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3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그의 증언 His Testimony
요 21:24~25
<책쓰는 목사>
저는 스스로 저에게 칭호를 하나 감히 붙였습니다. “책쓰는 목사”입니다.
목회하면서 책을 쓰는 목사라는 뜻입니다.
물론 목회자 중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분, 한둘이 아닙니다. 많습니다.
저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이 팔리는 책을 쓰는 분들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스스로 “책쓰는 목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책쓰는 목사” 아니라도 자기를 드러낼 업적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내세울 것이 없기도 하지만, “책쓰는 목사”로 자칭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맨 처음 펴낸 책이 2017년 저의 신학박사학위 논문 「하나님의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신학박사학위 논문을 펴내고 보니, 계속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책으로 펴낼 주제도 갑자기 머릿속에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책을 쓰는 목사가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한권 한권 펴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두 번째 책은 어떤 책이어야 할까요?”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너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라!”
그래서 두 번째 나온 책이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저 자신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부끄러움, 감추고 싶은 일들, 차마 내세우지 못했던 일들까지 다 기록했습니다.
그 책을 출판하고 나니, 저는 세상에 더 이상 감추고 숨길 것이 없어졌습니다.
비로소 그다음 책을 거침없이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6년간 8권을 펴냈습니다.
이렇게 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두 번째 책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 덕분입니다.
저 자신을 햇볕 아래 낱낱이 드러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책쓰는 목사” 이 칭호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책쓰는 목사”라는 칭호 뒤에 부끄러워 숨기를 즐겨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복음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주에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설교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일컬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요한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요한 스스로 요한복음에서만 5번이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열두 제자 중에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노라는 자랑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자기의 칭호입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열두 제자 중에서 성질이 제일 급한 요한과 야고보 형제입니다.
주님이 오죽하면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을까요!
요한이 자기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한 일은, 자기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_ 나는 성격이 급하고, 분노조절이 잘 안 되는 문제적 인간이었습니다.
_ 욕심 많고, 지기 싫어하고,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_ 그런 나를 주님이 가슴에 품어주셨습니다.
_ 늘 나를 측근에 두시고, 식사때면 옆에 앉히셨습니다. 늘 내 손을 잡고 다니셨습니다.
_ 다른 이들이 보면 “둘이 사귑니까?”라는 오해를 받을수도 있었습니다.
☞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시듯이,
예수님은 제자 요한을 품에 끼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렸습니다.
_ 저는 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으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_ 이 사람이 요한입니다. 이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_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진솔하고, 절절한 고백의 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의 “자기 오픈”은 분명히 이루어졌습니다.
책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저는 이러저러한 사람입니다.” 독자 앞에 낱낱이 드러내야 합니다.
☻ 대단히 죄송합니다. 요한의 모습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용서하시고 오늘 설교를 들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의 증언>
요한복음은 저자인 사도 요한의 자기 고백이 있으므로 더욱 값진 책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두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합니다.
이 본문 속에도 사도 요한의 자기 고백에 기초한 “주님께 영광돌리기”는 계속됩니다.
(24절)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4절은 난해구절 중의 한 구절입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요한복음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이 구절을 언뜻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요한이 쓴 책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튀어나옵니다.
요한 자신이 이 책을 썼다면 24절처럼 쓸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주석서에도 보면 논란이 대단합니다.
24절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야 되냐는 것입니다. 24절은 꼭 남이 쓴 듯한 구절입니다.
24절이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사도 요한이 이렇게 적었으면 될 일입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 나 요한입니다. 나는 나의 증언이 참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믿으십시오!”
그런데 꼭 남이 쓴 것처럼 24절을 기록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24절)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사랑하는 온고을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설교를 마무리하는 오늘, 24절을 어떻게 설교해야 되겠습니까?
예수 안 믿는 이들은 이 구절을 들어, 요한복음은 절대 요한이 쓰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말이 맞을까요? 아니면 “요한복음은 요한이 쓴 책”이라고 믿는 우리가 맞을까요?
☞ 사도 요한은 주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을 것입니다.
_ 아무도 내편이 안 되어주는데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신 주님!
_ 나를 이렇게 사도로 세우시고 영생의 복음을 선포하게 해 주신 주님!
_ 내가 필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내가 쓴 이 책은 진실과 진리만을 기록한 책입니다.
보통의 평범한 문장으로는 요한의 이 마음을 다 드러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간증>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간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고후 12:1~10)
바울이 어떻게 간증합니까?
자기 자신의 간증을 꼭 남의 말 하듯 간증을 합니다.
고후 12:1~5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도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는 중에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낙원으로 끌려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평범한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간증을 남의 간증처럼 객관화 시켜서 남의 얘기하듯 합니다.
이것은 고도의 문학적 기법입니다.
고차원의 수사학입니다. 매우 빼어난 레토릭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내가 천국에 다녀왔다.”라고 주장하면서 책을 펴냅니다.
그런 유의 책을 펴내면 엄청나게 많이 팔립니다.
몇 년 전 세 살 먹은 목사의 자녀가 천국에 갔다왔다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저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 실컷 팔아먹고, 아빠 목사가 가짜로 지어낸 것이 드러납니다.
이 책 말고도 아직도 이런 유의 책이 시중에 더러 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세상 말로 적어낸 신뢰하지 못할 책들입니다.
정말 천국을 체험했다면, 사도 바울처럼 기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경험했다고 얘기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섣불리 발설할 수조차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레토릭>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3년간이나 동고동락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어찌 감히 일일이 기록해 낼 수 있겠습니까?
요한도 요한복음을 마감하면서 고도의 강조기법을 씁니다.
바로 24절이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 나 요한입니다.
나는 나의 증언이 참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믿으십시오!”
이렇게 적으면, 거들떠도 안 봅니다!
시를 쓰는 분들은 시 한 편을 탈고하기 위해서 몇날 며칠, 몇 달, 몇 년을 두고 묵상합니다.
이렇게 고쳐보고, 저렇게 고쳐보면서 독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킬 방도를 찾습니다.
세상 글을 쓰는 사람들이야 몇날 며칠 각고의 노력을 하겠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영감으로 기록합니다.
요한도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복을 기록했습니다.
책의 말미에 그저 평범하게 “나는 나의 증언이 참된 줄 확신한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사실 힘 빠져요! 자화자찬이요, 자가당착이 되고 맙니다.
사도바울이 했던 것처럼, 사도 요한도 자기를 객관화합니다. 저자인 자신을 남처럼 씁니다.
(24절)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어떠세요? 읽으면 읽을수록, 24절 말씀이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갬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 그, 대명사_ 1인칭 3인칭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그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25절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기록 목적>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5절의 강조법도 대단합니다. 역시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25절을 보충하는 구절이 요한복음 20장에 있습니다.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요한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주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살면서 평생을 주님만을 위하여 삽니다.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일평생을 쏟아붓습니다.
그런 중에 요한복음을 기록합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적어냅니다.
보통의 책이 아닙니다.
세상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잘썼네, 못썼네 왈가왈부하는 책이 아닙니다.
요한이 썼다, 다른 사람이 썼다고 논란을 벌이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 앞에서 우리가 내놓아야 할 것은 우리의 “골수”입니다.
우리의 허접한 껍데기는 다 벗겨버리고,
우리의 알맹이가 쪼개지면서 거듭나는 책입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우리가 얻을 것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우리가 영생을 얻는 책입니다.
지상최대의 복, 영생을 선물하는 책, 요한복음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