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흐리지만 그날은 4월 치고는 좀 쌀쌀한 날씨였다. 게다가 정오쯤엔 소량의 빗방울까지 떨어진 상황.
나와 지인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은 경복궁 입구를 통과하여 근정전을 거쳐 연못으로 이동했다.
예년에 비해 낮은 기온 때문에 나무들에선 순이 더디 나오고 꽃망울도 보이지 않아 좀 휑한 상태에서
궁내 길을 걸으며 단체 사진도 찍고 민속박물관까지 관람을 마친 우리는 후문으로 나와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동 중간 지점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음식점을 나와 인사동 거리로 들어서서
유명한 호떡집에서 호떡을 하나씩 들고, 또 고구마 채 튀김을 사서 들고서 최종 목표지인 청계천으로 행진.
아직 풀과 나무 순이 보이지 않는 개울 주변에 비둘기 몇 마리가 앉아 양지를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30 분가량 청계천을 이동하던 우리는 중간 계단으로 올라와 광장 시장을 거쳐 지하철을 타고 귀환했다.
청년시절 나는 경복궁을 가끔 찾았었다.
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서, 아내 된 사람과 데이트 코스로,
고궁에 잠재한 고즈넉한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낙엽 지는 가을과 눈 내린 겨울 이 곳을 찾았다.
근정전의 돌계단, 박물관의 돌바닥, 연못 속 정자, 가을 단풍, 길에 뿌려진 흰 눈 가루,
이 모두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그림이 되어 내 마음의 캔버스에 남아있다.
인사동 거리는 어떤가?
중학교를 졸업했던 까마득한 과거, 재수생이 되어 나는 이 거리를 지나 풍문여고 옆에 소재하던 학원에 다녔었지.
그때의 사계절 거리상이 분명히 기억나는데 내용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이런 것들을 대할 때, 이런 것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눈망울은 어느새 향수에 잠기곤 한다.
삶에서 혼란스러워진 우리의 감각을 순화시켜주는 풍치를 접하면 우리의 가슴에는 일종의 감정적 샘물이 솟아난다.
볼 수 있다는 것, 들을 수 있다는 것, 느낄 수 있다는 것,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아닌가?
순수하게 그럴 수 있다면, 혼돈스러움 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고 누릴 수 있다면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인생에는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끼어든다.
죄, 탐욕, 가난, 실패, 억눌림, 외로움, 잘못된 처우, 고생, 질병, 고통, 전쟁 등.
이때 사람은 신비광을 잃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방어적이 되고 전투적이 된다.
하나님의 강보가 벗겨진 인생은 어느새 가시 돋친 요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눈은 순결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연말 크리스마스에 흰 눈이 내리면 인류가 동경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된다.
하지만 군부대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군인들의 눈에 지겨운 제설작업 대상이 된다.
아름다운 소녀는 거친 정서를 순화시켜주는 청순함의 상징처럼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더러운 욕망의 시선으로 소녀를 바라본다면 그렇게 바라보는 마음에서 청순의 빛깔이 사라질 것이다.
사과, 배, 딸기, 귤, 포도, 체리, 키위, 등 인간이 만들지 않은 과일과 그 과일에 찍힌 신비한 문양들은
얼마나 이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면하게 하는가?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 입술 모양이 비웃음의 모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 자체다. 카프카의 말처럼 그분은 "빛으로 가득한 심연"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 자체도 미스테리다.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 시간 속에서 구속되어
시간 후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간다는 이 과정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 속에 있다.
태어나는 것도, 산다는 것도, 이생 이후도 모든 것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신비의 이름은 하나님이요 은혜다.
그리고 이 신비는 경건하고 겸손한 영혼의 눈에만 포착된다.
내 영혼, 우리의 머리 위에 영원히 신비의 무지개가 떠나지 않기를...
신비의 덮개가 제거되지 않기를...
2023. 9. 7
이 호 혁
첫댓글 현실에 정신을 쏟아 삶의 신비와 감격, 은혜,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길 기도해야겠습니다 ㅠㅠ
아멘!
매 순간 삶이 주님과 그 은혜의 신비로 가득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