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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만 갇혀 계시던 어머니가 난생처음 비행기 타게 되셨네. 근데 여보,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가져가세요." 아내가 거실에 걸려 있던 어머니 사진 액자를 꺼내 비단 천 보자기에 싸면서 한 말이었다. 그렇다. 어머니의 첫 해외여행이다. 돌아가신 지 20여년 만에 어머니 액자 사진이나마 가슴에 안고 비행기에 오르니, 가슴이 아려온다.
사실 해외여행은 이 못난 자식도 처음이다. 올 초 경찰공무원으로 명예퇴직하기까지 30년 넘게 가족들과 여행은커녕 가까운 주변조차 다녀올 겨를이 없었다.
뜻밖에도 '뉴칼레도니아' 여행 기회가 생겼다. 바로 어머니의 고생스러운 삶을 소재로 쓴 '아, 어머니 전(展)' 편지글 사연이 일간지에 당선돼 상품으로 '2인 왕복항공권'을 받은 것이다. 아내의 양보로 아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무려 10시간이나 걸려 한밤중에 칼레도니아에 도착했다. 이 섬은 전체의 60% 이상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천혜의 관광지였다. 도착하자마자 5성급 호텔방 탁자 위에 어머니를 모셔놓았다. 마치 환생(還生)이라도 하신 듯 우리 부자(父子)를 바라보시며 살포시 웃으시는 어머니는 지금 당장에라도 사진을 뚫고 걸어 나오실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밖에 나가 식사를 하자"고 해도 "그래, 됐다. 너희만 잘 먹으면 난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시곤 했다. 자식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내가 군 복무하는 동안 시골집을 혼자 지키시면서 엄동설한에도 군불을 지피지 않고 사셨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장독대에 나가 그 눈을 고스란히 맞으셨다고 한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만 방에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면 "자식은 엄동설한에 총대 메고 눈밭에 서 있는데 어미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서 자겠느냐"고 하셨다고 한다. 내가 제대하여 어머니 소원대로 가정을 이뤄 귀여운 손자도 안아보게 하는 등 잠시 기쁨을 드렸으나 1989년 여든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셨다.
말로만 듣던 남태평양의 이 아름다운 섬나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부럽고 행복한 나라임엔 틀림없었다. 이 나라는 사람이 적어 그런지 빨리 서두르는 '조급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운전사가 '볼일' 급하다는 나를 위해 무려 5분 이상 기다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 그리 힘들어 아등바등 조바심 내며 바삐 살아왔던가.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던 70년대 후반 경찰에 들어와 거의 매일같이 '시국 치안'에 험한 경찰생활을 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에서 밤을 새우며 어머니가 제때 진지를 드시는지, 자식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좀처럼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30여년을 쫓기듯 직장생활을 해왔다. 어머니 정성과 사랑에 만분의 일이나 효도를 했던가를 생각하면 후회감에 가슴이 저려왔다.
"비행기 타고 올 때 한국인 여승무원이 한 말이 생각나요. '모녀간에는 여행하는 것을 봤어도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분은 처음 보았어요'라고 했잖아요. 제 친구들도 아버지랑 해외여행 떠난다니까 모두가 놀라는 거예요." 평소 과묵한 아들이 이처럼 살갑게 아비 듣기 좋은 말만 하는지,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아들은 자기도 의경으로 복무했지만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한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할머니의 고생스러운 삶을 이야기로 쓰셔서 이렇게 여행에 나섰지만, 이번 여행은 30여년 동안 경찰관으로 고생하신 아버지의 '퇴직기념 여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난 네가 더 자랑스러워. 넌 대한민국 경찰 중에서 가장 바쁘다는 서울 종로에서 의경으로 근무했잖아. 시위 진압에 동원되어 길바닥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었다는 네 얘기를 듣고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 슬며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들이 의경으로 복무하는 동안 시위현장에서 행여 다칠까 봐 애간장을 녹이던 아비의 심정으로 쓴 글들을 모아 '아들아, 대한민국의 아들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우리 부자간의 해외여행은 신문사에서 용케도 알고 '위로여행'을 보내 준 것만 같구나!" 아들과 나는 이제껏 속에 담아 두었던 가슴 저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친절하고, 상냥하고, 삶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긴 이처럼 꿈에 그리던 낙원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아들은 "그래도 나는 한국이 좋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부대끼며 사는 게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잖아요. 잘만 승화시키면 국가발전의 원동력도 되고요." 20대 후반인 아들은 이미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아내가 왜 함께 가자는 여행을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아들에게 양보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내인들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경찰 생활하면서 아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 했으니 이제라도 함께 여행하며 '정을 나누라'고 했던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액자 사진을 닦고 또 닦고 반들거리게 손질하여 고운 비단 보자기에 애지중지 싸준 아내의 손길이 고맙기만 했다. 천국의 어머니도 다 내려다보고 계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