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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의 인생은 고난의 역사이다.선수 생활을 항상 위협하는 부상,감독과의 갈등,그리고 대표로써의 부당한 취급.
연재 초반은 자라난 내력으로부터 프로 데뷔,유벤투스입성 까지를 더듬는다.
로베르토 바죠는 금년(1999년) 2월달,32세가 되었다.
32세--본래대로라면 은퇴뒤의 생활을 생각하기 시작해도 좋은 연령이다.
그것이,여전히 바뀌지 않고 "발랄"한 플레이를 계속하고,아쭈리에도 선발되고 있다.
현재(99년)의 인테르에서는,어쨌든 "TURNOVER"(이탈리아에 있어서의 외래어로“교대”또는“2 Platon 시스템"을 의미한다)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있지만.
후반15분,상대가 지쳤을 때에 로비를 투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할정도가 된것이다.
"SOVRANO"(군주),라파엘로(르네상스의 화가)등많은 별명을 가지는 로베르토·바죠는,그만큼 임팩트가 강한 플레이어이고,지금도 위대한 플레이어 임에는 틀림없다.
로비의 축구 스타일은 이 수년간의 칼치오의 "로보트화"에 의해 크게 손상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로보트화",즉,피치상에서는 피지컬적인 축구가 요구되는 한편,감독의 전술을 촌각을 다투며 실행하는 것이 요구되는 현상에 있어서는,로비의 독특한 맛"환타지아"를 발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로비의 축구 인생은 "이야기"의 반환구조 이다.
축구 선수에 있어서,"라이벌"은 필요한 것이지만,로비에게 있어서는 상처가 축구인생 에 있어서의 최대의 라이벌임은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18년간의 프로 생활에서 많은 상처에 울었다.
그러나,로비는 그 때 마다 상처를 극복해 왔다.
상처 뿐이었지만 감독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서도 극복해내었다.
"CODINO"(코디노=포니테일의 의미.로비의 별명)의 인생은 확실히 실의와 부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바죠의 부친, 프로린드는 전직축구 선수였다.
(카르도뇨의 아마츄어팀에서 GK로 뛰었었다.아마츄어의 대회에서는 많은 타이틀도 획득했었다.)
프로린드는,축구를 하고 있었다고는 해도,근본적으로 자전거광이다.
(자전거의 로드 레이스는 축구와 함께 이탈리아의 인기 스포츠)
아버지 프로린드는,당연히,로비가 싸이클 선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위해,로비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즉시 자전거를 타기시작했고,전속력으로 달렸다.
물론,목적지는 카르도뇨의 축구 연습장소 였지만.카르도뇨는 인구8300명의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지금,그 8300명 전원이 로베르토 바죠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다.
로비는 9 세때 카르도뇨의 축구 하위조직의 최연소조에 들어가게 된다.로비의 생활은 어디까지나 축구가 중심이며,축구연습이 없을 때만 숙제를 하는 그런 사내 아이였다.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그 무렵의 선생님인 '보린'(여성) 은 말하고 있다.
「만약, 교과서가 둥글다면, 로비는 대과학자가 되어 있었겠지요.」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카르도뇨의 아마츄어팀에서 로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듯 뛰어난 플레이를 연발한다.
쥬니어의 감독 피에로 제네레는 곧바로 로비의 재능을 인식했다.
피에로 제네레,그를 단순히 시골팀의 쥬니어의 감독이라고 경시해서는 안된다.
일찍이,밀란의 죠니리(하위조직의 하나. 13세의 그룹) 에서,유명한 지아니 리라와 함께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1시합에서 6 골을 넣는 (카르도뇨승 7-0 ) 선수는 단지 한사람밖에 없다,모로는 즉시 쥬리오 사이니의 팀에 로비를 데려가 말했다.
사이니는,60년대,라네롯시의 왼쪽사이드백,당시엔 비첸자 죠니리의 감독이다.
비첸자는 군소리없이 로비 영입을 결정했다.
카르도뇨의 제네레감독에게는 훌륭한 선수를 길러 주었음에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그리고 카르도뇨의 팀에는 50만리라가 지급되었다.
1981년,로비의 입단으로 비첸자의 죠니리는 일약 활기에 넘치게 된다.
물론 로비는 순조롭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성장을 스톱시키는 요소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바죠에게 "예상할 수 없는 장애"가 그에게 최초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것이다.
1982년 2월, 네토주 선발팀 vs 리그리어주 선발팀에서,바죠는 왼쪽무릎에 이상을 느꼈다.
진단의 결과,반월판을 다친 상태였다.
로비에게 있어서는 최초의 실의에 다달은 것이었지만,새로운 기쁨을 알게된 시기이기도 했다.
여름 어느날,로비는 스쿠터를 탄 여성을 마주 쳤을때,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 여성에게 한 눈에 홀린(?) 것이다.
얼마간의 갈등뒤,로비는 그녀에게 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녀(안드레이나)는 로비의 구애를 결국 받아들였고,두사람은 약혼반지(다이아)를 나누어 끼게 되었다.
그리고,7년간의 교제를 하게 되었고,1989년 7월 1일날,로비와 안드레이나는 결혼한다.
이야기를 피치(운동장)로 돌릴 것이다.
16세의 때,비첸자의 감독 마쪼아는 로비를 톱팀에 올렸다.
그리고,1983년 6월 5일날,로비는 프로 리그 데뷔를 완수했다.
(당시 비첸자는 세리에 C)
그로부터 2 년후,죠르지감독의 지휘아래,로비의 비첸자는 세리에 B 로 승격을 완수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이미 로비의 명성은 전국구가 되어 있었다.
프로빈의 비첸자에,이탈리아내의 빅 클럽에서 오퍼가 쇄도했다.
프로빈에"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안의 팀이 로비를 데려가기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삼프도리아의 만토니회장은 고액의 이적료를 제시했다.
루치아노 모찌(현재는 유벤투스의 GM )는 토리노에 데려오기 위해서 로비를 집요하게 쫓고있었다.
베로나의 키안판회장은 로비를 거의 영입했다고까지 말했다.
비첸자의 회장 Ruskin은 유유히 "인생 최대의 비지니스 찬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끝끝내,피오렌티나의 회장 폰텟로가 Ruskin이 바라는 액을 제시했다.28억리라,세리에 B 의 선수로는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가장 원했던,만토니회장이,이미,35억리라의 수표를 준비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너무 싸게 판게아닌가 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편,유벤투스도 40억리라를 제시했지만,모두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
1985년 5월 3일날,대리인 안토니오 카리엔드를 중개인으로서,이미,계약은 조인되고 있던 것이다
이탈리아내의 클럽들이 쟁탈전을 펼친 결과,피오렌티나로 입단한 로비의 앞에 "인생 최대의 라이벌"인 부상.
그러나 로비는 곤란을 겪는 상황과는 달리 빛을 발한다.
로비의 인생은 기복으로 가득차있다.
세리에A 의 단골팀에로의 입단은 로비에 있어서 큰 스텝업이고,그 꿈은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런데,꿈은 환상으로 끝났다.큰 부상이 로비를 습격한것이다.
계약 2일뒤의 5월 5일날,비첸자는 리미니와의 어웨이전을 싸우고 있었다.
비치토에 있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게임이었다.
상대의 감독이,이미 "예언자" 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던 아리고 사키였기 때문이다.
이 시합에서도 로비는 골을 넣었다.
그러나,골의 기쁨은 순간이었다.
몇분뒤에는 피치에 가로놓인 로비의 모습이 있었다.
상대 선수와의 컨택트로 넘어진 것이다.
"우슬십자인대 파열",의사의 진단에 피오렌티나 프런트는 동요했다.
다음시즌의 계약은 이미 완료되어 있는 상황이다.
로비의 쇼크는 말할 수도 없었다.
오라(피오렌티나)와 로비의 주변에서는 같은 질문이 몇백회나 반복해졌다.
「로비는 그전처럼 되는 것일까? 」
로비 신화에게 첫번째의 수술. 그 수술은 성공했다.
계약도 순조롭게 나아갔다.
그리고,1986년 1월29일,로비는 오라의 유니폼을 입고,처음으로 오라의 일원으로서 피치에 서 있었다.
코파 이탈리아의 우디네세 전이었다.
그러나, 로비의 움직임은 본질이 빠져있고,최상의 컨디션이 아님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게임감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오라 프런트는 로비를 아렛죠의 카니발 토너먼트(프리마뷰라의 국제 대회)에 보냈고,수시합 출장시켰다.
결국,로비의 오라 첫년도는 코파 이탈리아에서의 1시합 출장만으로 마쳤다,세월은 그렇게 1년이 흐른것이었다.
1986년 9월 21일은 로베르토·바죠에게 있어서 기념할만한 날이 되었다.삼프도리아전에서 세리에A 데뷔 (피오렌티나2-0 삼프도리아)를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세리에A 에 데뷔했기 때문에,그의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릎은 항상 소용돌이치고 있던 것이다.
그 해의 12월18일,로비는 다시 반월판의 수술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생테티엔에서 브스케교수의 집도에 의한 수술이 행해졌다.
수술은 성공이었다.
1987년 5월10일,로비는 부활했다.
베르셋리니 감독은 나폴리전에서,로비를 안토니오니(현재오라의 GM)의 날개에 배치한 것이다.
눈앞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었다.
로비는 최고의 플레이를 했다.
상대인 마라도나와 아군인 안토니오니가 희미하게 보여 버릴 정도로 로비는 빛나고 있었다.
피에조레는,이윽고 로비가 안토니오니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1987∼88시즌,로비는 시즌 개막직후부터 톱클라스에 끼어들게된다.
9월20일,오라는 산시로에서 밀란과 싸웠다.
상대의 벤치에는 "천적" 아리고 사키.
로비는 사키와 미라니스타의 그“웅장함”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오반니·갓리와 드리블을 주고 받은 뒤,GK 를 조소하듯 볼을 띄워 골을 빼앗은 것이다.
이 순간,로비는 사키에게 복수를 완수한 것이다.
이해의 로비는 최고 호조였다.
로비는 그것을「불교의 덕분」이라고 표현했다.
불교가 로비에 생명력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축구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에,로비는 불교(창가학회)에 출회.그리고,동양의 종교가 로비에게"불가의 힘"을 준 것이다.
한편에서 불교에로의 개종은 큰 편견을 불렀다.
가족으로부터도 때로는 차디찬 눈총을 받아야했다.
그러나,불교가 로비에 평정심을 준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축구 선수로서는,체자레·말디니로부터 U-21 소집의 전화가 있었고,곧이어 이번엔 디노·조프로부터도 올림픽 대표팀에로의 소집명령.
그리고,마침내 알제리오·비치니의 A 대표에도 불리운 것이었다.
1988∼89 시즌도 로비는 톱 컨디션에 있었다.
보르고노와의 투톱으로 골을 양산(시즌15골),오라에 UEFA컵 출장권을 가져왔다.
바죠는 완전하게 플로렌스(피렌체)의 영웅이 되었다.
플로렌스 시민은 로비를 더 없이 사랑했다.
1989∼90 시즌, 오라는 안정성을 상실한 경기로 시종 일관했다.
가까스로 세리에 B 로의 탈락을 피했지만,플로렌스 시민들에게 있어서 큰 불만이 남는 시즌이었다.
그러나,로비는 호조를 유지했다. 고군분투하고,17골을 넣었다.
그리고 맞이한 UEFA컵 결승,오라는 유벤투스의 앞에서 굴복해버린다.
유벤투스..이것이,로비의 축구 인생 최대의 소동의 키워드가 되는 것이다.
1989년 1월,피오렌티나회장의 훌라오·폰텟로가 폭탄 선언을 했다.
「만약,바죠가 떠난다고 말한다면,유벤투스에 양도할 생각이다」
이 발언에 플로렌스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플로렌스 시민은 항의로 맞섰다,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봉기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 한지도 모른다.
어쨌든,도시는 패닉상황이 된것이다.
로비는,「플로렌스를 떠나는건 말도 안된다.」라고 말하며 시민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폰텟로는 실제로 유벤투스의 아니리명예 회장과 몇번이나 교섭을 갖고 있었다.
아니리 회장이 로비를 강하게 바라고 있던 때문이다.
아니리정도의 거물에게 개인적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에는,로비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비는 괴로워했다.
그리고,유베와 로비사이에,또 안토니오·카리엔드(일본에 둥가, 스킬라치등을 데려온 대리인)가 엉켜있었다.
4월,이제,로비의 유베행은 주지의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아직 리그전은 남아 있고,UEFA컵도 있었다.
그리고 5월17일,끝끝내 로비의 이적이“정식”발표되는 날이 온 것이다.폰텟로 회장은 로베르토 바죠가 이적금 160 억리라로 유베에 이적하는것을 발표한 것이다.
각오하고 있었다고는 해도,플로렌스 시민에 있어서는 쇼크인 사건이었다.
플로렌스 시민은 폭도화 되었고,도시 전체가 이틀간 카오스(혼란)에 빠졌다.
이틀간에 걸쳐서,폰텟로의 자택은 시민에게 포위되었다.
시민"봉기"는 끝나고,부상자50명,기소36명,구치54명이라는 숫자만이 남았다.
섬세한 로비에게는 큰 쇼크였다.
분노가 수습되지 않는 오라팬은,코르챠노(플로렌스 교외)에 있는 아쭈리의 합숙소까지 들이닥쳐,로비에대한 항의를 반복했다.
로비는 뒤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만,그 때 만은 정말로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전쟁) 같았습니다. 그렇지만,내가 나쁜게 아니었죠.
그 때는 내일밖에 없었던 겁니다.나도 괴로워했습니다.」
플로렌스가 외치는 목소리는,이윽고 고장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의 대환성에 뭍혀갔다.
월드컵에서 바죠는 할만큼 했다.
굳이 말한다면,비치니감독이 제3차전의 체코슬로바키아 전까지 바죠를 기용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는 말해도 준결승의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바죠는 스타팅으로 나왔으므로,바죠가 좀 더 나왔었더라면 이라고 말하는건 물론 아니다.
이기든 지든 어차피 지나간 대회였다.
바조와 비에리
1993년,Ballond'Or(유럽최우수선수)에 선정되고,유럽넘버원 플레이어의 훈장을 손에 넣은 로비.
그리고 맞이한 월드컵 미국 대회.
아리고·사키와의 다툼,실의,그리고 부활.너무 극적인 결말.
로비의 축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다.
1990∼91시즌, 유베는 감독에 지지 마이프레디를 맞이해 리그전에 임했다.
마이프레디와 로비의 관계는 대단히 양호했고,유베는 이탈리아 슈퍼컵에서 나폴리에 대패(1-5)했지만,곧바로 형편을 되찾고,시즌의 가운데 지점에서는 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그해의 시즌은 확실히 삼프도리아의 해였고,유베가 삼프도리아의 등을 보면서 달린 것은 여기까지였다,그 뒤는 완전하게 갈려버렸다.
마침내,28년만에 유럽컵에로의 출장권조차 잃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로비자신은 33시합에 출장,14골을 넣었고,그만한 활약을 보였다.
이 시즌,유베와 오라(피오렌티나)와 로비에 있어서 인상에 남는 게임이 있다.
1991년 4월6일날,유베가 플로렌스에서 어웨이를 치룬 날이다.
게임 전반,로비는 거의 볼을 잡아보지 못했다.
그리고,로비가 겨우 볼에 접촉한 순간 (패널티 에어리어내),휘슬이 울렸다.
로비에게 있어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PK 이다.
운명의 PK..「누가 찰꺼야? 」이 순간,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혼돈의 와중,누구인가가 고함쳤다.
「지지, 네가차! 」"지지"데·아고스티니가 PK 지점으로 향했다.
짧은 조준거리로 부터의 슛을 GK 가 막았다.
스탠드는 박수와 함성으로 대소동이 일게 되었다.
10분후,마이 프레디감독은 로비를 피치로부터 밖으로 내보냈다.
쓸데없는 트러블을 막기 위해서이다.
피치를 나서서 라커룸으로 계속되는 터널로 향하려고 하는 로비.드라마는 그때일어났다.
발 밑에 오라(대표색인 보라색)의 muffler가 떨어져 있던 것이다.
로비는 그것을 줍고,목에 대었다.
로비는 터널의 안으로 사라질때까지,그사이에,플로렌스의 로비로 돌아온 것이다.
이 행위가 이번엔 유벤투스에서의 논쟁을 부르게된 것이었다.
유벤투스에 있어서는 이것은 명백한 배반행위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1991∼92 시즌,마이프레디는 사임,보니페르티회장과 공히,죠반니 트라파토니가 감독에 복귀,유베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로비의 생활도 바뀌었다.
아리고·사키가 로비를 대표에 부른 것이다.
1993년, 로비는 프로 선수 생활처음으로 타이틀을 손에 넣는다.
UEFA컵의 타이틀이다.
결승(vs보루지아·도르트문트)의 첫번째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활약, 바죠에게 있어서는 처음 얻는 타이틀이었다.
그러나,트라파토니와의 사이에는 전술을 둘러싼 골이 패이고 있었다.
포워드의 최전방의 포지션이 좋은가,미드필더가 적당할까,바죠의 포지션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그런것은 꼭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왜냐하면,무척 바라고 있던 "상"을 이윽고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세리에A 100골(유베vs제노아,1993년10월)을 넣은뒤, 파리에서 특별한 뉴스가 날아온 것이다.
그것은 로베르토 바죠가 1993년의 유럽 최우수 선수에 선출되었다는 뉴스였다.
11년전에 파올로 롯시가 수상한 이래 처음으로 뽑힌 이탈리아인의 바론·도르(유럽최우수선수)이다.
비로소,로비는 유럽 넘버원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1993∼94시즌은 로비에게 있어서 불만족인 성적으로 끝났다.
그리고,월드컵 미국 대회가 시작되었다.
예전부터 그래왔듯 아쭈리는 출발부터 채인다.
첫경기인 아일랜드전에서 패배를 당하고,예선 리그 탈락의 위기 상황,노르웨이와 대전했다.
GK 팔류카에http://cafe.daum.net/santacruzgoalgoal게 레드 카드가 제시되어 벤치는 동요했다.
마르케쟈니(GK)를 피치에 넣기 위해서는 누구 든지 빼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를 뺄까?아리고·사키는 로베르토 바죠를 지명했다.
「머리가 돈게 아닐까!」이탈리아 국내에 큰 논쟁이 벌어졌다.
「아리고·사키는 바죠에게 복수하고 있다.바죠가 대회의 히어로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라고 이탈리아 국민은 분노했다.
로비를 사랑하는 아니리(유베 명예회장)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TV로 멕시코전을 보았지만,시합전의 로비는"흠뻑 젖음의 산토끼"같았다.」
"CONIGLIO BAGNATO”(코닐리오·바냐토, 흠뻑 젖은 산토끼)는,이후로,로비의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바죠는 굴욕적으로 엎드리는 일 따윈 없다.
그는 반드시 소생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는 곧바로 부활했다.
나이지리아전,Spain전,그리고,Bulgaria전에서 로비는 이탈리아를 승리로 이끌었다.
온 세상의 축구팬중 누구든지,대회의 히어로인 로베르토 바죠의 이름을 들었다.
이탈리아는 결승에서 브라질과 대전했다.
그러나 바죠는 녹초가되어 있었다.
당연하다. 혼자서 싸워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결승전은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행해졌다.
0-0 으로 시합 종료, 그리고,PK전.
프랑코·바레시가 선축한뒤,마지막으로 로비가 PK를 차게되었다.
볼은 무심하게도 골대와는 상관없이 빗나가고,상황은 끝이 난다.
TV카메라는,묶은 슈즈를 목에 늘어뜨린 로비의 소낙비같은 눈물을 온 세상에 비추었다.
그러나,로비는 이대로는 끝나지 않다.
아직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때문이다.
새로운 시즌에 새로운 얼굴.유베 프런트는 일신했다.
보니페르티는 추방되고,벳테가,지라우드,못지의 삼두체제가 되고 있었다.
벤치에는 마르첼로·립피가 앉았다.
립피는 선수 전원에게 눈을 번뜩거렸다.
그리고,여름의 합숙시부터 "바죠에 대한 의존으로부터의 탈피" 를 계속 말했다.
선수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거야.'라고 괴상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바죠가 없어도 이길 수 있는 팀을 만든다는 것이 립피의 생각이고,이것은,이윽고 증명되게 된다.
이 시즌,로비는 플레이에 자기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앗리와의 콤비 플레이가 이루어 지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 해,립피와 벤트로네(피지컨트 코치)가 앗리를 부활시키고 있던 것이다.
로비는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1994년11월27일,파드전에서 파울을 당한 뒤, 상대 선수의 과실로 그의 오른쪽 무릎을 아프게 한다.
로비는 모든 종류의 치료법을 시도했다.
그러나,메스를 대는 것만은 완고하게 거절했다.
바죠는1995년 3월12일까지 유베의 피치에 설수 없었다.
그리고,4달,긴 침묵을 깨고,로비는 말했다.
「5월달에 계약 이야기를 하고 싶다.계약기간을 정하지 않아서는… 」 그 무렵,화술좋은 유베의 명예 회장 아니리는 로비를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를 예로 들었다.
"로비의 플레이를 접할 때,흡사 라파엘로의 canvas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그것이,로비의 축구다"
아니리가 이 정도까지 로비의 플레이에 심취하고 있어도,유베는 무슨 방법으로라도 로비를 만류하려는 방법론은 취하지 않았다.
아니리의 동생,운벨트는 유베의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벤투스는 클럽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그 예를 나타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부상으로부터 복귀한 바죠는 좋은 플레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처음으로 스쿠데토를 획득하는 데에 도달한다.
그러나 "바죠 방출”의 소문은 이탈리아내부를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본에 가는 것일까?인테르에 이적하는 것일까?
이탈리아내에서 바죠의 거취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5월29일, 인테르의 회장,마시모 모랏티는 보도진을 앞에 두고 언명했다.
「아니리회장과 의논,바죠의 양도에 합의했다. 뒤는 그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바죠가 인테르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고?
네랏즈로의 셔츠를 입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선수가 있다면,놀랍고,불쾌한 일이다.」
그로부터 몇 일후,바죠는 모랏티에게 전화한다.
그리고,자신을 영입하고 싶다고 말해 준 모랏티회장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뒤,밀란으로의 이적을 결정했음을 것을 전한 것이다.
「곧바로 타이틀을 얻고싶다」라는 것이 밀란 선택의 이유였다.
그리고,1995년 6월1일날, 유베와의 이별을 발표했다.
「유벤투스는 새로운 보강을 하기 위해서도 나의 이적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베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좋게 대해 주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인테르가 나를 바라고 있던 것은 뒤에 알았습니다.
인테르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렇지만,지금은 밀란의 일원입니다.
2배의 조건이 제시되어도 결단을 바꾸지 않습니다.」
7월달 상순,팬의 강한 반대의 목소리는 있었지만,바죠의 밀란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밀란의 갓리아니(부회장)는,「유벤투스와 합의에 달했다.이적금의 액은 당초의 예정보다 싸게 결정해 주었고,그것에 2년 분할로 주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밀란이 유베에 지불한 액은 210억 리라.
로비는 아르헨티나의 별장에서 사냥을 즐긴 뒤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보도진에게 말했다.
"할 수 있으면 유베에서 현역 생활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베는 나에 대해서는 그러한 태도를 취해 주지 않았다."
전격적인 밀란으로의 이적. 거기서도 로비는 평온을 찾지못했다.
카펠로의"관리 축구"와 싸우고,후임 타바레스,아리고사키와의 확집.
그리고 신천지,볼로냐에서의 활약,프랑스 월드컵에서의 고투를 지나며 끝끝내 바죠는 어린이 시절부터 동경하던,네랏즈로(인테르)의 10번을 손에 넣는다.
밀란에서의 첫해는 카펠로 감독 밑에서의 플레이였다.
로비는 사비체비치에게 10번을 양도하고, 18번으로 플레이했다.
카펠로는TURN OVER를 밀란에 도입했다.
턴오버를 이용해 리그전용과 컵전용의 팀을 만들어,선수의 피로를 경감시킨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로비는 때로는 리그전의 게임에서 제외되었다.
조지 웨아가 밀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로서 골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로비의 천재적 플레이로 이긴 시합도 적지는 않았다.
로비를 가장 괴로워하게 한 것은 카펠로의 "관리"축구였다.
로비는 그전까지 항상 스타였지만, 카펠로 밑에서는 다른 선수와 같이 "근면"이 생명인 노동자가 되는 것을 요구받은 것이다.
군조로부터 병졸로의 떨어짐을 만족할수 없는 로비는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감독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2개째의 스쿠데토를 획득.
시즌 종료뒤,카펠로는 밀란을 떠나고, 대신에 오스카르 타바레스(우루과이인)가 밀란의 감독에 취임했다.
로비는 타바레스에 말했다.「좀 더 스페이스를 주세요! 」
1996∼97시즌,로비는 호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8월중 리그의 시즌 매치에서 골을 뽑은 로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타바레스,그가 나에게 주어 준 역할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최고군요.톱아래의 포지션이 내게 제일 맞는것 같습니다.'
바죠가 말하는 톤은, 전성기의 로비의 플레이가 돌아온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행운은 이번에도 길게는 계속되지 않았다.
밀란의 DF진이 붕괴하고, 실점을 거듭했다.
타바레스는 팀 밸런스 붕괴를 수비의 혼란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밸런스의 붕괴가 로비의 플레이에 기인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비는 시모네의 후보에 올랐다.
로비는 컵대회(챔피언스리그) 에서 롯소네이로에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 후의 소동의 계기가 된것이다.
바죠는 산시로에서 포르투전에 선발로 출장하지만, 2-3으로 진다.
타바레스감독은 삼프도리아전의 전날,바죠를 스타팅 멈버로부터 뺀다고 발표했다.
'바죠는 복사뼈가 아픈 상태입니다.또한,나의 결단은 어디까지나 전술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바죠는 큰 가능성을 숨긴 플레이어입니다만, 현시점에서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수비의 밸런스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밀란은 삼프도리아에게 고배를 마시고, 타바레스 vs 바죠논쟁이 매스컴을 자극하게 된다.
9월17일의 코리에레 젯로·스포르트지는「바죠는 밀란을 넘어섰지만 무엇인가 있다」라고 말하는 타이틀로 라커룸의 분쟁을 기사화했다.
'왜,내가 나쁜가? 무슨일이든 벌어지면 모두 나의 탓인가? ',로비는 푸념했다.
베를루스코니는,「밀란의 슬럼프의 책임이 바죠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로비를 변호했다.
「로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이탈리아내에서 로비의 심경에 주목했다.
하지만,로비의 입에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었다.
그리고,수주 뒤,로비는 이타로 구찌(당시의 구에린편집장)에 그 심정을 밝혔다.
「나는 타인에 대해 언제나 존경의 심정을 가지고 접해 왔습니다.
그렇지만,그 담보가,질투이고,악의에게 가득 찬 배반이었으므로.
타인은 나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지금. 그리고,자기들이 화가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바꾸어 가는 겁니까?
그렇지만,진정한 나는 바뀌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생각으로 살죠!
그러므로,비판을 받거나, "겁쟁이" 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내게 "흠뻑 젖은 산토끼"란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어린이 시절부터 병원을 드나들던 내게"라이온의 용기"란 없는 거겠죠.
그렇지만,인간으로서의 용기는 가져 지금 이러한 중상(중상모략)에는 나라도 화내요.
나는 불량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정당하게 이루어진 비판은 달게 받아냅니다.
그렇지만,불합리한 비판에 어떻게 대응 하라는 말입니까?
관자놀이에 총탄을 들이대고 내 입으로 말하란 겁니까? 」
그 후 바죠는 예테보리전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승골을 넣고,코파·이탈리아의 비치전에서는 귀중한 골을 넣었다.
그리고,심경을 보도진에게 밝혔다.
「포르투전에서의 패전 이후의 2주간은 지옥의 생활이었습니다.
밀란도 나도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지금은 완전하게 슬럼프를 벗어났어요.
나의 독특한 맛을 피치에서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영웅과 현재의 영웅..바조와 지단
로비에게 평정의 시기가 돌아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슬럼프의 밀란에 업을 끓인 베를루스코니 회장이 움직인 것이다.
타바레스를 해임하고,신감독을 맞이한 것이다.
운명의 못된 장난인지,거기에는 아리고 사키의 모습이 있었다.
사키는 로비를 후보요원으로 기용한채 게임에 임했다.
밀라니스타도 매스 미디어도 분노를 표현했다.
「바죠는 페라리예요! FIAT 500 가 아니예요!」
바죠도 후보선수가 된 자신을 한탄하게 되었다.
97∼98 시즌을 맞이할때,또,베를루스코니가 움직였다.
사키를 해임하고, 역시 "천적"인 카펠로를 감독에 귀환시킨 것이다.
카펠로는 즉시 바죠를 이적 리스트에 실었다.
파르마의 탄트회장이 재빨리 흥미를 나타냈다.
그러나,사키의 "제 1제자”안첼로티 감독이 난색을 나타냈다.
"바죠를 선택하면 난 옷을 벗겠다"는 협박에 탄트는 로비영입을 단념했다.
로비에 손을 뻗친 것이 볼로냐 회장이었다.
우리에리 감독도 로비를 환영했다.볼로냐에서 바죠는 소생했다.
득점왕을 다툴정도로 골을 양산해 냈다.
일약 볼로냐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행운의 시기는 길게 계속되지 않다.
1998년 1월18일,우리에리 감독은 유벤투스를 맞이한 홈게임으로 바죠를 스타팅 멈버로부터 제외했다.
바죠는 우리에리로부터 분노를 폭발시켰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에 둔 아쭈리에서도 바죠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체사레 말디니는 감독 취임 당초, 바죠를 아쭈리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델·피에로 중심의 아쭈리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바죠를 빼버린 것이다.
체사레는,「아쭈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노동자"며,팬터지(fantasy) 스타가 아니다」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결국,이탈리아 국민과 매스 미디어가 바죠를 후원하고, 월드컵에로의 길은 열렸지만, 체사레가 의지한것은 끝까지 델 피에로였다.
<"세계의축구리그,선수"카페에서 "아주리"님의 글>
여기까지만 글이 올라 와 있네여 뒷 이야기는 제가 쓰겠습니다
체사레가 의지하고 아주리대표팀의 선수들마져 지지한 델 피에로는 챔피
언스리그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해 과연대표팀에서 한경기라도 치룰수있
을까하는 의문을 나타내게됩니다.
말디니 감독밑에서 한차례도 A매치를
치루지 못한 바죠는 결국 97-98시즌 볼로냐에서 보여준 예전의 모습과
예전히 그를 지지하는 이태리의 많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결국 아주리
의 푸른 유니폼을 입게됩니다.
하지만 이때도 이태리 국내팬들에겐 상당
한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요즘 대표팀에서 델피에로와 토티가 그러했듯
이 등번호 문제였죠.
10번을 달지 않은 바죠의 모습을 상상할수 없었던
팬들은 바죠의 인터뷰를 보게됩니다.대표팀에 든 자체로 만족할뿐 등번호
에 연연하지 않겠다.델피에로에게 양보하겠다는 내용이죠.그렇게 등번호
문제가 해결되고 부상이 여전히 낫지 않은 델 피에로를 대신에 월드컵
예선1차전인 칠레와의 경기에 비에리와 투톱으로 나와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특히 막판 페널트킥을 직접얻어내 골을 넣으므로서 다음날
전세계언론에 대서특필이되었죠 '4년전 악몽을 스스로 씻어내다'이런
기사였죠 그리고 월드컵에서 델피에로와 번갈아가며 출전하며 여전히그
는 판타지스타라는것을 보여주게됩니다.마지막 프랑스와의 경기때도 첫
번째승부차기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켰죠.
그리고 월드컵이 끝나자마자인테르유니폼을 입게됩니다.그가 어렸을때부터 동경한 팀의 유니폼이죠하지만 여기서도 쟁쟁한 후배들에 밀려 서브멤버로 활약하게되죠.하지만5게임연속골을 넣으며 그는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합니다.그렇지만 벤취에 앉아있는일이 늘어자나00-01시즌 결국 스스로 이적을 요청하게됩니다.갓 세리아A로 올라온 약체 브레시아로 이적하게되죠.
이유는 단한가지02년 월드컵에서 다시한번 못이룬 우승을 이루기위해서죠 브레시아는바죠를 내세워 선전하게 되고 01-02시즌 초반선두로 나서기도했으며 바죠는 초반 득점1위였죠 다들 월드컵에 당연히 바죠를 데려가야한다며 난리였지만 트랍감독은 여전히 토티와 델피에로라인에 그가 낄자리는 없다며외면하게됩니다.이태리 대표팀이 헝가리와의 조예선 마지막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경기장의 모든팬들이 바죠를 외치며 그의 발탁을 지지했죠.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약3개월간 리그에서 떠나있게됩니다.그리고 복귀한 2월 파르마전에서 다시 그는 부상을 입게됩니다 축구선수로서 가장치명적인 십자인대파열.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다들 했지만 바죠는 병원에서 나오며 인터뷰에서 '아직포기하지 않는다'는 말로 팬들에게 다시 돌아올것을 약속합니다.그리고 4월말 축구선수로서 믿기지않는 2개월반만에의 십자인대회복 특히 그의 나이35살을 감안한다면 실로대단한것이라 할수 있죠.그리고 복귀전 20분동안 2골.이태리 언론은 바죠의 복귀내용을 톱기사로 다루며 대표팀 복귀를 지지했지만 결국 트랍은그를 외면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담게됩니다.
바지오선수는 인생이 부상의 연속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