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을 걷는 길 위의 사제
김완
길 위의 인문학자라고 불리는 신정일 선생님의 시집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을 사서 읽고 있는데 (사)광주평화포럼 김형수 대표를 통하여 선생님이 시집을 내게 보내오셨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드러낸다”라는 고전적인 수사처럼 이번 시집에는 선생님의 길 위에서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신정일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그가 ‘아직도’를 견지하는 사랑의 힘으로 역사의 강물이 유장히 바다로 흘러갈 것을 믿는다. 미래의 어느 시간에도 신정일 시인은 ‘아직도’를 찾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는 머무는 자가 아니라 걷는 자이고,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여 ‘아직도’라는 부사는 ‘사랑한다’는 동사를 지향하는 시인의 시론이라고 적는다. 걷는 것은 현재를 확인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박태건(시인, 문학박사)-해설 중에서. 4부 62편의 시들 중에서 몇 편의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 마음속에 이해핳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그리움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아직도 가야 할 미지의 곳이 섬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고, 걸어가야 할 길이 길길이 펼쳐져 있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아직도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사랑하는 까닭은 아직도 그 섬이 어딘가에서 푸른빛 단장을 하고 내게 들려줄 절절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 여전히 나를 기다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직도를 사랑하는 까닭은」 전문 |
아직도 그리움이 넘실거리고 아직도 가야 할 미지의 곳이 섬처럼 남아 있다는 것 아직도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는 것은 시인의 정신이 청춘이다는 것이다. 영감이 끊기지 않고 희망의 물결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애송했다는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흔들리는 세상의 중심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남은 것은 없다
갈매기에게 묻는다 너의 생애는 어땠느냐 더는 내려갈 것도 더는 올라갈 것도 없는 세상의 끝 바다를 내려다보는 항구에서 내 여정을 뒤돌아본다
잘못 살아온 생도 잘 살아온 생도 이제 생각해보니 흔들리는 물결 같다고 끼룩거리는 갈매기여 -「갈매기에게 묻다」 전문 |
세상의 끝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항구에서 살아온 생을 되돌아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자기 성찰의 시간은 회한이 많고 의문이 생기는 시간이지요. 누구에게도 아닌 항구에서 늘 볼 수 있는 끼룩거리는 갈매기에게 생의 의미를 물어보는 시인의 모습이 흔들리는 물결 같지 않습니까? 삶과 죽음이 여일한 “죽음과 삶이 저녁과 아침 사이에 있다”-「시퍼렇게 살아」부분. 는 시인의 욕심 없는 담백한 정신이 엿보입니다. 다음의 시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떠나야 할 시간은/누구에게나/순식간에 찾아온다//봄눈이 녹듯/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듯”-「순식간에」 부분.
나약하고 겁이 많았던 한 꼬맹이가 백척간두에 한사코 매달려 있다 아슬아슬한 일들을 겪고 난 뒤에야 삶은 아름다워지는 것 존재는 골방 속에서도 쌀알처럼 빛나는 것이라고 아슬아슬 말하는 것 같다 바람을 타며 벼랑에 한사코 피어 있는 구절초 -「구절초」 전문 |
1연 7행 4문장의 짧은 시입니다. 짧은 시에 인생과 계절과 순간의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말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이런 시는 가다가도 자꾸 되돌아보게 하는 풍경 같은 시입니다.
시간은 누가 뭐래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가고 또 간다 세월의 끝을 아는 자 없어도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 일 년, 세월이 뭐 별거냐는 듯이 간다
비녀꽃이 피고 호박꽃이 피고 감꽃, 복사꽃이 서러움도 모른 채 피고 지는 그 사이에도 달개비꽃이 또 피고
그리고 세월의 강에 실려 나도 그대도 간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 길을 오늘 또 간다 -「강은 흐른다」 전문 |
늘 느끼지만 시간은 힘이 세지요. 시인에게 길을 걷는 것은 구도(求道)의 행위입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걷다가 죽는 일’이라는 것을 자각합니다. 길에서 사유하고 길에서 쓰고 길에서 걷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가히 길의 사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살다가 문득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그 길을” 시인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남의 평가란 게 사실 별거아닙니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지요. 자기 만족, 자기 행복에는 윤리가 전제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천하에 상남자가 어느 날 문득 산천을 노닐다가 아름답고 오묘한 풍경에 반해 죽도 선생이라고 자호를 지은 섬
산죽이 많아 죽도竹島라 지은 그 섬을 그리워하고 사랑해서 서실 하나 지어놓고 오가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지
기축년이라든가, 그해 가을 산천이 오색찬란하게 물들었다가 시들 무렵 조선팔도를 뒤흔든 역모 사건이 일어나 그 사내 이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지 장렬하게 자기가 꽂아 놓은 칼에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도 하고 혹자는 때려죽이고선 자살했다고 꾸며 의문사로 남은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도 부르고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도 부르지
결국 이 나라에 거센 피바람이 일어나 알토란 같은 조선 선비 천여 명이 죽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 선조가 시시때때로 동인과 서인을 시험하던 그 때에 불경스럽게도 “천하가 공공의 물건이고” “임금이 임금 같지 않으면 갈아 치워야 한다”라고 말하며 평등 세상 대동 세상 만들자고 했다지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를 설파했던 그 사람
슬픔도 없이 반성도 없이 내리는 비 그리움이 깊으면 사랑도 깊고 사랑이 깊으면 슬픔이 되어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간다는 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깨닫았다지 -「죽도竹島를 죽도록 사랑했던 한 남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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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면서 시대와 불화했던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시대의 거울이란 역사이고, 민족의 역사에 대해 아는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처럼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인의 시를 통하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생각하게 합니다. 죽도에서는 대동세상을 꿈꿨던 정여립을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시가 시대의 아픔과 나라 걱정이 담기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 라고 말했지요. 오늘도 조국의 어느 아름다운 산하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을 응원합니다. 형상이 없는 길, 길이란 집착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문득 든 생각, 시인은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을까요?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실까요? 유목과 정주의 삶,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고민하는 당신, 강호제현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저자 신정일: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 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 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뒤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 자전적 이야기인 『느리게 걷는 사람』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와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천재 허균』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것들』 『왕릉 가는 길』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조선 천재 열전』 『섬진강 따라 걷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낙동강』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시집, 꽃의 자술서 시집』 『시선집,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전10권)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등 10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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