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 스투키와 난蘭에 물주기 교차로신문 2020년 5월 26일
근자 스승의 날, 오래전 가르쳤던 학생들과 스님들 몇 분이 문자를 주거나 선물을 보내왔다. 주위 몇 분에게서 인사를 받으며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내가 스승으로서 대접받을 만큼 덕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스승의 날이라고 인사 받는 것이 멋쩍었다고 할까? 작년까지도 그렇지 않았는데, 올해는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생의 철이 드는 건가! 스승으로서의 자질과 덕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들으면, 그것을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들었다고 바로 행할 수 있겠느냐?”
염유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을) 들으면, 그것을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한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공서화가 말했다.
“스승님, 자로에게는 ‘부형이 계시는데, 어찌 쉽게 행하느냐?’고 하시고, 염유의 질문에는 스승님께서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저는 의구심이 듭니다.”
공자가 말했다.
“염유는 물러서는 성격이므로 ‘곧 바로 나아가라’고 하였고, 자로는 남의 몫까지 겸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므로 한번쯤 사유하고, 물러서게 한 것이다.” - <논어> 선진 #21
똑 같은 질문에도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스승의 답변이 달랐다. 중국의 선사 가운데, 당나라 때의 마조(709∼788)선사도 그러했다. 마조는 제자의 질문에 어떤 때는 자세하게 설해주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반어법을 썼으며, 어느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때도 있었다. 또 문답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돌아서는 제자에게 이름을 불러 자성을 각성케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또한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祖師西來意]?”라는 똑같은 질문에도 답변이 다양했다. 곧 어떤 제자에게는 자세히 설명하고, 어떤 제자에게는 방망이를 들기도 하는 등 일괄적이며 교조적인 답변이 없이 그때그때마다 제자들의 근기에 따르고, 상황에 맞추어 지도 편달하였다.
석가모니 재세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제자들 중에 공부를 많이 한 승려가 와서 ‘조용한 곳[아란야]으로 가서 홀로 수행하고 싶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대부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이를 보고, 우바리 존자도 부처님께 찾아가 자신도 아란야에서 조용히 홀로 수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No’라고 하신 뒤 ‘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머물면서 공부하라’며 허락해주지 않았다.
제자를 교육하는 스승의 뛰어남이 돋보인다. 각자마다 그 사람의 그릇이 다른데, 이를 알고 지도함이 스승됨의 첫 번째 자질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식물을 좋아해 다양한 나무와 꽃을 키운다. 그런데 이 식물들에게 일괄적으로 물을 주어서는 않된다. 공기정화 식물인 스투키는 한달에 한번 물을 주고, 난 계통은 열흘에 한번, 잎이 무성한 나무 계통은 일주일 단위로 물을 주어야 한다. 식물도 물을 받아들이는 용량이 다르다. 내 입장에서 일괄적으로 한번에 물을 주면, 살아 있는 식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사람도 그러하다고 본다. 진정한 교육은 일괄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피교육자의 근기와 성량에 맞춰 지도함이 참 교육이라고 본다. 물론 이 또한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에 늘 고민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자질과 역량이 다른데 무조건 "무자"화두만 주니 머리만 아플 땨름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