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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한 복 음 21;15-25,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부탁의 의미. 2025. 4. 6.
다음 주일이 고난주일이고 그 다음이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또한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동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대로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실 고난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이 at the end 이었습니다. 부활을 하신 이후에 만났음에도 7명의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간 그 아침이 소망과 기쁨이 아니고 at the end이었습니다. 왜요? 기대하고 밤이 맞도록 몸에 베인 어부의 삶으로 그물을 내렸지만 아침까지 한 마리의 물고기도 못 잡았습니다. 갈릴리로 간 것과 그물을 내린 것이 at the end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 합해서 모두 일곱 명의 제자들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베드로를 따라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올라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피곤했고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낙심했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at the end이었는데 날이 새어 갈 무렵 예수님이 호숫가에 오셔서 그들을 향해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그들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더니 조금 전까지도 없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 세어 보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3년 전이나 오늘이나 같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전이나 이제나 원칙에서 시작을 하니까? 이전 갈릴리보다 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고 그래서 at the end가 걷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조반을 소리 없이 나눕니다. 말을 하지 않았고 침묵이었습니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내용은 한 사람의 이름을 특정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하고, 세 번의 대답을 듣고, 세 번의 부탁을 합니다.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at the end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조반을 드시면서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대답과 세 번의 부탁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3번씩 질문을 할까요? 왜 베드로에게 물으면서 주위에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실까요? 왜 사랑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다르게 물으셨을까요? 왜 베드로의 답을 세 번씩 이끌어 내셨을까요? 그리고 왜 세 번씩 내 양을 말씀 할까요?
1. 왜 세 번의 반복된 질문과 세 번의 반복된 답변과 세 번의 부탁을 하실까요? 여러분, 지난 3년 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진액이 다하기까지 힘을 다하여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는데 제자들이 배신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욕하고 저주하면서 배신했습니다. 결과가 처참함과 고독한 죽음이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난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아 간 사람들이 배신자이었습니다. 그 배신자들이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을 합니다.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 할지라도 일단 배신자를 향하여 악담을 합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교육하고 훈계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단지 네가,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때린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유를 따지고 훈계를 한다고 다시 배신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등을 돌리지 않고 사랑은 배신하지 않고, 사랑은 따름과 순종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배신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기까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던 것은, 하늘의 보좌를 지키는 것보다 사랑하고,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 지금 주님 앞에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입니다.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보다란 단어 우측상단에 1란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 아래쪽 1번에 혹 것들보다 입니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이 사람들보다가 이것들보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다 의미가 있는데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의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가장 큰 배신자가 되었는데 이제는 역으로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느냐? 그러나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시면, 이것은 더욱 큰 의미가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키는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이고, 지금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방금 잡은 153마리의 물고기이고 아침 조반입니다.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아 온 세상이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결정입니다. 이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헛 그물질을 하던 갈릴리를 가리키며 이 공허한 갈릴리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과의 약속을 망각하면서까지 소유하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았던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이제 곧 썩어질 이 소유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이 세상을 가리키시며 이 덧없는 세상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너희의 몸과 마음의 결정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이아침에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시면서 이것들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여러분,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요? 참된 신앙과 참된 미래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침묵을 깨트리고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제는 알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답변에서 베드로가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고,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는 현재형으로 대답을 합니다. 이전이나 조금 전까지 베드로는 주님보다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곧 썩어질 생선과 덧없는 세상과 자기의 결정에 더 큰 가치를 두었고 이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잊어버리고,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이 대전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그가 밤이 맞도록 추구해 왔던, 갈릴리로 통칭되는 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주님 없는 세상을 목적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는, 다른 사람은 모를지라도 내 자신과 주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여러분, 내가 아는 것과 내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왜 모르시겠습니까? 숙달된 위선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내 자신과 주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단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랑을 확인한 것뿐입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16절과 세 번째는 17절인데 왜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십니까? 베드로의 대답이 미덥지 못합니까? 신뢰가 되지 않아서 일까요?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주님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무력과 강압의 위협 앞에서가 아닙니다. 대제사장 집의 비천한 여종 앞에서 겁을 먹고 부인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 직후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렇게 통곡한들 한심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사라졌을까요?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은 베드로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되풀이해서 물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세 번 반복하게 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고,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심한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에 베드로의 감격과 감동이 어떨까요? 이날 아침에 이 귀한 기회를 허락치 않으셨으면 심령에 새겨졌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는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적 억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날 아침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신 결과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또 한 번의 기회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또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다시 기회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무엇입니까? 삶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앙인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에 의해 쓰임 받는 기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을 받은 이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웃에게 기회를 줄줄 모르는 삶과 이웃의 귀한 기회를 박탈하는 삶과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인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배신한 사람까지 기회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과 사랑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내 중심에 좌정하신 것은,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 나를 통하여 나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쉽지 않지만, 나는 할 수 없지만, 새 삶의 기회를 주신 주님을 힘입어서 그 분의 생명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슴속에 배신의 못을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가 왜 주어졌을까요? 하루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위한 하루의 기회입니까? 내 마음속에서 버려 버리기로 작정한 바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또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때 우리는 철저하게 고독할 수 있고, 외로울 수 있으나, 그 고독과 외로움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배신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고독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도록 고독하셨던 예수님께서 더 더욱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등불은 생명의 빛과 기회를 주신 예수님께서 심령의 갈릴리에서 묻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대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사랑의 의미입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하느냐? 물었습니다. 사랑하다는 헬라어 동사,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사용되었습니다. 처음과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 동사를 사용하여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가파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사랑으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그런 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형제의 사랑으로 필레오 동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물으실 때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의 필레오를 사용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물과 배와 고기보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입니다. 독점적인 사랑, exclusive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다른 것과 동일하십니까? 왜 이렇게 묻나요? 독점적인, exclusive의 사랑이 아니면 주님의 양을 맡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질문에 실패한 사람을 일으키시는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습니다. 여러분, 실패로 인하여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죄와 실패와 잘못을 지적하면 더 고통스럽습니다. 회복하기보다 더 좌절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과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께서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습니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나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십니다.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십니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중심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직관적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읽었습니다. 실패로 인하여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신다고 필레오로 고백을 하지만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습니다. 왜요? 세 번 부인했던 것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고민하고 애통함으로 사랑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안에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이전의 수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가운데 여러분의 죄책과 패배의식이 사라지고 다시 힘과 능력을 주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온전히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부탁의 중심인 양에 대한 표현입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 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 물었고, 베드로 역시 세 번 고백을 했습니다. 그 고백이 끝날 때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부탁을 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양을 치고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 되풀이 하십니다. 왜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양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과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써 돌보아야 할 양떼는 누구입니까? 첫 번째의 언급에서 어린이란 형용사를 제쳐놓고 보면, 세 번 다 양으로 표기 되어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헬라어 사본에 의하면, 세 번 다 양의 다른 단어로 표현하셨고 구별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처음 명령하실 때 주님께서는 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arnion은 양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 입니다, 어떤 단어로부터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작은 개념입니다. 악기 비올라(Viola) 중에 가장 작은 비올라에 in이란 접사를 붙여 바이올린(Violin)이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바이올린은 비올라의 지소어입니다. 여러분, 바이올린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악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올라를 계속 작게 만들고 더 세미한 소리를 만들다가 비올라의 지소어인 바이올린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인 arnion을 말씀하신 것은 어린 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갓 태어난 양입니다.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하실 때에는 prob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성한 양의 통칭인 probaton의 지소어입니다. arnion보다는 크지만 그러나 장성한 양이 되기에는 부족한 상태의 양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발육이 끝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의미하는 probaton을 사용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특정상태의 양만을 국한하여 지칭하신 것이 아니고 갓 태어난 양에서부터 중간치를 거쳐 발육이 끝난 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양들을 구별 없이 돌보라 명령입니다. 어떤 장소와 어떤 상황과 어떤 시간에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나에게 믿고 맡겨주신 주님의 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짐 덩어리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과 매사에 반항적이고 심사가 꼬여 있는 사람과 자기중심으로만 살아온 군림하려는 사람들 모두입니다. 그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구별 없이, 모두를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로 생각하고 돌보는 것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첫 번째 양은 아르니온입니다. 갓 태어난 양입니다, 두 번째는 프로바티온, 성장 중에 있는 양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바톤, 성장이 끝난 양입니다. 수준이 낮으면 무시하고, 비슷하면 경쟁하고, 나으면 질시하고 굴종하는, 구별과 차별이 아니고 구별과 차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3-1. 왜 이런 명령을 하실까요? 우리가 베드로처럼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arnion아닙니까? 매사에 반항적인 probation아닙니까?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지배하려는 probaton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나를 향하여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변함없이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영적인 갈릴리 바닷가에 거하는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변덕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당신의 양떼로 인정하시고 품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주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옹이가 된 주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3-2. 왜 이런 중요한 사역을 실패한 베드로와 우리에게 부탁하니까? 여러분!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힘듭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무런 보상 없이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섬기는 나에게 댓가와 보상이 없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항상 어려움만 주는데 왜 섬겨야 합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그 주님의 모든 양은 목자의 손길과 도움을 필요합니다. 스스로 꼴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돌보지 않으면 쉽게 해를 당하기 때문에 믿고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찾아오심으로 드러난 주님의 사랑입니다. 찾아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알았고 자신의 역할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결코 빼낼 수 없는 옹이가 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 너무 깊이 옹이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예수님의 부르심과 부탁을 나의 삶 가운데 잘 적용하시는 비전교회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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