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 a Itaiana, 약칭 ITALY)
이탈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탄생한 에트루리아(Etruria) 문명에서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르네상스(Rinasimento) 문화 시대까지 이 나라의 역사는 서유럽 문명의 원천이 되어 왔다. 건국 신화는 BC753년 4월 21일 로마의 탄생을 전한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로마의 창립자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형제의 동상이 지금도 이탈리아 건국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이후 BC509년에는 로마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BC146년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BC30년에는 이집트가 로의 속국이 되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 가서 전도하면서부터이다.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바오로를 개종케 한 하느님은 그리스도교가 전 세계의 종교가 되기 위한 교두보로 로마를 택하셨다. 그들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인류 구원의 복음을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넣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범신론적인 로마 문명과는 기본적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노예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신앙과 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과 갈등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교를 금지하고 잔악한 방법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자 들 중에는 제국의 어떤 용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당당한 자세로 죽음에 임한 자도 적지 않았다. 신자 수는 감소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드디어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고, 380년에는 국교로 인정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용하여 세계 종교로서 제국의 문화와 함께 온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395년에는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때부터 로마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해 493년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반도를, 827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정복했고, 951년에는 동프랑크의 오토 왕 1세가 이탈리아를 원정해 신성로마제국 왕에 즉위했다. 11세기경부터 시작된 자치도시는 도시국가의 시작이 됐으며 도시국가는 18세기경까지 이어졌다. 1802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정복, 수많은 통일 이탈리아 내각을 거쳐 2차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집권 후 패전과 함께 군주제가 폐지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영광과 그늘의 역사가 이 나라를 이끌면서 다양한 문화와 혼돈이 있는 나라로 변모되었다.
종교 :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교가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시차 : 우리나라보다 8시간이 늦다 .(썸머 타임 적용 시에는 7시간)
주의 :소매치기나 날치기에 유의하고 화장실을 갈 때는 남성은 Uomini 또는 Signore, 여성은 Donne 또는 Signora를 이용. 보통은 Toillette로 표시되어 있다.
▼ 로마 성벽
▼ 콜로세움 (Coloseo)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하고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경기장 옆에 네로황제가 세운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 도금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가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뒤 네로의 황금궁전(Domus Aurea) 옆에 있던 인공호수 자리에 세울 것을 명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콜로세움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 황제가 80년에 완공했다. 콜로세움 건설은 한편에서 네로가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제거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콜로세움 완공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아치와 볼트를 사용한 로마 건축 기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축조되었다.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콜로세움은 가로 · 세로가 각각 190미터 · 155미터에 이르며 4층으로 된 관람석은 4만 5,000개의 좌석과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석을 갖추었는데 최대 8만 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물로 만든 벨라리움(velarium)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시설과 환기구 역할을 했다. 관람객은 오늘날처럼 입구에서 번호표를 받아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고 5만에서 8만 명의 관람객이 단시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 188미터, 최소 지름 156미터, 둘레 527미터, 높이 57미터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4층을 제외하고,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원기둥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이어져 있다. 그리고 2층과 3층에는 조각상, 4층의 막힌 벽면에는 청동 방패들을 세웠다. 받침 기둥 · 지하층 · 받침벽 · 정면부 등만 값비싼 자연석을 이용했고 내부의 토대와 담은 저렴하고 가벼운 콘크리트와 기와를 이용했다. 콜로세움 건설에 사용된 석회석은 10만 입방미터, 철은 330톤이다. 대리석은 특별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유적으로 꼽히는 콜로세움은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콜로세움 건너편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예약할 때 식당 좌석에서 콜로세움이 보인다고 하여 기대하였으나 막상 들어가보니 외부가 보이지 않는 방이어서 실망이 컸다. 예약 때 콜로세움 앞이라고만 해서 꼭 기망 당하는 기분이었다.
▼ 대전차 경기장
예루살렘 제일의 부호 귀족 유다 벤허(Juda Ben Hur)와 황제의 권력 추종자로 변해버린 옛친구 호민관 멧살라가 로마 대전차 경기장(Circus Maximus Rome/Circo Massimo)에서 벌이는 경주에 등장한 그 Chariot(이륜 전차). 이 1인승 전차는 BC 약 30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말과 사람들 모두에게 가장 흥미진진하고 위험한 운동 중의 하나인 전차 경주는 적어도 BC 7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포츠였다
그리스人들은 이태리로 이 전차 경주를 전파했으며 그곳에서 에투르스칸이 BC 6세기경에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속도에 대한 에트루리아 사람들의 욕구를 공유하고 전차 경주를 대중오락의 구경거리로 바꾸었다. 특히 로마 귀족들이 열광하던 전차 경기가 열리던 곳인 대전차 경기장은 현재 황량한 풀밭으로 변해 있고 시민들이 운동을 하는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성벽을 나오면 보이는 피라미드 : 어느 귀족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그 무덤을 피라미드로 만들었다고 한다.
▼ 로마 가톨릭 의대 정문
이곳 가톨릭 의대는 교황님께서 몸에 이상이 있을 시 입원하는 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