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이유
우리는 흔히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를 사대에 찌들었던 주체성 없는 인물로 평가한다. 이것 또한 사대에 대한 정확한 개념 위에서 최만리의 생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대는 단순히 큰 나라를 섬기자는 예속적인 사상이 아니라 선진한 대국의 문물과 제도를 잘 받아들이자는 성리학적 사상이다.
그러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의 상소문은 6개 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첫머리 부분의 3개 항을 보자.
1. 우리나라는 조종 이래로 지성껏 중국 문화를 섬기어, 오로지 중국 제도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중국과 문물제도가 같아지려고 하는 때를 맞이하여 언문을 창제하시면, 이를 보고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중화를 섬김에 있어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1.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아직 방언으로 인해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고,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과 같은 무리들만이 각각 제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들만의 일이라 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전해 오는 고전에 의하면, 중국의 영향을 입어서 오랑캐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오랑캐의 영향을 입어 중국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1. 만약에 언문만을 사용한다면 관리들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려 할 것입니다. 진실로 관리들이 28자의 언문만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에서 보듯이 최만리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사대에 입각하여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있다. 한글 창제가 선진국인 중국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선진문명국이 되고자 하는 데 지장을 줄까 염려한 것이다. 한자 배우기에 소홀함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당시로서는 중대한 국가적 문제였음을 고려한다면, 최만리의 상소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최만리는 세종 1년에 등용되어 세종 27년에 세상을 떠난 그야말로 세종 대의 인물이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한 지조 높은 사람이었다. 성리학의 가치관은 군신 간의 도리와 백성들의 도리를 바르게 밝혀 국태민안을 가져오는 일이다. 그 실천 방법으로는 중국을 사대하여 선진문물을 본받고 그를 위해서 한문과 한학을 연구하여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 내는 일이었다. 중국의 선진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여 작은 중화를 마련하는 것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대열에 나가는 것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최만리는 세종과 각별한 사이였고 임금의 정책에 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한글 창제에 관여하는 집현전에서 부제학으로 일했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하여 깊이 알았고, 그것이 국가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닷 말하면 훈민정음이 나라의 발전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사대와 성리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훈민정음 창제는 선진화에 아무런 이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두는 한자에 발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한자를 알게 되지만, 정음은 한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이므로 선진문화 수입과는 관련이 없는 문자였다. 몽고, 여진, 서하, 일본의 무리들이 각기 저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후진국의 일일뿐 선진사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지만 사대는 단순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속적인 사상이 아니라, 선진문화와 제도의 수입이다. 그 당시의 선진국은 중국이 유일한 나라다. 그래서 최만리는 ‘만일 중국에라도 이 사실이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고 하였다.
정음이 한자보다 훨씬 쉬운 문자이지만, 만약 이로 인하여 중국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하고, 나라 안에서는 한자를 공부하지 않고 새 문자를 익히는 관리가 늘어난다면 문화는 천박해질 것으로 보았다. 선진문화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우선 과제인데, 임금이 그것을 소홀히 한다면 신하로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라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최만리는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관리였다. 그는 원칙주의자였고 성리학적 명분 외에는 다른 길을 걸을 줄 몰랐다. 그래서 세종도 그 상소에 대하여 비록 그를 하옥시키긴 하였지만, 하루 만에 그를 석방한 것이다. 이러한 최만리의 뜻을 간파한 세종의 반박도, 훈민정음 자체가 아닌 한자의 음과 관련한 운서(韻書) 문제에 치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훈민정음을 통한 한자음 정리가 시급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 것이고, 그만큼 훈민정음이 한자음 정리를 위하여 긴요하다는 생각임을 밝힌 것이다. 세종은 신숙주로 하여금 요동에 와 있던 황찬에게 한자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묻게 하였고, 집현전의 학자들과 동궁, 진안대군, 안평대군에게 한자음을 적은 운회(韻會)라는 책을 번역하게 했다. 당시의 한자음이 매우 혼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음을 적는데 매우 편리한 글자(발음 기호)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이란 책을 발간한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가 결코 한자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내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최만리는 1419년(세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 박사로 임명되고, 그 뒤 집현전 학사를 거쳐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대제학은 명예직이었고 부제학이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였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학술원 원장이나 서울대학교 총장과 같은 최고의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어찌 매국노 같은 단순한 생각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겠는가?
최만리는 정음 창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집현전을 떠나 낙향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오랫동안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비워두고 그를 못 잊어 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세종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을 운서(韻書)를 통한 한자음 정리에 활용함으로써 선진문화를 받아들임에 힘을 쏟았다. 최만리도 단순히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사대에 어긋날까를 두려워한 것이다. 시쳇말로 하면 세종도 최만리도 세계화를 염두에 둔 인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