(선생의 둘째 동생 여관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맏딸은 부사직 최호문에게 시집가서 아들 언청을 낳았으며 그 사위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임호신이다. 그가 관찰사로 있을때에는 선생이 영면한지 45년만이므로 무오사화, 갑자사화에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던 시대였으므로 그에 따라 처외조부인 정여창의 무덤에 비석을 세운 사람이다. 둘째딸은 생원 조효온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를 낳았다. 셋째딸은 이현손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를 낳았다 넷째딸은 설공순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을 낳고 모두 잘 지냈다. 그러므로 선생의 적통을 둘째아들 희설이 이어받고 그는 또 사촌동생 언남을 후사로 삼으니 그가 곧 동지사를 지낸분이므로 동지공이라 이른다. 언남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대민과 수민이다. 대민은 현감을 지냈고 수민은 참봉이었으며 선생에 관한 문헌공실기를 편집하고 화개도를 만들었다. 대민은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홍서라 하였으며 수민은 아들 셋을 두었다 홍서는 이괄의 난때 큰 공을 세웠고 아들셋을 두었으며 큰 아들 광한은 생원이다. 따라서 문헌공의 종사는 둘째아들 희설, 그리고 종손 언남으로 이어져 대민, 홍서, 광한의 순으로 하여 지금 개평의 종가를 지키고 있는 병호에까지 17대를 계승해 오고 있는 것이다.
2. 출생과 성장
선생은 세종32년(1450년) 아버지 정육을과 어머니 경주 최씨사이의 3남 1녀중 맏이로 태어 났으며 어머니 최씨는 목사를 지낸 최효손의 따님이다 공의 호는 일두(一履) 또는 수옹(睡翁)이며 자는 백욱,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선생은 이름을 여창이라 하였는데 그 연유를 보면 나이 8세때 아버지를 따라 의주부로 갔으며 부친이 훈장을 집에 들여 학문을 가르켰다. 당시 명나라의 사신 장영이 집에 놀러왔기에 아들을 소개 시켰는데 선생의 상을 보고 크게 번창하라는 뜻에서 여창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의 결혼연대는 알수없으나 15~6세 되던해에 종실 도평군의 막내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의 손녀이다라고 되어있다 공정대왕은 조선 2대 정종의 시호로서 그 아들중 도평군이 태종 이방원의 등극에 불안하여 1천리밖 서하면 봉전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의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때 전사를 하였는데 함양에서 격전지까지 찾아가 시신을 염습하여 승안동으로 반장하니 왕복 4천리였다 조정에서는 국가를 위해 순절한 사람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관례에따라 군직(軍職)을 임명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선생은 정중히 사양하였다 아버지의 상에 동민들이 고생하였음에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하여 드리기 위하여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줄도 모르고 소를 잡아 대접하였다 이것이 말썽이 되자 어머니에게 도리어 걱정을 끼친 결과가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공은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공이 한번은 술을 많이 마셔 들판에 쓰러져 잤는데 그 어머니가 이를 꾸짖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다. 공이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대왕이 술을 하사하자 어머니와의 약속을 주청하며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부복하자 왕이 허락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의 바램이 있어 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한편 성종의 문치주의에 공감을 하였고 초야의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자 왕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을 보고 진사시에 응시 2등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계속 공부를 하는 유생이 되었다 1486년 공의 나이 37세 되던해 여름에 어머니를 뵙기위하여 내려오던중 남부지방에 돌림병이 도는 것을 보고 급히 어머니를 뵈오니 병중이었다 이에 밤낮으로 병구완을 하였으나 10일만에 운명하니 공이 슬퍼하는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가 없었다 선친의 유택이 있는 승안산으로 출상을 하기로 정하자 승안사의 승려들이 반대를 하였다. 행상에 즈음하여 강물이 불어 건널수가 없게되자 하늘을 보고 통곡을 하였는데 갑자기 강물이 갈라져 운상을 하게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승려들이 하늘이 아는 효자라며 스스로 절을 떠났는데 이로부터 승안사가 폐절이 되었다 공은 3년이 넘도록 죽만 먹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집에 오니 많은 동민이 모친에게 돈이나 곡식을 빌려간 문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동민들이 서운한 마음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모두 태워버려 동민들이 어진자라고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또한 많은 재물을 노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의 학문이 높고 효행이 참되다는 이유로 정3품인 시정 윤긍과 조효동이 조정에 천거했는데 성종이 소격서 참봉을 제수하자 공이 사양하였으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왕의 교지 내용이 "여창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내 지금 눈물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속히 발탁 임용하여 국가에서 선을 정표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하셨다
3. 학문의 연구
ㅇ자신의 공부 공은 어린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중국 진나라 소진(전국시대 6나라의 승상을 동시에 지냄)의 고사를 생각하면서 책상 머리맡에 송곳을 꽂아 머리가 숙여지면 이마가 닿도록하여 공부를 하였다 21세 되던해에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던 이관의(성리학에 정통한자로서 성종대왕이 불러 학문을 물으니 막히는곳이 없었다. 생전에 벼슬을 하지않았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의 문하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23세 되던해에 스승이 더 가르칠것이 없다고 하자 지리산 악양정에서 3년동안 4서5경을 통달하는등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26세 되던해에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두 번째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공의 인격을 완성시켜 평생토록 잊지 못하였다 김종직은 밀양사람으로 부친 김숙자는 야은 길 재 선생의 제자였고 길재는 정몽주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점필재는 정몽주의 학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으니 정여창도 정몽주의 학통을 배운 것이다 점필재의 문하에는 남효온,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표연말, 강 겸, 허 반, 김시습, 조 위, 임희재, 권오복, 박한주등 수많은 당대의 명사들이 수학하였는데 점필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람은 남효온과 정여창, 김굉필인데 그의 문하에서 공과 한훤당 김굉필같은 거유가 나옴으로서 한국 유학사에서 김종직의 위치는 더욱 높아진것일뿐 아니라 유학이 실천유학으로 변하여지는 도학의 기초가 만들어진것이다 40세 되던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학문이 높아 시강원 설서(세자의 스승)가 되었으나 44세 되던해에 설서 벼슬을 그만두고 악양정으로 내려와 후진들을 강론하였으며 악양을 무척 좋아하였다
ㅇ학문의 벗 공은 성품이 단아하고 행동이 신중하여 남과 사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한훤당 김굉필과는 관포지교를 맺어 왔으며 도(道)를 서로 논하고 글을 강론하여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했다 김굉필은 서울 사람으로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한사람은 죽었고 동복형제가 12형제였는데 어려서 다 죽고 혼자만 성장을 한 사람이다 조선조 5현이면서 동국18현인 굉필은 19세에 합천 야로면 순천박씨 집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개울 건너편에 조그만 서재를 지어 한훤당이라 하였으니 그것이 그의 호가 되었으며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찾아와서 문하생이 되었다. 벼슬은 천거로서 형조좌랑까지 4년이었는데 무오사화로 귀양을 갔다 한훤당은 선생보다 4살이 적었으나 두사람의 학문, 생활관이 비슷하여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냈으며 다만 일두는 소극적인데 비해 한훤당은 적극적이었고, 일두가 보수적이라면 한훤당은 진취적이었으며 일두가 온건한 편이라면 한훤당은 과격한 편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정여창과 김굉필이라는 두학의 두쌍벽이 배출 되었는데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김안국, 이장곤등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나 한훤학파를 이룬데 비하여 선생의 제자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두 도학자를 일컬을 때 후세인들이 한훤.일두라며 한훤을 앞에 세우게 된 연유이다
ㅇ도덕으로 사귄 벗 들 - 스승으로 존경했던 사람 : 김종직, 이관의 - 벗 : 김굉필, 남효온, 이심원, 이 총, 이 종, 윤극창, 김일손, 이 목, 허 반, 유효인, 표연말, 윤효손, 조 위, 강 혼, 박한주, 권오복, 이 원, 임대동, 정여해, 권경유, 이종준, 이수공, 양희지, 조 신, 강경서, 박형달, 최 부, 이계맹, 이 주, 정희량, 강백진, 허 반, 임희재, 정승조, 홍 한, 이인형, 강 겸 등인데 대부분이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무오사화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ㅇ문하생 함양에서는 노우명등이 있고 종성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희증과 고숭걸을 두었는데 고숭걸은 진사에 합격한후 학문에 더욱 열중하여 북쪽 변방에서는 처음있는 일이라 하였다
ㅇ두류산(지리산) 유람 - 기 간 : 1489년 4월 14일 ~ 4월 29일(16일간) - 유람일행 : 정여창, 김일손 - 유람경로 함양읍 남문~복골 ~구룡~삼배재~오도재~등구사~금대암~용유담 ~ 엄천사~사근역 (수동)~산음현(산청)~신안역(단성)~단속사~ 오대산수륙정사(시천면에 있던 절)~묵계사 ~상동원사~중산리~ 세존암(칼바위방향으로 생각됨)~법계사~성모사당(천왕봉밑)~ 천왕봉(해돋이구경)~향적사~영신사~의신사~신흥사~화개~ 쌍계사~청학동~불일폭포 ~불일암~섬진강(나룻배로 2일만에 진주도착) ~ 진주에서 밀양에 있는 스승 김종직 선생 을 찾아 감
4. 선생의 도학사상
도학(道學)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인간의 마음을 배우는 심학(心學)이며 행동하는 철학으로 성리학의 바탕위에 자라나는 인간학이다. 즉 도(道) 란 목숨을 걸고 행할수 있는 진리를 찾아 그것에 헌신적으로 종사함으로서 이 세상에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행동 철학인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시대 안향으로부터 들여온 이래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에 의해 이어졌으며 이 시대에는 주로 학문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러다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학파로 이어지면서 훈구학과 시문을 중심으로하는 사장학으로 구분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사장학은 다시 정여창과 김굉필에 의하여 학문을 실천으로 옮기는 도학으로 구분이 되면서 정착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두와 한훤당은 소학과 대학의 학문을 중심으로 도학을 실천하는데 노력하여 후세인들로부터 두선생이 동방도학의 선구자라 칭하여졌다 조선시대의 통치질서를 사대부정신 혹은 사림정신(선비정신)이라고 하며 그 선비정신의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정여창 선생이다 도학정신이 곧 선비정신인데 이는 정정당당하게 생각하며 행동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선생은 인간의 이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신봉했던 학자인 동시에 학문을 실천하는데 힘써 왔다 사람은 우주의 만물 가운데 살고있는 오직 하나의 영적인 존재로 이성적이며 종교적이고 사회적이라는 3가지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사회생활을 아무 탈없이 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의 각자 사이에 지켜야할 올바른 길이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길이 가정에 있어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효이며 국가에 있어서는 충성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선생의 가르침이요 신념이었다 공은 효를 덕행과 인격의 기초롤 보았으며 인간의 모든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는데 이 사상은 조선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5. 안음현감
- 안음현은 조선조 말의 안의군으로써 그 관할 구역은 현재 함양군의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거창군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남상면의 일부였다 -
ㅇ왕도정치의 구현 선생이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성종왕이 성균관에서 경서에 밝고 학문이 높은 사람 1명을 천거하라는 유시를 내렸는데 관에서 선생을 천거하자 왕이 소격서 참봉을 제수하였다 이에 공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윤허 하지않아 할수없이 그 직을 맡았다 그 해(1480년) 12월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니 공의 나이 40이었다 관직생활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시골로 내려가기를 바랐으나 왕의 만류로 다시 세자시강원의 설서로 임명되어 세자인 동궁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세자 융(연산군)의 성격이 포악하여 보람을 찾지 못하고 불안을 예감하여 외직을 자청 1494년 안음 현감으로 부임하게되자 신관사또의 행차를 관속들과 주민이 5리에 걸쳐 길에 늘어서서 맞이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안의 율림방향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오리정으로 바뀌었다 공은 안음으로 내려와 왕도정치를 구현해 보고자 지금까지의 모든 폐단을 불식하고 백성들이 편하고 사람답게 살수 있는 정치를 펴 나갔다 그 정치관이 간단 명료하였는데 도(道)가 없으면 먹을것이 없고 먹을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는 조광조로 이어지는데 훈구파에 의하여 사화를 겪으면서 그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선생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주로 역점을 둔 사항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백성을 내몸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몸가짐을 바로하였다 2.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데 힘썼다 3. 공평한 과세로 백성을 살찌우고 부역을 줄였다 4. 처벌을 위주로 하지않고 범법자를 교정 감화시켜 선량한 백성을 만드는데 힘 썼다. 5. 문교를 진흥시켜 덕치주의의 기반을 확충해 갔다. 6. 백성들이 생업에 힘 쓰도록 하였다 7. 상부상조의 기풍을 진작시켜 서로 믿고 도우며 사랑하도록 힘썼다.
선생은 관직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지방의 관원 수령들이 조세와 부역을 가중하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조세와 부역을 줄이는데 힘 썼다. 이렇게 고을을 다스리자 채 1년도 되지못하여 정사가 깨끗해지고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며 당시의 관찰사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일과 법률 적용에 의문이 있으면 공의 의견을 들어 시행할 정도로 공평하고 정확했다 공이 현감으로 있을 때 시행했던 편의조목은 그 이후에도 그대로 지켜져 안의현의 뚜렷한 규범이 되었으며 관청건물을 새로 중수하면서도 백성들의 재물을 이용하지 않으니 공역이 쉽게 이루어졌다 또한 마을마다 상포계와 두레, 품앗이등을 권장하여 서로 돕고 사는 풍속 을 진작시켰다 공은 주민들에게 경로효친 사상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봄 가을로 양노례(養老禮)를 거행하였는데 이때는 관청의 내외청에서 함께 잔치를 베풀었으며 내청에서는 부인이 직접 노인들을 대접하게 하였고 외청에서는 자신이 직접 노인들을 대접하면서 지방의 실정을 듣는 기회로 활용했다 공은 지역주민 가운데 자녀가 있어도 재물이 없어 오래도록 혼인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관에서 후하게 도와주어 혼기를 영영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공은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보는 여가에 향교에 나가 늘 강론을 하였는데 각처에서 안음향교를 찾는자들이 날로 늘어나 건립한지 20여년밖에 되지 않은 안음향교가 이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ㅇ광풍루의 중건과 제월당 건립 광풍루는 1412년 현감 전우가 건립하면서 선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이전을 하였다가 공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중건하면서 광풍루라 개칭하였고 광풍루기는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광풍루는 중국 송나라때 도학을 처음으로 주창한 주무숙(주돈이)의 인격을 다른 사람들이 "광풍제월"과 같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광풍"은 비가 오다가 개인뒤에 바람이 불면 초목의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번득이는 것을 말하며 "제월"은 비가 온뒤 맑게 개인밤에 밝게 비치는 달빛을 말하는것이니 "광풍제월"은 이 세상에서 더없이 맑고 깨끗함을 뜻하는것으로 선생의 고고함을 이런곳에서도 엿볼수가 있다 제월당은 광풍루에서 서상방면으로 500m정도의 위쪽으로 금호천과 안의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위에 지었다
6. 무오사화와 선생의 영면
ㅇ무오사화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력하였던 자들이 주축이 되는 훈구파 세력과 이에 반하는 영남을 중심으로하는 신진 사림이 형성이 되었는데 그 중심이 점필재 선생이었다 특히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훈구파에 가담한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바 있었으며 낙향시에도 그를 천시하는 일화가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였고 반목과 질시가 계속되었다 점필재가 젊을 때 꿈에 초의 회왕(회왕=의제는 진에 대응하기 위하여 초나라에서 세운왕으로 진시황이 죽은후 진의 수도인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하였으나 후일 항우에의해 죽었으며 항우가 그 자리를 빼앗아 서초패왕이 되었다)이 나타나자 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제문을 지었는데 『조의제문』이다 점필재의 제자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다 기록하였으며 훈구파의 사람들이 이것을 연산군에게 고해 바침으로써 사림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다고 하여 무오사화가 발생된것이며 훈구파의 일족인 유자광은 사적 감정까지 곁들여 사화를 진행시킴에 따라 사림에서 30명 이상의 많은 인적피해를 보게 되었고 선생은 함경도 종성으로 7년의 유배형을, 한훤당은 평안도 희천(후일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변경)으로 각자 유배를 떠나게 되었으며 한훤당은 유배지에서 조광조를 문하로 길렀던 것이다.
ㅇ유배생활과 영면 2달 가까이 끌어오던 무오사화의 국문에서 선생은 장100대에 3천리 밖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며 스승인 점필재는 부관참시, 지리산 유람을 했던 김일손은 대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유배지에서 선생은 공관에 불을 때는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으나 지극히 공손하게 거행하였다. 관원들이 다른 사람에게 시키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나면 학문이 궁벽한 접경지역이라 백성들의 자제를 모아놓고 강학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이희증과 고숭걸같은 제자를 두었는데 변방에서는 처음으로 진사시에 합격하는 진기록을 낳았던것이다 유배지에서 후진교육에 힘쓰면서도 어지러워지는 조정을 걱정하면서 참다운 왕도정치의 출현을 기원했던 선생은 1504년 4월1일(연산10년) 조용히 영면하였으니 공의 나이 55세였다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의 유림들이 슬퍼하였으며 제자들이 2천리길을 운상하여 승안동까지 반장을 했으니 2달이 넘게 시일이 걸려 6월에 승안동에 장사지냈는데 3개월 뒤인 9월에 연산의 모인 폐비 윤씨에대한 사건이 발단이되어 갑자사화가 발생되었다 무오사화때 화를 입은 사림은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귀양갔던 사람들은 거의가 죽음을 당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들은 부관참시를 당하였는데 선생도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한훤당 김굉필은 사약을 받았다.
7. 선생에대한 추모
ㅇ문묘종사 중종반정후 1507년에 예문관에서 무오사화때 화를 입은 사림들의 관작 회복을 주청하여 가산을 회복하고 도승지로 증직되었으고 1517년에 조광조, 정광필등의 주청으로 왕족이 아닌자로서는 최고의 직함인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증직되었으며 그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의 시호가 내려졌다 1568년 성균관에서 조헌(의병대장이며 동국18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음)등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라고 여러달 진청을하였으며 이후 성균관에서만도 16번이나 상소를 올렸다. 1574년 시호를 내리라는 상소에 따라 1575년에 선생에게는 "문헌" 한훤당에게는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 40년동안 끌어오던 5현에대한 문묘종사가 윤허되었다
ㅇ남계서원 서원은 경북 영주의 안향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졌고 왕이 사액을 내렸다 그 이후 점차 늘어 흥선대원군이 철폐령을 내릴때에는 700여개나 되었는데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에도 남계서원은 훼철되지 않았다 1552년 우리나라에서는 2번째로 남계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고을 유생 강익을 중심으로한 30여명의 선비와 당시 서구연, 윤확, 김우홍의 3대에 걸친군수의 도움으로 10년동안의 공기 끝에 완공하였으며 1556년에 왕으로부터 사액이 내려졌고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1612년 중건하였으며 왜란때는 위패를 옮겨 화를 면하였다 이 후 1675년에 동계 정 온을 서서에 배향했고 1689년에 개암 강익을 동서에 배향하였다
ㅇ선생이 배향된 서원록 대부분의 전국 향교에는 공자를 중심으로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공을 받들고 있는 서원은 아래와 같다
- 남계서원 : 함양군 수동면 - 종산서원 : 선생이 유배생활을 한 함경도 종성에 1684년 지방 유림들이 건립하였으며 존폐여부를 확인할수 없다 - 영계서원 : 1579년 순무사겸 의병장인 김성일이 선생의 관향인 하동에 와서 건립하였으며 흥선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 - 용문서원 : 안음현감으로 있을시 지방 유림들이 안의면 봉산리에 1662년 건립하였으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고 지금은 그 유허비만 남아있다 - 도산서원 : 1659년 거창의 사림들이 한훤당과 일두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념하여 산제동에 건립하였으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 - 인산서원 : 1610년 충남 아산의 유림들이 5현에대한 문묘종사가 윤허됨에따라 기념하여 건립하였으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 - 이연서원 : 1586년 합천의 유림들이 한훤당 및 일두선생을 기념하여 야로면에 건립 하였으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 - 경현서원 : 1583년 나주목사 김성일이 5현을 추모하여 건립하였는데 서원철폐시 훼철된 것을 1977년 노안면 영안마을로 이전 복원하였다 - 도남서원 : 1618년 경북 상주시에 당시 관찰사이던 정경세가 지방 유림들과 힘을 합쳐 일두 및 한훤당등을 모셨는데 서원철폐시 훼철되었으나 1992년 복원하였다
ㅇ문헌공신도비 공의 묘지앞에 세워져 있으며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울수 있는 비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거창군 위천사람인 인조때의 이조참판 동계 정 온(남게서원 배향)선생이 지었으며 글씨는 인조때 이조판서 이정영이 지었다 세운지 350년이 지나 풍상에 많이 마모가 되어짐에 따라 1926년 선생의 16대손 정근상이 수동면 승안산 묘지 입구에 신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임훈이 짓고 한말의 명필 윤용구가 글을 썼다. 비각의 옆에는 영조대왕의 왕통을 의심하여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 안의현의 선비 정희량이 동참하여 위세를 떨칠 때 선생의 7대 및 8대 후손들이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공헌한 9충신의 정려를 모신 구충각이 있다
8. 선생에 관한 저술
선생에 대한 문집으로는 증손인 정수민이 편집하고 정구가 편찬한 『문헌공실기』와 근세에 후손들이 편찬한 『일두유집』,『일두속집』이 있으나 선생의 글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공이 저술한 『용학주소』,『주객문답』,『진수잡저』인데 무오사화에 모두 소실되고 없어졌으며 『진수잡저』에 포함되어 있던 세편의 글이 일두 속집에 실려있을 뿐인데 "이기설" "선악천리론" "입지론"의 3편이다 이 글도 선생의 사후 훨씬후에 경상북도 현풍의 곽효근이라는 사람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일두속집에 기재하였을뿐이다
ㅇ문헌공실기 무오사화에 공의 유문이 모두 없어진 것을 선생의 증손인 춘수당 정수민이 다년간 수집하여 만든 것을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으로서 광해군때의 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문목공 정구 가 검증하여 만들어졌으며 이를 근거로 일두집 및 일두속집등이 편찬되었다 춘수당은 왜란때 불타버린 오늘날 함양군지의 모체인 천령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ㅇ화개현구장도 화개도라고 하는데 공이 화개에서 강학을 하던 악양정을 그림으로 남길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증슨인 춘수당 정수민이 서울에 올라가 당시 지평이던 이무(후일 예조판서)에게 일두선생의 소원을 말하자 이무는 선조의 부마이자 명필이면서 좌의정을 지낸 신익성에게 부탁을 하였고 신익성은 그림을 국가의 화공인 이징 이 그리도록 하였는데 폭 56cm 길이 89cm의 두루마리형 그림이다 내용은 악양정을 중심으로한 화개현의 풍광을 그리고 정여창의 섬진강시와 유호인의 악양정시 및 그 발문을 신익성이 쓴것이다 이 그림은 춘수당계에서 가보로 보관을 하여 왔는데 가세가 기울어 산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나락 3섬에 남에게 팔게 되었다. 후일 집안 어른이 이를 알고 크게 꾸짖으며 되찾아 왔는데 보관을 놓고 걱정을 하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ㅇ선생이 지은 시
두류산 유람을 마치면서 섬진강 나룻배에서 지은시 풍포범범롱경유(風蒲泛泛弄輕柔) 사월화개맥기추(四月花開麥己秋) 간진두류천만첩(看盡頭流千萬疊) 고주우하대강류(孤舟又下大江流)
해설 갯버들 하늘하늘 부드럽게 흔들릭도 사월이라 화개땅 보리 이미 익었더라 두류산 천만봉을 두루 다 구경하고 조각배에 흔들려 큰 강 따라가네
선생의 시에 탁영 김일손 선생이 아래와 같이 화답하였다 창파만경노성유(滄波萬頃櫓聲柔) 만수청풍각사추(滿袖淸風却似秋) 회수경간진면호(回首更看眞面好) 한운무적과두류(閒雲無跡過頭流)
해설 창파는 망망한데 노 젓는 소리 부드럽고 소매에 스민 맑은 바람 문득 가을철같구나 머리를 돌려 다시보니 참으로 모습 좋은데 한가한 구름은 흔적없이 두류산을 지나네
선생이 7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남겼는데 일두 집에 있는 것이다.
- 강두시(江頭時) 주마강두발호가(駐馬江頭發浩歌) 가중감의자연다(歌中感意自然多) 료장일곡이현상(聊將一曲移絃上) 요탁청음유백아(遙託淸音有伯牙)
- 해설 강머리에 말을 멈추고 긴 노래를 읊조리니 노래속에 느낀 뜻 스스로 많다 애오라지 한가닥 거문고줄에 올려 멀리 백아에게 맑은소리 의탁한다
- 두견시(杜鵑時) 두견하사누산화(杜鵑何事淚山花) 유한분명탁고사(遺恨分明託古査) 청원단애호독이(淸怨丹哀胡獨爾) 충신지사시미야(忠臣志士矢靡也)
- 해설 두견은 무슨일로 산꽃에 눈물짓나 남은 한은 분명코 옛등걸에 의탁했다 깨끗한 마음과 붉은 마음 어찌 너 홀로이랴 충신과 지사도 맹세코 딴데 가지 않았다
- 안령대풍(鞍嶺待風) 대풍풍불지(待風風不至) 부운폐청천(浮雲蔽淸天) 하일량표발(河日凉표 發) 소각군음 경견천(掃却 陰 更見天)
- 해설 바람 기다려도 바람은 오지 않고 뜬구름만 푸른 하늘을 가리었네 어느날에 서늘한 바람이 일어 뭇 그늘을 쓸어버리고 다시 하늘을 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