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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원 고성 금강산 화암사(禾巖寺)를 찾다 ①
- 일주문부터 대웅전 팔각구층탑 삼성각까지 -
지난 10월 18일,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두루 살펴보고 내려와 명파리해수욕장, 대진항, 화진포에서 일명 김일성별장과 이기붕별장을 두루 살펴보고 서울로 향할까 하다가 2시 25분, 다시 42km쯤 떨어진 최종목적지 화암사로 백우거를 몰았습니다.
화암사도 건봉사와 마찬가지로 20년 전에 가 본 터라 다시금 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화암사 가는 길도 역시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친절한 네비의 안내로 무난히 갈 수 있었습니다. 화암사 초입에 일주문이 있지만 승용차로 더 올라가야 주차장이 있습니 다. 3시 20분, 화암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화암사 입구에서부터 아스콘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2.8km 들어가면 '금강산 화암사 (金剛山 禾巖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옵니다.
금강산 화암사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476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입니다.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일주문
이 일주문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고 진(眞)과 속(俗)이 하나이며, 만법이 일심(一心)의 소현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화암사는 설악산 권역에 있는데 '금강산 화암사'란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암 사는 예로부터 <화암사사적기> 등에서 모두 금강산이라 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신라 혜공왕(惠恭王) 5년(769)에 진표율사(眞表律師)께서 이 절을 창건하시고 는 금강산 화엄사(金剛山 華嚴寺)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율사는 금강산 동쪽에 발연사(鉢淵寺), 서쪽에 장안사(長安寺), 남쪽에 이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하셨는데, 화엄사라 이름한 것 은 이곳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100명 가운데 31인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또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친견하고 그 친견한 자리에 지장암(地藏 庵)을 창건하여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화엄사가 금강산 남쪽에 있는 절이라 하여 금강산 화엄사라 했다 합니다.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편액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1999) 선생 글씨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1999) 선생은 진주 태생으로 진주에서 활동한 서예가로, 합천 해인사 「해탈문(解脫門)」, 문경 묘적암 「일묵여뢰(一默如雷)」, 진주 촉석루 「남장대(南將臺)」, 「서장대(西將臺)」, 「진남루(鎭南樓)」 등이 있으며, 그 외에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길을 따라 오르고 있노라니 길가에 조성된 시비가 많이 보 였습니다. 참 좋은 불사를 하였구나 생각하며 올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화암사 주지 웅산 스님은 10월 31일 선시비 제막식을 가진 바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절입구까지 <선시명상로>를 조성한 것이죠. 제막전에 우리는 먼저 경험한 셈입니다. 역대 선사 스님들이 깨달음을 읊은 글로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담고 있었습니다.
선시명상로에 있는 선시비(禪詩碑)
많이 담았어야 했는데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부득이 하나만 담았습니다.
열반송(涅槃頌) -성림 월산(聖林 月山 1913~1997)-
○ 죽음은 왕생도 아니고 소멸이요 본래자기로 돌아가는 귀환이다.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그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回回一生 회회일생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未移一步 미이일보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本來其位 본래기위 본래 그 자리는 天地以前 천지이전 하늘과 땅보다 이전이니라.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이 조성되어 있네요.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가지 모습[八相]으로 나눌 때 일곱 번째가 녹원전법상(鹿苑轉 法相)입니다.
부처님은 붓다가야 보리수하에서 대각을 성취하신 후 21일간 열반락을 누리시고는 범천 의 권청으로 중생을 제도할 것을 결심하시고 그곳에서 1,000여 리 떨어진 녹야원에 가셔 서 6년 동안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게 되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 라 합니다. 이때 설해진 법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그들은 석존(釋尊)께 귀의하여 오비구(五比丘)가 되는데, 그 이름은 <콘단냐(憍陳如)>ㆍ <앗사지(阿說示)>ㆍ<밧디야(跋提)>ㆍ<마하나마(摩訶男)>ㆍ<밥파(波濕波)>입니다.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설법하시는 모습입니다.
5비구 중 교진여(橋陳如;Kondanna)가 제일 먼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콘다냐는 깨달았다. 콘다냐는 깨달았다"고 환호하셨고 이후 나머지 비구들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의 출가교단인 승가(僧伽)가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부처님[佛]과 가르침 [法]과 출가수행자[僧]라는 삼보(三寶)가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전법륜상에 대하여 아쉬운 것은 부처님께서 취하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보다는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셨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입니다. 무엇을 조성하든 좀 생각을 담아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 인(手印)이 어색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
부처님 뒤편 바위에는 사구게(四句偈)가 새겨져 있습니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모든 법은 항상함이 없는 법이니 是生滅法 시생멸법 이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생멸하는 분별 마음 사라진다면 寂滅爲樂 적멸위락 열반의 고요함이 낙이 된다네.
이 사구게에는 부처님께서 과거세 보살로 계실 적 인행시(因行時)에 나찰에게 몸을 던져 법을 구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부처님 일대기>방에 실려 있습니다.
바위에 간성군 금강산 화엄사(杆城郡 金剛山 華嚴寺)란 각자가 있네요.
화암사의 주소를 보면 고성군(高城郡)으로 되어 있는데 간성군(杆城郡)으로 각자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간성군이었나 봅니다.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변경된 때는 1919년이라 하니 이때만 해도 화암사(禾巖寺)가 아니라 화엄사(華嚴寺)였나 봅니다.
《전통사찰총서》 에 의하면 1912년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이 절 은 이전부터 사용해 왔으나 각종 기록에는 준용(準用)하지 않았던 화암사(禾巖寺)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화암사 가는 길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금강교(金剛敎)를 건너면 경내로 들어섭니다.
제일 먼저 만나는 전각은 풍악제일루(楓嶽第一樓)
풍악(楓嶽)은 금강산(金剛山)의 다른 이름이지요. 금강사명(金剛四名)이라 하여 금강 산은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엔 봉래산(蓬萊山), 가을은 풍악산(楓嶽山), 겨울은 개골산(皆骨山)이라 부릅니다.
우선 대웅전에 들어 삼배를 올리고자 계단을 오르니 계단 위 왼쪽에 누각이 모습을 드 러내는데 바로 풍악제일루라는 전각은 바로 범종각입니다. 범종루(梵鐘樓)지요. 범종 루는 대웅전 앞마당 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풍악제일루(楓嶽第一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범종루(梵鐘樓)입니다.
이 범종루가 가장 운치있는 종루가 아닌가 합니다. 종루에는 범종을 비롯 법고ㆍ목어 ㆍ운판 등 사물이 있어 조석으로 장엄하게 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웅전 마당에는 9층석탑이 있는데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화암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겹처마의 팔작지 붕 건물로서 1991년 건립되었습니다. 안에는 특이하게도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
모셔져 있습니다. 본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보처 보살로 미륵보살, 제화갈라 보살을 모셨습니다.
대웅전에 주련이 걸려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원각산에 한 그루 나무가 생겼는데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천지가 나뉘기 전 이미 꽃이 피었다네.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푸른색도 흰색도 검은색도 아니며 不在春風不在天 부재춘풍부재천 봄바람 하늘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네.
대웅전(大雄殿) 편액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선생 글씨.
법당에 들어 두루 삼배를 올리고 나서 법당보살의 양해를 얻어 내부를 찍어보려 했으 나 안 된다고 하여 내부의 사진을 담지 못 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제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참고로 올려 보았습니다.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 본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보살(彌勒菩薩)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은 과거불인 연등불(燃燈佛)께서 성불하시기 전의 보살이 름이며, 석가모니불은 과거세에서 선혜보살(善慧菩薩)로 수행하실 때 연등불로부터 "다음 세상에서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으시고 현재불이 되셨으며, 석가모니불은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미륵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수기를 주고 받은 세 분의 불ㆍ보살을 모신 것을 일러 수기삼존불(授記三尊 佛)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모습
대웅전 앞에는 괘불(掛佛)을 거는 괘불대가 보입니다. 마당에서 법회를 성대히 베풀 때 괘불지주대에 괘불을 걸고 의식을 봉행합니다.
그리고 측면의 문앞에 바로 감로수대가 조성되어 있는데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법당에 들어 감로와 같은 부처님법문을 들으라는 뜻이 있을 터이지만, 이는 아마도 화암사에 불 이 자주 나서 화재를 막기 위한 비보차원에서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감로수 물을 받아 한 바가지 마시니 청량한 기운이 감돕니다.
석가모니 고행불상
이 고행상은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 산쪽에 조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안내문이 설치되 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9세에 출가한 싯다르타는 구도자 보살(菩薩)로서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의 삶이었다. 극도의 고행으로서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6년의 갖은 고행이 최상의 깨달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6년 금식고행을 청산하 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으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렇게 수자타의 공양을 드신 보살은 넓은 그늘을 드리운 피팔라나무(pippala:보리수)에 이르러 주위를 세 바퀴 돈 뒤 길상(吉祥)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솟띠아로부터 길상초를 받아 반석 위에 고르게 펴서 깔고 동쪽을 향해 몸을 바르게 세우고 호흡을 고른 후 보살은 맹세하였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메말라 가죽과 뼈와 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갖은 마라(악마)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깊은 명상에 들어, 칠 일째에 동쪽의 새벽녘 샛별을 보고 드디어 보살은 모든 미혹의 번뇌를 일순간에 다 끊어버릴 '아뇩다라삼먁 삼보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태자 나이 35세 때 12월 8일의 일이었다.
49일간 선정(禪定)에 든 후 "내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 버리고..." 하고 전도 선언을 하신 후, 함께 고행을 닦았던 아야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처음 가르침을 설하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하며 이들은 석가모니불의 첫 제 자가 되었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苦行修道相)> 석가모니부처님께 참배 드리고, 우리 모두 수행 정진(修行精進)하여 성불(成佛)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
안내문을 옮기면서 오자와 원문을 약간 손보았습니다.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대웅전 옆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건물입니다.
무독귀왕(無毒鬼王) 본존 지장보살(本尊 地藏菩薩) 도명존자(道明尊者)
지장삼존상과 지장탱화(地藏幀畵)
지장보살 좌측의 명부시왕(冥府十王)들
명부시왕(冥府十王)은 왼쪽으로부터 제1 진광대왕(秦廣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7 태산대왕 (泰山大王), 제9 도시대왕 (都市大王)입니다.
맨 끝은 일직사자(日直使者)인데 일직사자는 저승사자의 하나로 임종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결정하고 그 혼백을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성질이 매우 포악하다고 합니다. 일직사자 옆은 판관이 아닌가 합니다.
업경대(業鏡臺)
이 업경대를 정파리경(淨玻璃鏡)이라 합니다. 정파리경이란 깨끗이 투명하게 본질의 근원을 살펴 밝힌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은 온갖 죄들이 비친다는 거울 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죄를 발뺌해도 이 거울을 비추면 꼼짝 못하게 됩니다.
지장보살 우측의 명부시왕(冥府十王)들
오른쪽부터 제2 초강대왕 (初江大王), 제4 오관대왕 (五官大王), 제6 변성대왕 (變成大 王), 제8 평등대왕 (平等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 (五道轉輪大王)입니다.
맨 왼쪽은 월직사자(月直使者)입니다. 일직사자와 같이 죽은 후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 자입니다. 품에 명부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금강역사(金剛力士)
수바위와 금강교가 멋지게 보입니다.
대웅전 마당에서 본 수바위 모습
수바위는 화암사를 상징하는 바위입니다. 유명한 바위에는 전설이 있는 법입니다. 이 수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신라 36대 혜공왕(惠恭王) 5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769년에 창건한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위치한 우뚝 솟은 왕관모양의 바위는 모양이 워낙 빼어나 빼어날 수(秀) 자를 써 수암(秀巖)이라 불립니다. 그래서 수바위라 합니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역대 고승들이 이 바위 위에서 좌선수도 했다고 전해지는 수바위 꼭대기에는 지름이 2m 가량 되고 깊이가 20cm 정도 되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극심한 가뭄 때에도 이 물만은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가뭄이 심할 때 이 물 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마르지 않는 우물 때문에 수바위를 '수암(水巖)'으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 모양이 워낙 빼어나기 때문에 옛부터 '수암(秀巖)'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수바위에는 욕심 많은 이에게 교훈을 주는 전설이 있습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절에 있던 두 스님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는 꿈을 동시에 꾸게 됩니다. 백발 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일러 주면서,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하였습니다.
잠에서 깬 두 스님이 이른 아침 수바위로 달려가 노인이 일러준 대로 하였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없이 수행에만 열중 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화암사를 찾아온 객승이 이런 신기한 사실을 듣고 욕심을 내게 됩니다.
'세 번 흔들어서 두 사람 분의 쌀이 나온다면, 삼백 번을 흔들면 이백 사람 분의 쌀이 나올 것이 아닌가?'
객승은 몰래 수바위로 올라가 쌀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도 없이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쌀이 나오기는 커녕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그 뒤로는 수바위에서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제가 알기로 부여 미암사(米巖寺)의 쌀바위에 얽힌 전설과 서울 아차산 대성암의 쌀바위에 대한 전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수바위에서 쌀이 나왔기 때문에 '벼 화(禾)', '바위 암(巖)'자를 써서 화암사(禾巖寺) 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화암사 홈피>에는 화암(禾巖)이라 한 것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화암(禾岩)이라고 한 것은 남쪽에 한 덩이의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만곡(萬斛)의 이슬이 쌓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구층석탑과 석등이 어울어진 대웅전 마당의 모습
대웅전 앞의 팔각구층탑 모습
화암사는 절터의 기운이 매우 센 곳이라 예부터 많은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 탑은 주변의 이러한 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최근에 세운 비보(裨補) 성격의 탑이라 합니다.
화암사는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처럼 화재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이 절이 남쪽의 수(秀) 바위와 북족의 코끼리처럼 생긴 바위의 맥이 서로 상충하는 자리 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수바위가 뿜어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해 불이 자주 난다고 풍수가들은 진단한다고 합니다.
《화암사사적기》에 기록된 첫 번째 화재(火災)는 인조 1년(1623)에 있었고, 인조 13년 (1635년)에 산불이 일어나 화엄사를 불태워, 인조 22년(1644)년 다시 중건하였는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종 3년(1662) 세 번째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합니다.
숙종 42년(1716)에는 산적들이 절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후 다시 중건했는데 영조 36년(1760)에 다섯 번째 화재로 대웅전과 향각(香閣)ㆍ승당(僧堂)이 불타 버리자 이듬 해부터 다시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로 정조 18년(1794년) 도한(道閑) 스님이 약 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21일간 올렸는데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 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감격한 정조가 후원하여 화엄사는 창사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팔각구층석탑은 비보(裨補) 성격의 탑이라 합니다.
그러나 철종 11년(1860), 산불로 인해 큰 절과 암자까지 완전히 소실되었고, 이에 춘담 (春潭)스님을 중심으로 중건에 착수하여 전국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하였는데... 중건 4년만인 고종 1년(1864), 화엄사는 다시 산불 속에 휩싸였습니다. 그리하여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장탱 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고서 화재를 면할 방책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볼 때 수암과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 여 100m 아래에다 절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수봉 스님은 고종 9년(1872) 새로운 터에 법당ㆍ영각(影閣)ㆍ누각ㆍ요사채를 지어 절을 중건했습니다. 그리고 고종 19년 (1882)에는 자허(耔虛)스님과 선월(船月)스님이 철원 장구사(長久寺)로부터 아미타여래 좌상과 약사여래좌상을 모셔와서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종 30년(1893), 이번에는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이듬 해 축성(竺星)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순종 3년(1909) 영운(影雲) 스님은 안양암에 칠성 각을 건립하였습니다.
1912년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이 절은 이전부터 사용해 왔으나 각종 기록에는 준용(準用)하지 않았던 화암사(禾巖寺)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5년 9월 화암사는 또다시 불타 버렸고, 두 해가 지난 1917년에 중건하여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사변으로 크게 파손되어 외채 1동만 남게 되었습니다.
휴전 후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비구니가 정착하여 화암사를 지키다가, 1986년 주지로 온 양설(良說)스님이 세계잼버리대회와 때를 맞추어 절을 중창함으로서 다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화암사의 역사는 화재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임을 알겠습니다. 탑을 세워 비보를 했다 고 낙관할 문제가 아니니 각별히 화재, 산불, 산사태 등 안전에 만전을 기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쌍사자석등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8각석등인 국보 제5호인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을 본떠 제작한 듯합니다.
팔각구층탑 옆에서
저도 서 보았습니다.
남쪽 방향으로 삼성각을 찾아갑니다.
손바닥의자와 원탁이 있는 쉼터입니다. 혹시 부처님 손바닥인가?
편안하십니까?
화암사 계곡 풍광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참 사진마다 나타나는 흐린 빛줄기는 렌즈가 깨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모처럼 카메라를 새로 구입하여 이번 순례에 처음 들고 나왔는데 건봉사 적멸보궁을 잘 참배하고 나오다가 그만 실수하여 돌바닥에 떨어뜨려 그만 렌즈가 조금 손상되어 이런 현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수리했는데 구입가의 반값이 들었네요.
템플스테이 전각입니다.
템플스테이 건물이라 지나가려는데 '본다라(本多羅)'라는 현판을 걸고 있어 시선이 머 물렀습니다. '본다라(本多羅)라...' 처음 보는 말이라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 습니다. 음으로 봤을 때는 범어 같은 느낌입니다.
본다라 밑에 영문으로 'born die life' 라고 써 있네요. 그러고 보니 본다라(本多羅)는 범어가 아니라 영문의 'born die life'를 음사(音寫)한 말이네요. ㅎㅎㅎ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템플스테이관 옆의 삼성각(三聖閣)으로
삼성각(三聖閣)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구조이며 맞배지붕,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삼성각은 금강산의 시작점인 신선봉 바로 아래 세워져 있어 매우 영험하다 믿고 있 으며,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들과 스님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기도도량이라 합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불기 2526년(1982년)에 조성-
독성탱화(獨聖幀畵) -불기 2525년(1981년)에 조성-
독성 나반존자께서 심산유곡의 낙락장송 아래 홀로 반석에 오른팔을 괴고 맨발로 땅바 닥에 털썩 앉아 한 곳을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독성 나반존자를 시중드는 시자 는 보이지 않으니 과일을 따러 갔는지 약초를 캐러 갔는지... ^^
산신탱화(山神幀畵) -불기 2526년(1982년)에 조성-
산신 탱화에 계곡물이 출렁출렁한 모습은 처음 봅니다. 산신은 역시 심산유곡의 낙락 장송 아래 파초선을 들고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곁에 두 명의 시자는 산신께 공양할 선과(仙果)를 한 명은 바구니에 담아 받들고 한 명은 품에 안고 있네요. 그런 데 산신 곁에 있는 호랑이가 우스깡스럽게 생겼네요.
이 얼굴이 호랑이가 맞나요? ^^
여기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므로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여기서 다시 되돌아 나갑니다. 다시 대웅전 앞마당쪽으로 향합니다.
다음은 화암사의 미륵전과 이모저모를 알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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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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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더 밝고 선명합니다.
카메라 떨어뜨려 속상하셨을것 같아요.
그마음 알거든요.
늘 즐거운마음으로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돌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아뿔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했지만 그래도 적멸보궁 참배한 덕택에 사뿐히 떨어진 모양입니다.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
비상금이 조금 털렸지요.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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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금이 갔는데 속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 '수리하면 되지' 하면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다녔습니다.
20년만에 찾으니 많은 변모가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화암사 순례기 잘 봤습니다.![^0^](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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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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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순례 잘 봐습니다._()_
감사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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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님 20년 생각이 절로, 그 후엔 아직 못 갔다 왔지요. 암튼 좋은 곳 다녀 오셨내요....나무묘법연화경()()()
20년 전과는 많이![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라졌어요. 감사합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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