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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갑절의 영력을 주소서(김현정)
자 오늘의 말씀은 열왕기하 2장입니다. 열왕기하2장 7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갑절의 영역을 주시옵소서 입니다. 엘리아가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자기 문하생들 생도들 있는 곳으로 이렇게 보내시죠.
그런데 그 문화생도들 중 엘리사라고 하는 제자가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얘기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선생님을 하늘로 취하신다고 한 거를 니가 알지 않느냐 아 근데 뭐 그렇게 열심히 따라가느냐 아 따라가 봤자 같이 올라갈 것도 아니고 그런가 하면 엘리야도 너 나 고만 따라와라 너 알지 않느냐 그런데도 나는 끝까지 따라갈 겁니다. 그래서 엘리아가 물어보죠. 니가 분명히 무슨 소원이 있구나 니 소원이 대단절 뭐냐 하고 물었더니, 엘리사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당신이 받으신 영역에 갑절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영감이라고 설명을 해서 표현을 했는데, 사실은 영감의 갑절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지 뜻이 분명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에 감동을 받아서 선지자들이 받아서 쓴 것이 이 성경책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영감으로 된 책이다. 그런 얘기인데 엘리야가 엘리사를 따라가면서 원하는 거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영역을 받으려고 이렇게 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거는 선지자란 누구냐 갑절의 영역을 받은 사람 또는 갑절의 영역을 사모하는 사람 이렇게 해서 엘리야와 같이 자기 스승에 그 받은 은혜의 갑절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그러한 일꾼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이 말씀을 듣고 정말 갑절의 영역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다 충만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왜 갑절의 영역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일인가
왜 이것이 복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아서 어떻게 되는 거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 그러니까 첫째는 권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니까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고 나니깐 나타난 현상은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도 이렇게 성령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니까. 제일 처음 하시는 일이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에도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에게도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건져낼 때 애굽의 바로 왕을 찾아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그에게 요구할 때에 그에게 나타난 거는 10가지 재앙을 쏟아 내리는 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도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실은 그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참 종들에게는 말씀에 능력이 있고 찔림을 주고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만 거짓 선지자들 잘못된 사역자들 옛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런 사람들은 말로는 선지자인 척하고 그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마태복음 5-7장에 산상수훈 마지막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맞히심에 무리가 다 놀라니 왜 놀란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기들이 늘 들어왔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이런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씀하면 말씀하는 대로 막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능력이다. 하나님의 일을 지혜롭게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나갈 수가 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능력을 받아야지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 될 수 있다 하는 거죠.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행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다 내 뜻대로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자기의 뜻대로 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거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이렇게 다른 거죠.
우리가 예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아셨어요. 그러면 우리 인간의 생각은 뭡니까? 나에게 그런 십자가 고난이라고 하는 어려움이 온다 하는 걸 알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피해서 갈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세인들 이런 사람들의 눈에 거스르지 아니하도록 되도록이면 그들 비위도 좀 맞춰주고 이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예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겠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신조를 아셨기 때문에 저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이 역사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를 살리신 살려내신 그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가지고 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막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가 하면 또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죽이려고 했다고 설명하고 있죠. 공관복음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예수님이 능력 있게 했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열등의식을 느끼게 되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만약 우리는 어떻게 하겠느냐? 저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거를 안다면 우리는 절제할 거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야죠. 저들에게 밉보이면 안 되죠. 어떻게 해서든 되도록 부드러운 말을 하고 그렇게 해서 겉으로 보기 아주 화목하고 가깝게 지내는 것 같고, 이렇게 해야지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런 길을 가시지를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마지막에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는 결정적인 빌라도에게 타협하지 아니하고 불복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고 하늘에 있는 나라다 이렇게 강조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냐 인간의 뜻이냐 이거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갑절에 영감을 받아야지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엘리야가 엘리사의 갑절의 영역을 간구한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무엇이 위대한 것이냐 하는 거를 알았어요. 그가 깨달은 것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그가 세상 승천할 때에도 땅에 서 있으면서 그를 우러러 바라보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남은 생을 살았어요. 그래서 엘리사가 죽을 때에도 그 땅에 아하스 왕이 와가지고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옛날 엘리사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알기로는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된다. 내가 모시는 나의 스승 엘리야보다도 갑절의 영역을 받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장차 이 나라를 구해낼 수가 있다.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갑절의 영역을 받아 가지고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해야 되겠고 이렇게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위대한 일꾼들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지켜나가고 이 미국을 지켜나가고 세계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가 갑절의 영역을 받아서 살아야 할 것인가? ]
첫째, 이 세상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지기 때문에, 옛날에 받은 그 은혜 가지고는 앞으로의 세상을 감당해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갑절이나 악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의 현실을 보면 그러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자꾸 줄어들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자꾸 줄어들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인 신자들로 가득하고,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얼마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어두운 일들이 가득하니까 정말 아 주님만을 섬기는 일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심지어 로마 교황이라고 하는 녀석이 동성애자들을 축복한다고 그 딴소리를 했으니까요? 로마교가 얼마나 사악한 종족인가 하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 세상의 재난과 환난이 갑절이나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급해졌습니다. 멸망으로 빠져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살려내야 할 것인가? 셋째로는 이 세상의 유혹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유혹이라고 하는 건 도덕적인 타락을 말하는 곳이기도 하구요.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려는 유혹 뭐 율법적으로 이렇게 죄를 짓게 만드는 거, 이제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교회에도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짓된 것들이 가득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는 그런 말씀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거는 사실 기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주님이 오실 날이 각절이나 더 앞당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주님 오시기 전에 빨리빨리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로는 주님이 오실 날만 가까워진 것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갑절이나 더 짧아졌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쇠약해지고, 활동하기 점점 힘들어지고 그리고 영역도 떨어지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는 의욕도 쇠퇴해 지고.. 자 이러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각자의 영역을 받지 않으면 감당해 나갈 수가 없겠다 하는 것입니다.
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일곱 번 째 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거는 오늘날 우리 목회들을 볼 때에 탄식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옛날 목사님들은 기도에 전념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그래서 간절하고 진실하고 힘 있게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목사님들이 반면에 기도를 안 해요.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아요. 간절할 마음도 없어요. 그냥 많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세상 이것저것 아는 게 너무 많아요. 이런 거 설명하느라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는지 그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 이런 안타까운 세상이 되어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다 각별의 영역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갑절의 영역을 받을 수 있느냐 금방도 말했지만은요, 첫째로,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거는 이 갑질의 영역을 받아야 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야지 합니다.
둘째로, 철저히 회개하는 거죠. 회개하지 않으면 이 귀하고 신령한 것이 오지를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더러운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사가 이 거룩하고 깨끗한 은사가 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더욱 정렬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들고 이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라가려고 할 때에는 우리 앞에 여러 가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잘 따라서 잠깐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모두가 다 성명의 충만함을 받아 가지고 이 나라를 살려내고 우리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큰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 느낀 소감 문 :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주의 종으로, 주의 백성으로 소금맛을 내며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엘리사에 있었던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간구했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도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간구해야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악한 생각, 탐욕, 탐심들을 회개함으로 우리마음을 청결케 해 야 한다는 것을 다시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입술로만 외치는 사람은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이 뼈를 때립니다! 좀 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주님 앞에 코람데오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 간구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6.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
오늘의 말씀은 열왕기 상 17장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엘리야가 아합왕을 피해 시냇가에 숨어 있었던 때의 이야기가 본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은 말라가는 시냇가에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리야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엘리야는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첫째: 엘리야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인지도 모르는 신비한 인물이다. 마치 멜기세덱을 가리켜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다고 설명했는데 엘리야도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하간 구약시대에 나타나는 다른 인물들은 그래도 족보를 찾으면 부모가 누구고 어느 지파 사람이고 이런 것을 알 수 있지만 엘리야는 그냥 디셉사람이라고만 나오는 근원을 알수 없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유명하냐? _ 엘리야는 선지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고 이 사람이 아합을 대적해서 아합왕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무섭게 책망하고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선지자들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일깨워준 사람이다.
또 무엇이 중요한가? _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형이 되셨을 때 이렇게 신비한 모습으로 정말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처럼 천사처럼 이렇게 변형을 받으셨을 때 그때에 나타났던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였다고 하는 것이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다.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런 두 인물이어서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또 변화산에 나타난 모습을 볼 때 모세는 죽었다가 부활한 그래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대표고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간 사람의 대표고 그래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땅에 두종류의 사람들이 하늘로 들림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인데 첫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서 이렇게 들림을 받는다고 그랬다. 또 하나는 아직 이 땅에 살아있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또 변화를 받아 가지고 그러니까 이렇게 변화체로 하늘에 들려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두 분은 예수님과 인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셔야만 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모여서 나누었던 그런 면에서 너무너무 위대한 인물이다.
오늘 17장 1절에 보면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하고 아합왕을 만나 땅에 비도 오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간은 3년 6개월로, 우리와 성종이 똑 같은 사람이지만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엘리야의 기도가 이렇게 능력이 있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하는 것을 말씀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도 의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엘리야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아야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왕을 만나서 선포하라 말씀하시고 또 숨겨주신다. 어디로 숨기는가? 그릿 시내가로 가서 숨어있게 하신다. 거기에다 오막살이 집을 짓고 있었는지 텐트를 치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시냇가에 어떻게 우거하고 있었을까?
성경은 말하지 않고 있는데, 엘리야의 말처럼 진짜로 이슬도 안 내린다. 그런데 아함왕은 하나님께 내가 벌을 받는구나 잘못했습니다. 우상숭배한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해야하는데,
그 한마디를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악인들처럼 잘 못해 놓고도 속질하게 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는 ㄱ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서가 중요하죠. 니느웨의 왕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온 백성이 왕으로부터 금식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이렇게 해서 니느웨성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세월이 지나서 시냇물도 자꾸 말라가죠. 엘리야가 마실 수 있는 물조차도 없게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엘리야를 사렙다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다. 아합왕이 화가 잔뜩 났다.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는 하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간다. 거꾸로 간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엘리야를 잡아라고 포고를 내린다.
이스라엘 나라의 군병들이 전부 저 엘리야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찾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숨겨 놓으시면 찾아낼 인간이 없어요. 하나님이 숨겨주시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안전하게 숨어있다고 해도 다 들통이 나죠.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 주 날개 및 내가 편안히 쉬네 하는 그런 찬송이 있죠. 주님의 날개 밑이 제일 안전한 피난처다. 거기에 숨어있으면 아무도 나를 잡아가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앞으로 이 땅에 큰 환난이 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벌써 이 환난은 전 세계적으로 지금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있다. 온갖 재앙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크게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 이런 것이 터져서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전쟁이 이렇게 번지면서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점점 어려워진다.
먹을 것도 없고 양식도 부족하고 재앙은 많아지고 질병이 창궐하면서 얼마나 어렵겠는가? 인심은 사나워지고 이런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말라가는 시냇가에서 엘리야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선지자를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홀랑 태웠다? 자 이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훈련을 통해 능력을 주시고 이 능력을 받은 그 위에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믿음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엘리야를 어떻게 훈련시키는가를 잘 깨달아야 한다. 야곱이 축복할 때 창세기 49장에 열두지파에 대해서 쭉 예언을 하면서 축복할 때 요셉에 대해서는 하늘의 보물인 이슬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에게는 하늘의 보물이 내려오는데 이 보물이 이슬이다. 이 보물을 받지 못한 사람은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부자라고 큰소리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보시기에는 너는 가난뱅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면 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큰 책망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자리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을 자꾸 체험을 한다. 날은 가물어서 햇볕이 쨍쨍 내려 쬐고 물은 바싹 말라 들어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서 당신의 종을 지켜주신다. 그런 가운데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천지 만물을 다 창조하신 분이시고 그분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이렇게 지켜주시는구나. 이런 기쁨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부르실 때 첫 번째로 나타내 보이시는 기적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기적이다. 둘째로 엘리야가 깨달은 것은 숨어있는 생활의 가치를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숨겨 놓으셨다.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으셨다. 사람의 본심은 자꾸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나 잘났다 하고 떠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숨어 있으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는 스랍천사들은 이사야서 6장에서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실제로 날아다니는 날개로는 두 날개밖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로 무엇을 알아야하나? 하나님은 한걸음씩만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앞으로 될 일까지 다 알려고 애쓰지 말라, 엘리야를 시냇가에 숨겨두실 때 너 여기 한달만 있어라 그러면 내가 그 다음에 너를 어디어디로 옮겨주겠다 이런 말씀 안 하셨다. 그냥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으라, 거기 가서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장차 이런이런 일들이 생긴다 하고 가르쳐주셨는데 그 때를 물어볼 때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넷째로, 엘리야가 또 배운 것은 말라가는 시냇물을 보면서 걱정 안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택하여 나에게 물을 주실 것이다. 땅에서 샘물이 솟아나서 그 물을 마시고 살 수도 있게 하실 거고, 하나님은 방법이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 선지자들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자 그러면 우리 삶 속에서 나의 지금의 모습에서 말라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돈이 말라간다. 둘째로 건강이 말라간다. 또 세상인심이 말라간다. 특별히 마지막 때에는 무엇이 말라지는가?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말라진다. 사랑이 식어진다고 한다.
다섯째로 엘리야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낙심했을까? 아무리 기도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약속을 안 해 이 기간이 3년 6개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엘리야는 모른다. 그냥 기도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와 백성들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모르는 백성들은 좌절하고 낙심한다. 살 길이 없으니까, 자살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부자나 잘난 사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헐뜯고 죽이려고 애를 쓴다. 그런 속에서 엘리야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근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놀라운 은혜의 시대가 열린다, 나를 통해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엘리야도 얼마나 간절하게 기고하고 애쓰고 몸부림치던 그 가운데서 능력을 받아가지고 갈멜산에서 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저들은 못 깨닫는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우리가 이 능력을 받아야한다.
우리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나가는 놀라운 새 역사를 이루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소감문 _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먹이고 입히시고 돌보시고 무엇보다 그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케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종말의 지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엘리사와 같은 주의 종의 모습이 필요한 때이고 사모해야하고 받아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27) 이 소리가 들림은 어찌 됨이요?
사무엘상 15: 13~ 21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선지자란 누구인가? 23번째 시간입니다.
이 소리가 들림은 어찌 됨이요입니다. 14절 말씀 한 절만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까 하니라. 아멘
사울이 왕이 됐습니다. 그리고 아말렉과 그 큰 전쟁에서 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셔서 사울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명령을 내리셨어요. 이 아말렉 군사들, 적군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그리고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전부 진멸해라. 근데 사울은 승리에 도취해가지고 너무너무 신나고 좋았겠습니까? 적군들은 이렇게 다 죽인다고 했지만 짐승들도 잡아서 다 죽이려다 보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잖아요. 이 귀한 짐승이 다 돈인데 이것이 다 재산인데, 이걸 가져가면 우리나라에도 얼마나 큰돈이 되는데
이것을 왜 괜히 다 죽이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좋은 것들은 남겨놓고, 좀 못한 것들만 다 이렇게 죽였습니다. 그렇게 사무엘이 이 전쟁터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을 영접합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로부터 큰 칭찬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대답은 전혀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이 14절 말씀 아닙니까? 사무엘이 묻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또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된 것입니까?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겁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여기는 군대로 치면은 연병장입니다. 전쟁터입니다. 연병장은 군인들이 훈련하는 곳이고, 전쟁터는 막상 나가서 싸우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전쟁에 이기고 돌아 와가지고 백성들이 이 군사들이 다 이렇게 모여 있는 한 곳에 사무엘이 찾아갔는데 사무엘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양들의 소리, 염소들 소리, 소의 소리 이런 짐승들 소리가 막 들렸습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소리는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다 죽이라고 했는데 왜 안 죽였습니까? 그 말이죠. 그랬더니 사울이 핑계를 댑니다. 예 이것은 그 짐승들 중에서 좋은 것들을 골라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려고 남겨놓은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언제 자기에게 재물 드릴 양을 남겨놓으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신 일이 없어요.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의 생각으로 죽이기가 아까워서 이것을 남겨두었었는데 하나님의 책망이 즉시 거기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행했다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는 잘 했습니다~ 하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세밀하게 보십니까? 정말로 네가 나의 뜻을 다 행했느냐?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고 증거를 들이미시잖아요.
우리가 이 말씀을 놓고 이렇게 곱씹어보면서
정말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무엇이라고 책망하실까? 주님이 우리 교회에 찾아오시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또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시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이 짐승들의 이 소리가 들리는 것이 어찌 된 일인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하나님이 과연 그런 제사를 기쁘게 받으실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재물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한 거죠.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이 땅을 의롭게 거룩하게 살아가고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제사가 열랍될 수도 있고 제사가 거절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이렇게 유대교가 타락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뱀들아 독살의 새끼들아 하고 무섭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무서운 책망을 받고 그들은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도 무너져 버리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다 그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 땅에 정말 집도 없고, 거처할 곳도 없고 유리방황하면서 유대민족이 전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버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오늘 드리는 예배가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이 되어야 한다하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백성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옛날 사울 왕 때에 이스라엘 땅에 전쟁이 있었다했는데
에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떨까요? 오늘의 우리 교회에서는 어떨까요? 마지막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마지막 시대에는 얼마나 타락한 시대가 되는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또 돈을 사랑한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세상은 전부 돈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말세에 대 환난 가운데에서 크게 망하는 자들이 생기는데 누가 망하느냐? 상인들이 망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큰 재벌들, 부자들입니다. 이들이 다 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돈으로 하나님을 삼고, 돈을 벌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온갖 부정한 짓들을 행하고, 뇌물을 먹이고 이렇게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버림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좁혀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하겠다고 나온 우리의 마음속에 혹시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가? 하고 살펴봐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짐승들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우리가 이유를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첫째로 사울은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신 것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큰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것만 있어요. 그래서 이제 죽어야 됩니다. 바울은 뭐가 죽었다고 그랬습니까? 갈라디아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육신도 죽었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데 어떻게 죽었어요? 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렇게 해가지고 이게 다 죽었대요. 심지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씀하고요.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말은 물속에 우리가 들어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나의 옛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 죽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물에서 올라온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례를 제대로 받았다면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에 세례를 제대로 받은 사람이 어디가 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이 죽어야 돼요.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내 힘으로는 죽을 수가 없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옛 사람을 죽여주시고 이렇게 이 관계가 이루어져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양 한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양을 내가 죽인다. 그 말은 내가 양을 죽이지만, 동시에 그 양이 나의 죄를 죽입니다. 나의 옛 사람을 죽입니다. 나의 악한 성품을 죽입니다. 헛된 세상 욕심을 죽입니다. 그래서 그 양의 피를 가지고 내가 죄 사함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양의 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피입니다. 그래서 그 피가 우리 속에 모든 욕심까지도 죽이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헛된 마음도 죽이고,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이것이 안 이루어지면 우리 속에서 여전히 짐승의 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이 듣기에는 아주 달콤하고 교양 있고, 아름답고, 문자가 유식한 문자를 쓰고, 그래서 말을 잘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 말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짐승의 소리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성해가지고 정말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지혜로운 사람 다 되어야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울은 핑계를 댔어요. 뭐라고 핑계 댔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남겨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그러니까 그랬느냐 그랬으면 뭐 내가 용납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의 중심을 꿰뚫어보시고 그가 제사할 마음은 눈 곱 만큼도 없었는데 거짓말했다는 것을 아시지요 하나님이 죽여 버리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걸로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이 그걸 기뻐 받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하간 어찌 되었거나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제사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냥 살려두지 말고 빨리 잡아서 제사를 드렸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했어요. 일천 번제라고 하는 것은 제단 천개를 만들고 소 천 마리를 잡아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이걸 다 불살라서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에 한 마리씩 이렇게 해서 천 번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울도 정말 마음만 있다면 그 자리에 재단을 쫙 만들고 그래서 짐승들을 정말 좋은 짐승들 골라가지고 자기도 정성껏 하나님 앞에 다 태워서 번제를 드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을 다 바치지 않은 죄, 이것이 사울왕의 둘째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는 것이 큰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쳐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될 것을 찾아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걸 바치지 않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욕심을 위해서 쓰니까 거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거를 분별할 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것이 무엇이고 내 것이 무엇인가? 분별해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바쳐야 될 것을 바치면서 살아야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간하라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래서 그다음에 2절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산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려야 될 영적인 예배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뚱이는 이게 내 거라고 말하지만 내 거가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것이다. 잠깐 이 세상에 우리를 잠깐 살려두신 동안 내가 이 몸을 관리하고 있는 것뿐이지 심지어는 그 관리하는 것조차도 주님이 다 해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의 몸도, 나의 재물도, 내가 가진 재능도, 내가 가진 지식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또 남인 것 같아도 나의 아내나 남편도 하나님의 것, 내가 낳은 자식들도 하나님의 것,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두 손 들고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여 지도록 우리가 관리하고 하나님께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될 것을 바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돼요.
셋째로 어떤 잘못이 되어 있느냐? 사울은 여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 짐승들... 이 연병장에 군사들 훈련해야 되는 여기에 짐승들을 끌어들인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도 짐승들은 이 성전 저 바깥에 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 성전 안으로 끌어들여서 이 장사꾼들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주느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무섭게 질책을 받고 크게 책망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끌어들이느냐? 이게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평생 사는 동안 끌어들이지 않고 살 수가 없어요.
첫째 결혼을 한다. 내가 아내를 나의 집으로 끌어들인다. 또는 여자가 남편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다. 이거는 누가 누구를 끌어 들인다 라기 보다도 다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옛날 어른들도 그랬어요. 집안이 잘 되려면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된다. 며느리 잘못 들여놨다가 집안이 풍비박살 나는 일이 생기죠. 사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이나 되는 이 시편의 제1편 구약의 찬송가라고 하는 제1편 찬송가 1장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에서 뭘 말합니까?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 처음에는 1절에서는 부정적으로 봐요.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곧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친구를 잘 사귀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끌어들이느냐? 내가 이 사람을 친구로 삼느냐? 친구 삼지 않느냐? 이것은 나의 선택권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잘하라고 하는 거예요. 잘못된 사람을 끌어들이면 큰일 나는 수가 생기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나쁜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사실 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저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해주셔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 안에는 각종 이단들이 정통이라고 하는 탈을 쓰고 이렇게 찾아와요. 그래서 우리는 정통인 줄 알고 받아들였는데 사실은 이단일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분별해내느냐 이것은 성경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으로 분별을 해나가는 거죠. 이거는 옳다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히 분별해서 우리가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배척할 수 있고 이렇게 성경을 잘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해서 되는 거 아니고, 신학교 공부 한 3~4년 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정말 기도를 막 많이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 진리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지 분별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참된 선지자를 찾고 계십니다. 겉으로는 나도 선지자다 하고 떠드는 사람들 많이 있지만, 이 세상은 그 참 선지자는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다 귀하게 써주셔서 마지막 때에 정말 훌륭한 일꾼 만드시고 우리 속에 이 짐승들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만이 우렁차게 울려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설교를 들으면서 받은 생각 :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내가 보기에 어떠하던지 그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영적분별인데, 이 영적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성령을 받으므로서 기도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 후보생들로서 단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개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성령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중요성을 곱씹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8)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던 줄을 알라
오늘의 말씀은 에스겔서 34장에서 두 번이나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던 줄을 알지니라> 이 말씀을 제목으로 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에스겔서 2장 5절에도 또 한 번 나오지요. 그리고 또 똑같은 말씀이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고치려고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 엘리사가 그 말을 듣고 자기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을 나에게로 보내세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기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그가 알리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다른 나라에도 왕이 있고 이스라엘에도 왕이 있어요. 다른 나라에도 제사장이 있고 이스라엘에도 제사장이 있어요. 물론 누구를 섬기고 누구에게 제사하느냐 하는 면에서는 다르지만 이렇게 왕이라든지 제사장이라든지 이런 거 다 있었습니다. 또 높은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도 다 있었고, 과학자도 있었고, 유명한 장군들도 있었고, 의사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똑같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나라에 없는 특별한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있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그것이 바로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말한 거잖아요. 나아만 장군이 이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에스겔 33장 33절에도 똑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스겔 2장 5절에도 똑같이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었음을 알리다> 이제 그런 말씀이에요. 대한민국에는 그럼 누가 있어야 되겠느냐. 똑같은 얘기죠. 대한민국에도 선지자가 있어야 된다.
선지자가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할 의미가 없는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가 억지로 독립은 해가지고 저렇게 버티고 있지만 계속 전쟁이 나고, 그 중동을 세상의 화약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세상의 화약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전쟁도 아마겟돈에서 일어난다, 아마겟돈이 바로 이스르엘 평야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다. 물론 이게 상징적인 의미니까 진짜로 이스르엘 평야가 될지는 그거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볼 때는 저 우크라이나 땅이 아주 거대한 평야 지대고 곡창지대인데 거기에서 지금 전쟁이 저렇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은 저 우크라이나의 이 평야가 바로 세계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겠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대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아담의 가정에서부터는 아벨과 가인의 대결, 이렇게 해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아벨을 쳐 죽여서 이겼어요. 그다음에 가면은 야곱과 에서의 대결,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니까 야곱이 집을 떠나서 도망가죠. 그래서 외갓집으로 가서 거기서 20년 동안이나 살고 이러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괴로움은 뭐냐 이거는 거짓 선지자들이 참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수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저 다른 나라 사람이 원수가 아니고, 나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내 나라 사람들이 원수가 되는데 내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누구냐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말이죠. <나도 선지자다> 하는 자들이 사실은 참 선지자를 괴롭히고 대적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일반적으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거를 우리가 살펴봐야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다른가? 참 선지자는 항상 그 외치는 메시지가 똑같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너희가 돌아오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한다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는 거를 외쳤어요. 그런가 하면 거짓 선지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죄를 크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걸 자꾸 앞에 내세워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좀 지었어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다. 회개도 강하게 정말 눈물 콧물 흘려가며 밤을 새워가며 이렇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면서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는 가르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 내가 이렇게 이렇게 나쁜 짓을 좀 했습니다.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옵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 믿고 내가 주님 앞에 왔사오니 주여! 할 수 있으면 이거 다 용서하시고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정도로 두루뭉술이 이렇게 하고 사람 귀에도 듣기 좋은 소리하고 이렇게 하고 끝난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구약시대에만 그렇게 된 게 아니고요. 지금 오늘에 와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뭐가 달라야 되느냐. 회개를 강조하느냐 하는 회계에 대한 이야기는 싹 빼놓고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살살 해가면서 이렇게 할 것이냐 이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참 선지자의 말을 잘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합니다.
둘째로 참 선지자들은 너희가 죄를 회개하지 아니면 나라가 망한다 하는 거를 가르쳐요. 그렇지만 거짓 선지자는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또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백성들에게 <여러분 죄를 회개하세요.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망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다닐 때 보세요. 그냥 자기만 괴로운 것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도 전부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그를 공격하고, 매국노라고 하고, 역적이라고 하고, 이렇게 하면서 예레미야만 없애버리면 아무 일도 없이 없게 되는 것처럼 이런 착각 속에서 이 사람들이 참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셋째 특징은 참 선지자는 많은 박해를 받았고, 반대로 거짓 선지자는 참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도 똑같습니다. 지금도 바른 소리 외치면 이 거짓 선지자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요. 동경 일본의 큰 지진이 일어났었잖아요. 그래서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조용기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일본은 워낙 우상숭배를 많이 하는 나라고 우상숭배를 회개해야지만 한다. 우상숭배하기 때문에 이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고선 외쳤더니 한국에서 목사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가지고 조영기는 이단이다 하고 막 그냥 얼마나 욕을 했어요. 지진이 일어난 원인이 우상숭배 때문에 된 거냐 해가면서 이건 자연 현상인데 저절로 일어나는 거지, 이거를 어떻게 우상숭배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그렇게 거짓되게 가르치고 백성들을 거짓되게 인도하느냐 이러면서 악을 써댔던 일이 있습니다. 이런 거를 생각해 볼 때에 정말 바르게 외치면 반드시 박해를 받고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소리하면은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이래서 선지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뭐가 다르냐? 참 선지자는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한 사람들이고 거짓 선지자는 참 선지자를 박해한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들 듣기 좋은 소리 잘하고 세상적으로 인기를 얻고 권세와 결탁을 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선생 노릇도 하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되고 이런 식으로 인간에게 아첨해가지고 영접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졌더라 하는 것입니다. 자 또 우리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다른가? 참 선지자는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면 박해가 많고 고난이 많고 어려움이 끝없이 찾아오지만, 그것이 생명길이고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서야 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많아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그대로예요. 그래서 우리 시편 1편 2절에 있는 대로 복된 사람은 누구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죠. 그건 시편 19편에도 마찬가지, 시편 119편에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그저 눈만 뜨면 하나님 말씀 이게 신명기 6장 소위 쉐마라고 하는 거기에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이게 쉐마인데요.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니 너희가 그의 율법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라. 길을 갈 때도 눈을 감았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그래서 이 단에도 전부 성경 써놓고 집에도 문설주에도 붙여놓고 벽에도 붙여놓고 천장에도 붙여놓고 이렇게 다 해놓으라고 하는데요.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다윗처럼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말씀에 서서 이렇게 하나님 잘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말씀도 주시고 계시도 주시고 별별 희한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이러면서 한량없는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큰 복을 받아가지고 살아야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 놀라우신 은총을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찾고 계십니다.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나의 일꾼이 될 것이냐? 예수님은 종말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시면서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어 집안사람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 말씀하시죠. <너희가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죠. <근신하고 있으라> 하고 경고하시죠.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잠자지 말고 세상 잠에 취해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새롭게 변화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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