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역사를 한눈에......깊은 내용은 기대치 마시고 가볍게...그러나 엄청 길다는거....ㅋㅋ)
재즈의 어원
원래 음악에는 'jazz'란 명칭이 없었다. 언젠가 부터 사람들은 이 음악을 'jazz'라 불렀고 그 어원은 실로 불분명하다. 많은 재즈 연구가들이 그 어원을 찾았지만 가설에 불과할뿐 실로 그 어떤것도 단언할 수는 없다.
보드 빌리언의 "Jass it up!"
현재 재즈란 말은 시카고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15년 5월 시카고의 '램의 카페'에 나온 톰 브라운의 밴드는 BBDL이란 밴드명을 갖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연주를 위해 동부로 가면서 'The King of Ragtime'으로 개명했다. 1916년 3월 이후 OBDJ로 다시 개명한 이 그룹이 '실러의 카페'에 나갔을 때는 'Stein's Band from Dixie'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여기서 Dixie는 남부를 가리킨다). 어느 날 밤 손님 속에 있던 희극배우 보드 빌리언이 술에 취해 'Jassit up!' 이라고 성원을 보냈는데, 그 후 이들은 밴드명을 'Stein's Dixie Jass Band'로 개명, 이름이 없던 이 향기로운 장르의 음악은
재즈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jazz' 철자의 확립
최초로 'Jazz'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13년 3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정기간행물에 T.E.글리슨이 쓴 기사에서 였다. 하지만 'jazz'란 철자가 그때부터 굳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몇년동안 'jass'란 철자가 계속해서 통용되었는데, 1917년 대단히 히트한 'Dixieland Jass Band One-Step'이란 음반의 재킷에도 여전히 jass로 쓰여 있다.
재즈의 발생
재즈는 20세기초 뉴올리온즈에서 탄생했다. 재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 재즈라 불리는 음악의 원형은 뉴올리언즈 주변의 브라스 밴드와 매칭 밴드에서 볼 수 있다. 재즈의 뉴올리언즈 발생설에 관한 또다른 이유는 버디 볼든, 젤리 롤 모튼, 죠 킹 올리버, 루이 암스트롱 등 재즈 창세기에 활약한 연주가들이 뉴올리언즈 주변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즈의 음악적 성향 요소
재즈는 역경속에 있었던 미국의 흑인에게서 비롯된 음악이므로 아프리카의 음악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속에 흐르는 감정과 가치관은 독특한 그들만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의 사회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백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즉 재즈는 흑인적인 요소와 백인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태어난 새로운 방향의 음악 이라고 하겠다.
최초의 녹음부터 스윙 시대까지(1917∼1939)
20세기초에 발생한 재즈라는 장르는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많은 장소에서 연주되었으며 흑인만이 아닌 백인들 사이에서도 그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백인 재즈 밴드 ODJB(Original Dixieland Jass Band)가 1917년 재즈 사상 처음으로 레코딩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재즈는 미시시피강의 리버보트에 의해 주변 도시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원래가 흑인 빈민층에서 시작된 재즈는 이들 흑인 노동자에 의해 여러 지역에서 연주되고 오락적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홍등가에서 출발한 재즈, 음악 명칭은 시카고에서 만들어져....
뉴올리언즈 다음으로 재즈가 융성한 곳이 북부의 대도시 시카고였다. 재즈의 기원지는 뉴올리언즈의 홍등가 스토리빌로 전해지고 있다. 스토리빌은 뉴올리언즈 한 가운데 있는 윤락가로, 이 지명은 재즈 팬에게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윤락자체가 현실로 인식되는 현재, 스토리빌의 이국적 밤생활은 좋은 연구 대상임에 틀림없지만, 스토리빌의 밤풍경은 흔히 연상되는 사치스럽고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재즈가 연주되는 곳은 스토리빌의 주변지대 댄스 홀이나 카바레였다.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뉴올리언즈는 군항이 되었고, 모든 병사는 이곳 뉴올리언즈에서 출정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의 눈앞에 홍등가의 존재는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었다. 결국 해군 장관은 스토리빌의 홍등가를 폐쇄하였고, 1917년 11월 이 호화스러운 스토리빌의 홍등가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토리빌의 폐쇄는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의 실업을 낳게 된다. 새로운 연주 장소가 필요하게 된 이들이 찾은 곳이 시카고였다. 이것이 시카고를 제2의 재즈 도시가 되게한 중요한 요인이다. 1920년대 전반의 시카고는 뉴올리언즈 이상으로 재즈가 성행했다. 이런 변화에 견인차적 역할을 한 것이 1922년 루이 암스트롱이 킹 올리버의 요청으로 시카고로 이주한 것이다.
거물급 연주자의 탄생과 스윙 재즈의 출몰
1920년대 중반부터는 캔사스와 뉴욕에서도 재즈가 성행하게 되었다. 캔사스에서는 밴드 어레인지에 의해 애드립 연주를 가미한 빅 밴드가 성행하였으며, 그 중 카운트 베이시에 의해 탄생한 '카운트 베이시 악단'이 유명했다. 이 무렵 뉴욕에서는 할렘을 중심으로 고급 나이트 클럽과 댄스 홀에서 활발히 재즈가 연주되고 있었다. 1924년 시카고로부터 루이 암스트롱이 합세, 프레처 핸더슨 악단에 들어가 뉴욕 중심의 연주가에 큰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할렘에서 최고급 나이트 클럽에 듀크 엘링턴 악단이 출연하여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930년이 되면서 금주법과 대공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부호들에 의해 '스피크 이지'라 불리던 모그리 술집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재즈는 필수품격으로 연주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재즈의 고급스런 분위기는 이 무렵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재즈는 불경기를 잊기라도 하듯 밝은 형태의 스윙 재즈에는 '롤링트웬티'로 대표되는 핫 재즈가 유행하였고, 달콤하면서 환상적인 연주가 주체가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 최초의 국민적 영웅이라 칭해졌던 재즈 연주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일컬어졌던 베니 굿맨은 현재 록 스타에 필적할 만큼 당시에는 절대적 인기를 누렸다. 또 같은 시기에 많은 백인 연주가들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며, 그것과 동시에 밴드 싱어의 존재 역시 중요한 것이 되었다. 스윙 재즈는 193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지만, 이후에는 쇠퇴의 일로를 맞게 된다.
'재즈의 제왕' 루이 암스트롱의 등장
20세기 막을 연 1900년, 미국 독림기념일인 7월 4일 뉴올리언즈의 슬럼가에서 후에 '재즈의 제왕'이라 불릴 루이 암스트롱이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불량 청소년이었던 그는 소년원에 들어가 악기(코르넷)를 처음 접한 후 1918년에 고향 선배 킹 올리버에 의해 시카고에 진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4∼'25년 뉴욕에서 프레처 핸더슨 악단에 입단, 뉴욕의 중요 뮤지션으로 성장하였다. 1925년 시카고로 돌아와 리더 세션을 녹음하였으며,이후 그는 '핫 파이브', '핫 세븐'등의 그룹을 결성, 1930년대 후반까지 재즈 역사상 큰 족적을 남겼다. 흑인, 백인을 막론하고 재즈에 대한 그의 연주는 큰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1920년대 후반의 할렘, 듀크 앨링턴 악단이 대인기
1920년에 제정된 금주법은 재즈를 크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듀크 엘링턴은 할렘에 있던 코튼 클럽에서 '정글 무드'라 불리는 독특한 연주로 인기를 모았다. 1927년부터 할렘의 고급 클럽에서 엘링턴 오케스트라는 계속되는 인기 속에 음악적 방향성을 완성시켜 갔다.
베니 굿맨의 카네기 홀 재즈 콘서트
1935년 베니 굿맨에 의한 전미 순회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이는 스윙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러나 베니 굿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빅밴드는 물론, 스몰 밴드에 의한 재즈 연주의 가능성에 도전하였다. 그는 1938년 1월 16일 클래식의 전당 카네기 홀에서 사상 최초로 재즈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연주회는 라이브 음반으로 제작되어 빅 히트를 기록했다
불세출의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스타 탄생'
1933년 데뷔이래 스타의 자리에 오른 빌리 홀리데이는 1935년부터 본격적인 레코드 가수로 연륜을 쌓아 갔다. 1936년 자기 이름으로 된 최초의 레코드를 출반한 후 1937년 1월부터 카운트 베이시 악단, 1938년 11월까지 아이디 쇼 전속 악단의 가수로 참가했다.1939년이 되면서 밴드 싱어로부터 독립을 생각한 홀리데이는 4월 'COMMORE'에서 솔로 싱어로 활약한다. 그러던 중 <기묘한 과실>의 가사와 그녀의 우수 어린 목소리에 의해 크게 히트, 이후 이 곡은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카운트 베이시의 황금시대
캔사스에서 최고의 밴드였던 '베니 모턴 악단'은 베니 모턴 사망 후 카운트 베이시에 의해 1936년부터 '베이시 악단'에 소속되게 된다. 그후 프로듀서 존 헤이먼드가 가세 베니 굿맨은 전미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게 된다. 그 후 뉴욕에 진출한 베이시 악단은 1937년 데카 레코드와 전속 계약, 베이시 악단 최고의연주를 녹음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비밥의 탄생과 웨스트 코스트 재즈(1940 ∼ 1949)
재즈는 시대의 변화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을 정점으로 미국 사회 역시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황금기가 끝나고 비밥의 탄생과 발전 시기로 들어선다. 재즈는 스윙 시대까지 기본적으로 춤을 위한 댄스 뮤직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이것이 복잡한 블루스나 싱코페이션을 사용한 비밥에 이르러서는 감상용 음악으로서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다. 스윙 재즈를 경계로 하여 이전과 이후의 재즈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스윙 재즈의 말기를 빛낸것은 댄스 뮤직의 황금시대를 만든 글렌밀러(Glenn Miller)였다. 그의 악단은 '39년에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으며, 그후 서서히 인기를 잃어 갔다. '38년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던 배니 굿맨(Benny Goodman) 역시 절대적인 인기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감성을 지닌 연주자들의 등장
스윙 재즈의 쇠퇴는 재즈 밴드에서 활약하던 젊은(창조적인) 연주가 등에 의해 새로운 감상을 가진 재즈를 연주를 연주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굿맨악단의 찰리 크리스찬(Charlie Christian)과 캡 캘로웨이(Cab Calloway)악단에서 활약한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등이 이런 인물로 통상의 일과를 마친 후 할렘의 '민터즈 플레이 하우스'에서 재즈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두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같은 클럽의 하우스 밴드에서 연주하고 있던 인물이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와 케니 클라크(Kenny Clark)로, 그들의 열정과 창조력이 후에 비밥이라 불리는 새로운 재즈의 원형을 탄생시키게 된다. 제이 맥샨 악단에 있던 찰리 파커(Charlie Parker)도 합세하여 비밥은 스윙에 대해 변화된 현대적 스타일의 재즈로 그 자리를 굳히고 발전하게 된다.
비밥의 요람 민터즈 플레이 하우스
스윙이 융성했던 '30년대 말부터 '40년대에 걸쳐 뉴욕의 할렘 한곳에 있던 '민터즈 플레이 하우스'에는 밤마다 다른 곳에서 연주를 끝낸 젊은 연주가들이 모여 새벽이 밝은 때까지 연주를 차례로 펼친다. 종래의 스윙 재즈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들은 좀더 현대적인 하모니와 연주 방법을 보완·발전시켜 스윙 재즈의 변화격인 새로운 재즈 비밥을 완성시킨다. 이러한 연주가들 중에는 찰리 크리스찬, 세로니어스 몽크, 케니클라크 등이 있었다. 하지만 재즈에서 일어난 이 혁명적인 변화는 때마침 시작된 레코딩 거부 운동과 시기를 같이하여 정규의 형태(레코드)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 속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록은 '41년 5월에 녹음된 '민터즈 하우스'의 재즈 연주를 아마츄어 재즈 팬이 직접 모아 수제의 테이프 레코더를 이용하여 녹음한 것이다. 이것이 후에 <민터즈 하우스의 찰리 크리스찬>이라는 레코드로 발표되어 비밥 탄생의 순간을 기록한 레코드로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실험정신
열광적인 애드립을 중심으로 한 비밥에 비해 같은 형태의 싱코페이션과 하모니를 사용하여 어레인지를 중시한 지적 재즈 역시 이 무렵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를 최초로 한 것은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였다. 그는 '48년 9월 '로열 루이스트'라는 9중주단을 창단하여 등장한다. '로열루이스트'는 그때까지의 재즈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연주를 보였다. 그들은 '50년대에 캐피탈에서 레코딩을 하였으며, 작품 <구르의 탄생>에 담긴 사운드는 로스앤젤레스 연주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어레인지를 주체로한 웨스트 코스트 재즈 탄생의 팡파레였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40년대 말이 되어 전후의 경기 회복 기미도 보였고 로스엔젤레스에서는 영화 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영화에 있어 음악은 필수적 요소로, 영화의 흥행은 유능한 연주가의 수요를 창출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뉴욕의 재즈 연주가들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Body and Soul...
모던 디너 색소폰의 창시자 중 한사람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는 '24년에 뉴욕에 진출하여 곧바로 프레처 핸더슨(Fletcher Henderson)악단에 참가한다. 프레처 핸더슨 악단은 같은 해 시카고에서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합세하여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호킨스 역시 암스트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연주자 중 한사람으로 핸더슨 악단에서는 솔로이스트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레스터 영(Lester Young)보다 창조적인 디너 주자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34년에 유럽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39년 귀국하게 된다. 귀국직후부터 호킨스는 블루 버드에서 레코딩을 개시하게 되며, 이렇게 녹음된 최초의 연주곡 네곡 중 <바디 앤 소울>이 높이 평가되 그의 이름은 재즈 역사상 영원히 남게 되었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최초 '41년에 캔사스 시의 제이 막샨 악단에서 데뷔한 찰리 파커는 제이 막샨악단에서 '42년 뉴욕으로 진출하여 그의 혁신적인 연주를 클럽에서 연주, 좋은 평가를 얻었다. '42년 12월에는 알 하인즈(Al Haynes)악단에 가입하여 그곳에서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여러 형태로 공연하게 된다. '4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레코드 샵을 운영하는 로스 랏셀을 알게 되는데, 그는 후에 다이알 레코드를 설립하여 파커의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46년∼'47년에 이루어진 파커의 다이알 녹음은 재즈 역사상 최고의 명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파커는 사보이에 의한 앨범을 남기게 된다. 천재 알토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는 '46년 7월 로스앤젤레스의 다이알 레코드사에서 녹음중 발작을 일으켜 강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당시 결성된 디지 길레스피와의 콤비는 해체된다. 다음해 1월 퇴원후 서해안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한 그는 곧 뉴욕으로 돌아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길레스피 악단에 잠시 몸을 맡긴다. 마일스 데이비스 등을 끌어들여 새로운 밴드를 결성한다. 이것이 9월에는 길레스피와 함께 카네기 홀 콘서트로 이어진다. 이 당시의 라이브 녹음은 '53년 녹음된 파리 녹음과 함께 모아져 <길레스피·파커 인 콘서트>로 출반, 최고의 라이브 음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냇 킹 콜의 새로운 시도
후대 파퓰러계의 대가수가 된 냇 킹 콜(Nat King Cole)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선 것은 '3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는 '39년 경부터 기타와 피아노를 이용한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당시까지는 이런 편성의 트리오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40년에 트리오에 의한 최초의 공식 레코딩이 이루어 진 후 '41년까지 냇 킹 콜은 4회에 걸쳐 데카에 녹음을 남기게 된다. 그후 '43년에 캐피탈로 이적한 이후에도 계속되는 히트곡에 의해 그의 자리는 더욱 더 확고해진다. 그 당시의 보컬과 피아노 연주는 현재 <보컬 클래식 앤 피아노 클래식> 으로 출반되어 있다.
버드 파웰의 예술
'30년대 말부터 프로로 활약한 버드 파웰(Bod Powell)은 세로니어스 몽크와 나란히 비밥 피아노의 최고봉으로 불린다. 몽크는 '40년대 초 할렘에 있던 민터즈 플레이 하우스에서 연주하고 있었으며, 파웰은 그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44년에 몸담고 있던 큐티 윌리암스 악단에서 레코딩을 하게 된다. 파웰이 '47년 카리 랏셀, 막스 로치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 같은 해 녹음한 여덟곡은 후에 '53년 연주와 함께 <버드 파웰의 예술>이란 이름으로 출반된다. 이것은 다시 몽크 피아노 트리오에 의해 연주되어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을 처음 시도한 디지 길레스피는 오스카 페티포드와 함께 '퀀텍'을 결성하여 '43년에 뉴욕의 52번지에 있던 재즈 클럽 '오닉스'에 출연한다. 밴드에는 조지 월링턴(George Wallington)과 막스 로치(Max Roach)가 참가하게 되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처음 결성된 비밥 밴드로 불린다. 길레스피와 파커 의 공연은 이 무렵부터이며, 그 중 절정을 이룬 것은 두 번째 녹음('42년 8월∼'44년 11월)이 이루어진 무렵이었다. 이 앨범에는 길레스피가 빌리 엑스타인(Billy Eckstine)악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의 '45년부터 '46년에 걸친 연주가 들어 있다. 그리고 '45년 2월∼5월 사이의 찰리 파커 초기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쿨의 탄생
'48년 9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9중주단을 이끌고 브로드웨이의 재즈 클럽 '로열 루이스트'에 출연한다. 비밥 전성기였던 그 당시 이 9중주단은 어레인지의 주체 사운드로서, 종래의 연주와는 판이하게 다른 연주를 보여 준다. 편곡자는 유명한 길 에반스(Gil Evans), 존 루이스(John Lewis), 제리 마리건(Gerry malligan). 다음해부터 '50년대까지 9중주단은 캐피탈에서 총 세차례의 레코딩을 하게 된다. 마일스의 차가운 트럼펫 소리를 주체로 한 연주는 후에 앨범화 되어 <쿨의 탄생>으로 출반된다. 이후 '쿨 재즈'라 불리게 되는 이들의 연주는 붐을 이루게 된다.
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는 '40년 가을부터 비밥 탄생의 초석이 된 램의 재즈 클럽 '민터즈 플레이 하우스'에서 수석 피아니스트로 활약하였다. 당시 연주는 <민터즈 하우스의 찰리 크리스찬>에 기록되어 있다. '44년 콜맨 호킨스에 의해 최초로 녹음하게 되고 바라던 리더 세션이 된 것은 '47년이다. 블루 노트와 계약한 그는 그후 '52년까지 다섯 차례의 녹음을 갖는다. 녹음된 모든 음반은 밥 피아노의 최고 연주로 알려져 있다.
비밥의 쇠퇴와 하드 밥의 탄생(1950 ∼ 1955)
전후의 일시적인 경기 회복과 성장도 일단락 지어지며 웨스트 코스트가 다방면의 산업이 안정된 성장을 보인 반면, 이스트 코스트는 구조적인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로하고 재즈는 '50년대에 들어서게 되고 발전을 거듭한다.'40년대 초반 뉴욕 할렘에서 탄생한 비밥은 '5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층 열광적인 블루스 색조를 강조한 하드 밥으로 진화되어 간다. 또한 마일스 데이비스와 레니 트리스타가 개척한 쿨 재즈 역시 일반적 재즈 형태로 그 자리를 잡게 된다.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는 이스트 코스트의 하드 밥에 비해서 무브먼트로 형태를 잡게 된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발전
뉴욕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재즈는 웨스트 코스트의 연주가들에게 유입되는데 그 결과 재즈의 움직임과 발전은 동서로 분산되는 결과를 낳고, 이 시대의 눈에 드러난 특징이 된다. 뉴욕에서 탄생한 쿨 재즈는 불황이란 시대적 배경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본다. 하지만 동해안 지역에서는 큰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다. 쿨 재즈의 성과는 음악 산업에서 낙후되어 있던 웨스트 코스트로 전해진다.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여 영화 산업에서 종사하고 있던 연주가들은 악보 그대로의 연주에 싫증나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비밥이 탄생하게 된 민턴즈 플레이 하우스와 같은 상황이 서해안의 '재즈신'에서도 일어난다. 즉 연주가들이 일을 마친 후 재즈 클럽에 모여 그들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악보에 강했고, 따라서 어레인지를 응용한 연주로 연주 형태가 바뀌게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히트 선상에 있던 곡이 마일스 데이비스가 발표한 <쿨의 탄생>에 어레인지로 참가한 게리 멀리건 등이 중심이 되어 재치 있는 어레인지에 의해 쿨과 유사한 연주를 연주하게 된다. 이것이 후에 웨스트 코스트 재즈라 불리는 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드 밥의 등장
한편 뉴욕의 재즈계 역시 '54년경부터 경기가 회복됨으로써 차차 그 기세를 높여갔다. 그로 인해 많은 흑인 연주가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연주를 시험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비밥을 계승 발전시키고 흥미와 강렬함을 지닌 하드 밥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재즈의 황금시대
마일스 데이비스와 아트 브레이키는 웨스트 코스트로부터 온 클리포드 브라운, 막스 로치 그리고 크인테트와 함께 '50년대 초기를 선도, 증기에 들어서면서 하드 밥은 많은 연주가들이 그에 근접한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흑인들의 정서를 강조한 펑키 재즈 역시 탄생하여 재즈는 사상 최고의 인기를 획득하는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50년대 중반 뉴욕의 재즈계는 '40년대에 많은 재즈 클럽이 탄생한 52번지 이외에 그리니치 빌리지 주변에도 많은 재즈 클럽이 탄생하였다. 한편 블루 노트, 프레스티지, 리버 사이드, 사보이라 불리는 재즈 전문 레이블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비지니스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한 시기였던 재즈는 예전의 성격과 하드밥에 의한 전성기에 따른 시행 착오를 함께 갖고 있었다(물론 유명한 연주가들이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런 시기에 하드 밥으로부터 탈출하여 모드 인디옴에 의한 연주를 추구하게 된다. '59년에는 모드 재즈에 의해 최고의 작품 <카인즈 오브 블루>를 발표한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오네트 콜만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 당시의 음악 개념을 반영·발전시킨 프리 재즈를 독자적으로 완성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격동의 '60년대 재즈를 예상케 한다.
비밥의 명콤비 파커와 길레스피
비밥 시대의 명콤비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는 함께 모던 재즈의 원형이 된 비밥 창조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연주가이다. 두 사람은 '4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룹을 해산한 이래, 찰리 파커는 디지 길레스피 대신에 신진 마일스 데이비스와 케니 드리함을 그룹의 트럼펫 주자로 기용하게 된다. 한편 길레스피는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이런 두사람이 오랜만에 스튜디오 녹음(1950년 6월 6일)을 한다. 피아니스트에는 세로니어스 몽크가 참가. 이 세 사람은 모두가 비밥을 창조한 인물로 '40년대 초에는 여러 차례 함께 공연한 경험을 갖고 있다. 세 사람이 참가한 레코딩은 특기할 만한 사항.
사라 본의 성장
빌리 엑스타인 악단에서 싱어와 세컨드 피아니스트로 활약하였으며, 모던 재즈를 노래할 수 있는 싱어로서 인기와 지위를 확립한 사라 본은 '45년에 독립하면서부터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49년에는 콜롬비아사와 계약하게 되며 '50년 5월에 레코드를 취입하게 된다. 사라 본의 백밴드 리더 지미 존슨은 이 당시의 마일스 데이비스와 매우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날 녹음된 곡들은 다른날의 녹음과 함께 편집되어 <인 하이파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있다.
혁신적인 레코딩의 기술의 발전
'50년 12월에 행해진 듀크 앨링턴 오케스트러의 레코딩에는 재즈계 최초의 장시간 연주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까지는 여러 매의 SP를 사용한 장시간 연주를 수록하였으나, LP의개발에 의한 최초의 롱 레코딩에의 도전이이루어진 것은 이 무렵부터이다. <마스터피스>라는 앨범명이 붙여진 이 앨범은 앨링턴의 최초 LP 녹음반이다. 빅터가 개발한 EP반과 경쟁을 벌였던 '48년 콜롬비아에서 개발한 LP는 '50년대 이후 빅터가 LP 방식을 수용하면서부터 LP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당시에는 10인치 음반을 사용하였다). '51년 듀크 앨링턴의 연주는 LP 제1호로 발매되었다.
백인 피아니스트 데이브 부르벡
부르벡은 대학 시절에 다뤼스미요와 쇤베르크 등의 현대 음악가에게서 사사, 그 논리를 재즈에 적용하여 개성적 스타일을 이룩한 백인 피아니스트였다. '48년 밴드를 결성하였으나 난해한 음악성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그후 그는 피아노 트리오에서 활동하였으나'51년에 다시 그룹을 결성한다. 새롭게 조직된 그룹에는 후에 알토 색소폰의 전설적 존재가 된 폴 데스몬드 역시 참가했다. 그들은 이후 16년간 명콤비를 이루게 된다. 최초의 레코딩이 이루어진 때는 '51년 10월과 '52년 9월의 연주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쿨 재즈의 발전
'49년부터 '50년에 이르기까지 마일스 데이비스가 녹음한 <쿨의 탄생>은 웨스트 코스트부터 이스트 코스트의 연주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레코드 회사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캐피탈 이었는데 눈치 빠른 연주자는 그의 차가운 사운드를 모방하는 새로운 창조 작업을 시작했다. 그 중에는 숄티 로저스와 쳇 베이커도 있었다. 이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와 유사한 쿨 트럼펫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런 연주가들이 출입한 곳이 하이모사 비치에 있던 '라이트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이었다. 이곳에선 일요일에 순번적으로 연주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하우스 밴드가 결정되었다. 하우스 밴드에 참가하고 있던 로저스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이 캐피탈에서 녹음한 것이 1951년 [모던 사운드]이다. 이 앨범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최초로 녹음한 작품이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 레이블의 명문 블루 노트에서 '52∼'54년까지 연 1회의 페이스로 레코딩을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마일스 데이비스 제1집>과 <제2집>으로 발매되었으나, 몇번의 CD화를 거치며 현재에는 두개의 앨범이 함께 섞인 <컴플리트 버전>이 출반되어 있다. 이 시기의 마일스 데이비스는 마약과의 전쟁을 한다. 특히 '52년과 '53년의 연주에는 이런 경향이 농후하다. 마약을 하던 시기의 연주 역시 명연주로 평가되고 있으나, 마약을 끊은 '54년의 연주를 보면 당시까지의 연주가 거짓이었다고 생각될 만큼 밝은 연주로 변한다.
오리지날 게리 멀리건 쿼텟
로스앤젤레스의 재즈 클럽 '헤이드'에서 일하고 있던 차드 북은 6월에 게리 멀리건, 레드 밋첼, 체코 헤밀턴으로 결성된 트리오를 레코딩하고, 그 후 '52년 8월에 쳇 베이커를 보강한 밴드에서 재녹음을 하게 된다. 이것이 퍼시픽 재즈 레코드의 최초 작품 <오리지날 게리 멀리건 쿼텟>이다. 멀리건과 베이커는 '헤이그'에서 나와 의기 투합하여 그룹을 결성한다. 사상 최고의 멀리건과 베이커의 출발하였다.
한편 헐리우드의 영화 프로에서 그 인기를 굳힌 레스터 케니히 역시 새로운 재즈 녹음을 위해 컨템포러리 레코드사를 설립한다. 이 두 개의 레이블의 성공에 의해 본격적인 웨스트 코스트 재즈에 붐이 인다.
비밥의 황제들 모두 모여...
'40년대에 시작한 비밥 무브먼트가 서서히 약세를 보이기 시작한 '53년, 캐나다의 토론토시에 있는 맷세이 홀에서 이러한 생각을 뒤엎는 화려한 콘서트가 열린다. 연주자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 찰스 밍커스, 막스 로치 등 모두 비밥의 황제들 이었다. 당일 공교롭게 세계 헤비급 권투 선수권 대회와 중복되어 장내에는 청중이 거의 없었으나, 이들은 역사에 남을 명연주를 펼쳤다. 이 연주는 밍커스가 주제하는 데뷔 레코드가 녹음하였으며, 후에 발매되어 재즈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높게 평가된다. 또한 이날 첫무대를 장식한 버드 파웰 트리오의 연주도 같은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블랙 시나트라의 쿨 창법
백인 싱어의 최고봉 블랙 시나트라는 '40년대에 하리 제임스 악단의 전속 가수가 된다. 그후 토미 도시 오케스트러에 참가, 인기 정상에 오르게 된다. '42년에 독립하면서 더욱더 인기를 얻었으며 재즈 팬 뿐만 아닌 일반 팬까지 그의 연주는 칭송 받는다. 쿨 창법이라 불리는 그의 창법은 당시 백인 재즈 싱어의 전형. 그는 이것에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한다. 시나트라가 절정의 시기에 녹음한 두 개의 작품 [송 오브 영 라바즈]와 [스윙 이지]를 커플링한 덕용 CD가 이 앨범이다. 이 앨범에는 시나트라의 젊은 가성 중에 그의 풍부한 표정과 가사의 해석이 돋보인다.
펑키재즈,모던재즈,프리재즈의 발전(1956 ∼ 1960)
재즈 격동의 시기 '60년대를 예상할 수 있는 1950년대는 독자적 애상과 정열을 지닌 하드밥을 이어 펑키 재즈와 모던 재즈 그리고 프리 재즈가 그 형태를 완성시킨 시기이다. 흑인의 애환과 정서의 표현으로 시작된 재즈는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적 정서와 자유의 물결 그리고 종교적 색채를 더하게 된다. 지금까지 20세기초 뉴올리언즈에서 탄생한 재즈는 눈부신 발전을 통해 여러 종류의 재즈가 생겨났다.
이스트 코스트의 하드밥
하드밥은 '50년대 중반에 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스트 코스트에서 융성한, 독자적인 애상과 정열을 지닌 음악이다. 어떠한 이유로 이스트 코스트에서 이런 스타일의 재즈가 융성하였는가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날씨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겨울에 뉴욕을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 쉽게 알 수 있겠으나 뉴욕의 겨울은 매우 춥다. 영하 18도 정도의 날씨가 보통인데 사람은 대개 추위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슬픈 감정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 애상, 슬픔에 못지 않은 정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춥고 배고프더라도 참고 그 슬픔과 애상을 정열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인간의 특성에 의해 이스트 코스트에는 예감과 정열이 가득한 재즈 즉 하드밥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와의 접목, 펑키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등과 공통점 많아
펑키 재즈는 하드밥을 더욱 흑인답게 그리고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현재는 예외이나 예전에는 일요일 아침이면 미국인들은 예외 없이 교회에 갔다. 그리고 오후에는 팬케익을 먹으러 외출하고... 미국인은 자신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시며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속에 어떤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편이다. 재즈도 이와 비슷하다. '팬케익이 재즈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란 질문을 하는 이도 있겠으나, 이는 팬케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재즈와 종교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위함이다.
펑키의 대명사 아트 브레이키(Art Blakey)는 재즈 매신저스 연주로 알려져 있는 <모닝>에서 마이너조로 멜로디를 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또한 하모니에는 '아멘'처럼 들이는 메이조의 코드 진행이 사용되고 있다. 펑키 재즈와 교회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드밥은 비밥과 비교하여 멜로디를 얼버무리는 듯한 형태이다. 연주의 형태는 두 개의 관악기에 의한 유니즌 연주가 많다. 펑키 재즈라 하면 하드밥에 애감어린 멜로디와 종교적 색채를 터한 형태로, 그 멜로디는 세 개의 관악기로 연주된다.
외적 발전과 내적 발전, 프리 재즈와 모던 재즈
'프리'라 하는 낱말은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다. '50년대에 하드밥이라 불리던 재즈의 형태를 확립하였으나, 그곳으로부터 자연스러운 발전을 거쳐 좀더 자유분방한 형태의 프리 재즈가 된다. 프리 재즈 악기에서는 색소폰이 가장 주된 악기로 대두된다. 이는 색소폰이 음정을 약화시키거나 곡 끝부분의 음정을 부드럽게 한다든지 하는 기교에 있어 관악기 중 색소폰의 강점은 무엇에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프리 재즈의 유명 연주자는 색소폰 연주자가 대다수이다. 오네트 콜맨(Ornett Coleman)과 에릭 돌피(Eric Dolphy)의 알토 색소폰은 종종 인간의 목소리에 비유되었으며, 인간성의 발로로서 칭송 받았다. 또한 이들의 연주에서는 색소폰뿐만이 아닌 플루트나 베이스 클라리넷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에릭 돌피는 코드 진행을 충실하게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연주되는 음의 선택 방법이 조금 다른 면을 보인다. 음정이 고정되어 있는 피아노는 프리 재즈에서 그 영역을 고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은 끝이 없어 세실 테일러(Cecil Taylor)는 새로운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인물로 유명하다. '60년대의 프리 재즈의 콘셉트와 주법은 현재에도 커다란 표현 양식의 하나로 아티스트와 애호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 프리 재즈가 하드밥이라 불리는 재즈의 전형적인 형태로부터 외적인 발전을 한 형태라면, 모던 재즈는 내적인 발전을 한 형태라 말 할 수 있다.
C 메이저 키를 이용하여 설명하기로 하자. C메이저로 부터 파생된 코드에는 Dm7, Em7, F, G7, Am7, Bm7이 있다. 이러한 파생 코드에는 Dm7 같은 드리안과 Em7 같은 프리지안 보드(음계)-이 각각 대응하고 있다. C메이저 곡에는 Dm7과 Em7과 같은 코드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게 된다. 에드립을 연주하는 뮤지션은 '이곳은 Dm7이기 때문에 드리안을, 이곳은 G7이기 때문에 믹소리디안과 모드'를 사용하여 분리 연주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에드립을 기초로 아름다운 연주가 가능한 것이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는 한 곳의 연주곡에 한 개의 음계밖에 사용하지 않는 모던 주법을 사용했다. 그것이 앨범 [카인즈 오브 블루]에 들어 있는 <소우 헛>이다. 테너 색소폰의 존 콜트렌(John Coltrane)은 <소우 헛>의 초연에 참가하기는 했으나, 마일스 데이비스를 쫓아 모던 주법에 의한 곡을 작곡하게 된다. 그것이 [빌리지 뱅거드 196-01]에 들어 있는 <인프렉션즈>이다. 시기는 조금 틀리지만 피아노의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역시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렌을 쫓아 모던 주법의 곡을 작곡하게 된다.
근대 음악을 배운 밍거스의 전위적 사운드
찰리 밍거스(Charlie Mingus)는 '55년말 [재즈 아트 멧세이홀]등의 명반을 내놓았던 독립 레벨 데뷰를 해산, 재즈 워크숍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컴포 재즈 워크숍을 개최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유럽 음악의 요소가 보인다. 그런 성과를 기본으로 밍거스는 워크숍을 계획한다.
찰리 밍거스는 재키 맥린, J·R 몬테로이즈, 말 발드론, 윌 존슨을 쫓아 '56년 1월 30일 아틀랜틱의 스튜디오에 입단하게 된다. 녹음한 곡은 유럽 근대 음악으로부터 수법을 배운 조곡 '직립원인','프로필 오브 재키'등. 또한 프리 재즈의 개념이 확립되기 전이란 것과는 관계없이 매우 전위적인 사운드를 보였다. 이 작품이 발매 되면서 밍거스의 최고 수작으로 커다란 반응을 얻었다.
클리포드 브라운, 약관 25세로 사고사...
'56년 6월 26일 트럼펫계의 떠오르는 샛별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은 막스 로치와 함께 퀸텟의 멤버 리치 파웰 부부와 함께 자동차로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로 가던 중 펜실베니아 탄파이크에서 사고사하게 된다. 빗물로 미끄러운 도로에서 파웰 부인이 몰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일러난 비극이었다. 이때 브라운의 나이 25세, 버드 파웰의 친동생 리치는 24세였다. 이 사고로 브라운, 리치의 퀸텟은 해산되었으며, 재즈 트럼펫계도 지휘자를 잃게 된다. 브라운은 사망 며칠 전 필리델피아의 레코드숍에서 그곳 연주자들과 함께 점두연주(店頭演奏)를 했다. 이 연주를 발췌한 '더 비기닝 디 드'가 후에 발매되어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마일스의 리듬 세션과 함께, 아트 페퍼가 최고의 연주....
'50년대에 아트 페퍼가 남긴 최대의 수작 [미트 더 리듬 셀렉션]이 '57년 1월 19일에 레코딩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마약 중독으로부터 막 벗어난 직후였다고 전해지며, 건강은 좋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페퍼와 공연한 것은 리듬 세션을 맏고 있던 레드 갈란드, 폴 쳄버스, 필 존스였다. 아트 페퍼는 '50년대 후반부터 마약으로 인해 차츰 일선에서 멀어졌으나, 훌륭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1957년은 피아노 트리오의 명반 탄생의 시기이다. 버드 파웰에 의한 모던 피아노 트리오의 스타일은 확립되었으나, 그 이후 여러 피아노 트리오에 의해 무수한 명반들이 출반되었다.'57년이라는 시기는 피아노 트리오의 전성기와 같았다. 토미 브라나간 트리오의 '오버 시즈'를 처음으로 레드 갈란드 트리오의 쿨비, 소니 클락 트리오, 레이 브라이언즈 트리오등 트리오의 성황이었다. 이러던 중 브라나간이 윌버 리틀, 엘빈 존스와 스웨덴에서 녹음하였다. '오버 시즈'는 미국에선 브레스티지에서 발매되어 '환상의 음반'으로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프리 재즈의 제일보 새긴 오네트 콜맨
텍사스로부터 로스앤젤레스로 나와 독자적 활동을 계속해 오던 오네트 콜맨은 당시의 재즈 개념을 뛰어 넘는 연주로 향토적이면서 혁신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돈 체리와 함께 결성한 그룹은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를 기초로 하여 리듬이나 하모니 그리고 멜로디 모두가 당시까지의 음악 상식을 뛰어 넘는 파괴력 있는 것이었다. 그의 그룹은 착실히 인정을 받았다. 그런 콜맨이 작곡가로서 계약을 맺은 것이 컨템포러리 레코드였다. '58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그는 체리 외에 발터노이즈, 돈 페인, 빌리 호킨스를 더한 퀸텟에서 콜맨에 있어서는 최초의 녹음을 한다. 이것에 의해 재즈계는 새로운 일보를 딛게 된다. 프리 재즈의 기념비적인 최초의 앨범명은 <섬싱 엘스>라는 인상적인 이름이었다.
모던 연주를 수용한 마일스의 선풍
'57년말 파리에서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사운드 트랙을 녹음한 마일스 데이비스는 '58년에 귀국하여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던 그룹에 존 콜트렌을 복귀시켜 활동을 재개한다. 마일스는 이 시기에 적극적인 모던 재즈를 선보이고 있다. <사형대의 엘리베? 터>나 길 에반스와 함께 '57년에 녹음한 <마일스 紵理?>의 음악성을 발전시킨 <마일스톤즈>를 제드 갈란드, 폴 쳄버스, 빌리 조 존스를 더한 그룹으로 4월에 녹음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모던 재즈의 탄생
'58년의 <마일스톤즈>에 이어 마일스 데이비스는 모던 재즈를 추구한 <카인드 오브 블루>를 3월 2일과 4월 22일 양일에 걸쳐 녹음. 이 작품을 통해 지금까지의 모던 인디오즘에 의한 연주를 마일스 데이비스가 완성한다. 재즈사에 남긴 이 작품엔 그룹을 은퇴하고 있던 빌 에반스 역시 참가하였다. 멤버는 이 외에 존 콜트렌, 캐논볼 아더레이, 윈턴 켈리, 폴 쳄버스, 지미 코브였다. <올 블루스>등의 작품에는 모던 재즈의 기초가 되는 연주가 가득 실려 있다. 이 앨범은 재즈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60년대에 새롭게 시작되는 신주류파 재즈의 원점이 된다. 콜트렌은 이것을 계기로 독자적 스타일을 확립하기도 한다.
존 콜트레인 역시 모던 재즈를....
존 콜트레인이 아트란틱으로 이적하여 그의 최고 수작이라 불리는 <자이안트 스? 스>를 녹음('59년 4월,5월,12월). 당시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그룹에서 모던 재즈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음악적 변화 속에 콜트레인 역시 독자적인 연주법을 개발하게 된다. 이것이 비평가 '아이라 기트라'가 명명한 '시츠 오브 사운드'이다. 마디가 적은 독특한 연주에 의해 코드 진행시 애드립부터 자유롭게 뛰어넘을 수 있는 콜트레인만의 수법이었다. 콜트레인은 코드를 기초한 재즈로부터 모던 인디오즘으로 전환하여 가는 과정에서 이 연주법을 실행하였다.
초기재즈
전성시기
첫댓글 헉~! 진짜 길당.. 읽다가 기운 다 빠졌넹..ㅋㅋ
음.. 좋은 내용이다 ㅎㅎ 하지만 이렇게 긴 글은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거.. 끝까지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ㅡㅡ;; 그래서 째즈 히스토리 니, 째즈뮤지션 열전이니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라네 ^^ 잘 봤다 ^^
음...글쿠나....솔직히 나도 반 읽다가 포기했다는...ㅋㅋ
인내하는 자가 승리한다...ㅋㅋ 잘봤다 풍인~ 어디서 이런 좋은 정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