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거지록(世居地錄)을 만들다 (대동보1권p.39)
존재공은 위씨들이 살고 있는 곳 즉 세거지를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은 장흥부의 연혁에서부터 일가들이 살고 있는 전국의 지명을 적은 것이다.
(1) 장흥부 역대 연혁(遂寧·烏次·會寧)
지금 방촌(傍村)은 백제 때는 오차(烏次), 신라 때는 오아(烏兒), 고려 때는 정안(定安)이라 하였고, 고려 인종 때 수령현까지 포함해 장흥부(長興府)로 개정하였으며, 고려 원종 6년에 회주목(懷州牧)으로 개정하였고, 고려 충선왕 2년에 다시 장흥부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지금 건산(巾山) 뒤 연곡(淵谷) 중령산(中寧山)에 치소가 들어섰다가 태종14년(1414년 甲午)에 수령현 고허(古墟)인 장흥읍 동동리(東洞里 옛 군청 터)에 장흥도호부를 옮겼다.
위씨 선세(先世)가 수령현 장원봉(壯元峯) 아래 살았기 때문에 구보에 수령인(遂寧人)이라고 기재하였으니 수령은 지금 장흥이므로 장흥위씨라 부른다. 동동리 구 군청 터에는 옛날 객사의 북쪽 승방동(勝傍洞)으로 바로 위씨가 살던 곳이다.
집 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때 사람의 시에 '암하여두사(巖下如斗舍)'가 이곳이다. 지금 장흥 동남쪽 5리 밖은 평화촌(平化村)이요 동북쪽 5리 밖은 행원(杏園)이요 북쪽 10리는 기동(基洞)이요 북쪽 30리 밖은 양곡(暘谷)이니 장동(長東)이다.
또한 지금 방촌은 옛 장흥치소로 천관산 동쪽 상산(觴山) 아래이다. 서항(西巷)을 안항(顔巷), 가운데를 춘곡(春谷), 동쪽을 신대(新垈), 서남쪽을 포전(蒲田), 서일리를 당동(堂洞), 서북2리를 옥산(玉山), 3리를 죽천(竹川)이라 한다.
(2) 장흥 위씨 제파 소거지 현황
전라남도 = 장흥군 관산읍 방촌(傍村)·당동(堂洞)·평촌(平村)·옥동(玉洞)·옥산(玉山)·와룡(臥龍)·신촌(新村)·성자(聖子)·만년(萬年), 용산면 계산(桂山)·모산(茅山), 안양면 월암(月岩)·동촌(東村)·동계(東溪)·기산(岐山)·모령(茅嶺)·목단(牧丹), 장흥읍 행원(杏園)·건산(巾山)·향양(向陽)·월평(月坪)·연산(蓮山), 부산면 기동(基洞)·효자(孝子)·월만(月滿), 유치면 단산(丹山), 장동면 율곡(栗谷), 장평면 종정(鍾亭)·녹양(綠楊), 대덕면 초당(草堂), 강진군 군동면 평덕(平德), 성전면, 강진읍, 영암군 금정면, 보성군 회천면 영천(聆川), 웅치면 왕초(王草), 조성면 용전(龍田), 득량면 해평(海坪), 벌교읍 고읍(古邑), 여수시 율촌면 봉두(鳳頭)·신대(新垈)·평려(平呂)·개도(蓋島), 순천시 승주(昇州)·황전면 죽동(竹洞), 고흥군 고흥읍·포두면 장촌(長村)·도화(道化), 곡성군 석곡면 송정(松汀), 담양군 창평면 창평(昌平)·장산(長山), 해남군 옥천면 옥천(玉泉), 완도군 완도읍·청산면 국화(菊花), 목포시, 광양시
광주시 = 일원
제주시 = 삼도건입동(三徒建入洞), 서귀포시
서울시 = 일원
인천시 = 일원
경기도 = 부천시·수원시·성남시·의왕시·군포시·안양시·안산시·일산시·고양시·의정부시,남양주시 화도읍 창현(倉峴), 가평, 개성
전북도 = 전주시·익산시·김제시, 남원시 운봉(雲峯)
대전시 = 일원
충청남도 = 연기군, 장항
충청남도 = 옥천군 안남면 오덕(五德), 보은군 삼승(三升)·영춘(永春), 제천(堤川), 내속(內俗)
부산시 = 일원
경상남도 = 충무시, 통영 도산, 사천군, 고성군
경상북도 = 금천, 예천군 상리(上里)·명봉(鳴鳳), 상주군, 청송군, 의성군 인동(仁同)·풍양(豊壤)·효갈(孝葛)·개령(開寧)
강원도 = 춘천시, 원주시, 영월군 서면, 횡성군, 인제군, 동해시 후평(後平), 평창군 남면
함경도 = 함흥군 영흥
평안도 = 구성(龜城)·곽산(郭山)·의천(宜川)·정주(定州)·태천(泰川)·삭주(朔州)·안주(安州)
"이상과 같이 살펴보건대 개령(開寧) 이하 16개읍은 모두 위씨가 살고 있는 고을이라고 본다. 혹은 여지도(與地圖)를 상고하고, 전해 들어 얻은 것이니 오직 개령은 종인 춘인(春仁)이 영조 경신(庚申) 1740년 봄에 와서 그 계통을 폈고, 함흥종인 정진(挺振)이 영조 신유(辛酉) 1741년 겨울에 와서 그 족보를 전함으로써 함께 얻어 그 세첩(世牒)을 연(聯)하였으나 그 나머지는 모두 모지(某支) 모파(某派)임이 자상하지 못하고 혹은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으나 다른 위씨가 없으므로 묻지 않더라도 장흥이 본관(本貫)임을 알 것이니 마땅히 널리 찾아내어 문서로 연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의 산천 같으니 무엇 때문일까. 지명만을 권우(卷右)에다 열서하고 차례로 군명만을 지적하여 그 사람들을 상상케 하니 무릇 우리 제종으로써 이를 보는 자는 진실로 그 처음에 한 몸이 나누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로 알지 못한 것에 느낀 바가 있을 것이며 위의 16읍을 기록한 것이 또한 수보하는 뜻도 있을 것이니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하겠는가. 만약 이로 인하여 거의 고삭(告朔)의 예(禮)가 회복된다면 능히 후현들에게 바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며 소회를 적고 있다.
한편 존재공은 세거지 이외에 위씨 선산소재방(魏氏 先山所在坊)도 일일이 확인해서 기록해둬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했다.(대동보 1권p.44)
4) 죽천사 사우기(竹川祠 祠宇記)를 쓰다 (지장록p.1069)
존재공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재직 중이던 1797년(丁巳)에 관암공(冠庵公) 휘 상정(相鼎)이 사재를 희사해 낡아 쓰러져 가는 죽천사를 중수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우기를 썼다.
중략 "비록 돈이 만당(滿堂)하나 진실로 선조를 위하지 아니한다면 수전노에 불과할 것이다. 정사년 봄에 청계(聽溪)선생 5대손인 상정중여보(相鼎重汝甫)가 200냥을 내놓아 사우를 중수하되 썩은 나무는 바꾸고, 헐어진 담장을 고치고, 이끼 낀 기와는 바꿔 묘우(廟宇)로부터 강당과 양사(兩舍)의 문랑(門廊)을 모두 수리하고 회를 발라 확연히 새롭게 하니 중여의 출연이 아니었다면 강당은 유도(儒徒)를 비호할 수 없었고 조우는 벌거벗어 술도 받을 장소가 없어지고 뜰에는 추초(秋草)만 가득했을 것이다."
正祖 丁巳 4月 22日 옥과 설죽헌(雪竹軒)에서 5대손 위백규
5) 후학을 가르치려 평생을 바치다 (편제록p.114)
공은 문중의 후손들을 지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22세(1748년)부터 장천재(長川齋)에 서당(계당학숙)을 개설하고 2세 교육에 나섰다. 이어 29세(1755년)에는 귤우헌에서 양정숙을 개설, 운영했으며, 41세(1767년)부터는 사강회(社講會)를 조직해 일하며 공부하는 마을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공의 교육에 대한 정열은 평생 동안 변함없었다.
6) 무기계로 시기질투를 없애려하다.
지역민을 순화(醇化)하는데 앞장섰다. 방촌의 주민들간에 시기와 질투심이 많을 것을 우려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다는 뜻의 '무기계(無忮契)' 서문을 지어주며 정서를 순화하려 했다. 무기계는 서로 질투하고 싸우지 말라는 의미이다.
7) 방대한 저술로 문명(文名)을 떨치다
존재공은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여헌(旅軒) 신경준(申景濬),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과 함께 호남실학의 4걸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불행하게도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의 환영지는 지금도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렵다고 한다. 현실정치의 모순과 적폐를 지적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정현신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그가 10세 이전에 지은 시는 과연 어린이의 생각이 저렇게 깊고 의미가 심장(深長)할 수 있을까 탄성이 나올 정도이다.
'뿌리'에대한
진한 역사가
담겨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방대한 저술로 문명을 떨치신 존재공의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경북 (김천)인데 (금천)으로 되어 있네요
존재 할아버지가 쓰신 위문중 세거지록을 보노라니 더욱더 문중 뿌리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네요.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