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 뿌리는자 -
☆ 2014년 가해 1월29일 (녹)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수원] 씨뿌리는 사람이 씨뿌리러 나갔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2사무 7, 4 - 17
† 복음 : + 마르 4, 1 - 20
★ 주님께서는 나탄을 시켜 다윗에게 축복의 말씀을 내리신다. 이제
이스라엘은 한곳에 자리를 잡고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온히
살 것이며, 다윗 집안에 내리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들으며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나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 비유를 풀이해 주십니다. 씨가
땅에 뿌려졌는데도 새들이 쪼아 먹거나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렸다는
비유는, 우리가 들은 말씀이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갖가지 욕심
때문에 숨이 막혀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낯설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또렷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머리로는 잘 알아들었는데도 여전히 말씀의 씨앗이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답답한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내 마음에 어떻게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렇게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시원한 호숫가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광경을
천천히 떠올립니다. 그 장면에 머무르며 나를 가득 채웠던 걱정과
욕심과 계획에서 잠시나마 훌쩍 떠나 봅니다. 이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조’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상하고 철학적인 진리의 관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연과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느덧 영원을 담은 하느님 나라에 조금씩 물들어
가는 체험을 갈망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체험하는 동안 마음의
가시밭과 돌밭은 조금씩 치워지고 그곳에 말씀의 씨앗이 숨 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위대한 시인이자
근대의 진정한 예언자적 인물로 인정받는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순수의 전조’를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매일 미사 -
◈ [청주] 말씀의 열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 4,1-20
말씀의 열매
어떤 열매이든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
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수능이나 혼사 등 여러 일이 다가올 때 성당을 찾지 않고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은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성공만 있기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유비무환, 고진감래!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동기들과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따뜻하고 좋은 경치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사제로
15년, 신학생으로 10년, 또 이 중 몇몇은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왔으니까 적게는 25년, 많게는 30년을 알고 지내온 동창신부들
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제는 서로에 대해 훤하게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잘 안다고 자신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많이 변한
동창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네요. 먼저 예전과 같은 건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허리든 뱃속이든 어디 한 군데는
정상적이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더군요. 또 한 가지는 흰 머리카락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만나 왔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점점 약해지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따라서 항상
자신이 옳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그러한 교만이 커다란
사고를 일으킨 적도 있지요. 영화로도 나왔던 타이타닉 침몰 사건입니다.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이라는 명성을 날렸던 타이타닉 호는 대서양
횡단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해안통제소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이
무전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작은 빙산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타이타닉 호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빙산이 부딪힌 후 침몰하기 시작했고,
전체 승객 2,300명 중에서 자그마치 1,600명의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장의 교만에서 나온 판단이 어마어마한 사고를 가져온
것처럼, 우리의 판단 속에 어떠한 교만이 숨어 있다면 이 또한 커다란
사고를 가져올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을 해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무조건 외워!’라면서 명령하듯이
가르칠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보다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쉬운 말씀으로 다가서십니다. 바로 우리들도
이웃들에게 그러한 모습으로 다가서라는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드러내는 모습, 특히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신 스스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겸손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오늘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많이 사랑할 필요는 없어. 한 사람이라도 마음 구석구석 사랑해 보렴.
그 편이 진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까(다카하시 아유무).
제주도 잘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푸른 바다입니다.
자존심 세우기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존심이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자존심만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도 피곤해집니다. 왜냐하면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자존심이 상했다면서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로부터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을까요?
그리고 어떤 삶이 더욱 더 의미 있는 삶이 될까요?
주님께서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신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마음잡게 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 가득한 사랑이 중요한 것이라고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르코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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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오늘의 복음으로
읽혀진다. 이 비유에 관한 설명은 친절하게도 예수님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얻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인가?
길 위,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과 의지의
상태를 말한다. 그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복음이 관심 있게 들리는가? 그렇지 않다면 길바닥 같은 마음이다.
복음이 관심 있게는 들리는데 내 삶에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 마음은
돌밭이다. 복음에 감동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은 있는데, 십자가는
안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은 가시덤불이다. 복음에 감동했고 결단을 내렸고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180도 바꾸었다. 그 마음은 좋은 땅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의 땅에 비유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두 번째의 돌밭이나 세 번째의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에 속한다고 속상해 하실 지 모른다.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는 없다.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자.
이 네 가지의 땅은 어느 누구든 예외 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속에 있는 네 가지의 움직임이다. 그러기에 인간이다.
때로는 척박하고 메마른 마음,
때로는 돌밭 같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
때로는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도 유혹이 정신 없이 밀려들어 넘어지고
마는 마음, 때로는 비옥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마음. 이 모두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이라는 여정 안에서 모두가 겪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기에 하느님께선 인내하시며 우리를 좋은 땅으로 들어오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상처 속에서 황폐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이 무성해지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느님께서
주신 그 비옥한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땅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 한 톨 허투루 뿌리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처음부터 엉터리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원래 버려진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딱 한번만 더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마르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딱 한번만 더>
꽤 오래 된 일입니다. 모두들 싹수가 없어 보인다던 아이, 그래서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인다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데다 혈기왕성한 아이였기에 그
누가 뭐래도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뭐라 한마디하면 눈부터 부라렸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게 그 아이가 홀로 험한
세상을 헤쳐오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처세술이었습니다.
그 아이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그런 상처와 아픔을 헤아려주지는
못하고 단지 외적으로 드러난 몰상식한 행동에만 기분 나빠하고 집착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 다들 난리였습니다.
"저 녀석은 우리 영역 밖입니다. 돈보스코께서도 <썩은 사과는 골라내야
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전체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내 보내야
합니다."
그때 제가 좀 고집을 부렸었죠.
"한번만 더 기회를 줍시다. 이번 딱 한번만!"이란 구호를 숱하게도 되풀이
했었습니다.
비록 여러 심사원, 소년원 등 갈만한 곳은 다 전전하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아이는 다행히 여기저기 살레시오집 울타리 주변만 맴돌면서
아주 조금씩 자신을 다스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철들 때가 되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조금씩 인간이 되어
갔습니다.
"아이가 조금씩이나마 철이 들어간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번 더 용서하고 한번 더 받아준 일, 한번 더 인내하고
한번 더 품어 안은 결과가 아닐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대접 받은 일,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인간취급
받은 일이 특효약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과 살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아이라 할지라도 아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메마를 대로 메마른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거름을 주고
물을 댈 때 어느 순간 토질은 변화될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첫 삽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첫 삽은 바로 인내이자 용서입니다.
그 첫 삽은 수용이며 기다림입니다.
그 첫 삽은 기도이며 관용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막을 옥토로 바꾸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으로부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 한심해보이는 인간을 도구로 삼아
당신 사랑의 사업을 계속하십니다.
우리는 각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옥토입니다. 이루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능력과 희망으로 충만한 좋은 밭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세상에서 가장 좋은 밭-우리 각자의 인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열심히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기꺼이 땀을 흘리는
농부로서의 삶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3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1월29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 4,1-20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을 것입니다. 저도 의정부에
계시는 어머님께로 다녀오려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5명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예전에는 요즘과는 달리 5명 이상은 자녀를 낳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이치는 잘 알고 계셨지만 돈을 버는 이치는 잘 모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쌀장사, 연탄 장사, 밥장사, 구멍가게’등을 하시면서 자녀들을
키우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사를 참 많이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사랑하시고, 잘 키우셨지만 모두 어머니의 뜻대로 잘
자라지는 못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큰 누님은 5살 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고향 선산에서 큰 누님의 작은 무덤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큰 형님은 아들 둘을 보았고, 형수님과 28년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97년 'IMF' 때 사업에 실패해서 아직도 힘들어 하시지만
가족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둘째 형은 10년 전 45살 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세상을 자유롭게 살았지만 어머니의 가슴에는 큰 못을 박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1991년도에 사제가 되었고 23년 사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머니의 기도가 많이 필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동생도 1989년도에 수녀원에 입회를 하였고 수도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 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돈, 명예, 권력이라는 성공의 결실을 맺지도
못하였습니다. 가문을 이어갈 사람도 3대를 내려와서 조카 둘 밖에 없으니
이 또한 큰 결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어머니는 많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지금도 대녀들께서 어머니를 찾아오십니다. 어머니께서
대모를 서 주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시고,
어머니에게 영적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자식 둘은 성직자와 수도자로
키우셨으니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공, 출세, 명예, 권력, 재물’의 결실을 많이
맺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길가에 씨를 뿌린 것처럼
거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결실은 ‘사랑, 나눔,
희생, 친절, 인내,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께서는 많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고, 벌써 1월도 다 지나갑니다. 올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씨앗을 우리들 마음에 잘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씨앗들이 잘 자라나도록 희생의 물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거름을 뿌려야 하겠습니다. ‘불신, 질투, 욕심, 원망, 분노’와 같은 잡초들을
부지런히 뽑아내야 하겠습니다. 올 가을 우리들 마음 안에 뿌려진 씨앗들이
풍성한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씨 뿌리는 사람이 씨 뿌리러 나갔다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복음 : 마르코 4,1-20
< 씨 뿌리는 사람이 씨 뿌리러 나갔다 >
마이클이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누군가 전화기를 들고 “전화 잘못 걸었소!” 하고는
바로 전화가 끊겼습니다. 마이클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시 같은 번호를
돌렸습니다.
“전화 잘못 걸었다고 하지 않았소!”
여전히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꽝 하고 전화 끊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이클은 뉴욕 시경에 근무하는 경찰입니다. 그는 경찰의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세 번째로 그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남자가 대뜸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이, 또 당신인가?”
“네, 접니다. 제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잘못 걸린 전화라는
걸 아셨는가 궁금해서요.”
“그런 건 당신 스스로 알아내라구!”
또다시 꽝 하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에 수화기를 매달고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가 대뜸 소리쳤습니다.
“아직도 못 알아냈나?”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 당신에게 전화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겁니다.”
“잘도 알아내셨군!”
네 번째로 전화가 뚝 하고 끊겼습니다. 마이클은 또다시 번호를
돌렸습니다. “이번엔 또 뭘 알고 싶은 건가?”
“전 그냥 ... 인사나 하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인사라고? 왜지?”
“아무도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면, 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좋소. 안녕하시오.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마이클은 자기소개를 했고, 그도 조금씩 자기를 열었습니다.
“내 이름은 아돌프 메트요. 나이는 여든여덟이고, 지난 20년 동안 하루에
이렇게 잘못 걸린 전화를 많이 받은 건 오늘이 처음이오!”
그 말에 둘이 동시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매일 전화를 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마이클도 고아로 자라서 아버지라는 느낌을 아돌프를 통해
받았고, 아돌프도 친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돌프는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가 성취하여 얻은 것이나, 잃어버려 아쉬운
것들까지도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었고, 마이클은 그에게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넉 달 넘게 이렇게 좋은 친구로 지내고 마이클은 이젠 얼굴을 보아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돌프 씨의 생일에 그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습니다.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경비원이 말했습니다.
“아돌프 씨는 그저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돌아오면서 허공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돌프 씨, 난 그때 전화를 잘못 건 게 아니었어요. 어쨌든 당신은 내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으면서 씨 뿌리는 사람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씨 뿌리는 사람은 새가 집어먹을 줄 뻔히 알면서 길 위에도 씨를
뿌리고, 자라다 말 것을 알면서도 돌밭에 뿌리고, 숨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가시밭에 뿌릴까?’
물론 성서학자들은 그 때는 씨앗을 흩뿌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충분히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씨앗이 귀중하게
생각된다면 그렇더라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이클은 왜 굳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 그 사람에게 끝까지
전화를 걸었던 것일까요? 본인도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외롭게
고립되어 혼자 죽어가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이클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혼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씨
뿌린다는 것은 그 씨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해도 끊임없이 뿌리는
분이십니다. 어떤 이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당신과 친교를 이루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분인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씨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의 씨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씨가 주어졌는데 씨 뿌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참 그리스도인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평생을 씨 뿌리다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다 보면 어떤 때는 길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어떤 사람은 급 반기다가도 바로 식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저주저 하며 확실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도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뿌립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든 맺지 않던 나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두려움,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지면 더 이상 씨 뿌리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씨 뿌리러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가 없는 삶은 지켜보는 이 없는 임종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를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씨앗을 내어주며
많은 벗을 사귀도록 합시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세상의 좋은 이야기와 주님의 좋은 말씀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세상의 좋은 이야기와 주님의 좋은 말씀
좋은 이야기들이 샘솟는 세상이기를 바라지만 뒤죽박죽 세상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라는 말도 속화되어 재물이나 세상성공으로 통하니 말입니다.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고 살며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니 말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한 세상으로 보며 사는 사람들은 버티기가 힘들지요.
세상살이에만 오래도록 살려는 먹구름이 햇빛을 가려버리고 으스댑니다.
주님의 좋은 말씀이 먹구름 뒤 저세상까지의 생애를 기리게 하니
감사합니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마르코 4,18~1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인생기보(人生棋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29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사무 하7,4-17 마르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 4,1-20
인생기보(人生棋譜)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언뜻 떠오른 시편 말씀입니다.
이런 체험이 진정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게 합니다.
10년 만에 공부를 끝내고 온 도반의 말도 생각납니다.
“10년 전과 사람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인간미가, 여유가 없고 영혼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정말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 폰에 몰두하고 있는 많은 이들을 보면
영혼 없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님과 살아있는 만남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순간적 체험도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수도원 정원에서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어느 분을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어, 저 분이 산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
마치 죽은 사람이 걸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과연 살아있음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이 30에 죽어서 70에 묻힌다.’ 어디선가 읽은 가끔 인용하는 말인데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힐 때까지의 40년 잉여인생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마태8.22절 예수님 말씀입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놓고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에게 맡겨놓고’, 역시 살아있으나 생각 없이, 영혼 없이, 하느님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을 빗댄 말마디임이 분명합니다.
중국의 구리 10단과 10번 기를 겨루고 있는 천재기사 이 세돌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승패에 관계없이 후회 없는, 최선을 다한 바둑을
두고 싶다. … 설령 대결에서 패해 정상에서 추락한다고 해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구리는 내 바둑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물이다.”
최고의 적수이자 도반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둑대신 인생을 넣어 ‘승패에 관계없이 후회 없는, 최선을 다한 인생을
살고 싶다.’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둑은 절대 혼자는 못 둡니다.
자기와 걸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흡사 바둑과 같습니다. 하느님과 상대하여 두는 인생바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생에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인생바둑을
둬야 비로소 살아있는 삶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깨어
살 때 아름다운 인생기보의 완성입니다. 과연 하느님과의 내 인생기보는
아름답게 수놓아지고 있는지요?
오늘 1독서는 다윗과 하느님의 인생기보 같고,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인생기보 같습니다. 오늘 1독서는 다윗과 함께 하시며 은총을 가득
베푸신 주님의 업적들을 보여줍니다.
“내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자애를 거둔 것과는 달리, 다윗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정말 심사숙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음으로 이런 축복의
약속을 듣는 다윗입니다. ‘나탄은 이 모든 말씀과 환시를 다윗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이런 축복의 말씀을 바탕으로 깊이 숙고하면서 끝까지 파란만장한
인생기보를 완성한 위대한 다윗입니다.
인생이치와 바둑이치가 똑같습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바로 인생바둑의 변화무쌍한 장면을 상징합니다. 이런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마침내 좋은 땅에 풍부한
수확의 해피엔드로 끝날 것이며 이런 상황 모두가 아름다운 인생기보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느님과의 내 인생기보에 최선을 다할 때 풍부한 수확에다 아름다운
인생기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아름다운
인생기보 완성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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