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843) - 2021 조선통신사 옛길 대장정 기행록(9)
- 고모산성과 유곡역 거쳐 호계로(문경 관산지관 – 호계 성보예술촌 26km)
4월 13일(화), 아침에 가랑비 내리다가 낮에는 비 그치고 바람 솔솔 불어 걷기 좋은 날씨다. 오전 8시에 서중학교 관산지관 앞을 출발하여 20여분 걸으니 문경온천 강변길에 들어선다. 전날 새재에서 본 벚꽃을 마지막으로 강변의 벚꽃도 낙화, 천변에 노니는 황새 떼들이 먼 길 나선 나그네를 환영하듯 나래를 펼치고 비 그친 산자락의 아지랑이가 한 폭의 그림이다.
한 시간여 걸으니 문경읍을 벗어나 마성면에 들어선다. 신현리 마을 지나 고모산성(姑母山城)에 이르니 오전 10시 반, 산성꼭대기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한눈에 천혜의 명소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문경시가 세운 입간판의 내용, '북쪽으로는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 아래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다른 길을 낼 수 없는 요충지라서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의 둘레는 1,270m.
고모산성의 셩벽에서
고모산성 주변은 진남교반 일원이라 하여 경북 8대 경승 중 제일경이라는 입간판의 설명, ‘군사적 요충인 고모산성 등 성곽과 교통의 요충으로 옛길의 1번답게 명승 31호인 토끼비리 주변에는 옛길의 문화에 관련된 주막과 성황당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모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부근의 단골음식점에서 점심식사(메뉴는 오리불고기, 전에는 부근의 강변에서 잡은 생선 매운탕이 전문이었는데 고객들의 욕구가 바뀌었다는 여주인의 설명이다.) 정갈한 식단과 담백한 맛에 일행 모두 만족.
12시 20분에 오후 걷기, 하천(영강)을 끼고 이어지는 큰 도로를 따라 한 시간쯤 걸으니 완만한 고갯길에 들어선다. 30여분 걸어 고개 마루에 이르니 큰 돌 판에 유곡역도사적비(幽谷驛道史蹟碑)라 새긴 입석이 눈에 띤다. 그 내용의 일부, ‘길이 열리는 곳에 인류의 문명이 밝았으니 길은 곧 유구한 역사의 자취를 간직한 물증이다. 여기 소백대간의 남북을 오가는 요충에 자리한 문경시 유곡동은 옛 역으로 이름난 곳이다.’ 마을 초입의 유곡동 비석거리 팻말의 기록,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역도체계에서 상주도(尙州道)의 으뜸이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각지로 뻗은 9대 간선도 중 가장 큰 찰방역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역리 469명, 노비 83명과 다수의 마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여덟 고을을 거친 200여리에 19개 역을 관장했다고 한다.’ 지금은 옛 영화가 쇠한 한적한 동네를 지나며 세월의 무상을 새긴다.
유곡동에서 바라본 풍광, 멀고 가까운 산들의 모습이 매혹적이다
유곡동 지나 여러 마을 거쳐 강폭이 넓은 별암교를 지나니 호계면에 접어든다. 강변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문경대학 입구 지나 오후 3시 20분에 목적지인 성보예술촌에 이른다. 걷기 8일째, 26km를 유쾌하게 걸었다. 일행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 걷는 중 마성면 신현리를 지나노라니 '박열의사기념관 1.8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가는 길목이면 들러 가리라 마음먹었는데 500여m 지나니 왼쪽으로 1.3km 꺾어 들어가는 표지가 나타난다. 일행 모두가 들어갔다 나오기는 무리라 여겨 본대는 그대로 행진, 선상규 회장과 함께 차량으로 기념관에 들렀다. 박열(1902-1974) 의사는 1920년대 일본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원래의 뜻은 무정부주의자이지만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 인식)로 3‧1운동 참여 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 권익증진에 앞장섰고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를 폭살하고자 일본여성이자 동반자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 폭탄반입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애국지사.
광복 후 북한으로 납북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여 기념관 경내에 가묘가 있고 옥중에서 결혼한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몇 년 후인 1926년에 박열 의사 가족들이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수습하여 지금은 기념관 경내에 묻혀 있다. 몇 년 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박열’을 통하여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졌지만 문경에 그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참배하는 이 없이 적막, 나이 지긋한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박열 의사의 생가 터에 건립한 기념관은 정부와 경상북도, 문경시가 건립기금을 출연(한국과 일본의 사회단체도 협찬)하였고 문경시가 관리, 예상보다 자료가 충실하고 전시실 등이 짜임새 있다. 시간관계상 주마간산하듯 1층과 2층의 전시실만 간략히 살피고 먼저 간 일행들이 기다리는 고모산성 행, 기념관의 팸플릿에 살핀 박열 의사의 유지 하나를 옮겨 적는다. ‘내가 일본 제국에 준 상처는 영원히 일본의 몸에 남아 심장을 썩게 해서 마침내는 제국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영원한 승리자다. 1926년 1월, 강자의 선언 중’
박열 의사 기념관의 팸플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