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五
정충량(鄭忠樑) 묘갈명(墓碣銘) - 김안국(金安國)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 정군(鄭君) 숙간(叔幹, 정충량의 자(字))이 가정(嘉靖) 2년인 계미년(癸未年, 1523, 중종 18) 12월 24일에 병이 들어 앓다가 졸(卒)하니, 조정의 관리 및 그와 더불어 교유했던 자들이 아쉬워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의 가장 절친한 벗인 나 의성(義城) 김안국(金安國)이 바야흐로 전리(田里)에서 허물을 반성하는 중이어서 미처 몸소 함습(含襲)하는 상사(喪事)에 참여하지 못하여, 슬프고 애달픈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슬픔을 쏟아낼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는데, 군의 아들인 정수후(鄭守厚)가 나를 찾아와 군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나는 더욱 슬프기도 하고 또한 기쁘기도 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버지의 벗 중에 아버지를 아는 것이 깊은 사람을 찾아낸 것은 과연 나보다 더한 자가 없으니, 그대가 나를 찾아와 청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어찌 차마 숙간의 묘사(墓辭)를 짓는단 말인가? 비록 그렇지만 또 내가 짓지 않으면 누가 짓겠는가? 더구나 내가 그 슬픔을 쏟아내고 유명(幽明)의 유감(遺憾)을 해소할 수 있는 방도는 아마 이 일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씨(鄭氏)는 동래(東萊)의 현달한 성씨(姓氏)로, 정사(鄭賜)라는 분이 있어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지조와 절개를 꿋꿋하게 지켰고 벼슬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뒤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곧 군의 증조(曾祖)이다.
정난손(鄭蘭孫)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군의 할아버지이다. 정광세(鄭光世)는 과거에 제1등으로 뽑히어 성망(聲望)이 혁혁(赫赫)하였고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마쳤는데, 이분이 곧 군의 아버지이다. 진무 부위(振武副尉)로 배조(裵稠)라는 분이 곧 군의 외할아버지이다.
군의 휘(諱)는 충량(忠樑)이고, 숙간은 그의 자(字)이다.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1480년 성종 11년)에 태어나 나보다 2살 연하이다. 형판공(刑判公, 정광세)이 나의 선고(先考)와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말함)으로서 두텁게 교유하였으므로, 나는 군과 집안끼리 왕래하는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함께 유학(遊學)하였다.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 연산군 7)에 함께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두 시험에 합격하였다. 두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경우는 진실로 흔하지 않은 일인데, 더구나 또 나이까지 비슷하고 지향(志向)도 합치하여 어려서는 함께 공부하고 자라서는 서로 따랐으니, 내가 군을 아는 것이 상세한 것이다.
군은 뜻이 담박하여 거짓됨이 없었으며, 행실은 반듯하여 교만하지 않았다. 처신하는 태도는 간소하였고 집에서 지낼 때에는 검소하였으며, 맡은 일에는 반드시 근신(謹愼)하게 처리하였고 남들과의 교제는 반드시 신의로써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있어 정성과 효심을 다하였고,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일에 은애(恩愛)를 두텁게 다하였다.
또 성품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어서 마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과 같았으며, 남의 과실이나 악행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담박하여 재물을 모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처지에 순응할 따름이었으니, 아! 군의 마음 씀씀이를 세상에 어찌 쉽게 볼 수 있으랴? 군은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원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뽑혀 들어갔고, 이어 대교(待敎)와 봉교(奉敎)에 승진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전임(轉任)되었다가 누차 공조(工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 및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 병조(兵曹)ㆍ공조ㆍ예조(禮曹)의 정랑(正郞), 사간원(司諫院)의 헌납(獻納)과 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승문원(承文院)의 참교(參校), 내자시(內資寺)ㆍ사섬시(司贍寺)ㆍ사재감(司宰監)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518, 중종 13) 여름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 제수되었고, 네 번 전임되어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가 병 때문에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 봄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겨우 반년 만에 일 때문에 체직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공조(工曹)로 옮겼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44세였으니, 어찌 그리 단명(短命)하였는가? 차분한 사람은 으레 장수를 누리고 착한 사람은 누리는 바가 반드시 두터운 법이거늘, 어찌 군이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이치도 또한 어긋남이 있어 단정하기가 어려운 노릇이구나.
비록 그러나 하늘이 군에게 보답해 준 바가 어찌 이에 그치고 말겠는가? 군의 맏아들을 보건대, 학문을 좋아하는데다가 단정하고 근실하니, 반드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떨칠 것이므로 군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군은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안에 있는 경안리(慶安里) 마산(馬山)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을 골라 장사지냈으니, 이때가 군이 죽은 지 이듬해 봄이었다.
군의 배필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인 하음 부정(河陰副正) 모(某, 이재(李梓))의 딸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곧 정수후(鄭守厚)이다. 정수후는 왕자(王子)인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우뚝하게 뛰어난 것은 결함이 많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부화(浮華)에 가깝네.
올곧고 정성스러워 내면이 성실하면 겉면의 아름다움을 어찌 구하겠는가?
이런 사람이 있었으니 군자가 평소에 실천하였네.
18년 동안 벼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하고,
공경하면서 임금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직위(職位)에 부끄럽겠는가?
높은 벼슬을 대대로 이어받았으니 또한 훌륭한 아들을 두었네.
복경(福慶)을 면면히 이어나가니 선행에 대한 보답을 믿을 수 있네.
장수하지 못한 한 가지 애통함은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나?
군의 평생을 기술하여 이 비석에 새기노니,
왕래하는 자들이 감히 업신여기리오? 이곳이 군의 유택(幽宅)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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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通政大夫工曹參議鄭公墓碣銘。
有明朝鮮國通政大夫、工曹參議鄭君叔幹, 以嘉靖二年癸未十二月二十四日, 寢疾卒。 朝之縉紳曁所與交者, 無不惜悲之。 君之最親友義城金安國, 方省愆于田里, 未及躬含襲之事, 悼怛不自已, 思所以洩其悲而不得, 君之子守厚來以碣銘請。 安國益悲且喜, 泣謂之曰: “子求父友之知父深者, 果無加於我也, 子之來請也固宜。 雖然, 我忍爲叔幹之墓辭乎? 雖然, 我不爲而誰爲之? 況我之所以洩其悲而塞幽明之憾者, 庶其在此乎!”
謹按鄭, 東萊顯姓。 有諱賜, 早登第, 抗志節, 官藝文館直提學, 後贈議政府左贊成, 是君曾祖。 諱蘭孫, 官僉知中樞府事、贈吏曹判書, 是君祖。 諱光世, 擢科第一名, 聲望赫赫, 位終刑曹判書, 是君考。 進武副尉姓裵諱調, 是君外祖。
君諱忠樑, 叔幹其字。 生成化庚子。 少我二歲。 刑判公與我先考, 同年交厚, 我與君以通家子, 自稚少同遊學。 弘治辛酉, 同中進士、生員兩試, 再世同年, 固不多有。 而又齒齊而志合, 幼同業而壯相隨, 我之知君也悉矣。 君志恬而無僞, 行貞而不驕。 處身也簡, 居家也儉, 職必思謹, 交必有信。 事親致誠孝, 睦族厚恩愛。 性靜默言, 若不出諸口, 不喜揚人過惡, 淡泊無營, 處順而已。 噫! 君之用心, 世豈易得哉? 君登正德丙寅第, 選入爲藝文館檢閱, 陞待敎、奉敎。 遷成均典籍。 累歷工・刑二曹佐郞、掌隷院司議、黃海道都事、兵・工・禮曹正郞、司諫院獻納・司諫、司憲府持平・掌令・執義、承文院參校、內資寺・司贍寺・司宰監正。 戊寅夏, 由弘文館直提學擢拜承政院同副承旨。 四轉爲左承旨, 以疾遞僉知中樞府事。
己卯春, 由戶曹參議復入爲都承旨。 僅半載, 以事遞拜吏曹參議。 後移工曹以卒, 享壽四十有四, 何其短哉? 靜者常得壽, 善者享必厚, 豈謂君遽至於是哉? 噫! 理亦有爽而難定也夫! 雖然, 天之報君, 寧止是而已哉? 觀君之胤好學而端謹, 必繼振其家業, 君爲不忘矣。 君卜葬廣州治南慶安里馬山坐乾向巽之原, 實君沒之明年春也。
君配淑夫人李氏, 宗室河陰副正某之女, 生一子, 卽守厚。 娶王子甄城君惇之女, 生女, 幼。 銘曰:
嶢嶢多缺, 燁燁近浮。 貞愨內實, 膚美何求? 若人之有, 君子素履。 十有八年, 寅畏終始。 不負于主, 寧愧職位? 金貂襲世, 亦見有子。 趾慶綿綿, 善報足恃。 一欠之慟, 噫命也已! 紀君平生, 鐫玆片石。 來者敢慢? 是君幽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