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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 |
노조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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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당기순손실 517억 등 심각한 적자상태이다 |
➀ 2010년에도 13.7%의 영업이익률 기록했고, 당기순손실은 이자비용(1,925억 원)과 지분법손실(344억 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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➁ 3년간 수주가 0건일 정도로 조선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서 정리해고 불가피하다. |
➁ 정리해고 위해 필리핀 수빅으로 물량 빼돌린 것이다. 정몽준의원 조차 “3년간 0건은 이해 안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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➂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 |
➂ 정리해고 직후 174억원을 주주에게 배당했고, 경영진 연봉도 올리면서, 정리해고를 하는 것은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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➃ 정리해고 안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줄 모른다. 남은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 |
➃ 젊은 사람 위주로 정리해고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회사를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
쟁점 2 ‣ 사회적 갈등의 확산
✑ 한진중공업 사측은 정리해고 후 파업이 지속되자, 노조 지회와 협의하여 희망퇴직 전환 등을 합의한 후 사주인 조남호 회장이 장기 해외체류를 하면서, 일체의 협의를 거부하여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 영도가 지역구인 김형오 국회의장조차 "한진중공업 사태의 원인은 사주의 부도덕하고 방만한 경영이므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심화, 청년실업 증가 등 우리 사회 안에서 강자독식 구조가 심화되고, 약자의 고통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저항이 김진숙 위원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고,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조직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희망버스에 대해서 사측 등에서는 불순세력의 3자개입이라고 비난하고 있고, 정부 역시 “당사자가 해결할 일”이라는 원론적 입장에 머물러 적극적 중재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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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 보수측 |
노조, 진보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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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정리해고는 기업의 고유권한이므로 협상 대상이 아니다. |
➀ 정리해고는 살인과 다름없는 재벌의 횡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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➁ 이미 노조 지회와 합의했고, 지방노동위원회에서도 승소했다. |
➁ 정리해고에 대한 협상권은 지회가 아닌 산별노조(금속노조)가 갖고 있어 노사합의는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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➂ 시장에 맡겨야 할 일이기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 |
➂ 한국사회가 공동체로서 존립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비롯한 각계의 폭넓은 개입과 중재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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➃ 희망버스는 좌익세력의 3자개입이기에 중단되어야 한다. |
➃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청년실업, 중산층 몰락 등 약자의 고통을 반영하는 아이콘이다. |
※ 최근 조선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민의 62.7%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과 서민층의 몫을 빼앗아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기업의 좋은 실적이 자신의 살림살이에 전혀 혹은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82.1%에 달했다. 경제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대해서도 분배가 더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이 55.2%로 성장을 중시하는 사람(38.5%)보다 훨씬 많았다. 조선일보도 이러한 민심의 변화를 감안하여 대기업의 발상전환을 주문하는 실정이다.(조선일보 2011. 8. 2)
2. 불교적 사고와 해법
1) 한진중공업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기업이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할 수 있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한진중공업 사측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10년동안 반복적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면서, 힘으로 밀어 붙이는 관행을 반복했다. 대규모 파업이 모두 회사 측의 약속 파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노조는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필리핀 수빅만에 세계 최대규모의 조선소를 지어 운영하고 있는 점, 이번에 정리해고한 대상이 주로 젊은 층인 점 등을 이유로, 사측이 결국은 영도조선소를 폐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노조는 물론 상당수 지역민들도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작금의 극한적인 노사간의 갈등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증폭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불교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근본 가치로 여긴다. 다행이 현대 들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는 많이 벗어났지만, 이러한 사고가 인간과 인간으로까지 넓게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번 장마피해에서도 다시 확인하였듯이 자연을 훼손하여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면 그 해는 인간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중소기업, 영세상인, 청년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를 공동체가 돌보지 못하여 파국으로 내몰면 공동체는 피폐되고, 그 피해는 다시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돌아온다.
▸ 2년전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 1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듯이 정리해고 역시 공동체의 근간을 훼손하면서 진행될 정도의 불가침의 권한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필리핀 수빅만으로 조선소의 주력을 이전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국경을 넘어 투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존재 가치는 이윤추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란 노동자들의 일터이자, 지역공동체의 일원이고, 넓게는 국가공동체에서 생산과 소비, 분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에 공동체의 유지에 복무할 책임이 있다. 기업의 해외투자나 이윤추구 역시 국가 공동체가 파괴된다면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의 한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중도적 시각이 절실하다.
▸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등의 책임을 기업가 측에만 물을 수는 없다. 일부 노조는 지나치게 자신들의 이익에 집착하여 귀족화되었고, 노동운동이나 진보진영 역시 비정규직 문제 등에 있어 공정한 해결자로서 국민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자리 문제, 중산층의 몰락, 사회적 안전망의 해체 등으로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배타성이 강화되면서, 우리는 한국사회가 홉스가 말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편한 상태임을 직시해야 한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죽여야 하는 삶은 행복할 수도 없고, 오래 지속될 문명도 아니다. 공부하고, 직장을 찾고, 먹고 자고 입을 거리를 함께 누리지 못하는 공동체는 오래 가지 못한다. 이것은 이념이나 사상 이전에 삶의 문제요, 문명적 문제이다. 지금은 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상호간에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국민적 대타협을 통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지혜로운 해답을 찾아야 한다.
▸ 모든 사회 문제의 해결 주체는 일차적으로 당사자여야 함에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른 구성원들은 3자이니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금과옥조는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세간이 연기(緣起)적 관계임을 애써 부인하는 어리석음이요,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기 쉽다.
상당수의 사회적 갈등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서 3자는 개입하지 말라고 울타리를 치는 경우가 많기에, 공동체가 이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면 강자의 폭력을 묵인하는 것이 되기 쉽고, 이는 다시 약자의 저항을 불러 갈등과 폭력의 되풀이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진중공업 사태는 이미 단위 사업장 문제를 넘어 국가적 과제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김진숙 씨와 노동계는 물론이거니와 정치권, 지역사회, 희망버스 모두 제 3자가 아니라 당사자라고 봐야 한다. 사회적 개입은 불가피한 것이다. 사회적 개입 자체보다는 그 의도와 방법을 갖고 다투는 편이 훨씬 지혜롭다.
2) 불교적 시각과 기본 해법
평화로운 공존은 불교의 이상
사육장 안의 닭들이 쌀 한 톨을 갖고 다툰다. 서로 홰를 치며 쪼아댄다. 몇시간 후면 이제 그들 모두는 도살될 예정이지만, 자기 욕심만 부리고 있다. 우리는 그 닭들이 서로 간에 이익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임을 잘 안다. 영리한 닭들이라면, 쌀 한 톨로 다투기보다는 모두 살 궁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단기적으로 쌀 한톨을 얻어 이익을 누릴지 모르지만, 닭장 안에 사육되는 운명을 벗어나지 않는 한 도살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 이익을 두고 극한의 갈등이 지속되면 모두 불행해진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으로 사라지는 비용이 3백조원이라는 한 민간연구소의 연구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그 비용을 공동체 전체의 복지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다.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이것이 이번 한진중공업 사태에 불교계가 힘을 모아 나서야 할 이유다.
연기적 사고의 사회적 확장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싸움이 지속되는 것을 말릴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먼지 한 톨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했다. 김진숙씨가 농성중인 타워 크레인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다. 한진중공업 노조, 김진숙 씨, 사측, 희망버스, 어버이연합, 언론, 정치, 종교, 사회의 모든 것들은 서로 의지하여 하모니를 빚고 있다. 그 하모니를 당대에 상징하는 것이 타워 크레인이다. 우리는 그 하모니가 좀 더 선량해지고, 좀 더 조화로울 수 있도록 지혜와 자비를 한진중공업에 쏟아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시대적 요구에 화답하는 과정을 통해 본연의 정신을 살찌우고, 사회적 존재 가치를 입증해 왔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종교현대사를 보아도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빈민과 노동자를 돌보며 성장한 개신교, 민주화 과정에서 지식인과 청년학생을 적극 후원하여 성장한 가톨릭의 경험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진중공업이 이미 담장 안 조선소에 국한되지 않듯이 우리 불교 역시 사찰 안에 고립되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의 생활로, 사회적 고통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 세간의 모든 것과 더 깊이 소통할수록 불법은 더욱 멀리 깊게 울려 퍼지게 된다.
불교계의 화두는 생명, 그리고 평화
부처님은 탄생게에서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겠다(三界皆苦 我當安之)고 서원하셨고, 전법을 떠나는 제자들에게도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하셨다. 뭇생명이 차별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고통을 덜어주는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불자들이 갖춰야 할 최고의 수행덕목이자, 대승의 보살행이이다.
우리가 김진숙 씨의 목숨을 건 항거에 화답해야 하는 이유는 특정집단의 편을 들고, 이념적 투쟁에 복무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오늘날 중생들이 처한 고통을 보듬어 안으려는 것이다. 약자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어 있는 그의 생명을 살림으로써 우리 사회가 만민이 공존하는 생명평화의 큰 길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구세대비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 생명평화에 있다.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대지도론>에는 “빈궁박복한자는 자활 할 수 없어 재물 때문에 십불선을 행하게 되니, 보살은 가난한 자, 고독한 자를 멸시하지 않고 가엾게 여겨 자식처럼 여기라”고 하였다. 하물며 지금은 중산층까지 나락으로 떨어져 사회적 고통와 불안이 가중되는 시절이다. 김종인 전 경제수석은 “양극화로 중산층이 점점 무너져 중산층의 의식과 저소득층의 욕구가 같이 결합할 때 사회적으로 어떻게 폭발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비정규직이 근로자의 절반에 육박하고, 청년실업자가 1백만명에 달한다. 정리해고가 곧 사회적 파산선고를 의미하는 한국사회에서 지금은 ”가난과 불행을 몰아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 가난과 불행을 몰아내기 위해 소박한 실천을 해야 할 시기이다. 시장이 돌보지 않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이야말로 불교도들의 책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회적 약자를 돕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회에 널리 퍼져 갈 것이다.
공정한 중재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약자를 돕되, 그 방식이 일방적으로 편을 들거나 강자를 배척하는 식의 자세여서는 안된다. 불교는 이렇게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뿌리지 않을 훌륭한 사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원효스님은 화쟁사상을 통해 세상과 불법 모두를 회통할 수 있는 훌륭한 길을 제시하였다. 이 때의 화쟁은 무조건적인 화합이 아니라, 화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잘 제거하여 쟁론의 장으로 상대를 끌어내고, 그 장에서는 차이를 잘 드러내되, 공정한 중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현재 한진중공업 노사가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상호간의 불신 때문이다. 노조 측은 “이번 정리해고가 영도조선소를 폐쇄하기 위한 단계적 조치”라고 의심하고 있고, 사측은 “기업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노조가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여 양보할 의사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 이 수면 밑의 불신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지금처럼 수면 밑에 놔두어서는 양측 모두에 도움이 되지않는다. 양측의 심중에 있는 불신의 원인들을 털어놓고, 서로 절충점을 모색하다보면 얼마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기업에게는 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고용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고, 노조에게도 마찬가지로 직장의 유지를 위한 양보와 타협을 요구할 수 있다. 양자 모두에게 폭력적인 방식의 문제해결 방식과 결별하고 즉각 대화의 장으로 나올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겠지만 말이다.
불교계가 이 문제의 해법을 굳이 제시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경험도 부족하고 아직 지혜도 부족하다. 하지만 화쟁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불교계의 힘으로 얼마든지 시도해 볼만한 일이고, 그것이 성사되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무아의 정신은 상대에 대한 배려로 외화되어야 한다.
내 뜻이 옳으므로 꼭 그렇게 관철시켜야겠다고 하는 고정관념은 상대를 극복대상으로 보게 하고, 우리를 옭아매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우리는 실체적 자아라는 관념을 잘라버림으로써 남을 배려하고, 너와 나의 고통을 연결된 것으로 보게하여 주는 무아의 가르침을 사회에 널리 알려야 한다. ‘나’가 옅어진 자리에 인정을 베푸는 관용적인 태도를 채워야, 그 자리에 배타성과 공격성은 자리 잡을 수 없게 된다. 사측이든 기업이든 ‘나의 주장’만을 앞세워, 상대를 탓하는데 머물지 말고 먼저 스스로 분노하는 마음을 줄이고,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 ‘나’라는 틀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 사회가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세상은 착하게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후손들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주어야 한다. 무한경쟁 대신 나눔과 보살핌을, 이윤추구 대신 지속가능한 경제를, 폭력적 갈등 대신 관용과 평화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철저히 개인에게 전가된 무한의 경쟁, 두려움과 탐욕이 빚어내는 강자독식의 문화 대신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연기적 책임을 강화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불교인 스스로부터 방관과 무관심에서 벗어나자. 사회적 고통, 공업(共業)을 해결하기 위해 소박하면서도 용기있는 실천에 나서자. 이렇게 고귀한 마음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사회적 고통은 줄어들고, 불법은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