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6:25-34
제목: 염려를 설레임으로
일시: 2021. 5. 3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어느덧 이제 5월을 마치고 6월을 앞두고 있다. “와” 하는 기대감으로 설레이는가? “휴” 하는 염려와 걱정이 되는가? 사실 기대보다 걱정이요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게다가 “염려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 자체가 또 다른 염려의 표현 아닌가! 코로나는 이제 그만 잠잠해지겠지? 갑작스런 변이가 생기지 않을까? 백신은 언제 맞을 수 있나? 아스트라인가? 파이자인가? 부작용은 없을까? 코로나로 인해 보기 어려웠던 지체들이 영혼과 육신의 삶에 큰 문제는 없는지? 다음 주부터 주일학교를 교회에서 함께 하기로 했는데 다들 오랜 만에 옮기는 발걸음이 어색하지는 않을지? 코로나 관련된 상상만 해도 걱정 충만해진다.
II. 염려가 없어질 것을 기대하지 말라. 기대하면 실망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반복해서 나온다. 염려는 아주 센 놈이다. 염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단하지만 그 결단은 곧 무너지며 마음 한쪽이 허물어지곤 한다. 염려는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염려는 있었고,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불행히도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 살아도 걱정이 있고 독일에 살아도 걱정이 있다. 오늘 염려가 지나면 내일 신제품 염려가 또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염려청정지역에서 염려프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고 기후조건만 맞으면 새봄에 싹이 나듯, 염려의 싹도 또 새록새록 올라오는 것을 그저 노말하게 생각하라. 사실 인생에는 염려의 무풍지대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더욱 많아진 세상은 걱정도 그와 비례하여 더욱 많아진다. 가정사 걱정, 교회일 걱정, 직장일 걱정, 친구일 걱정... 뿐 아니라 세상 걱정 다한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걱정,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걱정, 체르노빌 방사능 활동 조짐이 보인다는 걱정, 인도발 변이발이러스와 백신부족 걱정, 미얀마구테타정상화 걱정, 코로나로 정부보조 예산이 많이 풀려 돈이 휴지값되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 이율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비트코인 값 떨어질까 걱정, 걱정도 팔자이다. 즐겁고 기쁜 축제의 날도 그것이 끝나고 나면 힘든 시절이 올까봐 걱정이다. 태풍이 오기 전에는 태풍 전야의 고요함 때문에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아무 걱정이 없어서 이래서 되나라는 걱정이 생긴다.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 익명의 걱정거리들로 걱정을 하기도 한다. 비도 오지 않는데 비올까봐 걱정이고 늦지도 않았는데 늦을까봐 걱정이다. 걱정도 팔자이다.
사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성실하기 때문이다. 불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될대로 되라”라는 삶이기에 걱정이 헛발질하기 좋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정신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걱정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은 계획한 것이 틀러질까 준비한 것이 무효 될까? 쌓아놓은 것이 무너질까 더욱 긴장한다.
저도 염려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을 보니 성실한 사람인가보다. 시간 배분을 하고 그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얼마나 꼼꼼하게 계획하는지 지인들과 얘기하다가 헤어지기 전에는 종종 시간유예를 말한다. 예를 들어 10분후에 가자고 한다. 갑자기 말하면 충격을 받을 것이기에... 하루의 계획도 새벽기도 원고 뒤편에 기록하여 하나하나 체크해 나간다, 한주의 계획, 6월 새로운 한달의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 평생의 계획도 큰 그림으로 그려 나간다. 그렇게 철저하게 기계인간처럼 계획하고 성실하게 삶을 설계하는 것은 실수를 줄이고 불확실성의 걱정과 염려를 감소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참담하다. 삶의 뒤를 돌아보면 내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계획은 세우지만 거기에 목숨 걸지 않는다. 생각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앞에 있는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도색하여 다른 색을 칠해버린다. 비오는 날씨를 나쁜 날씨라고 한다. 그러나 가뭄이 심할 때 비가 오면 단비라 하지 않는가!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염려가 아니라 기대와 설레임일 뿐이다. 권목사 6월이 염려되고 걱정되는가? 그 염려를 설레임으로 바꾸라. 그 걱정을 기대로 바꾸라.
III. 염려에게 뭘 기대하는가? 사람 진만 빼고 해주는 것은 눌(0)이다.
염려에게 뭘 기대하느냐? 염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6:27). 염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염려의 실체는 안 일어날 일이거나, 일어나도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한다. 염려함으로 일이 해결된다면 열심히 염려하겠다. 그러나 염려는 계속 “어떻게 할거냐”고 윽박지르고 질문만 할 뿐이지 아눙은 하나도 주지 않는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걱정은 누가 하는가? 오늘 말씀에 재미만 표현이 있다. 걱정은 내가 아니라, “내일”보고 걱정하라고 하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Tomorrow will care for itself). 내일 가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나머지는 내가 감당해주겠다는 것이다.
염려가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무시하지는 말라. 그의 존재와 그의 위협은 우리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결국 “염려님”이 오신다.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이다. 그때 우리는 이미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계셔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별 내색하지 말고 그저 밝은 얼굴로 맞이해 주라.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반겨주라. 그러면 “염려”는 아주 근심어린 얼굴로 당황해하면서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어쩐 일로 안색이 좋느냐? 왜 걱정을 안 하냐? 그 염려님은 염려 안하는 우리로 인해 무척 염려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염려가 아무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종이 호랑이임을 알기 때문에 염려의 이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염려님이 올 때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오셨냐고 하는 것은 염려에 대한 예의를 차린 것일 뿐이다. 염려에 대해 예의를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종종 생각 없이 살다가 폭탄이 터질 수 있다. 쉽게 생각했는데 아주 난감한 지경에 이를 수 있으니 작은 일에도 무시하지 말고 항상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대미산 자락에 있는 문경 벧엘관 아버님 기도처 깊은 계곡에 돌을 밟고 올라가는데 아버님이 “아들 돌을 무시하면 돌이 우리를 무시하니 존중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날씨도 쉽게 생각하여 무시하면 날씨도 우리를 에씨하고 무시한다. 오히려 한 겨울에는 감기에 안걸려도 오뉴월에 감기가 들기도 한다. 코로나도 무시할 때 걸릴 수 있다. 그래서 내 자신의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예의로 걱정해준다. 방심은 금물이기 때문이다. 염려에게 꽤나 염려한 듯이 겸손히 대한다. 염려도 나름대로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데 너무 무시하면 행여 기분나빠할까봐 예의로 염려해 준다. 염려함으로 키도 한자 자라게 하지 못하는 염려는 이렇게 굴욕을 줄 수 있다.
IV. 염려의 종착점은 하늘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염려는 원래 노말한 것이고 염려한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 그냥 방치할것인가? 우리는 씨름에서 상대선수의 힘을 이용하여 균형을 무너뜨려 이기는 것 같이 염려라고 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역이용해야 한다. 염려는 내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붙잡게 해 주어야 한다. 걱정이 우리를 회의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염려와 걱정으로 “될대로 되라”라는 던져져버린 인생이 아니요 맡긴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 염려는 나를 좌절에 빠지게 하는 핵방사능이 아니요 나를 치료하는 기도의 원자력에너지가 되어야 한다. 염려가 다가올 때 염려거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요즘은 어떤 계절인가? 코로나의 계절인가? 말을 바꿔야 한다. It is not the season of corona, but the season of God. 바로의 압제가 거셀 때, 홍해가 있을 때,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을 때, 사막에서 불뱀에 물려 사람들이 죽어갈 때는 위기의 시기(The time of crisis)라기보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The time of God)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시다. 그는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는 공중나는 새를 먹이신다. 들깨씨를 뿌렸을 때 두 마리 비둘기가 우리 밭에 늘 와서 사이좋게 쪼아먹는다. 누가 밥을 주었는가? 그래서 후다다닥 발바닥소리 크게 내어 좋았다. 그리고 돌을 들어 던졌다. 그것은 우리 교회식구들이 올 여름 그릴 먹을 때 쓸 깻잎농사야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옆집 지붕꼭대기로 올라가서 “헐 내가 뭐 어쨋길래 먹으면 안돼”라는 모습으로 쳐다 본다. 좀 안쓰럽기는 하다. 그러면서 아 하나님이 요롷게 먹이시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 땔깜으로 사용될 들풀과 백합화조차도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화려하게 입히신다. 그런 그가 어찌 당신의 자녀를 방치하실 수 있겠는가! “하물며 너희들일까 보냐”(마태6:30).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거리들보다 우리를 생각하신다.
예)우리 부모님들이 우리가 공부도 잘하고, 학교도 잘 들어가고, 사람도 잘 만나고, 직장도 잘 잡고,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얻고... 다 좋아하시지만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만일 아파 병날 정도가 되면 “딸 괜찮아 아들 그냥 와 문제없어”라 하실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의 학위나 직장과 명예와 돈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신다. 우리의 염려거리들은 그저 딸려 오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태6:30)라고 하신다. 이 애비를 그렇게 못믿냐라는 듯한 안타까움이시다. 염려는 방치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쇄기 속에 넣고 없애면 되는 것이다. 염려를 다룰 때 염려와 담판을 짓거나 염려와 더불어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걔는 그냥 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문의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에게 “아빠 알아서 하세요”라고 다 맡겨버리는 것이다.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이 그냥 통째로 맡기라. 어떻게 해결하실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너무 예민할 필요 없다. 마치 의사에게 우리 몸을 맡기면 그들이 알아서 수술하듯이 살려면 내세요 고쳐만 내세요 처리만 하세요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왜 무슨 권한과 자격으로 그러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말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염려하지 말라고 약속하신 분은 하늘 아버지니까!
V. 6월을 맞으면서 염려가 많은가? 염려의 존재를 부정말라. 그러나 그들의 이빨과 발톱의 날카로움에 겁먹지 말라. 그러면 벌써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염려가 찾아올 때 그와 씨름하여 승부를 걸지 말라. 하늘 아버지께 다 일러바치고 다 위버바이중 넘겨 버려라. 그렇게 함으로 색깔을 다 바꾸어 사는 한달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염려하기보다 기도하라. 하소연과 한탄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로 바꾸라.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도록 하라. 슬픔의 애곡이 아니라 기쁨의 찬양이 나올 것이다. 5월을 마치며 내일부터 6월로 들어간다. 아 어떻게 살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히야 무슨 신나는 일이 생길까 기대하라. 염려로 시작하는 6월이 아니요 설레임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한달이 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