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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4주)
“저절로 그리 되었다”
겔17:22~24; 고후5:6~10, 14~17; 막4:26~34
요즘은 낮이 최고로 길어지는 때입니다. 엊그제 동지 때를 맞은 거 같은데, 벌써 이번 주간에 하지를 지나게 되지요. 얼마 전과는 달리, 저녁 8시가 되어도 완전히 캄캄하지 않고 아침 4시가 넘으면 훤한 여명이 비쳐오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매년 맞는 일이지만 늘 신기하고 새롭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 신비롭고, 똑같은 시간에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 것이 신비롭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똑같은 하루가 아닌 것이 신비롭습니다. 이 모든 것이 누가 인위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지금 호수공원에는 한껏 녹음이 우거졌습니다. 어느 사이에 벌써 무성한 숲이 되었습니다. 물론 관리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겠지만, 제가 보기엔 “저절로” 그리 된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호수공원엘 가서 달리기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시간에는 나 자신도 “저절로 그리 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4장의 예수님의 비유 중에 좀 이상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농부)이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씨를 뿌린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싹을 내고 이삭을 내고,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내는데,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소위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입니다.
여러분, “저절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되는 요즘 세상에서 이 비유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좀 머뭇거려집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비유가 하나 나오는데, 소위 “겨자씨의 비유”(30~32절)지요. “겨자씨는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러면서 오늘 두 가지 씨앗의 비유가 소개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좀 관념적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뭔가 우리와는 먼 것 같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걸까? 뭔가 좀 의아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평범해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이 알찬 낟알을 낸다...”
요약해 보면, 하나님 나라는, 씨앗을 뿌린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농부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듯이, 그래서 농부는 열매가 익으면, 추수 때가 되어 낮을 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렇게 추수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 비유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정작 필요한 이야기, 아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요소들은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농부가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으면서 농작물을 돌보는 일상적인 농부의 땀(수고와 애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또한 햇빛이나 비와 같이 작물 성장에 필수적인 요인들에 대해서나, 혹은 성장을 위협하는 태풍과 가뭄과 잡초와 같은 여러 장애 요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마가복음 4장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네 가지 밭의 비유)가 나오지요? 거기만 보더라도 성장에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결정적인 조건들이 나옵니다. 밭에 뿌려진 씨를 새들이 와서 쪼아 먹기도 하고,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때문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장애요인들이 나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성장하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이런 여러 조건들이 최상으로 어우러져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리고 성실한 농부들은 그렇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곡식의 성장에 대한 모든 요인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생략해 버립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나서,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랍니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농부의 무지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씨앗이 어떻게 발아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지에 대해서 농부는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농부는 알지 못하지만,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노심초사하고 애쓰고, 또 그런 우리의 애씀과 수고를 무력화시키는 모든 요인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안하고 단순한 자연의 이치만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고 있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게 뭐야 그렇게 생각되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노력과 수고가 무시될 때 우리는 화가 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와는 매우 다른 엄청나게 복잡한 삶을 살아갑니다. 주부들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 하루라도 주부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거 아닙니까? 아기 한 명 키우는데,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요? 그런데 그런 애가 커서 자기 혼자 저절로 컸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또 직장살이는 어떤가요? 매사에 노심초사해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번 한 주간에 한 일이고 다음 주간에도 그 다음 주간에도 계속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살림살이와는 달리, 우리의 태도, 우리의 애씀과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저절로” “자연적으로” 오게 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애씀과 수고에 상관없이, 우리가 매일 걱정하는 우리 삶의 방해요인들과는 상관없이,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저절로 그리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매일매일 우리 삶을 방해하는 요인들과 힘겹게 싸워가며 살아가는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마디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만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에게 중요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이렇게 뜬금없이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종파나 사람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주된 관심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보다는 “언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고, 제자들도 그 때를 계속해서 묻지요.
유대인들에게 어느 정도 공유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다분히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회복, 즉 다윗 왕조의 회복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정치적” 공동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사실 우리가 요즘 쓰는 “정치적”이라는 말로는 “다윗 왕조의 회복”을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윗왕조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자 경험이라는 말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모양은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말 가운데 깔려 있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리 혹은 방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자리 혹은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의 새로워진 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리 혹은 방식을, 우리의 새로워진 의식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로, 실재로 경험시켜 주고자 이런 저런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좀 전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회복이라는 다분히 “정치, 종교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고 말씀드렸지만, 유대 종파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각각 달랐습니다. 혁명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들은 무장하여 로마로부터 해방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 나라가 오는 시간을 열심히 계산했습니다. 그날에 대해서 자신들이 어쩌지는 못하지만, 그날의 시간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거기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로 그 나라를 앞당겨 오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주 일상에서 만나는 친숙한 용어를 통해 말입니다. 그것은 혁명가의 힘도 아니고, 율법학자가 정확히 시간을 예측하는 일도 아니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농부가 밤낮 자고 일어나는 동안 (일상의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싹이 나고 자라는지 모르지만,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듯이,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활동 가운데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디 다른 곳 유토피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이 지지고 볶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씨앗이 자라는데 필요한 환경(비, 햇볕 바람)이나 위험요소(태풍, 가뭄, 벌레 떼) 또 농부의 수고와 애씀 등은 생략되는데, 이것은 이런 요소들이 씨앗의 성장조건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지만, 궁극적으로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은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라는 신비의 영역임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얘기이고, 우리가 다 아는 얘기입니까?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통치자는 백성이 그가 있는 것만 겨우 알고,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가까이 여겨 받들고,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두려워하고, 그 다음가는 통치자는 경멸한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마무리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말하기를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한다(百姓皆曰, 俄自然) 우리의 통치자들과는 아주 딴판이지요? 우리 통치자들은 뭔가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선전하고 광을 내고 이름을 내야 훌륭한 통치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백성들은 통치자가 있는 것만 겨우 알고, 저절로 그리되었다고 여기는 것이 최고의 통치라고 합니다.
이렇게 도덕경에서는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 도(道)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현자이지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상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고, 그것을 알고 그것을 잘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우리 말로 말해서 새로운 의식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얼마나 경험하며 살고 있을까요? 이것을 경험하며 살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요?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알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알 때, 용서와 관용, 자비가 일어납니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알게 될 때 수용과 사랑이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관상기도는 바로 저절로 그리되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기도 방석에 앉아 있는 시간, 우리는 모든 것에서 손을 멈추고, 심지어 우리의 생각까지 다 놓아두면서,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우리의 소유는 저절로 그리 된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존재는 저절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얼마나 든든하게 사는가는,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얼마나 알아차리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히 고요히 들여다보면, 저절로 그리 된 것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바탕” “근저” “보이지 않는 활동”들이 서서히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눅12:25)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은 수준에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복지부동하거나 손 놓고 하늘만 쳐다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한참 잘못 짚은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생략하신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은, 우리의 삶을 진짜의 삶으로 사는 참된 길은, 더 많은 질문과 더 많은 대답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그래서 더 많은 동요와 더 많은 혼란뿐인 세상 속에서, 근본을 붙잡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붙잡을 때, 우리의 행동, 우리의 애씀, 우리의 수고가 진정한 의미를 띠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우리 의식의 촉수를 내밀어 그분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믿음의 눈으로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그분을 지향하고 가만히 그분 안에 있어 보는 것, 그분이 어떻게 나를, 우리를, 우리 가정을, 우리의 크고 작은 공동체를 견고하게 붙잡고 있는지 지켜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우리의 가장 깊은 가슴(herat; 중심)으로 내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그 놀라운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빛을 발견하는 길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겨자씨 비유가 말하는 것도, 비슷하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넌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살아라, 내가 너를 아름다운 백향목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에스겔의 본문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에스겔의 말씀은 망해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기 때문에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심으면, 겨자나무가 나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되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면 그것이 가장 축복받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바울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주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시고,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우리의 생명이 바로 그분의 활동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그 생명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