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손과 친절
(눅 14:7-14)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작년 말 진주 MBC에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발표해서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지역 사회에 필요한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성실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학교도 설립하고, 재단을 설립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한약방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을 지역 사회에 전부 환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여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인품은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모든 사람이 존경할 만한 어른으로 소개받은 것입니다. 점점 세상에는 ‘어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호랑이 없는 숲에서 여우가 임금 노릇 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른은 없고, 교활하고 욕심 많은 사람이 어른 노릇을 하려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어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어른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유튜브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만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큰 어른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는 지혜를 나누려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자기를 자랑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어른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유명한 사람, 인기 있는 사람만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신없이 다니며 강연을 하지만 진짜 어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유명한 사람 역시 경쟁 사회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어른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지식을 팔고 다니는 지식 장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강연해서 돈 많이 벌어 부자 되었다는 것은 자랑일 수 없습니다. 특히 지혜와 지식을 강연해서 돈 벌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이들과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받고 강연하는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돈 받고 복음을 전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노동을 해서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예수님은 쉴 틈도 없이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을 도우셨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요즘은 예수님이 인기가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면, ‘내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기뻐하며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도 크게 짓고, 빌딩도 사고, 기부도 많이 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은 부자가 될 수 있겠지만, 장사꾼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모든 가치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성공의 기준이 연봉이 되고, 지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기준까지 돈을 많이 버느냐, 재산이 많으냐,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가졌느냐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고, 천당 위에 분당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이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난도 해결해주지 못하느냐는 비웃음입니다. 물질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신앙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살기 위해서 물질도 필요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을 누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물질보다, 또는 성공보다 더 높은 가치를 신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마 그 가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라’라고 권고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십니다. 주님의 겸손을 세상은 무시하고 비웃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모든 사람 위에 높이십니다. (빌 2:5-11) 물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유명한 사람이 된다는 것도 어렵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겉모습뿐입니다. 그의 속마음이 어떻고, 내면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가 선한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하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를 많이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한 방법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존경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는데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은 존경하는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는 인정 받지 못하고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까지 선하고, 고상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명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베푸는 자가 될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장하 선생이 우리 시대의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방송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이지 그 분 말고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겸손과 친절’일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이웃과 나누며 베풀 줄 아는 친절함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어른으로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를 받습니다. 예수님 외에 여러 사람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모두 자리를 찾아 앉는데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함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얕보게 되겠지요. 예수님도 밀려나 낮은 자리에 앉았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유로 한 말씀 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밀려나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높고 낮음은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면 누가 알아 주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을 많이 하고, 조금은 교만하게 보일 정도로 과시해야 알아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만의 꺼풀이 벗겨졌을 때 추한 내면이 드러납니다. 겉모습을 포장하려고 하기보다 내면을 채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진실과 선함과 겸손함으로 채우고 살아갈 때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비유로 한 말씀 하십니다. 이번에는 초대한 사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이 서로 자리 다툼을 할 정도라면 대단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은 그들을 초대하며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초대해줄 것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초대는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대접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절은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 번도 대접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대접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복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받지 못하면 손해가 아니냐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옳긴 한데, 요즘 세상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나는 가난하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가진 것이 없어 못 한다’고 생각할까요? 자기보다 훨씬 많이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나누지 않는 것의 핑계일 뿐입니다.
친절한 마음을 가지면 도울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친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모호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국민을 배신하고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존경받고, 헌법을 짓밟으며 쿠데타로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국가 정체성의 상징이 되는 세상이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자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이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우리마저 혼란을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흐름에 따라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있도록 ‘겸손과 친절’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