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8일(화) 원촌교 서쪽 서원말에 있는 숭현서원을 찾아가기로 한다.
날씨가 심상치 않아 각자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13:00에( 대전지하철) 정부종합청사역 구내에서 합세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로 한다. 다행히 아침까지 춥던 날씨가 점심 무렵부터는 제법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버스로 가는 대신 택시로 합승해서 (유성구)원촌동 원촌3거리까지 간다.
-숭현서원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350m-
(예전에 다녔던 낯익은 식당간판이 눈에 띄인다. 20년도 더 된 시절 이야기인데.)
-언덕진 곳으로 조금 올라가니 홍살문이 나타난다. 옆에는 하마비도 서있고.-
(홍살문 중앙의 태극문양 부분은 망가져 보이지 않는다.)
- 조금은 허술해보이는 홍살문을 지나니 제법 잘 가꿔진 서원 입구와 안내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숭현서원지 안내판을 읽어본다.
(처음 1585년 용두록에 있던 삼현서원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9년 광해군 때 다시 세웠다가 1871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다. 묘정비만 남아있던 터에 1995-2001년 간에 복원 정비하여 오늘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영귀루 현판도 보고.-
(영귀루의 뜻은 무엇인지, 안에 들어가니 해설사 한 분을 만나서 듣게 된다)
-영귀루 대문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내다본 모습-
차마 영귀루 루각에는 올라가서 전망은 보지 못하고, 상상속으로 그려본다.
계족산이 멀리 보이고, 가까이는 갑천 큰 내가 지나고 배산임수 멋진 풍광이다라고 .)
-숭현서원 현판이 보이고 안에는 입교당이라는 현판은 대청마루 안쪽에 걸려있다.-
(오른쪽이 동재, 서쪽이 서재, 중앙에 웬 비석이 있다. 나중에 보니 바로 묘정비이다.
묘정비라, 삼현을 모신 묘당의 앞에 세웄던 비석이란다.)
-마침 동재에 있던 해설사께서 나오셔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숭현서원묘정비: 좀 낯선 비 이름이다.)
(숭현서원묘정비문을 상촌 신흠이 지은 것이라는데 깜짝 놀란다. 상촌 신흠이라. '상월계택'으로 유명한 조선 한문4대가 중의 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분이? 하고 의문을 가지자 성지기가 외가가 주산동 송씨네라고 귀뜀해 준다. 아 하.. 또 무식을 면한다
비 내용을 잘 몰라 집에 와서 찾아본다.. )
-연세 지긋해보이는 번남 박선생 해설사의 배웅을 받으면서 뒷산 우성이산으로 찾아 올라간다.-
(낯선 곳, 사방에 개인용 울타리가 처져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하고 , 어떻게 해서 뒷산으로 올라는 갔는데, 아뿔싸, 산 정상에도 사유지라 쳐놓은 토끼 그물같은 울타리를 따라 짐작으로 북쪽으로 가지만 결국은 또 다른 철제 울타리에 그만 좌절하고 만다. '고자리'라는 물한리 지명만 회상하면서 원점 회귀한다..
이렇게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뒷산조차도 길을 못찾아 헤매다니, 문득 대군을 이끈 김유신 장군의 신라군은 어떻게 길라잡이를 앞세워 백제수도 부여까지 진군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길잡이의 중요성. 지도도 없이 육안으로 그저 대충 짐작으로 결국은 낭패를 보고만 산걸음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나 가자고, 다 내려와서 산지기가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양지바른 풀섶에 엉거주춤 앉아서 홀짝거리며 나눠 마시며 썰을 푼다. 산을 돌면서 해설사 분이 말한 서원의 풍수지리적 지형도 생각해본다. 좌청룡에 우백호, 한 가운데 숭현서원이 자리하는구나. 마치 산(山 )자를 동쪽으로 갑천을 향해서 뉘어 놓은 곳 한 가운데에 서원이 있는 형국이다.
배산임수에 서출동류수이고 보면 풍수지리를 조금이라도 모르면 이해가 안 되는 유적지 이야기들이다..
목마른 말이 찾아와 물을 마시는 곳인가? 유생들이 목마른 말인가.)
-차를 마시고 나니 한결 원기가 난다.' 원점회귀'를 되뇌이면서 원촌교 밑으로 난 갑천변길로 들어선다. 잘 정비된 천변길이다. 갈대숲과 푸른 냇물 가장자리에는 살짝 얼음이 얼어있고, 발도 시리지 않은지 그 위로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닌다.
따사로운 겨울 햇볕을 가슴가득히 안고서 도란도란 함께 얘기 나누며 주변 산천도 즐기면서 걷기 시작한다.-
(갑천: '으뜸가는 내'라는 뜻의 갑천, 원촌교가 있기 전까지는 배로 다녔던 곳인데, 내 건너편에는 백제시대의 우술성터와 서낭당이 있고 지금도 회덕 향교가 있는 곳인데.... '원촌'이라는 지명이 곧 서원이 있는 마을이니 '서원말'이 순 우리말 이름이고..
-동쪽으로 보이는게족산 연봉들이 남쪽 식장산쪽으로 이어진다. 능선 따라 산성들이 즐비하고 -
(계족산 너머 계족산성이 보이고, 맞은 편에는 개머리산성 (견두산성)과 개대가리, 백제가 멸망하자 개죽음을 당한 백제군사들의 한이 서린 명칭을 성지기가 넌지시 말해준다.' 미화된 '계족산'이 아닌 '개X산''과 '개대가리산성'과 연계해 보는 지명 풀이.
그렇지 가까이의 백골산성의 '백골' 또한 섬뜩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이렇게 산성 이름에도 망국의 아픔이 서려있구나.
계족산성이 지닌 아픔, 개X산: 날이 가물면 울음소리 내고 비가 내린다는 기록이 있는 계족산인데... 다시 보아진다..)
(산지기의 사진솜씨로 본다.)
-갑천변의 철새들 -
(건너에는 대화공단이 있고, 예전에는 이곳 갑천변에 정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성지기가 말해준다.)
-1992년 대전 엑스포 당시 세운 한빛탑-
(뒤로 우성이산 줄기가 보인다. 저 산줄기를 타볼 요량으로 나선 길이었는데. 헛수고로 다음날을 기약한다.)
- 갑천 상류, 서쪽으로 계룡산 줄기가 보이고-
(갑천변 상류의 앞에 보이는 산에는 구성산성(대전과학고 옆, 기상대 쪽)이 토성형태로 아직 남아있는데..
더 위로는 만년교 부근에 월평동산성이 있고 갑천변 수로따라 이렇게 많은 산성들이 ,있구나.)
-1:5만 지형도로 옛이름 보기 -
(오늘 우리가 걸어본 길을 지형도로 더듬어 본다. 하도 많이 변해서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
지명만으로 짐작해본다. : 서원말, 서원말나루( 현재 원촌교 다리 생기기 이전의 배턱),
당아래, 서낭당(서낭 동구 입구), 역벌(전민동에 역이 있다해서). 선창말(구성산성 아래), .. 등등...)
(1977년 편집 1978년 국립지리원 발행 1:5만 지형도)
-복사본에 지명 표시해보기 -
(지명 보기 : 산디 => (계족)산 뒤에 있는 마을, 어둥골;=>어두운 응달에 있는 동네. 동구말=> 동네 입구에 있는 말,
원촌=> 서원이 있는 말, 생교골(<향교골, 향교가 있는 말,,현재 원자력연구원 안) , 관들,,,,,, 서당골,,,,배나무골, 방축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