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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터제 택시 등장
← 미터기(자동요금계산기)를 단 미터제 택시 내부 모습
1962년 4월 17일을 기해 미터기(자동요금계산기)를 단 3백대의 서울시내 택시가 서울시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내 택시 수가 2천 7백대에 달했지만 이날 우선적으로 3백대의 택시만이 미터제 택시로 시험 운행됐다. 정직하고 정확한 계산기에 나타나는 요금만 받으면 되고 또 내면되니 이전의 주먹구구식 요금 계산 때와는 달리 운전수와 손님간의 시비가 없어졌다.
미터제 택시의 기본요금은 300환 (1953년 2월 15일 제1차 통화개혁으로 원:환의 비율이 100:1 비율이었으나, 1962년 6월 10을 기해 원:환의 비율이 10:1로 다시 통화개혁됐다). 2km 이내에는 멀거나 가깝거나 3백환을 받고 500m를 넘을 때마다 미터기는 350환-400환-450환으로 50환씩 불어 표시됐다. 그리고 20분의 대기료 50환이 가산되며 달린거리, 시간, 영업횟수 등도 일일이 표시됐다.
미터제 택시에 대해 어떤 운전수는 ‘시비가 없어져 좋기는 하지만, 미터제 탓에 하루 수입으로 보면 2,3천환씩의 수입이 줄어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로 시가 10만5천환이나 하는 미터기 구입을 꺼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
[1995년] 판소리 거목 김소희 여사 별세
← 만정 김소희 여사
만정 김소희 여사가 1995년 4월 17일 65년 소리인생을 뒤로 하고 명을 달리 했다. 국악인으로서 일가를 이룬 예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박록수, 김여란, 박초월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1세대 여성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유일하게 생존, 국악계의 버팀목이 돼 온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의 타계는 국악인들에게 커다란 슬픔으로 받아들여졌다.
1917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만정은 12세 때 명창 이화중선의 노래를 듣고 감명 받아 소리에 입문했다. 송만갑, 정정렬 선생에게 ‘심청가’ ‘흥보가’를 배워 동편제 판소리 계보를 이어받았다. 일찍이 만정의 재능을 알아본 송만갑은 "요런 애물은 천에 하나 나오기 힘들제"하며 수업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판소리 외에도 김종기, 강태홍에게 가야금을, 정성린에게 살풀이 춤을 사사했으며 서예로도 국전에 3회 입선한 경력이 있다.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인간문화재가 됐으며 민속예술원 원장,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향사 박귀희씨와 함께 국악예술학교를 설립,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만정은 타고난 음악성은 물론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자태와 예인으로서의 재질을 두루 갖춘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조선
[1956년] 코민포름 해체
← 스탈린(1950)
1956년 4월 17일 '공산당 정보국'(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인 코민포름이 해체되었다.
코민포름은 소련의 후원 아래 1947년 9월 폴란드의 빌차구라에서 소련·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프랑스·이탈리아 등 9개국 공산당을 회원으로 해 창설되었다. 코민포름의 주요 활동은 공산당의 국제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선전물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후기 단계와 마찬가지로 코민포름도 국제혁명의 도구라기보다는 소련의 정책을 추진하는 도구로 더 많이 이용되었다.
1956년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와의 화해정책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코민포름을 해체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레닌 ‘4월 테제’ 발표
← 오보호프스키 공장의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바실리에프 그림)
1917년 4월 16일 깊은 밤,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 혁명지도자 레닌이 포로교환의 조건으로 러시아와 교전 중이던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같은 해 일어난 2월 혁명으로 지주-부르조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간의 대립이 첨예하게 맞서던 러시아였다.
다음날 4월 17일 오후 개최된 볼셰비키 회의에서 레닌은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그 내용인 즉,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전쟁을 계속하고자 하는 ‘임시정부 타도’,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 등이었다.
이날 레닌이 발표한 연설의 혁신성을 이해하지 못한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오히려 오랫동안 계속된 망명생활로 천재 레닌이 바보가 됐다고까지 비아냥댔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일 후 4월 27일. 볼셰비키와 임시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천재적 혁명지도자 레닌은 제 지위를 찾아갔고, 이에 ‘4월 테제’에 찬성하는 지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4월 테제로 촉발된 10월 혁명은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으나,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향후 70여 년 동안 계속됐다.
[1894년] 흐루시초프 Nikita (Sergeyevich) Khrushchov 출생
← 흐루시초프(1960)
1894년 4월 17일 태어남 / 1971년 9월 11일 죽음
"정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2명의 대표가 만나 악수를 한다고 해서 우리 체제들 사이의 모순이 그저 녹아 없어지리라고 생각하는가? 그 무슨 백일몽인가? " - 니키타 흐루시초프
흐루시초프는 평화공존 정책을 추구한 소련의 지도자이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교육을 받은 뒤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소비에트 노동자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모스크바의 스탈린공과대학에서 야금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내의 입지를 차츰 확립해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에서는 70명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스탈린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가담했다. 1940년대에는 주로 우크라이나에서 일하다가, 1949년 모스크바로 복귀해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원에 임명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베리아·말렌코프 등과 권력 투쟁을 벌인 끝에 제1서기가 되었다. 1958년부터는 총리직에 취임해 이후 7년간 당서기장과 총리를 겸임했다.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그는 스탈린 독재의 비리를 폭로한 비밀연설을 했고 평화공존의 원칙을 천명했다. 이같은 탈스탈린주의와 유연한 외교는 냉전시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 미국 U-2기 사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미국과 분쟁 위험이 있었지만, 1963년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는 등 지속적인 평화노선을 추구했다. 그러나 농업정책의 실패, 중소분쟁, 독단적 정부 운영 등으로 인해 당 지도부의 신임을 잃었고, 1964년 당서기직을 사임한 지 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23년] 동물분류학자 김훈수(金熏洙) 출생
1923. 4. 17 함남 갑산~.
1956년 이후 한국 동물분류학 발전에 이바지해왔으며, 특히 총 41종의 신종(新種)을 기재하는 등 한국 갑각류학의 기반조성과 발전을 주도해왔다.
경기공립중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피보디사범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사범대학 생물학과,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과,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1967~88) 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부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이밖에도 한국동물학회장·한국생물교육학회장·한국동물분류학회장·한국생물과학협회장·한국자연보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문화부 문화재위원, 한국학술원 회원(1992~)으로 있다. 1977년 하은생물학상, 1988년 대한민국학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동식물도감 제14권(집게·게류)〉(1877)외 20여 권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주로 미국 어로조사선 앨바트로스호가 1908~1909년 사이에 채집한 표본에 의거한 필리핀 군도 및 인근 해역의 부채게과의 게류(갑각류:단미류)〉(1983)외 100여 편에 이른다.(金元 글)
[1937년] 소설가 이상(李箱, 김해경) 일본 동경서 요절
1910. 9. 14 서울~1937. 4. 17 도쿄[東京].
개요
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생애와 활동
아버지 연창(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의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때부터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큰집에서 살았는데, 권위적인 큰아버지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불안의식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 1927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현상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1933년 각혈로 퇴직한 후 황해도 백천온천에서 요양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금홍을 만났다. 그뒤 다방 '제비', 카페 '쓰루', 다방 '식스나인'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34년 김기림·이태준·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했으며,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한 뒤, 그해 9월 도쿄에 건너갔다가 1937년 2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감금되었다. 이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4월 17일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그의 문학사적 뜻을 기리기 위해 문학사상사에서 1977년 '이상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기란 쉽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계열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사정을 내면화한 작품들로 소설 〈12월 12일〉(조선, 1930. 2~7)·〈휴업과 사정〉(조선, 1931. 4)·〈지도의 암실〉(조선과 건축, 1932. 4)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대칭구조로 되어 있고 일상어를 써서 개인적 체험을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둘째, 창작 노트에 실린 일본어로 쓴 작품들과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시들로서 〈이상한 가역반응〉·〈오감도〉·〈삼차각설계도〉·〈건축무한육면각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중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이 시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마구 뒤섞여 있고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숫자를 빌어쓰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일상적인 언어체계와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의 관념을 통해 고유의 기호와 담론구조를 창출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는데, 여기서 그의 관념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배운 근대적인 건축이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및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성에 기초한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도쿄행으로, 창작방법으로는 수필체의 소설로 나타난다. 셋째, 수필체 소설들로 〈지주회시 鼅鼄會豕〉(중앙, 1936. 6)·〈날 개〉(조광, 1936. 9)·〈동해 童骸〉(조광, 1937. 2)·〈종생기 終生記〉(조광, 1937. 5)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이전의 형식화된 기호체계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관념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한 인물간의 갈등과 대립보다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이 객관적인 현실을 관찰하며, 자의식을 확증할 수 있는 몇몇 현실적 징후들을 찾아헤매는 내면세계가 두드러져 있다. 특히 대표작 〈날개〉는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인해 1930년대 한국소설 가운데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이렇듯 그의 문학작품은 일상의 기호체계를 과감하게 부정한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 대해 한편에서는 일상적인 문법구조의 파괴를 들어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심리소설의 개척자,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확립한 모더니즘의 구현자로 높이 평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규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는 그의 문학작품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강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간을 구체적·역사적 인간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주체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이율배반적 성격을 지닌 점에서 비롯된다.
시집으로 〈이상전집〉(1956)·〈오감도〉(1987)·〈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1989) 등이 있고, 그밖에 1980년대 이후 발굴된 작품을 추가하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시전집〉(1991)을 펴냈다.
[1953년]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사망
← 1950년 10월 24일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당시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
1869. 12. 3 서울 ~ 1953. 4. 17 부산.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가 됐다. 1885년(고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886년 가주서(假注書)가 되었고 1887년 형조좌랑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이후 1892~96년 홍문관교리, 승정원부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다. 1896년 장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관직을 사임했고, 1904년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표를 올려 부임하지 않았다. 1905년 외부(外部) 교섭국장(交涉局長)으로 다시 등용,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한성재판소 소장,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1909년 법률기초위원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의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남만주에 들어가 사재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조국해방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1912년 학교를 퉁화 현[通化縣]으로 이전·확충했고, 1913년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베이징[北京]으로 가 위안 스카이[袁世凱] 총통을 만나 한인들의 보호를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베이징[北京]에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4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법무총장·재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고, 1942년 재무부장으로 다시 피선됐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진영을 이끌었다. 1947년 정국이 혼란과 대립을 되풀이하고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자 이에 회의를 느껴 일체의 공직과 절연하고 신흥대학(新興大學)을 설립해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해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1년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을 지냈다. 1952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4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동으로 옮겨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저서로 〈감시만어〉가 있다.
[1997년] 대법원, 전대통령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 징역 17년형을 확정
12·12및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사건 상고심에서 전씨에게 무기징역, 노씨에게 징역 17년형이 각각 확정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윤관 대법원장·주심 정귀호 대법관)는 17일 이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전·노피고인에게 군형법상 반란 및 내란죄와 뇌물수수죄 등을 적용,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이같이 선고했다.
이와 함께 전·노 피고인이 재임가운데 기업체 등으로 부터 뇌물로 받은 2천2백5억원과2천6백28억원을 추징금으로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1,2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박준병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확정하고 지난3일 사망한 유학성 피고인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다.
이와 함께 황영시·허화평·이학봉 피고인에게 반란 중요임무 종사죄 등을 적용해 징역 8년씩을, 정호용·이희성·주영복 피고인에게 징역 7년씩을 선고했다.
또 허삼수·유학성 피고인에게 징역 6년, 최세창 피고인에게 징역 5년,차규헌·장세동·신윤희·박종규 피고인에게 징역 3년6월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날 선고로 불구속 재판을 받아온 이희성·주영복·박종규·신윤희 피고인은 실형이 확정돼 형집행 절차에 따라 수감되게 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어떠한 헌법질서 문란행위도 명시적인 국민의 합의에 근거하지 않고는 용인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피고인들이 정치행위로서의 성공한 쿠데타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인정할 수 없으며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12.12와 관련한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과 병력동원, 5.18사건과 관련한 비상계엄 확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설치, 국무회의장 병력배치, 국회의사당 봉쇄 등에 대해 1,2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내란 및 반란 과정으로 규정했다.
특히 5.18과 관련 전피고인 등 5명에게 적용된 내란목적 살인죄의 경우도 “교전이 불가피한 사정을 알면서 재진입 작전을 강행한 만큼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이 있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공소시효와 관련된 내란 종료시점을 87년 6.29선언까지로 본2심 판단을 부정, “내란 및 반란행위는 계속범이 아닌 상태범으로 폭동행위 자체가 완성된 시점인 81년 1월24일 계엄 해제일로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한겨레 1997-04-17) /Google
[1976년] 한국-바레인, 국교수립
바레인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1976년 4월 한국과 수교하고 2001년 북한과 수교하였다. 한국은 1976년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였다가 1999년 폐쇄하였다. 1978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민속예술단이 방문·공연하였으며, 통상 증진을 위해 종합상사·은행·건설업체 등이 진출해 있다. 양국은 1980년 체육교류증진협력, 1984년 무역증진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1987년 문화협정, 1991년 항공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84년 국회의장 채문식, 1985년 외무부장관 이원경, 1995년 외무부차관 이시영이 바레인을 방문하였다. /naver
[1946년] 시리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들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페르시아 멸망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대왕 사후, 그의 부하인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안티오키아를 수도로하는 셀레우코스(셀루키드) 왕조가 건국되었다. 이후 왕조는 번영하였으나 파르티아, 이집트등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몰락해버렸고 기원전 64년 로마장군 폼페이우스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함에 따라 로마에 귀속되었다. 그후에도 시리아는 동방속주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그 수도인 안티오키아는 속주시리아의 수도로서 외항 셀레우키아를 통한 외부와의 교역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로마의 동방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가상적국인 파르티아를 견제하는 기지였다.
이후 기독교가 크게 전파되었으며, 안티오키아가 아시아 대주교의 소재지가 되었다. 이후 시리아는 4세기말 로마의 동서분열로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슬람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는 우마위야 왕조시대 왕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1260년 몽골군에 점령되었으나 맘루크의 영웅 바이바르스가 나타나 이들을 몰아내고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시리아를 위임통치령으로 삼고 지배를 강화하였다. 최초의 시리아 국기는 1932년에 만들어졌으며(지금과는 전혀 다른 국기), 현재의 시리아는 1946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잠시 이집트와 통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한적 있었지만 군사 구테타로 인해 탈퇴 하였다. 1970년 알라위파(시아파의 분파) 출신의 하피즈 알 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2008년 8월 21일에 시리아와 러시아는 회담을 가졌고, 이 회담에서 시리아에 러시아 미사일 기지를 설치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면서 중동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남서부의 다마스쿠스, 북부의 알레포와 홈스가 있다.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지중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시리아의 기후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다. 고지대에서는 겨울에 눈이 때때로 내리기도 한다. 상업적 가치가 있는 석유 유전은 1956년 시리아 북동부에서 발견되었다. 주요 유전지대로는 수웨이디야, 콰라취, 루매얀, 태옘, 다이르 앗 자우르가 있다. 이 유전지대는 이라크의 모술과 키르쿠크 유전지대와 이어져있기도 하다. 석유는 1974년 이래 시리아의 주요 자연자원 수출품목이다. 천연가스는 1940년 제베사에서 첫 발견되었다.
[1916년] 스리랑카의 정치가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Sirimavo Ratwatte Dias,) 출생
← 반다라나이케
1916. 4. 17 ~ 2000. 10. 10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라트나푸라의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의 크라이스처치에서 배웠다. 1959년 남편인 총리 S.W.R.D.반다라나이케가 암살되자 스리랑카자유당(SLFP) 총재가 되어, 1960년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다. 그 후로 좌익정당의 지지하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왔으나, 1964년 전력(電力)과 우정(郵政) 관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혼란이 생긴 데다가, 당내 우파의 책동으로 불신임 동의가 성립되었고, 1965년 총선거에서 보수세력인 통일국민당(UNP)에게 패배하였다.
1970년 사회주의 정당연합체인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총선거에서 압승, 다시 총리로 취임하였으나 인종분규와 경기침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1977년 총선거에서는 참패하였다. 1980년에는 의회에 의하여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공권력을 남용하였다는 이유로 직무수행을 중지당하였으나, 1986년 대통령 J.자야와르데네에 의하여 사면 ·복권되었다. 그 후 1988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94년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에 의하여 총리에 임명되었다. /naver
[1961년] 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사흘 만에 대패
- 피그만(The Bay of Pigs) 침공 사건
← 카스트로와 케네디, 그리고 피그만 계획을 주도한 CIA 간부 하워드 헌트
1961년 4월17일에 쿠바의 망명객 1,500명이 미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아서 쿠바의 남쪽 해안에 있는 피그만에 상륙하였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망명객들은 쿠바인들이 카스트로에 반대하여 궐기하면서 그들을 환영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란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48시간 동안 계속되었었는데 첫날 침입자들은 쿠바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둘째날은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후퇴하였고, 카스트로의 공군이 무기 적재함을 침몰시켰기 때문에 탄약 보급은 떨어져갔다. 망명객들은 단지 니카라구아에 본부를 두었던 취약한 비행단의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정규 공군의 지원사격이 없이는 침임자들의 비행기가 어디에라도 상륙하여 그들을 재 보급시킬 수 없었다.
이 계획은 아이젠하워 때 세워졌으나 케네디가 그것을 미국 군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승인하였던 것이다. “케네디는 이 계획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군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수차례 밝혔었다. …그러나 CIA와 쿠바 망명객들은 아마도 때가 오면 케네디가 별 수없이 미군을 파병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었다"고 역사가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는 술회하였다. 결국 그러한 기대는 허사로 돌아갔으며, 침입 이틀 후 탄약 부족으로 114명이 사망하였고, 그 나머지 망명여단은 쿠바군에 항복하였다.
그밖에
2004년 제15대 국회의원 지낸 이신행 전 기산 부회장 별세
2004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단체인 하마스 최고 지도자 란티시 암살
2003년 러시아 마피아 부산서 권총유혈사태
2003년 경선자금 한도초과에 ‘양심고백’한 김근태의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출두
2003년 ‘황제 다이어트’ 주창자 애트킨스 박사 별세
2003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 언론자유 상황을 우려하는 보고서 제출
2003년 이라크 파병 선발대 첫 출국
2003년 영국 최고 자선사업가, 존 폴 게티 사망
2000년 종합주가지수 93.17포인트(11.63%) 하락으로 하락폭-하락률 사상 최고기록 경신
1996년 국내최초 전자도서관 LG상남도서관 개관
1995년 4.19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
1993년 터키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 급서
1985년 북한.소련 국경조약 조인
1982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캐나다 신헌법 서명
1981년 진도-돌산 두 연육교 기공
1981년 폴란드 정부, 자유농민노조 결성 허용
1981년 한미문화교류위원회 발족
1981년 일본.북한 직통전화 개통
1980년 국제통화기금(IMF) 중국가입 승인
1975년 캄보디아의 해방세력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 수도 프놈펜을 점령
1975년 장쩌스 총통 장례식
1974년 내외통신 창간
1971년 방글라데시공화국 수립
1969년 체코 공산당 제1서기 알렉산더 두브체크 실각, 후임에 후사크
1968년 일본, 조총련계 조선대학 인가
1966년 폴란드 교회(기독교) 천년 기념 행사
1965년 한일협정반대 데모대, 효창공원서 시위, 파출소 점거
1961년 북괴, 유엔(UN)의 조건부 초청 거절
1952년 국회 야당의원,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1946년 중외신보 발간
1946년 단일클론항체 생성기술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면역학자 쾰러 출생
1941년 유고슬라비아, 독일에 항복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1911년 조선 토지수용법령 공포
1897년 그리스-터키전 발발
1895년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1880년 서울에 일본 공사관 설치
1790년 피뢰침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1586년 영국 극작가 존 포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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