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들은 마음을 보라고 하면
마음을 어떻게 보는지 난감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마음이 무엇인지부터 막힌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안다.
우리는 항상 마음 이야기를 한다.
느꼈던 감정. 의도, 생각 마음 작용 등을 수없이 얘기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는 다양한 경험을 얘기하며
그때 어떤 마음이였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하니까 어떻게 되더라 등등
그리고 어떤 얘기를 듣거나 어떤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의도
속마음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말들도 많이 하고 생각도 항상 한다.
그래서 마음을 표현하는 비유들도 많다.
우리는 원만한 사회 생활, 인간 관계를 위해서
속마음을 숨기고 인격적 가면을 쓰며 생활하는 거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아마 원치않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자기의 속마음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수 있다.
간혹 얘기나 모습을 보고 진짜 속마음, 의도를
타인이 깨우쳐 주는 경우도 있지만.
수행자도 우리도 모두 마음을 보고잇다.
그럼 차이점은 무엇일까.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는 바른 마음가짐, 바른 견해로
마음을 보고 잇지 않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 나' 의 이야기로
받아 들인다.
수행자는 바른 마음가짐으로 마음을 보므로
마음 작용을 잘 알 수 있고 바른 견해로 보므로
고요함,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욕망. 욕구, 식욕, 성욕 등 즉 갈애를 충족 시켜
좋은 느낌, 좋은 기분을 일으키는 것을
행복이라고 알고 계속 갈애를 총족 시키는 길로 간다.
맛잇는 음식, 이성과의 만남,스킨쉽, 예쁜 옷, 물건
멋있는 집, 자동차. 게임. 오락. tv, 영화, 음악, 음주
친구, 자식, 부모님, 형제 등등
원하는 것을 충족 시켜 행복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또 원한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도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그것이 고통의 원인인 줄 모른다.
그 순간 일어난 좋은 느낌, 좋은 기분만 기억하고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원한다.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많지만
사야도께서 로바를 50만큼 일으키면 50만큼의 도사가
일어난다 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우리는 각종 스트레스로 불쾌감을 안고 산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좋은 느낌을 찾아 해매고 집착하는 것은
한편으로 안쓰럽고 불쌍한 삶이지만
분명한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임을 모르니 말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고통의 원인을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각종 스트레스로 질병을 얻거나
심하면 미쳐버릴 것이다.
우리와 수행자의 또 하나의 차이점은
수행자는 고통의 끝, 해탈, 열반의 길을 알고있다.
그 길이 감탄할만한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 방법, 기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진리이다.
무상, 고, 무아 , 즉 진리를 께달으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래서 갈애를 충족시켜 좋은 느낌을 안식처로 삼기보다
수행자는 사띠, 사마디, 지혜, 신심, 노력, 즉 오력을 안식처로 삼는다.
그리고 또 하나 하고싶은 얘기는
우리가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초보 수행자는 법문을 보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생소한 용어들이 더 햇갈리게 한다.
마음이 마음이지 아는 마음은 또 뭔가
지켜보는 마음. 관찰하는 마음, 마음 작용 등등
우리 일상에 쓰는 쉬운 용어로 대체 가능한 단어들이
찾으면 있을 것 같다.
지켜보본다 는 의미는
애쓰지 않고 저절로 알아지는 상태가 이어지는 것을 말한 거 같다.
사야도께서 지켜보면 거기엔 항상 '나' 가 있다고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지켜보라는 얘기가 법문에 종종 등장한다.
사야도의 법문은 간단 명료하시다
그래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주해, 설명이 필요하거나
많은 법문을 읽으며 비로소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본다는 단어는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의미의 단어는 아닌 것 같다.
초보자에게 오히려 잘못된 수행 방법으로 나아갈 오해에 소지가
있는 단어 있는 것 같다.
샤야도께서 마음 작용을 봐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 작용은 속마음을 지켜보면 될 것 같다.
속마음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자신의 속마음이여도 자신의 속마음 전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 속마음을 알고 있다.
원만한 사회 생활, 인간 관계를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지만
사실 더 복잡한 속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속마음을 보면 복잡한 마음 작용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건 그 모든 마음 작용을
바른 마음가짐, 바른 견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근본 이치다
거기에 ' 나' 는 없다. 그냥 마음 작용일 뿐이다.
바른 견해로 봐야 한다.
하지만 사야도께서 자신이 생각하든 안하든
' 나 ' 는 항상 있다고 하셨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행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자연의 이치다 라는 생각을 적용해 관찰해도
깨달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 바른 마음가짐이다
집중해서 보지 말고 억재해서 보지말고 억지로 만들지 말고
억눌러 보지 말고, 일어나게 하지 말고 일어난 것을
없애게도 하면 안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통제를 탁 푸는 듯한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원만한 사회생활 , 인간관계를 위해
마음을 통제하고 억누르고 집중하고
살아 왔는데 . 통제를 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타심통은 없지만 우리는 느낌으로
어느정도 타인의 감정, 생각등을 알 수 잇는데
통제가 풀려 속마음이 다 드러나면
원만한 사회생활 , 인간관계가 유지될까ㅋㅋ
지혜가 충분하면 선한 마음이 유지되어 괜찮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수행은 수행처에서 충분히 지혜를 샇아야 하는건가..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이 제대로 될까..
첫댓글 저에 경우는 그냥 믿고 합니다... 쉐우민 수행법을 하고 부터 지혜가 생겼으니까요.....또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안합니다...사실 그게 생각에 함정이니까...지금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그리고 수행자는 정직해야 합니다...진실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수행이 어려우면 지혜를 빌려다가 써먹으라고 합니다...고요하면 조사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이해가 생기지요...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만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인것은 확실합니다.
법문을 경청하고 이렇게 읽고 배우고 공감하는 자신이 감사하고 행복 합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때의 고통을 실감 했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