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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3 부가 하나의 논문입니다)
<2018,“율곡의 고향, 판관대”세미나 자료>
[제7장] 율곡의 고향, 판관대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1. 머리말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께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584) 선생을 잉태하신 곳으로 강릉대도호부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로 현재의 평창군 용평면에 위치하며, 후일 부친 이원수(李元秀)공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판관대(判官垈)”라 이름하였다.
평창군지(平昌郡誌)에 의하면 판관대는 율곡을 잉태한 집이라는 이야기가 궁중의 임금에게 전해지자 현종 2년 임인년(1662)에 예조에 명하여 사방 5리 (산판이 170정보, 논 120마지기, 밭 30일 갈이)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아주1) 봄, 가을로 제향케 하였다한다.
이후, 1895년 유학자 홍재홍 선생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고을 유생들이 성금을 모아 봉산서재를 중건하여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임을 기념하고 있다주2). 또한, 2016년과 2019년 평창에서 판관대에 대하여“율곡의 잉태지”로서의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한바 있으나 이의 촛점은 잉태지란 설화적 내용을 기조로 하여서 판관대에 문화 아이콘이란 미명하에 놀이문화의 여러 이야기들을 조명하였다. 판관대의 여러 모습을 고찰하여 문화를 가꾸는 연구의 모습은 좋은 일이지만, 판관대는 우리나라에 성현(聖懸)으로 불리는 율곡 이이의 고향에 대한 역사로서의 인식엔 부정확한 점을 가지기에 역사적 사실을 소명하여야 하는 문제에 봉착되었다고 판단하기에 이에 바른 역사를 찾아 정립하고자 한다.
율곡선생과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판관대)에서 사셨다 한다. 그러나 너무 오랜 오백년 전의 조선시대의 일이라 지금으로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판관대는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이곳에서 10년 옮겨 다니고, 또는 4년 살았다고 하는 등 신사임당이 서울서 강릉에 오갈때 쉬어가는 집 정도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출처도 없는 석연치 못한 이야기들로 바르지 못하게 전래되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판관대는 논지에도 맞지않게 설명되고 있는바 그 증거는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통용되는지 알 수 없다.
지금껏 판관대에 대해서는 역사적 관점의 연구시도는 없었으며, 잉태지라는 설화에 중점을 둔 세미나만 개최하였기에주3) 판관대는 신사임당의 살림집인 본가로서, 또한 율곡의 고향집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소명은 잉태지 설화들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느낌이기에 필자로서는 잉태지 설을 배제하고, 이곳 판관대가 율곡의 고향마을이란 새로운 역사적 연구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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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은상.『보유수정 생애와 예술』6판. 성문각. 1982. 244쪽. 1967년 3판본까지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1994년 7판 완성본 244쪽에서도 동일기록으로 나 온다. 현종 3년.(임인년. 1662년)에 사패지를 하사받았다
주2) 평창군지』평창군. 1979. 454쪽.
주3) 『평창의 뿌리』.평창문화원, 2017.
1. 박도식.『율곡 이이의 잉태지“판관대”연구』강릉 원주대 사학과. 2016.
2, 장정룡.『평창“판관대“유적지의 전승설화 고찰』강릉원주대 국어과. 2016.
판관대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신사임당이 결혼 초 신혼집이 서울도 아니고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관동대로변도 아닌 외지 마을인 봉평의 백옥포리에 마련한 점에 대하여 우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이원수의 역할이 백옥포리에 거주하게 되는 이유가 어떤 작용을 하였을 듯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관점의 연구에 어려움이 있기에 판관대가 잉태지라는 설화적 이야기로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는 점으로 인하여, 율곡의 어린시절 이미지가 바르게 조명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4)
예를들면, 판관대는 이원수가 과거시험을 보러 다니기에 힘들어 중간지점에 집을 장만하여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는 추측성 이야기로까지 판관대의 이미지는 역사까지 훼손하며 퇴락되어 갔다. 또한, 사마시나 중광시 등 초시는 모두 지방을 순회하며 치렀으며, 이러한 초시에 급제자가 3년마다 어전에서 보는 대과의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바 이원수는 초시에 입격 기록도 없는데 과거를 보러 서울을 다녔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이야기들은 모순된 논리이기에 일반적인 역사자체를 역행하며, 판관대의 역사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율곡에 대하여 지금까지 모든 이야기는 오죽헌 율곡학회의 율곡과 신사임당의 연표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바. 당 연표에 기인하는 10년설은 역사적 사료도 없는 어수선한 여러 이야기들에 의하여 율곡의 고향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상실되어 갔다. 이러한 10년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찾을 수 없지만, 율곡의 생애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 율곡이 16살때 지은 선비행장주5)에 기록 중“惑歸臨瀛 惑居蓬坪”(혹귀임영, 혹거봉평)의 문장에서 오죽헌은 원래 신사임당의 외가지만 율곡의 외가로서 조명되지만, 봉평은 고향으로 조명이 되지 못한 점에 무엇이 문제였던가 하는 점도 고찰한다.
오죽헌에서는 지난‘62년 정부의 지침으로 오죽헌의 성역화 정비사업을 단행하자 율곡기념사업이 벌어졌고 ‘72년에는 신사임당 조명으로 오죽헌에 율곡학회가 창설되며, 율곡의 외가로서 성역화사업이 진행되면서 봉산서재는 특정인의 책에서 폄하하면서주6) 율곡의 고향은 더욱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갔다. 하지만, 이곳 판관대 주변의 관내 지방민들은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잉태지라는 여러 설화적 이야기 속에서 판관대는 율곡의 고향마을이란 이야기들을 꽃피우고 있다.
<해설; 특정인의 책은 이은상의 심사임당전 7차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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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이야기의 출처 ; 오죽헌 율곡연구회의 신사임당 연보, 평창군지, 판관대에 대한 세미나기록과 학술논문이나 서적, 인터넷 글들 모두가 그러한 경향을 지적한다.
주5)『율곡전서 권 18“선비행장”(先妣行狀) 기록문 중 惑歸臨瀛 惑居蓬坪”(혹귀임영, 혹거봉평), 혹귀임영은 강릉에 가기도 하고, 혹거봉평, 즉 봉평에 살으셨다.
선비행장이란 선비는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며, 행장은 사람 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주6) 주1)의 이은상의 책
판관대는 사료의 부족으로 역사적 의미는 상실되고 말았기에 여기에 판관대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학자들에 의한 연구의 세미나에서 판관대에 역사를 규명하지 못하고 잉태지 설화를 바탕으로 판관대의 여러 콘텐츠문화 창출이라 하면서 유락의 놀이문화의 한계를 넘지 못한점으로, 판관대가 율곡의 고향이라는 역사적 문화 이야기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판관대로서는 우선 판관대에 판관대라는 본가를 마련하는 점에서는 신사임당과 율곡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한 집안의 가장인 이야기가 전제되어야 역사를 바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원수에 대한 사료는 전무하다시피 하는 부족한 점 때문에 판관대에 대한 고찰에 어려움이 많으며, 현재까지 율곡과 신사임당의 이야기로 강릉 오죽헌만 부각하여 상대적으로 판관대는 격하된 모습으로 율곡의 고향은 실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의 고향은 어디인가?
이 물음에 가장 근본을 답해야 할 율곡학회의 율곡과 신사임당의 연표에서도 고향이란 단어는 없으며, 오죽헌만 가지고 외갓집으로 부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율곡의 생애사는 신사임당의 친정인 오죽헌과 시댁의 파주 이외엔 신사임당의 본가는 없다는 이해로 율곡에겐 고향은 상실된 점에서 신사임당과 율곡의 생애에 관한 역사를 조망하기에는 부자연스럽고 혼란스러운 점을 가지고 있다.
판관대는 봉평장에서 만날 수 있는 신사임당의 본가이며, 율곡의 고향집인데 많은 설화적 이야기는 있지만, 역사의 사실로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점은 조선 당시에 봉평의 판관대는 강릉도호부 소속의 변방에 위치하기에 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으며,‘70년대에 율곡학회는 율곡의 생애사의 많은 이야기를 오죽헌 성역화 사업에 일환으로 펼치지만, 율곡의 생애사 중에 가장 기본인 고향마을 조명이란 점은 무시되었기에, 그것은 율곡의 연구가 아니라 강력한 아날로그 체제의 국가가 요하는 오죽헌의 위상강화에 의한 목적에 부합하는 연구를 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율곡 이이 선생의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적절한 이야기들의 창출엔 일부 역사학자들의 봉평 판관대에 대한 편견적인 조명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율곡의 고향은 어디인지가 논의 돼야 했었다. 오죽헌에서 율곡의 한 부분만을 정립하기엔 전체적, 대의적인 소명의식이 부족했던 점으로 학자들의 잘못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점은 무엇이 판관대를 저해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도 아래에서 서술하며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율곡은 사림의 학자들이 조정에 나아가 성리학을 통하여 이상실천을 하고자 함에 당시 학문적 미숙성에 의한 사화가 초래되는 시기를 지나며 16세기 후반에 시대상황였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훈구와 사림의 시대를 지나며 사림의 정치시기가 열린시대였으나 훈구와 척족이 지배하는 동안 누적된 폐단으로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심각하게 되는 절박한 현실을 판단하고 치도(治道)로 잡아야 하기에 조선중기의 사화(士禍)를 지나는 시기였다.
시대적인 인식속에 율곡 이이선생은 이황 선생은 국가의 기강과 민생의 안정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사상을 이상향으로 체계화하여 조선의 토착화의 요람으로서 나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율곡 이이선생의 학문은 귀감이 되고, 자라나는 세대에 교육의 지표가 되는 교육문화 공간으로서의 판관대의 정비안도 마련하고자 하는 이해의 글을 제시한다.
2.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1)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18년 살아온 본가로 율곡의 고향이다.
<신사임당 생활의 시대구분>
*제1기; 출생에서부터 19세 결혼 시기(1504~1522년)
*제2기; 결혼시부터 38세 때 서울로 이사시까지 (1522~1541년)
*제3기; 서울생활 시작에서 48세 별세 때까지 (1541~1551년)
율곡이 8살 때 파주 화석정에 올라 쓴 시(詩)나 10살 때 쓴“경포대부 (鏡浦臺賦)“의 시에서는 그곳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기에 다니러 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어쩜 기행 시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율곡은 조정에 사표를 내고 파주에 내려간 적은 기록에 나타나지만, 이것은 서울로 이사 후의 기록들이며, 그 이전에 파주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시묘살이나 이후 부친의 시묘살이 할 때 파주에 있었다고는 볼 수 있는바 시묘살이 끝에 파주의 성혼과도 사귀게 되어 평생 친우가 되었다 한다.
이러한 점에서 봉평의 백옥포리 고향 집이란 이야기에는 신명화 공이 아들받이로 아끼던 둘째 딸 신사임당을 시집보내면서 이원수공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면, 오죽헌의 이씨분재기상에 재산은 노비가 173명이었는데 둘째 딸, 신사임당에게도 32명의 노비가 상속되었는 데 결혼 초에는 신혼 살림집 한 채 장만해 주지 못해서 아이들을 끌고 파주나 강릉으로 전전긍긍하였다는 것은 신사임당과 율곡의 생활과 가게도 전반에 걸쳐 균형적인 조명을 하지 못하고 오죽헌이나 파주에서필요부분만 확대 해석한 결과로 판관대는 누구도 바르게 밝히지 못한 채 사장되어 간 것이다.
신사임당이 판관대에 신혼 살림시에는 전답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에 필요한 농사일, 땔감나무하기, 물 기르기, 방아찢기 등 현대와는 다른 많은 잡일을 하기에 사임당의 판관대 생활시에 일정 수의 노예가 할당되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간 백옥포리의 판관대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거론하였었고, 이황의 주기론적 학맥을 이은 화서학파 유림의 유인석, 최익현 등 구한말 많은 유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인 봉평의 유림학자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봉산서재를 창건하고 춘·추 제향을 하는 문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평창의“구비문학대계에는 아마도 율곡의 이야기는 하나의 설화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5~60건 실려 있다.
물론 평창의“구비문학대계”는 대부분 설화적인 이야기들로 가히 역사적이지 못하기에 본 논문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에게 오르내리는 구전으로서 판관대가 율곡과 신사임당의 고향집이란 역사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신사임당의 서울 상경 이후로는 이원수가 종5품의 판관이 되었다는 소식과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떠난 율곡은 이후 판서의 높은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곳 봉평마을에도 전해졌을 것이고, 부친의 직위를 딴 판관대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지금까지도 이곳 봉평마을에 회자되며 많은 설화를 만드는 것이 되었다.
구한말 봉평은 문향(文鄕)으로서 화서학파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 뜻을 모아 강수계를 만들고 강수제에서 봉산서재로 이어지는 율곡의 고향마을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백옥포리 판관대는 이러한 설화적 요소에만 의존해서는 그 역사성을 찾을 수 없는 만큼 서술자의 시대상황과 위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조명되고 있지만, 신사임당의 판관대의 역사 기록은 단 한 줄 존재하는데, 신사임당이 돌아가시던 해인 1551년 율곡이 16세 때에 어머니 행장기인“선비행장”을 기록하였다.
2)“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봉평
율곡이 17세때 쓴 어머님 행장기록인“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봉평은 가거(家居)이고 임영은 귀녕(歸寧)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신사임당은 3년상(만 2년)을 마치고 신혼 살림집 백옥포리 시대가 시 " 惑歸臨瀛 惑居蓬坪”를 정확하게 번역하면“어머니께서는 임영에 친정 어머니를 뵈러가기도 하였으며, 봉평의 집에 살으셨다.”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율곡의『선비행장』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적을 직접 쓴 가장 정확한 사료로 율곡이 살고 있는 고향이 봉평이란 점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통설은 강릉 오죽헌이‘율곡이 태어난 곳’이며, 판관대는‘율곡이 잉태된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평창지역과 강릉지역에 이이의 잉태(배태)와 탄생 등에 관한 설화들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율곡과 신사임당에 설화적 이야기는 많았지만 정작 율곡이 선비행장에서 쓴‘혹귀임영 혹거봉평 (惑歸臨瀛 惑居蓬坪)’의 여덟 글자는 신사임당에게 봉평이 본가이고, 임영이 친정이란 뜻이다.
1,800년대 후반의 유학자 신범(辛汎)의 문집인『봉서유고(蓬西遺稿)』주8)의『판관대기』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옛 노인이 서로 전하던 말 중에‘선생(율곡 이이)은 봉평에서 임신하고, 죽헌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죽헌의 사람은 말하길,‘그렇지 않다. 선생 가족은 죽헌에서 살았고 선생은 죽헌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까닭에 이곳에 몽룡실(夢龍室)이 있다.’고 한다. 대개 그러함과 그렇지 아니함이 상세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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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봉서유고(蓬書遺稿)』; 봉서유고는 구한말 봉평출신의 유학자 신범선생의 산문연구기록 등을 모아서 1903년에 신범의 손자 신상묵(辛象默)과 사위 이석범(李 錫範)이 편집·간행한 유고문집으로 권말에 최익현 발문이 있으며 이 책은 19세기 유학자의 사상경향을 보여주는 참고 자료이다. ( 신교선 증조부)
7권 3책. 목활자본으로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도서 등에 있다. 신범선생은 팔석정 근처에 봉호재(蓬壺齎)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평창군청. 2006. 3 권 p218.
주9) 『판관대기』는『팔석정기』와 함께 국역『봉서유고』책에 실려있다.
대부분의 위인들의 전기 책에서는 첫째 줄에 고향이 명기된다. 사명당하면 밀양생, 만해 한용운하면 그의 기록 첫 줄에 홍성출생이라고 나오는데, 강릉 사람들은 율곡이 오죽헌에서 출생하였기에 율곡의 고향은 강릉이다라고 명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율곡도 본래의 외가는 서울이 될 것이지만 외조모가 강릉의 친정에 거쳐하였기에 사임당이 어머니를 뵈러 외가에 다녔기에 자연 율곡에게도 외가로 지칭되는 것이다. 이 또한 오죽헌의 위상강화에 판관대가 부각되었어야 마땅하나 그러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판관대는 무시되었고, 지금으로는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었다. (주; 물론 봉평의 판관대도 1906년 이전까지는 명주도호부 즉 강릉 관할지였다)
만약 뭇 사람들에게 율곡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하고 물어 본다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오늘날엔 율곡에겐 고향이 어디인줄 모르고, 그가 어릴적 뛰놀던 고향집의 정서와 호연지기를 그리지 못하면서 그의 사상에 이해는 올발랐을까? 이러한 굴절된 점에 필자로서는 깊은 괴리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신범선생은『판관대기』에서“갑신년(1524) 이후에 간혹 임영으로 뵈러 갔다가 간혹 봉평에 거쳐했고, 신축년(1541)에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고 했으니, 갑신년 이후와 신축년 이전은 죽헌에서 살지 않은 것 같다.”고 임영과 봉평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판관대기』
< 신범 선생은 봉평면 평촌리의 유학자로서 현 평촌리의 부친은 해장집을 쓴 신상옥이다.
“선비행장”의 기록은 당대에 율곡의 출생과 거주지에 대한 유일하고, 당사자인 율곡이 직접 쓴 역사적 기록으로서 신사임당이 결혼 후 봉평 살림집에 기거하며, 18년간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바, 태어난 곳과 잉태된 곳의 근거는 다만 분명하지 않은 구전과 설화뿐이며, 혹시 율곡이 태어난 곳이 오죽헌이라도 외갓집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판관대는 당시 봉평으로 가는 옛길에 봉평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후 일제 강점시에는 산아래 물을따라 굽어 돌며 신작로가 나지만 옛길에는 장평에서 팔석정을 돌아 굽는 흥정천을 건너며, 또한 후일에는 섶다리를 건너서 판관대를 지나야 봉평으로 당도하는 길에 판관대는 봉평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기에 사임당은 모든 봉평사람과 마주 대하는 봉평인으로서 정든 고향이었으며, 율곡은 유년시절은 이곳의 옥포리의 강과 산, 들판의 해맑은 자연을 벗삼아 뛰놀던 추억의 고향이었다.
3)「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
(이 시는 율곡이 직접 쓴 시로 출처는「국역 이이 율곡전서』이다)
[過越溪棧, 宿邨舍, 有懷兄弟]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를 그리다.]
歇馬滄洲上, 尋蹊畎澮閒. 모래톱 위에 말을 멈춰두고, 밭도랑 사이로 오솔길을 찾으니.
孤村依老樹, 細澗下荒灣. 외로운 마을은 고목에 의지해 있고, 가느다란 냇물은 황만으로 흘러가네.
雨足連畦菜, 嵐收繞屋山. 채소밭엔 비가 흠뻑 내렸는데, 안개는 산과 지붕에서 막 걷히네.
別愁今轉極, 無境解吾顔. 이별의 시름 이젠 더욱 짙어지니, 내 얼굴의 주름살 펼 길이 없구려.
< 이 시는 현제 알려지지 않았으며 필자가 율곡전서에서 처음으로 발췌하여 기록하기에 생소할 듯합니다.
* 역주 – 신사임당이 한양으로 이사 가기에 앞서 강릉 어머님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유대관령 망친정 ”이라는 시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가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오죽헌에서는 적절한 詩이지만, 이곳 판관대에서 율곡이 지은“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라는 시는 시골집인 판관대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서가 맞지 않을 듯하여 조명이 되지 못하지만, 판관대의 詩이기에 율곡전서에서 발췌하여 새로히 조명합니다.
율곡의 이 詩의 제목에서 보면 "시골집에 묵으며 형제를 그리다"라는 주제어에서 율곡에게 시골집이 있다면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가 아니라 외가쪽 가계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외가이고 여기서“시골집”은 일반적으로 날이 저물어 하루 묵어가는 촌락마을의 일반적인 시골집이 아니라 형제를 그리는 추억이 담긴 고향의 어릴적“시골집”이다. 율곡은 봉평 판관대를“시골집”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 詩의 오브제로서 가느다란 냇물과 징검다리는 봉평 판관대로 들어가는 사실성을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말(馬)을 집 앞마당에
메어 두었슬 터인데. 실개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모래톱에 세워 두었다는 임시적 행위의 표현으로 보이며, 시적 형상화를 시킨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의 회상속에 형제를 그려 본것으로 싯구는 어린시절의 추억의 장소는 오직 봉평(현 용평면 소재)의 판관대임을 알 수 있다. (주; 이 시에서 말을 타고 다닌것으로 말은 역원에서 마패를 보이고 탈 수있는 것으로 판서는 2필의 말을 빌릴 수있는 마패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이조판서시 대화를 다녀가며 대화를 명주에서 정선군 관할지로 이관하려고 한때로 추정함)
위 시에서“밭도랑 사이로 오솔길을”찾아 올라가야 집에 당도하며,“외로운 마을은 고목에 의지해 있고, 가느다란 냇물은 황만으로 흘러가네”라는 싯귀는 흥전천의 작은 냇물도 언제가는 서해로 흘러간다는 서정성의 묘사이다. 율곡 이이선생은 임영의 외조모를 뵈러 강릉에 가던중. 아니면 이조 판서시 황장목에 대한 업무차 평창, 대화를 다녀가며 묵었던 듯한 때의 詩로 날이 어둡자 가까이에 있는 옛 고향 시골집에 찾아가 하루 묵고가며 어린시절 형제들과 놀던 추억들을 회상하는 율곡 스스로 시골집을 회상하는 詩이다. (황만은 황해바다)
◀ 판관대 위치 사진 ▶ 백옥포리의 흥전천
율곡이 다섯 살때 어느날 홍수가 와서 앞냇물이 홍수가 졌는데 마침 어는사람이 내를 건너다 넘어져 위태롭게되자 그것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은 많은 강물이 블게되자 이곳을 건너던 사람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니 그것을 보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손뼉치고 웃어대는데 율곡은 기둥을 붙들고 서서 애를 태우다가 그 사람이 위태로움을 모면하게 되자 그때에야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위 詩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강은 바로 판관대 100m 아래의 흥전천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오죽헌에서 좀 멀리에 선교장 들어가는 곳에는 배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경포호의 물로 평시에도 사람이 그냥 건널 수 없는 상태이나, 봉평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판관대 앞의 흥정천은 징검다리로 건널 수 있는 실개천으로 장마물에 미끄러져 위태롭게 되었는데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한다면 어쩜 흥전천은 깊지 않아 미끄러져도 목숨이 위태롭지 않아서 자연 웃음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기에 율곡전서에 전하는 이 일화는 판관대 앞의 흥정천의 실개천에서의 홍수시의 일화로 해석된다.주10)
4)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
이 장에서는 판관대의 실체성으로, 즉 판관대가 정말 존재했었는가 하는 기록을 고찰합니다.
◉ 토지등기부상의 기록
오죽헌의 상속자는 이씨분재기에 의하면 권처균이 배묘조로 오죽헌을 상속하였다. 그리고 오죽헌은 권씨 문중으로 이어져 내려와서 토지조사부의 소유자도 권씨로 나온 것이다.
(소유자가 표기된 1916년의 토지조사부)
◉ 문헌상의 판관대 실체 규명
1906년까지는 판관대는 실존하는 건물이었던 기록을 고찰한다.
구한말에 봉평의 유람들이 봉산서재를 건립 중에 배향에 관한 문제로 유림사이에 각기 다른 의견을 주고 받을때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은 1906년 추성구(秋性求)에게 쓴 편지중에서“제 생각을 그만 말하라 하지 않으신다면, 율곡이 수태된 그곳의 판관대가 빈 채로 쓰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곳에 특별히 율옹(주; 栗翁, 율곡 이이를 지칭함)의 사당을 짓고 주11) 지금 짓고있는 사당 건물에는 (주; 봉산서재) 화옹 이하의 유상을 받든다면 일이 적절할 것 같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결혼시기인 1,520년대부터 1,906년까지 380여 년간 존속되어 있었다면 상당한 양반집 규모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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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김동주외 역주, 율곡전서 Ⅶ (연보,잡록,제가기술잡록) 한국문화정신연구원. 2002. 11쪽.
주11) 봉평 유림들은 화서학파로서 봉산서재 건립시에는 화서학파의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의 세 사람을 배향하려고 하였는데, 근처에 율곡 이이가 사셨기에 의암 유인석은 편지에서 판관대 옆에 사당을 짓고 이이 선생을 별도로 제향하자는 의견이다.
화서학파는 주리론의 이황의 문인들이며, 이이는 주기론파이지만 같은 유학자이기에 현재 봉산서재에서는 많은 의논 끝에 이이와 이항로가 곡각으로 배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판관대에 대한 역사성을 바르게 세우지 못하고 여러갈래의 의문과 이에 대하여 논증방법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문인의 고향인 역사를 간직하고서도 잊혀져가는 판관대의 역사를 새롭게 정비하여 율곡과 신사임당의 고향으로 재조명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여러분석을 통하여 올바른 의미의 판관대를 정비하고“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라는 새로운 문화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판관대 문화사업의 일원으로 한낱 놀이문화라는 점에서는 출발하는 점은 올바른 가치관은 아닌 듯합니다.
판관대의 위치 지도 (1911년 실측지도)
위 지도는 1,911년에 측도된 실측지도로 중앙박물관 소장의 일제강점기 역사 자료이다. 앞 글에서 1906년 판관대가 빈 집으로 존재한다는 기록에서 위 토지는 1916년 토지 조사부에서 송사(訟事)로 인하여 이전된 실 소유주주는 지도의 왼쪽 입구의 일본 목재로 지은 일식집에 살았다 한다. 따라서 지도에서 보이는 곡각의 가옥 두 채는 한 세대의 집으로 보이며, 이곳이 판관대임을 사료한다. 1911년에도 건물은 있기에 실측지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곳이 판관대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판관대 터 추정지 위치로 알려진 곳은 모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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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
위 두가지 역사의 사실은 본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힙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시골집에 묵으면서 형제(兄弟)를 그리다.」의 율곡의 詩는 율곡전서에서 발췌하였으며, 이 시에서 율곡이 지칭한 시골집은 오직 판관대밖에 없으며 아마도 이 시는 오죽헌에서는 필요도 없는 시인듯합니다만 논문 아래에서 보면 오죽헌 학자들의 연구는 별로 없는 듯하기에 이 시는 몰랏던 듯합니다.
(주) ◆ 판관대의 위치 지도 (1911년 실측지도)
지금까지는 판관대 아래의 도로 건너편의 농지가 판관대로 알려져 왔지만, 이번에 새로이 공개되는 위 지도는 정확한 실측지도로 판관대는 두 채가 남향으로 이어져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판관대는 중종때 신사임당이 결혼 후부터 살던 곳으로 1906년 의암 유인석이 봉평의 유학자 추성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판관대는 빈집으로 있다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3. 문헌속의 판관대
(2편에서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