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가시리 1994-1번지 충의사 내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유허비)
규격 ; 높이 128cm, 너비 55cm, 두께 22cm
이 비석은 조선말인 1873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면암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리자 한라산을 올랐다가 하산길에 이곳에 들렀는데, 여기가 서재공의 유허임을 알고 불사이군의 정신을 높이 기려 그의 《유한라산기》에 적어 놓은 것을 한씨 후손들이 새겨 세운 것이다. 한 동안 충의사 건물 안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2006년 밖으로 내놓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恕齋韓公諱蕆遺墟碑
乇羅之旌義縣 加時里有古恕齋韓公諱蕆遺墟. 漢拏脊脉 連延起伏 東走六十餘里 至此而平岡長阜 環合分開 地勢平正 瀛州甲蟬兎㺚烏鷹 諸峰 羅列四衛 眺望佳勝 儘靈境也. 今距公五百餘年 其寢廊廚廐 書齋點堂 諸位置 牧老耕叟 尙歷歷指點記傳不忘 如召茇鄭鄕焉. 苟非公德入人深 功及人遠者 能如是乎. 謹按韓氏淸州著族 有諱蘭 佐高麗太祖開國 官至太尉威襄 寔爲公十世祖 匡靖大夫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事世子師致仕諡文惠 諱康 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制誥 諱謝 奇宣力佐理功臣上黨府院君 賜鐵券諡思肅 諱渥 推忠協贊功臣匡靖大夫知都僉議司事 諱大淳公府君也. 天安全氏同知密直進賢舘大提學 諱信 公外祖也. 公生于麗季 以學行節義 國在掌敷文敎 國凶扶植彛倫 民到于今 受其賜. 麗史所載 恭愍王二十年辛亥二月 以韓蕆爲慶尙道都巡問使 恭讓王三年辛未 判開城府事 四年壬申七月 王遜于原州 斬晉(丹)陽君禹成範晋原君姜準(淮)季 流大提學韓蕆于耽羅者 此實錄也 足徵百世矣. 公配光山金氏 匡靖大夫政堂文學禮文舘大提學知春秋舘事上護軍 章榮公諱稹女 生二子 長曰洙 次曰濟 金氏舊譜 旣載公與二子 濟州官籍又可攷公子姓 而獨於韓氏內地全譜 以無後懸錄 何故歟. 當時事情 槪可想 已國破君亡 公幸不死 減律南流 則遠海僻山 於公心可謂爰得我所欲 晦響滅影 與世無聞 海旣遠而猶恨未遠 山旣僻而猶恨未僻 爲公子姓者 豈不知乃父祖心事 心以傳心 歷數世未暇問聞於內地修譜 而內地修譜諸公 亦以水陸數千里外 聲息阻絶 遂謂無後也. 然金譜官籍 不泯有據 此亦神理妙處 嗣後有修 當採而正之 豈以公德深功 遠而其後不昌大也. 螽斯椒聊 繩繩蕃衍 其麗數千 殆遍一洲 或闡科宦 或著孝友 多才藝多文學 有未艾氣數 報施之天 果不或哉. 又聞公居於是也 以敎育後進爲己任 後進之勤慢能否 必點考焉 所謂書齋點堂 是其址也. 嗚呼. 罔爲臣僕 箕聖東來 八條敎民 夷變爲夏 耻事二姓 公又南渡 立約敎士 而島漸興學 德雖有淺深 功雖有廣狹 而氣脉相傳 歷數千載 而一揆不亦奇乎. 益鉉適過是墟 窃有感焉 書此以遺 韓氏俾爲之記. 崇禎后五己卯仲秋 月坪 崔益鉉 謹誌 陽川 許 鉀 謹書 歲在辛巳春 後孫永植文玉錫均鳳澤寵錫晳珌守眞景運癸龍等 改竪
주1) 禹成範: 丹陽君으로 공양왕의 둘째딸인 貞信宮主가 그의 부인인데 공양왕이 폐위되자 會賓門 밖에서 1392년에 참형되었다. 진양군은 단양군의 오기
주2) 姜淮季: 晉原君으로 공양왕의 셋째딸인 敬和宮主가 그의 부인으로 공양왕이 폐위되자 會賓門 밖에서 1392년에 참형되었다. 강準계는 강淮계의 오기
필자의 능력으로는 전문을 다 번역할 수는 없고, 양진건의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을 보면 비문의 중심 내용은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공은 남으로 건너와 향약을 세우고 선비를 가르치니 이 섬에 점점 학문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ChatGPT에게 일을 시키니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왔다.
탐라 정의현 가시리에 옛 서재(恕齋) 한공 휘 천(蕆)의 유허가 있다. 한라산의 등줄기가 이어져 일어나 동쪽으로 육십여 리를 달려와 이곳에 이르러서는 평평한 언덕과 긴 구릉을 이루고, 지세가 평탄하고 반듯하다. 영주(瀛州)의 갑선·토달·오응 등 여러 봉우리가 사방에 벌여 서서 둘러싸니, 바라보는 경치가 뛰어나 참으로 신령한 경계이다.
이제 공과의 거리가 오백여 년이 되었으나, 그 침방·행랑·부엌·마구간·서재·점당(點堂) 등의 자리까지도 목동과 농부들이 아직도 역력히 가리켜 전하며 잊지 않으니, 마치 정향(鄭鄕)을 불러 모으는 것과 같다. 진실로 공의 덕이 사람들 마음에 깊이 스며들고, 공이 사람들에게 끼친 공이 멀리까지 미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한씨는 청주의 저명한 족속이다. 휘 란(蘭)은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하였고, 벼슬이 태위 위양에 이르렀으니, 실로 공의 십세조이다. 또 증조로는 광정대부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 세자사로 치사하고 시호 문혜인 휘 강(康)이 있고, 첨의부 좌사의대부 보문각 제학 지제고 휘 사(謝)가 있으며, 기선력좌리공신 상당부원군에 책록되고 철권을 하사받고 시호 사숙인 휘 악(渥)이 있으며, 추충협찬공신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 휘 대순이 있으니, 공의 부군이다. 외조는 천안 전씨로 동지밀직 진현관 대제학 휘 신(信)이다.
공은 고려 말에 태어나 학행과 절의로써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문교를 펴고, 나라가 위태할 때에는 인륜을 붙들어 세웠으니,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공민왕 20년 신해(1371) 2월에 한천을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고, 공양왕 3년 신미(1391)에 개성부 판사가 되었으며, 4년 임신(1392) 7월에 왕이 원주로 물러나자 진(단)양군 우성범과 진원군 강준(회)계를 베고, 대제학 한천을 탐라로 유배하였다 하니, 이는 실록에 실린 사실로서 백세토록 증거가 된다.
공의 배위는 광산 김씨로,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장영공 휘 진(稹)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수(洙), 다음은 제(濟)이다. 김씨 구보에 이미 공과 두 아들이 실려 있고, 제주 관적에서도 공의 자손을 상고할 수 있는데, 유독 한씨 내지의 족보에는 후손이 없다 하여 매달아 기록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당시의 사정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졌으나, 공은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형률을 감하여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멀고 험한 바다와 궁벽한 산은 공의 마음에 있어 오히려 내가 얻고자 한 바를 얻은 곳이라 할 만하니, 자취를 감추고 세상과 더불어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다가 이미 멀되 오히려 멀지 않음을 한탄하고, 산이 이미 궁벽하되 오히려 궁벽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공의 자손된 이들이 어찌 부조의 마음을 몰랐겠는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여 여러 세대를 지나도록 내지에 소식을 묻지 못하였고, 내지에서 족보를 수보하던 이들도 또한 수륙 수천 리 밖이라 소식이 막혔다 하여 마침내 후손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김씨 족보와 관적에 없어지지 않고 근거가 있으니, 이 또한 신묘한 이치이다. 훗날 족보를 다시 고칠 때 마땅히 채택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어찌 공의 덕이 깊고 공이 멀리 미쳤는데 그 후손이 창대하지 않겠는가.
자손이 번성하여 수천에 이르고 거의 온 제주에 퍼졌으니, 혹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고, 혹은 효우로 이름나며, 재주와 문학이 많은 이가 적지 않으니, 하늘의 보시가 어찌 헛되겠는가.
또 듣건대 공이 이곳에 거할 때 후진을 교육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 능하고 능하지 못함을 반드시 점검하였으니, 이른바 서재 점당이 바로 그 터이다.
아, 기자가 동쪽에 와서 팔조로 백성을 교화하여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킨 것처럼,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한 공 또한 남쪽으로 건너와 약속을 세워 선비를 가르치니, 섬에 점차 학문이 일어났다. 덕의 깊고 얕음과 공의 넓고 좁음은 다를지라도, 그 기맥이 서로 전하여 수천 년을 지나 하나로 통하니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내가 마침 이 유허를 지나며 사사로이 감회가 있어 이 글을 써 한씨에게 남겨 기록하게 한다.
숭정기원 후 다섯 번째 기묘년 중추에 월평 최익현 삼가 기록하다.
양천 허갑 삼가 쓰다.
신사년 봄에 후손 영식·문옥·석균·봉택·총석·석필·수진·경운·계룡 등이 고쳐 세우다.
《작성 2007.04.14. 보완 202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