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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전쟁을 통해 번영하지 않습니다. 그건 해야 해서 하는 것이고, 단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걸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골다 메이어 |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사무엘상 17장 4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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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가나안은 둔화한 경제성장률의 문제를 안고도,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으로 불평등과 체제 불안을 억누르며 서서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사이, 세계의 정세는 심상치 않게 돌아갔습니다. 미국의 듀이 행정부를 끝장내는데 일조한 일본 전쟁은 동일본이 살짝 유리한 상태에서 1952년 4월 종전되어 휴전선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국경이 서쪽으로 살짝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미국은 제멋대로 재무장한 일본의 군부가 붕괴하는 틈을 타 관료독재 정권을 세우고 신념형 극우를 숙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사누마 이네지로, 호소카와 마사타케, 시게노부 스에오, 미시마 유키오 등이 영향력을 상실하거나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는 서일본 내에서 반공투가 서서히 힘을 잃고 극좌 권위주의 테러 조직인 ‘일본적군’이 창설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본에서는 반공투가 명맥을 유지하지만, 기성 사회주의 세력은 자기들끼리 승전의 과실을 나눠 먹느라 바빴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 전쟁에 휘말려 있던 프랑스는 의외의 선택을 결정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빠른 철수’를 결정한 것입니다. 17도선 이남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괴뢰국인 베트남국을 놔두고, 프랑스군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이라 자칭한 국가의 영토에서 매우 빠르게 철수합니다. 훌륭하고 신속하게 철수작전을 지휘한 라울 살랑은 드골 다음가는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 되었으며, 철수한 병력은 프랑스 본토, 즉 유럽 프랑스와 알제리에 배치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법한 사건 또한 존재했습니다. 압둘라 알하심이 암살되고 새로이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이 된 뒤 국회의원 선거를 여는 등 개혁적인 행보를 보였던 트란스요르단의 탈랄 국왕이 정신이상자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친영파 관료인 타우피크 아부 알후다는 총리로서 임시 대권을 장악하고, 탈랄을 폐위한 다음 그 아들인 후세인을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으로 즉위시킵니다. 총명하지만 젊은 후세인은 개혁정책을 유지하지만, 철저한 친영 중립국의 자리를 유지하여 가나안과의 재접근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시마 가문이 지배하는 아라비아 국가 간의 우호 관계는 유지되었습니다.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는 48년도의 선거에 맞먹는 ‘개판’이었습니다. 루즈벨트 계파가 사실상 소멸하고 트루먼조차 힘을 잃은 뒤 민주당은 주권민주당에 휘둘리는 포퓰리즘 정당화되었으며,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공산당 몰이에 동참하던 듀이를 몰아내고 전쟁영웅인 아이젠하워를 대선후보로 추대하였습니다. 주권민주당이 대선후보로 올린 아들라이 스티븐슨 2세는 흑인민권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듀이 행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순전히 개인의 인기만으로 대선에서 신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존 스파크먼이 이끄는 민주당이 전부 장악하였으며, 아이젠하워는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여 통치하는 한편 ‘공화당에도 루즈벨트가 있었다’, ‘상식과 정의로 복귀할 때가 되었다’라고 주장하며 테오도어 루즈벨트 시대의 정책을 되살립니다.
1953년 1월에 열린 가나안 대표회의 2대 총선거에서는 대체로 1대 선거와 유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활력의 당이 자리를 더욱 굳건히 굳히고, 공산당이 분트의 지원으로 상당히 선전하여 결과적으로는 진보당까지 아우르는 좌익 빅텐트 정부가 유지되었습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많은 영향력을 가진 정계 원로로써 남았고, 활력의 당 대표였던 메이어 야리가 국무총리로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좌익의 성공은 우익 극단주의의 최후의 저항을 낳았습니다. 자유의 당은 선거에서 의석이 줄어들며 내홍에 빠졌고, 당이 너무 온건해졌다며 탈당한 일부 인사들이 분트 지부 및 소련 대사관에 대한 폭탄 공격을 시도하려다 사전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체포 과정과 체포 결과는 물론이고 이들의 허술한 계획, 부실한 장비 준비 등이 대서특필되며 ‘외로운 늑대 일부’의 공격 시도라는 게 밝혀져 소련-가나안 외교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자유의 당에도 단기적 영향은 없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결국 자유의 당이 극단주의에 매몰되어 몰락하고 정당이 해산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소련의 외교적 난국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소련의 위성국 중 유고슬라비아를 유일하게 능가하는 대국이자 1919년 독일혁명과 좌파공산주의의 후계자라 자칭하는 독일사회주의공화국, 일명 동독에서였습니다. 유명한 친소파였던 발터 울브리히트 독일공산당 부총재가 하인리히 라우 국가주석 및 빌헬름 차이서 내무보안상에 의해 실각 및 체포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울브리히트가 민족 볼셰비즘에 경도되어 쿠데타 시도를 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민족 볼셰비즘은 고의로 왜곡한 레닌주의의 냄새가 짙게 나 동독과 소련과의 외교관계가 경색됩니다. 좌파공산주의자들의 특성상 소련이 미국을 적대하는 것보다 동독이 미국을 적대하는 것이 더 심해, 이 사건이 미국에 이익이 되지는 않았으나 후일에도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한편, 집권 5년 차에 위기가 찾아온 소련의 최고지도자 라브렌티 베리아는 흔들리는 입지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사수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국방인민위원에서 사임해야 했으며, 그 자리는 베리아의 새로운 정적인 미하일 수슬로프의 계파인 군수인민위원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영전해 차지합니다.
미국의 경우 오히려 외교적 전략을 과감히 전환하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석유를 국유화하려는 민족주의자인 이란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수상에 대한 매카시즘적인 편견과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3년 8월 모사데크를 쿠데타로 실각시키는 대신 오히려 과감히 그와 이란을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모사데크와 이란은 열렬한 친미 국가로 변신하며, 이란의 석유로 큰 이익을 챙기던 영국은 경악에 빠졌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은 바로 다음 달인 1953년 9월 스페인과의 외교 정상화 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고의로 언론에 폭로하여 국무부에서의 매카시주의자들의 힘을 빼고 민주당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프랑코 총통은 졸지에 유럽 최악의 고립국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장은 없었습니다.
1954년 중후반에는 미국을 휩쓸던 공산당 몰이, 일명 매카시즘이 끝장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진두지휘하에 매카시를 규탄하는 결의안이 공화당의 주도로 어렵게 통과되고, 매카시를 받아들였던 주권민주당 계파는 매카시를 가차 없이 토사구팽하며 재빨리 손절매하고 당권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유대계 자본의 영향력이 살짝 회복되고, 매카시즘의 대표 피해자 중 한 명인 게오르그 브라운은 미국 중서부의 오지로 이동해 자신만의 교회를 세우고 추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 서독은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인 NATO에 정식으로 가입하지만, 새로이 창설되는 서독군-일명 독일연방군은 공격 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제한된 자위 병력일 것임을 천명합니다.
이 중 라틴아메리카의 국가 중 하나인 과테말라에서는 의외의 일이 일어났는데, 미국이 민주사회주의 정권을 이끌던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을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과테말라로 운송되던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는 반품되었고, 아르벤스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실행합니다. 반자본주의적 좌파로써 남미를 여행 중이던 젊은 의사인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미국의 파격적인 지원을 보고 깜짝 놀라, 과테말라의 성공을 지켜본다는 명목으로 눌러앉았습니다.
8-1. 붉은 제성인의 날
한때 마사다를 이끌었던 이츠하크 스테인베르크가 부인을 사별하고 급격하게 기력이 약화되어 공식 활동을 자제하는 동안, 마사다의 일원들은 내각 일부로써 스테인베르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잠한 듯싶었던 아랍 세계는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이집트 혁명 때 프랑스의 목표물 1번으로 존재감을 뽐냈던 알제리의 독립운동가 ‘아메드 벤 벨라’가 그 중심인물이었습니다. 1954년 11월, 아메드 벤 벨라는 이집트 왕국의 수도 카이로에서 ‘아랍인의 목소리’라는 바트당 계열 방송을 통해 알제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그가 소속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일명 FLN은 알제리 곳곳에서 프랑스 군경을 공격하며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반응은 격렬했습니다. 급진사회당을 비롯한 프랑스의 좌익 집권 세력은 갈피를 못 잡는 공산당을 제외하면 극우와 드골주의 세력에 지지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FLN을 적극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알제리-프랑스의 통일된 정체성을 주장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영웅으로 불리던 라울 살랑 장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수많은 진압군이 알제리로 향했습니다.
FLN의 구성조직 중에는 아랍사회주의 바트당 알제리 지부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코민테른처럼 아랍지역을 포괄하는 ‘국제 바트당’적인 체계와 신념을 가지고 있던 각국의 바트당들은 FLN에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는 ‘반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는 미·소가 인정하는 세계의 흐름’이라고 주장하며 FLN을 지원하였고, 중국은 이를 묵인했습니다. 소련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중동지역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가나안에도 시선이 쏠렸습니다.
가나안 지도부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엄연한 열강이자 페니키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한 프랑스와 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알제리 지원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카람을 비롯한 일부 좌익인사만이 FLN 지원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가운데,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지난 인도차이나 전쟁 때만 해도 프랑스를 지원하던 미국이, 알제리 문제에서는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고 UN에서 기권표를 던지는 등 외교정책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더욱더 침묵을 지킬 뿐이었습니다. FLN이 반제국주의 좌익세력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의아한 상황이었고, 마사다의 조사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의 좌익을 지원했다가 이집트가 중립화된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았다고 인지하고 있었고, 알제리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 상황에 대비한 미지의 ‘컨틴전시 플랜’ 또한 준비 중이었습니다.
가나안 지도부의 의견은 갈렸습니다. 알제리 사태가 연장되어야 가나안에 유리할 것이란 의견, 알제리 독립군을 친미로 만들자는 의견 등 온갖 의견이 난립하는 가운데, 알제리 전쟁 자체는 프랑스 정부에 아직은 유리하다는 분석 결과 또한 전해졌습니다. FLN은 무척이나 인지도가 높았지만, 군사적으로는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며 친불 극우단체가 FLN 가담자를 찾는답시고 민간인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등의 전쟁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토론과 논의 끝에, 결론은 내지 않고 먼저 미국과 입장을 같이하여 프랑스를 규탄하고 스페인을 몰래 끼워 넣어 미국을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자는 주장이 채택되었습니다. 가나안 대표는 UN에서 프랑스를 규탄하였고, 프랑스의 극우 인사들이 이에 반박한답시고 홀로코스트 관련 망언을 하며 국제적인 평판을 스스로 깎아 먹는 동안, 공작이 진행되었습니다. 세우타와 멜리야를 보존하고 싶었던 스페인국과, 알제리를 지켜야 하는 프랑스는 서로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구 스페인 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탄압 중단과도 같은 상식적인 일도 논의되는 꽤 의외의 일도 있었지만, 결국 협상의 중점은 양국의 북아프리카 영토의 유지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개입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였지만, 미국을 ‘어떻게’ 개입시키냐는 게 문제였습니다. 프랑스의 전쟁범죄를 막고 알제리 통치를 합리적으로 선회하는 대신 FLN 진압을 미국이 돕게 하자는 방안, 알제리 독립 세력을 미국이 전면적으로 지원하게 만들자는 방안이 회의장에서 논의되었고, 미국의 프랑스 지원 의견이 상당한 지지를 얻었음에도 결국 미국의 FLN 지원이라는 공작방안이 결론으로 채택되었습니다.
프랑스-스페인 합작 시도에 대해 미국이 격분하는 동안, ‘반공을 한다고 파시즘과 손을 잡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아이젠하워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어르고 달래느라 힘을 빼는 대신 FLN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FLN에 ‘사회민주주의와 혼합경제’를 추구하면 전후 경제복구를 도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FLN은 순전히 2차대전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의 이름값 때문에 이 메시지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는 소련의 ’컨틴전시 플랜‘의 정체였습니다. 친소파였던 프랑스 공산당의 모리스 토레즈 총비서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한 뒤, 새로이 선출된 임시 과두지도부는 ‘분열될 수 없는 단일한 프랑스는 오직 자코뱅의 후예이자 파리 코뮌의 계승자인 프랑스 사회주의만이 가진 정신이며, 반제국주의와 알제리 반란을 혼동하는 것은 사회주의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한 건강한 애국주의에 대해 위배되는 것이다. 쇼비니즘과 민족주의, 봉건주의에 맞서 프랑스 공산당도 투쟁에 합류할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발표하고, 내각 참여와 알제리 진압 지지를 천명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은 신규 당원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1920년대-30년대 SFIO 혹은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가 후일 파시스트로 전향했던 프랑스 좌익 파시스트들이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원들은 ‘나치 돌격대는 속은 공산당이고 겉은 파쇼인 비프스테이크더니, 우리는 겉은 공산당이고 속은 파쇼인 이들이 넘친다’라면서 자조하였고, 좌익 파시스트들의 대표로는 프랑스의 주체적 공산주의 노선을 주장하던 피에르 클레멘티가 지도권을 잡습니다.
프랑스는 이 직후 미국을 규탄하고, NATO에서의 즉각적인 탈퇴 논의를 시작하는 등 미국으로부터의 이탈을 시작했습니다. 알제리 전쟁이 점점 격화되는 가운데, 냉전의 향방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8-2. 반둥 회의
한편,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써 세계무대에 데뷔할 채비를 하는 중화민국이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3세계 회의’를 열 것이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2차대전을 이끌었던 탕성즈 총통의 후계자로서 정식으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덩옌다는 이 회의의 성공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중국의 혈맹인 버마와 인도, 스리랑카와 파키스탄은 물론 가나안과는 꽤 밀접한 관계가 된 이집트도 참가를 표명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와 동독을 비롯해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국가들 또한 참가 여부를 고민하는 가운데,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꽤 공을 들이던 가나안은 정식 초청국이 되었습니다.
소련은 이에 대해서 크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등의 ‘우당’들은 ‘레닌 시대에 우리도 삼민주의 혁명을 찬양했었다’라며 베리아 정부가 중국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반대로 수슬로프를 필두로 한 보수파는 ‘우리의 적은 사회주의의 적’이라는 가치관을 내세웠습니다. 베리아를 비롯한 최고 결정권자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본래 미국의 견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소련 지도부의 정책이 반공주의 극우를 배격하고 ‘상식과 정의를 추구’하는 아이젠하워의 등장으로 그리 성공하지 못하면서, 일단은 반둥 회의를 건드리지 말고 놔둬 보자는 의견도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지도부는 중국이 ‘아직은’ 패권국가가 아닌 점을 고려하고, 소련 지도부의 여론도 완전한 반대나 규탄이 아니라는 점을 이용해 회의에 참여하는 대신, 회의 규모를 반대로 키워보기로 했습니다. 이집트 혁명 당시 중국의 경고를 떠올린 가나안 지도부는 ‘우리가 회의 참가국을 늘려보겠다’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냈습니다. 중국은 흔쾌히 동의했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한 번 더 남겼습니다.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위험할 때 은근슬쩍 피하는 '그늘막'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오.’라는 일종의 포부이자 경고였습니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이란을 비롯한 체급과 국력이 상당한 국가들과 이란과 인도네시아 같은 인구 대국이 참가하게 된 반둥 회의, 즉 ‘아메리카-아프리카-유라시아 회의’는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가나안 지도부의 참가국 확대 시도를 비롯한 여러 작전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소 여론이 대중적인 가나안의 인민이나, 친소 정치권 등은 가나안이 이 회의에 꽤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지원하는 것을 의아하게 느끼기는 했지만, 유의미한 반대 세력이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일한 문제점은 소련이었습니다. 소련 정보국은 뛰어난 정보력을 통해, 가나안이 반둥 회의가 소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흘리려 한 것을 역으로 간파하였습니다. 베리아와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 최고지도부는 논의 끝에, ‘지켜보자’라는 결론을 내리며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외무상 장보쥔이 ‘사상과 정치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똑같을 필요가 없고, 똑같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가운데 반둥 회의는 성공리에 마무리됩니다. 미국, 소련, 심지어는 중국조차도 반둥회의가 친중 블록이 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요. 이탈리아는 NATO 가입국이고 이란은 친미 국가이며 인도와 중국은 국경분쟁까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성공적인 시도’와 ‘향후의 기반’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미국은 오히려 이 회의의 개최를 틈타 회의 참가국을 ‘우리도 반제국주의를 지원한다’라는 명목으로 자금력으로 구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의 결과를 본 소련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특히, 자신들이 패망시켰던 서독이 자위 병력이라지만 군대를 창설하고 NATO의 협력국으로 지정되자, 소련은 더는 이 모든 것을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진두지휘로 서부 유라시아의 친소국가들을 아우르는 ‘부쿠레슈티 조약’이라는 군사동맹 조약이 창설되었으며, 친소국가들도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일하게 군대가 없는 국가는 동독뿐이었습니다. 한편, 서독과 동독 모두 정식 군사 병력이 없는 데다 국제적 군사동맹에 정식으로 참가하지 않자, 이미 사망한 스탈린이 주장했던 ‘독일 중립화 통일안’, 일명 ‘스탈린 노트’가 다시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8-3. 중동조약기구
물론 반둥 회의의 결과는 ‘한때의 열강’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비록 친영 세력인 하심 가문이 반둥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는 영국은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국이 묵인하는 가운데 영국은 한때 추축국이었던 이란과 자신들을 지지하는 하심 가문령 아라비아, 파키스탄, 무스카트-오만 술탄국 등을 더해 바그다드를 중심지로 한 ‘반소 군사동맹’을 창설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METO라는 이름부터가 이는 NATO와 SEATO를 뒤이어 만들어지는 소련 포위망의 일부라는 것을 암시하는 가운데, 가나안은 이에 대해 몇 가지 사안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하심 가문령 아라비아가 METO에 가입한 뒤 친소중립 사회주의 국가인 가나안에 대한 적대 여론을 부추겨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사동맹의 거점기지가 가나안의 동부와 남부에 생기는 것이나, 소련이 METO의 창설에 격렬히 반발하며 가나안을 부쿠레슈티 조약기구에 참가시키려 한다든지 하는 예측들이었습니다. 소련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공작에 집중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METO에 반응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기대였으니까요.
가나안 지도부는 한때의 추축국이자 친미인 이란이 왜 METO에 가담하려는지 여부부터 조사하였습니다. 간단하게도, 이는 미국의 부추김이었습니다. 석유 국유화를 지지해준 미국에 대한 지지여론은 이란 내에서 무척이나 높았고, 이란이 이러한 미국의 부추김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논의와 협상이 진행되며, 이 METO 관련 사안은 이전의 다른 공작안에 비해 ‘훨씬’ 어려우며 그 후폭풍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이 지원하는 군사동맹을 제멋대로 뒤틀고 흔든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거니와, 소련이 지난 반둥회의 관련 공작을 눈치챘던 것처럼 미국 또한 가나안의 공작을 눈치챌 가능성이 존재했으니까요.
일부 가나안 내 강경파는 페니키아 등지에서 세를 불리는 좌익 파시스트 정당인 ‘사회민족당’을 지지해 바디아 내에 쿠데타를 일으켜 바그다드를 반영국가의 거점으로 만들어버리자는 급진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마사다의 일원들은 이에 대해 ‘반소 군사동맹을 대놓고 엎으면 세력균형이 깨지는 게 아니냐’라고 주장하였지만, 강경파의 의견은 간단했습니다.
‘가나안에 중요한 외교적 균형이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을 엎어야만 가능한 거라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아니었나?’
이는 가나안이 추구하는 중립이란 게 ‘왜 추구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유지되어야 하는지’, ‘최후까지 지켜야 하는지, 지킬 수는 있는지’와 같은 꽤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의견이었습니다. 이 METO 공작의 위험성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지요.
강경파의 ‘경고’가 있었지만, 가나안 지도부는 중립 외교를 좀 더 유지하는 노선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몇 번에 달하는 공작안의 수정 끝에 가상의 바빌로니아-이란 통일안을 만들고 하심 가문령 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전쟁 위기를 부추겨 METO를 파투 내는 공작은 성공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석유자본의 힘을 얻은 시아파 보수혁명주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아직 심각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가나안 지도부에는 예상한 부분도, 예상치 못한 부분도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METO를 대신해 균형의 추를 맞출 목적이었던 가칭 ‘레반트 경제블록’은 이집트, 이란과 아랍국가 대부분이 참가하는 거대 연합체가 되었습니다. 친미 국가인 이란이 참가하며 정치·외교적 공동체로 발전할 가능성은 0%가 되어버렸고, 가나안은 이란이 석유자본으로 블록의 주도권을 뺏어 가지는 않을지 걱정할 처지가 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성공’이었습니다.
강대국들의 반응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영국은 중동에 대한 군사적 옵션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공석이었던 국무장관을 극렬 반공주의자 존 포스터 덜레스가 다시 차지하여 ‘듀이 외교 노선’의 부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경제블록 가입 천명 후 친위쿠데타를 시도한 페니키아 정부를 지원하여 사회민족당의 파괴를 지원하였고, 소련은 최초의 소련제 수소폭탄을 이란 근처에서 터뜨려 이란의 바빌로니아 합병안을 무산시켜버렸습니다.
결국 METO 안은 완전히 엎어지고 파괴되었습니다. 레반트 블록은 세계 최대의 석유생산 경제블록이 되었고, 미국의 기업들이 막대한 지분을 가지기는 했어도 블록의 출현 자체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공작을 인지한 미·소는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나안에 최후통첩을 날리자는 것이었죠. ‘우리와 함께 서던가, 우리에게 맞서던가.’
9. 영원한 원수, 영원한 친구
한편, 가나안이 오래도록 미루어오며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 또한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바로 전쟁의 잔해 위에서 꿈틀거리며 부활하는 독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1919년 혁명의 유산이라고 믿는 독일사회주의공화국, 즉 동독은 가나안 측에 외교문서를 보냈습니다. 자신들을 독일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하고, 그 대가로 홀로코스트 및 각종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가나안에 대한 각종 기술 및 경제 제안을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동독의 제안은 가나안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나안 정보기관은 이 정보가 민간에 새지 않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여러 인사에게 ‘동독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다른 국가들의 입장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대표적인 친소파였던 하카람은 과감하게 소련에 ‘왜 동독이 이런 제안을 하는가?’라고 물어보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리둥절해진 소련은 ‘어느 독일의 제안이냐’라고 반문한 다음, 서독의 서독-가나안 외교 정상화 방책 가안이라는 문서를 보내주었습니다.
문서의 내용은 가나안과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홀로코스트와 각종 나치의 범죄에 대한 ‘인도적 차원에서의 보상’을 완료하고 서독과 가나안이 국교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카람이 이 문서를 동독에 흘리면, 동독은 같은 제안을 한 번 더 보냈습니다. 즉, 동독은 서독의 이러한 시도를 미리 눈치채고 가나안 측에 선수를 친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내 친소파들은 동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동독에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하기 위해 서독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자는 하카람의 제안은 반려되었습니다. ‘보상’이라는 망언으로 점철된 금액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 자체가 동독에 잘못된 신호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게 근거였습니다.
하카람과 친소파는 소련 측에 이 모든 것을 공개하고 ‘동독이 정상 국가화를 추구하려 한다’라는 추측을 보냈지만, 소련의 답변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대인이 가나안에서보다 ‘더 많이 사는’ 국가가 두 곳 있었습니다. 5백만 명이 거주하는 미국과 3백만 명이 거주하는 소련이고, 그중 소련은 홀로코스트와 나치의 범죄의 피해국이기도 했습니다. 즉, 동독의 ‘홀로코스트 및 범죄 배상’의 대상은 가나안뿐만이 아니라 소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소련의 방침은 간단했습니다. 어차피 동독은 좌파공산주의라는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미국이나 중국과 손을 잡을 수는 없고, 후일 경제력을 길러 이탈하는 것이나 고민할 것이니, 그렇다면 막대한, 청산할 수 없는 채무를 동독에 지우면 해결될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서독이 나치 청산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동독은 이를 거부할 수도 없었죠.
소련이 가나안과 독일 간의 관계를 중개하지 않은 이유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가장 큰 피해 민족인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는 가나안이 홀로코스트가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독일과 접촉하리라 보지는 않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가나안 내 일부 인사들은 이란을 매개로 위장회사를 세워 서독의 정보를 빼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나 서독에 대해 할 수 있는 행위는 많지 않았습니다. 서독이 나치 청산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는다면 서독과의 수교나 협상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한편, 가나안 지도부는 점점 더 혼란에 빠졌습니다. 동독은 이러한 가나안 수교 계획 및 나치 범죄 보상안을 특별히 숨기지 않아,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이 계획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사다의 일원들은 가나안이 최대한 중립을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면 배상금 같은 것은 포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 했지만, 가나안 지도부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이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이 친소진영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은, 가나안이 다른 중동의 대국을 공산화하는 도구로써 사용된 다음 버려질 것을 우려한 것이었고, 제헌선거에서부터 친소정당이 제1당을 차지했음에도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가나안이 중립을 지킨 것은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이 창설된 레반트 블록조차도 가장 최근에 내전이 끝난 그리스가 가나안의 1.5배의 경제 규모를 자랑했고, 중동의 패권은 석유 자금력을 가진 시아파 벨트가 가져갈 가능성도 컸습니다. 결국, ‘중립을 지키다 이란에 경제가 종속됨’이라는 결말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동독과의 수교에 핑계를 대기 위해 서독의 우경화를 지원한다는 방안까지 잠깐 나온 가운데, 결국 가나안 지도부와 마사다는 이 모든 것을 원점에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 의견을 묻자는 결정 또한 내렸습니다. 가나안의 시온주의 지도부의 다수는 유대인 핍박의 피해자는 많았으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는 많지 않았으니까요.
팔레스타인 유대인 사회가 ‘차라리 모두를 끼워 협상하는 것은 어떻겠나’라는 의견을 낸 것이 해결의 실마리였습니다. 가나안 지도부는 과감하게 서독, 동독을 비롯한 지역에 국가가 아닌 ‘독일인을 대표하는 단체’와 ‘가나안을 대표하는 단체’ 간의 회의를 제시했습니다. UNICEF의 창립자이자 비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노르웨이인 오드 난센이 회의 의장으로서 회의를 준비하고, 세계 유대인 대회나 분트 같은 조직과는 차후에 새로운 회의를 열기로 한 가운데 마침내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의의 목적은 꽤 명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가나안이 동서독과 동시에 수교하며, 정통정부 문제는 일단 논의하지 않고,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해 추모관 등을 구 수용소를 개조해 건설하며, ‘피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이 재단에 동서독을 비롯해 여러 단체와 국가에서 금액을 출자한 뒤 가나안 정부가 재단이 지급하는 배상액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가나안이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해야 한다고 믿는 친소파인 하카람은 이 회의의 개최 자체에 반대하여 ‘스탈린 노트’를 동독 대표단에 뿌려 회의를 파투 내려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친소 가나안 지도부조차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비해 상당히 강경하고 위험한 공작이었으며, 결론적으로는 노트의 편집된 사본의 사본을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동독이 스탈린주의자들을 더 싫어하게 된 것을 제외하면요.
노트의 폭로로 인해 동독과 서독이 일부 조항을 가지고 씨름하며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높은 동독의 금액부담이 조금 더 상승하는 일이 있었지만, 회의 자체는 성공리에 종료되었습니다. 국제 유대인 단체는 ‘우리도 배상금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며, 회의가 또 열릴 것 같지는 않다’라는 의견을 밝혔고, 서독은 여전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한 구 나치가 집권한 상태입니다.
마침내 1955년 11월 2일,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10년하고도 5개월이 조금 넘은 시점에 가나안과 동서독은 동시 수교를 진행하였습니다. 1955년 기준 15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배상금과 현물이 가나안에 지급되기 시작하였고, 가나안의 내년 경제성장률 예측은 20%에 달했습니다. 서독의 정부 차원에서 지급된 ‘보상금’이 아니었기에 반발 여론도 덜했습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숙제는 남아있었습니다. 서서히 독립국으로써의 면모를 갖춰가는 동독이 앞으로 냉전을 어떤 방향을 이끌게 될지, 그리고 서독이 구 나치와 협력하는 것을 방조하는 미국 국무부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힘겨루기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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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국가 평판 :3 (보통)
종교근본주의/좌우극단주의 세력의 영향력 :1/2 (낮음, 약간 낮음)
중동지역 평화 수준 :4 (약간 높음)
미국과의 관계 :2 (약간 낮음)
소련과의 관계 :5 (높음)
중국과의 관계 :4 (약간 높음)
여러분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머물 수 있는 국가를 건국하되, 최종적으로는 약속의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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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곧 진리 순천 지도 쳐보니(고딩때 수학여행으로 전남해안 돌아다니며 광양제철소에서 고소공포증 증세가 생긴건 기억나는데.순천엔 갔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안나네요.) 오히려 바다가 가까워서 그러려나요?
도쿄만 해도 여름에 존나게 더워 미치는데 또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던게 생각나서
@dear0904 제주도가 아열대에 속합니다.
@dear0904 근데 기후가 여러가지면 대응장비 갖추는거야...
+ 있다고요?
@931117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네... 그걸 못해서 깨진 군대가 한 둘이 아니죠.
+ 있"었"죠? 파나마... 가 정글 아니던가요?
@dear0904 아아. 플로리다요?
@dear0904 러시아 원정간 나폴레옹...2차대전때 소련친 독일군...
+ 아...본토엔 없잖아요...본토만 생각하다보니.
@돈이 곧 진리 거긴 늪이 있는거지 정글이 있는건 아니지 않나요?
@931117 해안가보다 내륙이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춥습니다.
@돈이 곧 진리 플로리다... 는 늪지대지 보통 생각하는 정글이... 아니지 않던가요? ㅋㅋ...
@931117 플로리다 남쪽에 아~주 약간 열대기후가 지나갑니다.
+ 아니네. 푸에르토리코랑 하와이가 있었네.
@돈이 곧 진리 제가 여행간데가 다 우리보다 남쪽이라 그런가.그런 느낌은 안들던데...
당장 도쿄에선 뻑하면 편의점이나 자판기 썼고 홍콩은...기억이 잘 안나네요...인상이...
대만은 날씨가 좋았는데 더웠던걸로 기억.근데 희한하게 정작 대만 현지인들은 그런데도 긴팔 입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던걸로 기억.
@931117 그리고 위에 말한 장진호 전역...
+ ㅋㅋㅋ... 본토에 다 있으면... 사기죠. 아니 근데 빅토 해보니까 사기 맞던데 (초반에 콩고쪽 개척하고, 파나마 압박으로 먹으면 없는 자원이... 없죠 ㅋㅋ. 고무만 신경 쓰면 되는 수준.)
@돈이 곧 진리 아 그두지역 완전 잊고 있었네...근데 정작 베트남전에서 정글 땜시 고전했었죠?
@dear0904 전 오늘 빅토에서 미국 잡았는데.이상하게 재정 부족은 둘쨰치고 뭐 법을 짜려하면 죄다 혁명 벌이겠다고 들고일어나서 빡쳐서 그만둔.
그나마 36년 끝까지 간게 조선뿐입니다 전.
뭐 난이도 모드 있어서 받아서 켰다 껐다 하는데.너무 쉬워져서 문제인.
너무 쉬워져도 어려워도 문제니 이거...ㅎㅎ...
@931117 그 두 곳이 열대기후긴 하지만 "열대우림"이 있는건 아니라 훈련이 부족했나보죠.
@931117 아. 정부 개혁과 갈라치기는 필수입니다. 혁명은 급진주의 100 안 찍음 안 일어나니 감수 가능하고... 초반 노예제가 관건이죠 ㅋㅋ.
+ 저는 지금 20년 남았는데, 할게 없어졌네요 ㅋㅋ. 미국이라 다 되다보니. 문제는 평의회 공화국을 갔더니 생활 수준 올리기가...?
@dear0904 노예제 폐지가려 했더니 혁명이 터져서 결국 남북전쟁이 터졌다니까요 전.뭐 쉽게 이기긴했습니다만.이후 다른 법안을 만들라 케도 꾸준히 계층들이 혁명 벌이겠다고 들고 일어나서...(검열) 빡쳐서 때려친.
+ 아니 당장 다문화법등 부터 다른법들을 하려고 해도 혁명 벌이겠다고 날뛰는데 어떻게 플레이를 합니까?
+ 전 청나라 하다 중화인민공화국 만들어본적도.ㅋㅋㅋ.멕시코를 멕시코 제국으로 만든적도 있습니다.
@931117 노예제 폐지 가려면, 일단 다른거 찍고 공장 지어서 지주 영향력 까다가, 적정한 수준에서 잡아야죠 ㅋㅋ. 아. 근데 저는 뜬금없이 여성 재산권에서 혁명 날뻔해가꼬?
+ 그게 재미죠 ㅋㅋ... 온갖 체제 해보는 맛? 다만 평의회 공화국은 두번은 안할듯... 예술 학교를 못 키우네요 ㅋㅋ... 30이 말이 쉽지!
+ 법 바꾸려면 정부 개혁서 입맛 맞추고, 반대파 정치력을 잘 까줘야 하니까요. 그게 빡세지...
@dear0904 네.그렇게 하면서 조용해질때쯤 찍었는데도 혁명이 터지더라고요.
+ 이게 미치는게.가령 A법을 제정하려고 하면 제정하면 애들이 혁명벌이겠다고 위협해서 취소하고 원하는대로 보존하거나 그쪽이 선호할 B법을 하려 하면 또 A법을 찬성하거나 그외 계층이 혁명 벌이겠다고 날뛴다니까요.
(검열) 어쩌라고??
조선,스위스는 그런일 없었기에 적응이 안되는중.
+ 일단 뭐 제국 놀이 하는건 감흥이 안서서 내정 위주 게임이구나 하는중이긴 한.
@931117 그... 혁명 압박이나 정치 운동은, 급진 100 안 넘으면 쿨하게 무시 때리는게 속 편합니다 ㅋㅋ... 조선, 스위스라... 해봐야겠군요.
+ 전쟁이 진짜 별게 없어서 내정겜이죠 ㅋㅋ. 심시티. 대신 자원 모아야 하는 심시티...
@dear0904 무시했다 90언저리까지 치솟는데 어떻게 무시합니까...
스위스는 페르이노님이 내정 익히는데 딱이래서 해본.
+ 근데 조선은 몰라도 스위스는 자원 구하는데 한계가 크더라고요.항구가 없어서.
@931117 90 언저리. 도 100만 안 넘으면 혁명은 안 납니다. 그니까 무시가 가능한거죠 ㅋㅋ... 아. 넘을거 같으면 그땐 아까워도 캔슬 누르고...
+ 네. 내륙국의 비애죠...
@dear0904 넘을것 같으니까 죄다 캔슬 때려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니까.차라리 통과 가능성이 높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상황에서 치솟으니.
+ 대신 적대국가는 없는.
@931117 하다보면 노조가 커져서 (이것도 기술인지 운인지...) 사회당 당선 시키고 나니 그때부터 다 편하게 통과 시키다가, 평의회 공화국-무정부 찍고 나니 더 찍을 법이 없더라구요. 아. 딱 한번 있어서 군부로 정치력 몰아서 국가 민병대에서 전문 직업군으로 바꾸긴 했습니다(...)
@dear0904 전 그것도 하기 전에 내전 터지고...재미는 있는데 몇몇 국가들 빼고 난이도가 높게 느껴져서 그런가.오늘 들어서 열정이 식어가는듯한...
@931117 아. 근데 보니까 내전 터지는게 참 흔하긴 하더라구요(...) ai는 각 안 보고 하는건가 싶고?
@dear0904 전 심지어 조선 할때 프랑스에서 옥시타니아가 떨어져 나가는것도 봤습니다...
이거 난이도가 좀 쉬워졌으면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제가 일부러 좀 난이도 있는 애들만 골라서일 가능성이 높지만은.미국이 난이도가 높은편은 아닐거 아닙니까...
진심 미국도 이모양인데 다른 열강들은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뿐인...
@931117 저도 이번판에서 프랑스-옥시타니아/영국-웨일스/스페인-나바라 다 보고있는 판이라 ㅋㅋㅋ... 오스트리아-바이에른도 있습니다. 이 무슨... 이탈리아는 통일도 못했구요.
@dear0904 전 이탈리아가 나오긴 하던데 전역 통일도 못하고 왕 성씨가 시칠리아인걸 보면...
심지어 태평천국은 베트남 잡을떄 딱 한번 봤는데 아예 분리독립한...근데 군주가 홍수전이 아니라 가공인물이에요...
+ 그외에 스칸디나비아 ai로 뜬거 한번 봤고.
+ 코시도 이번에 어째 재미가 없어서 다른걸 즐기려고는 하는데 빅토가 이리 식으면...안그럼 또 막간다고요 저.몇일전에 정말로 손 더봐버린...
@931117 푸에르토리코까지 포함하면 정글도 있네요. 그 외에 남부에는 대형 악어가 출몰하는 에버글레이즈 습지가 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네 푸에르트리코쪽을 까먹고 있었네요.습지는 알고 있고.당장 에오엠3에 플로리다쪽 배경 맵이 습지잖습니까.ㅎㅎ
오늘 에필로그 올리겠습니다.
마지막화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