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0:26~34)
‘(중략)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34절)
아합이 아람을 상대로 두 번째로 전쟁에서 승리한다.
아람은 지난번 처절한 패배를 하였으므로
이번에는 정, 첩보 분석부터 시작하여 철저한 전쟁준비를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편드는 쪽이 승리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승리를 하든지, 패배를 하든지 모두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행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는 전쟁 준비가 무의미하다고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결정적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을 사용하신다.
아람의 철두철미한 준비가 부각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준비한 북이스라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셨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아람은 패배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주장하셨다.
북이스라엘의 편을 드신 것이다. 그 전쟁에 한해서......
그러던 한 쪽을 편든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편든 쪽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데는 위험성이 있다.
아합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왕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기도록 도우셨다.
아합의 행위가 정당해서? 두둔해서?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다른 크고 넓으며, 높은 뜻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그러니 자신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전쟁 승리의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기고만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뜻을 한 편으로는 감사로,
한 편으로는 회개의 마음으로, 한 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바라보고 기다렸어야 한다.
지금은 승리하였지만
하나님의 큰 계획 아래서, 그 승리가 단지 과정일 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고 결말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조짐이 보인다.
그 균열은 바로 하나님이 아닌, 아합 자신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혀 주목하지 않고,
전쟁 사후 처리를 자기 임의대로 한다.
현세에도 잔인한 악과 부조리한 일을 서슴 없이 하면서도
세상이 제공하는 영광이란 영광, 힘이란 힘은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베팅하는 모험은 줄곧 승리로 장식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그 하나하나에 관여해서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들의 승리를 금하지 않으신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악행도 그렇지만
믿음을 앞에 내세워 세상에서는 최고의 신앙인처럼 추앙받지만
세상의 악한 이들보다 더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그런 이들로부터 무고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려다가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 몇 대에 걸쳐 곤혹을 당하는 이도 적지 않다.
참으로 부조리하다.
이런 상황에도 궁극적인 절망과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악한 이들의 승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게
이 세상 원리를 만드셨다는 점이다.
그들의 내적 양심의 메카니즘은 이미 오염되어,
궁극적 행복과는 결별한 상태이다.
그들은 균열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best scenario인 죽을 때까지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일을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야 하고
영원한 생명 속에서 죽음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쪼금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가만히 기다려 주면 된다.
물론 그들이 거듭나도록 도와주는 마음이어야겠지만
그렇지 않고 끝까지 무도한 범죄를 자행한다면 결론이 그렇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에서 악함, 공의를 택함으로써 생기는
불편함이나 아픔을 허락하셨지만,
쾌통(快痛)! bittersweet. Bitter가 Sweet 되는 원리를 심어 놓으셨다.
악한 이들은 반대로 Sweet이 Bitter 될 것이다
“하나님! 악한 이들의 잔악한 일들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저 많은 영혼이 돌이키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긍휼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양정환, 주님의 아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