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눈 것입니다.
오랜만에 글 한 편 올립니다. 6개월이 넘은 것 같습니다. 한번 펜을 놓으니 이렇게 되는 것 같네요. 글 안 쓴다고 타박해댄 글방식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6일(금요일) 한 학술 세미나에 갔습니다.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주제였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이승만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얼마나 깊어졌는가 보고 싶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우남((雩南) 이승만은 박사까지 공부한 분이지만 191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는 ‘학자’가 아니라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아니 독립협회와 관련하여 투옥된 이후부터 운동가였다고 해야겠지요. 그가 공부한 것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일 겁니다. 신채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한국사 연구는 독립운동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해방된 지 80년이 되어 가는데 우리는 '운동가'로서 우남을 박사학위까지 짧은 시기를 보낸 학자로서의 우남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1975, 76년인 듯합니다. 김용식 주영대사가 런던대학 한 강의실에서 한국의 해방과 독립에 대해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이승만 키드(kid)’였습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때로는 울분에 차서, 때로는 선동을 위해 내뱉은 말들은 그대로 옮기더군요. 1905년 테드 루스벨트가 한국을 배신한 것, Taft-카츠라 밀약, 얄타에서 루스벨트(FDR)와 스탈린 간의 한반도 분단 밀약설,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에서 미국은 한국을 팔아 넘긴데 사죄하고 보상(atone)하라는 주장 등등.... 대부분 그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내세우고 미국인들을 설득하는 데 사용한 상투적 표현(cliche)들이지요. 김용식 대사는 이를 ‘한국현대사’인 듯 열성적으로 설파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습니다.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인문학/역사학, 인간 정신의 진보는 왜 이렇게 느릴까요?
내가 정년 퇴임한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50대로 한창 연구하던 ‘젊은’ 학자들도 이제 정년을 넘겼다는 말입니다. 세미나장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이 아무도 없어 서글픔이 몰려오더군요. 더구나 목사나 외교관(스페인 대사 역임?) 출신, 혹은 사회단체 회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고 발언합니다. 이들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이런 분들은 학술모임에 오면 새로운 연구 결과를 경청하고 배우면 됩니다. 유학 시절 중국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미-소 핵, 미사일 분야에서 저명한 한 학자도 참석했지요. 사회자가 토론이 끝날 무렵 이 교수에게 할 이야기가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분은 자기는 중국 미사일 전문가가 아니라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외교사 학술모임인데 ‘진짜’ 연구자들의 모임이란 분위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외교사 연구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지요. 먼지 냄새 풍기는 외교문서나 마이클로 필름을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천착해야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지요.
그다음 한국외교사를 보는 시각에 관해서입니다. 최근 미국 기자협회 소속인 한 기자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 기자는 일본 기자들은 글로벌 이슈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는데 한국 특파원들의 질문은 한국, 북한 문제에 한정되어 있다고 꼬집더군요. 50년 전 내가 기자 생활할 때나 조금도 다른 게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북한은 초미의 관심사이지요. 그러나 이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다면 시야를 조금 넓혀 대국적인 관점에서 국제문제를 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이나 우크라이나 전쟁도 직간접으로 우리와 연결되는 세상이니까요.
역사학이 인문학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약육강식과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의 속성 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넓은 시야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싸우기도 하고 협력도 합니다. 또 일정한 도덕률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요. 장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웃 간에는 호혜적인 협력보다는 갈등이 더 많습니다. 개항 시기 열강들은 한국은 사방이 트여 방어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국과 같은 반도국은 국제적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고, 세계사적 흐름에서 부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19세기 후반 사방에서 한국을 삼키려는 늑대 무리들이 으르렁거리는 데 우리만 조용히 살겠다고 내버려 두라는 것은 수옥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 꼴입니다. 우리가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강을 못해 ‘이웃’ 일본에 먹히는 수모를 당한 것이지요. 해방 80년이 지나 과거를 성찰하지 못하고 언제까지 반일 죽창가만 부를 건가요?
다시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살펴봅시다. 이승만과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은 1921년 워싱턴 회의를 전후하여 ‘공공외교’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미국정부가 아니라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설파하였는데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당시 미국은 1차대전을 종결한 파리 평회회담에서 산동반도의 중국반환 거부 등 일본이 보여준 침략행위에 분개하여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합니다. 미국민들도 ‘우리는 정의를 위해 싸웠는데 종전 결과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고 일본은 중국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반일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한국의 친구(Friends of Korea)’라는 단체를 지역마다 만들고 미국 의회나 백악관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합니다. 영국 외무성에도 같은 청원서를 보냈더군요. 이를 읽어보면 영국 외무성이 평한 대로 개항 이후 합방까지 일본의 침략행위를 탁월하게 정리한 ‘문서’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될 여지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미국 등 열강에게 반일(反日)이 곧 친한(親韓)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 태평양과 중국에서 일본의 팽창을 억제하는 해군 군축 문제에 몰두한 이들에게 한국문제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우남이 내세운 1905년 테드 루스벨트의 배신과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볼까요? 그는 테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1905년 8월 그를 만나 한국의 독립유지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물론 성과는 없었지요. 8월이라면 그 전달 7월에 소위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맺어졌을 것이고 8월이면 2차 영일 동맹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이 인정되지요. 9월에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을 종결하는 포츠머스 조약에서 영일동맹의 내용을 승인(endorse)합니다. 한국에게는 최약의 시절이었지요.
더욱이 테드 루스벨트는 전형적인 마초형 인간입니다. 전쟁터에서는 뒤에서 부하들에게 ‘진격’을 외치기보다는 ‘나를 따르라’면서 앞장서는 인간이죠. 그는 한국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 나약한 국가라고 평했습니다. 약육강식, 군국주의가 횡행하던 시대정신에 앞장섰던 테드 루스벨트에게 한국은 파나마나 콜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과 같이 파멸할 수밖에 없는 국가로 보였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토의 사무실에는 천황과 함께 루스벨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약육강식, 군국주의, 사회진화론이라는 시대정신에 물든 이토였으니 당연했겠지요. 참고로 다윈의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은 다른 개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 즉 survival of the fittest, 환경에 적응한 동물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호랑이는 멸종 위기인데 고양이는 살아 번창하고 있지요.
태프트 역시 테드 루스벨트의 아류입니다. 그의 전기는 ‘심각한 협상을 위해(to conduct serious negotiations)’ 일본을 방문한 것이 아니며 일본 방문 중 카츠라 수상을 만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가츠라 등 일본 정부 지도자들의 면담 내용도 육군장관인 자신이 국무성의 업무에 간섭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국무성에는 보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통령도 읽어보고 자기 생각과 같다면서 설합 속에 넣어두었는데 이게 19년이 지난 1924년 Tyler Dennett라는 역사학자가 발견하여 일본과의 ‘비밀협정’이라고 떠벌린 겁니다. 그런데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고 두 사람 간의 대화를 적어둔 메모(memorandum of conversation)일 뿐입니다. 이에 관한 논쟁은 이전에 다룬 바 있습니다. 간단히 의미를 찾는다면 동아시아에서 ‘나 홀로’ 외교를 추구하던 미국이 유사한 입장을 갖은 한 열강을 발견했다는 정도입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도 마찬가지입니다. 3개월 후 독일의 항복을 목전에 두고있던 연합국들은 마지막 공세와 진격 루트, 그리고 독일, 폴란드 등 전후 유럽 문제의 처리 등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목전에 있는데 한반도 ‘분단’이니 뭐니 하면서 심각하게 논의할 여유가 있었을까요? 주요 문제들 논의하고 쉬는 시간 직전에 ‘옛날 카이로에서 결정한 대로 하자’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유학 중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미-영-소 3국 외상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했더니, 동양외교사에 정통한 교수는 자기는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더군요. 9월 런던회담에서 전후 유럽문제를 매듭지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12월 모스크바에 다시 모인 겁니다. 미국 수석대표인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의 회고록을 보면 발칸문제를 논의 중 한국문제가 간단히 언급될 정도입니다. 한참 뒤 트루먼이 한반도 문제에서 번즈가 양보를 했다면서 불쾌했다고 합니다만. 2차대전 관련 미국이나 영국 문서를 훑어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느껴질 것이고 이런 배경을 가지고 한국 문제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태프트-카츠라 문서의 발견 소식을 듣고 환호작약하고 또 분기탱천했습니다. 데네트가 자기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떠벌린 걸 읽었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지요. 차분히 분석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필요한 것만 꼬집어 ‘옳지, 이것이다’ 싶었을 겁니다. 테드 루스벨트가 나를 속이고 조선을 팔아먹었다, 이제라도 속죄하고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에서도 빚을 갚으라, 배상하라(atonement)는 구호가 강연장을 메아리쳤다고 합니다. 그는 독립운동 기간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말로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한반도 분할이라는 얄타 밀약설도 비슷합니다. 2차대전 중 전시외교에 관한 문서들은 엄청 많습니다. Conferences at Washington(3번?), Casabranca, Cairo, Teheran, Malta and Yalta. Berlin(Potsdam 2권) 등 이름으로 된 문서들은 권마다 1천 쪽은 될 겁니다. 영국문서도 비슷하지요. 이것을 다 읽을 필요는 없지만 회의의 주제와 참석자들, 그리고 회담에 대비하여 국무성이 준비한 문서를 간단히 보아도 흐름을 좇아갈 수 있지요. 한반도 분단이란 주제는 얄타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던 독일의 전후처리를 앞두고 거론될 자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 겁니다. 어느 보좌관이 회담 후 한참 뒤에 한마디 했다는 건데.....보좌관 차원(staff level)에서 논의되어도 중요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기지요. ‘회의 후 복도에서 만난 미국의 K대령이...’ 등등의 기록도 남아 있지요.(2024.9.14.) - 다음 회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