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다윗의 마지막 고별 기도입니다. 기도의 주제는 성전 건축입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송축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송축했다”(히브리어 바라크)라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즉, “송축을 받으소서”입니다. 영어성경(NASB)은 “blessed are you”로 번역하였습니다. “송축”이란 말의 한국 사전적 의미는 “감사를 기리고 축하하다”, 또는 “좋은 일을 기리고 축하하다”입니다. 교회에서는 “송축”이라는 말이 “찬양”, “높이다”라는 전용구가 되었습니다.
“송축하다”로 번역된 “바라크”라는 히브리어는 한글 성경에 “축복하다”(창세기 27:33), “문안하다”(사무엘상 13:10), “무릎을 꿇다”(역대하 6:13), “칭찬하다”(사무엘상 25:33), “찬양하다”(사무엘하 18:28), “자랑하다”(시편 10:3), “인사하다”(열왕기하 4:29)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송축하다”라는 단어가 수동태로 사용되었고,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 개역개정성경에 “송축하다”로 번역한 것은 오역에 가깝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찬양받기를 원합니다”가 더 적절한 번역입니다.
11절을 보면 다윗의 기도가 시작합니다. 11~12절을 보면 “주님께로”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11절에 “주권”이라는 말이 다른 성경에서는 “나라”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1절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과 나라가 주께 속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기도문 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13절을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의 첫머리를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즉,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과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입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높이고 귀 기울이고 신경 쓸 것은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면서 내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2절을 보면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잘난 것이, 못 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14~17절은 기도의 본론입니다. 다윗의 기도 배경은 성전 건축입니다. 물론 성전은 솔로몬이 짓습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합니다.
14절을 보면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라고 말씀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다”라는 말이 역대상 29장에 무려 7회(5, 6, 9, 14, 17절) 쓰입니다. 구약에서 “7”은 완전수이면서 강조입니다.
성전 건축에 물자가 필요한데, 다윗이 자기 재산 중 많은 것을 즐거운 마음, 즉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놓았습니다(역대상 29:1~5). 9절을 보면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백성 역시 즐거운 마음, 즉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놓았습니다(역대상 29:6~9).
고린도후서 9장 5절에 보면 “연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인데, 그리스어로 “율로기아”(bounty, 너그러움, 풍요함), 즉 “은혜의 선물”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헌금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5절 하반절) 헌금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하고, 자발적 헌금이 참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7절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이 자원입니다. 즐거이 드림입니다.
모세가 성막 건축을 위한 재료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때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헌금해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에는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습니다. 모세는 어느 지파가 더 많은 헌물을 바치는지 경쟁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기만 했습니다.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출애굽기 35:5~9)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광야에 있는 그 백성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했을 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많은 헌금을 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5:21).
14절을 보면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라고 말씀합니다. 15절을 보면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방 나그네”는 낯선 땅에 어쩌다가 흘러 들어와서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게르”로서 땅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외국인들은 크게 세 등급이 있었습니다. 첫째, 흘러들어와서 오래된 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영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둘째, 이 땅에 들어와 있지만 계절적으로 들어와 있거나 단기적으로 체류하는 자입니다. 셋째, 그냥 성경에서 외국인으로 불리는 사람들로서,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는 자입니다. 몇 달 들어온 자입니다. 거주가 완전히 불안정한 자입니다.
“이방 나그네”는 외국인이지만 내내 살 수 있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영주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류민”은 몇 년, 몇 달 체류 가능한 사람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불안정”입니다. “그림자 같다”라는 말은 그림자가 눈에 분명 보이는데, 없는 것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희망이 없다 ”입니다.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4절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16절을 보면 “성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드릴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드릴 수 있게 하니 감사입니다. 드리는 것이 나의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것만도 감사입니다.
18절을 보면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을 의미합니다. 감사를 의미합니다.
19절은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입니다. “정성된 마음을 주사”라고 기도합니다. “정성된”의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온전한”입니다. 온전한 마음을 주어서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성전을 건축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성전”의 주제는 역대상, 역대하의 중심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즐거이 드리게 한 것, 이것이 은혜요 감사란 내용입니다. 결국 기도의 핵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작은 자들을 들어서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신전은 대왕이 짓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대함의 과시용입니다. 자신이 신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강조입니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거대한 신전입니다.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역대상 29장은 다윗이 얼마나 위대해서 성전 짓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 백성이 누구이기에, 나그네요 거류민인데,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주의 전을 위해 즐거이 드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전 기도의 핵심은, 성전에 물자를 드려서 건축하게 하려는 핵심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하심입니다. 무엇을 입증하고 과시하고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전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데, 거기에 작은 자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하심이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