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강창 궁산 2019.11.18. 토요일 맑음
지하철 2호선 강창역 1번 출구에서 14명 산사람들이 아침 10시 약속시간에 모두 모여 궁산 입구에 있는 이락서당으로 출발하였다. 오랜만에 6명의 사나이와 8명의 여성동지가 참석하였다. 계명대학교 병원이 신설되어 주변의 상권이 되살아날 것 같은데 아직은 활성화가 눈에 띄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로변에 높이 솟은 아파트의 1층 둥근 기둥으로 멋있게 지어놓은 상가는 문이 닫힌 곳이 대부분이다. 그 아파트 상가를 지나 금호강변에서 산으로 오르니 곧바로 이락서당이 나타났다.
이락서당
이락서당에서 다사 아파트를 바라보며
서당 앞에 세워진 비문를 읽고, 이영환 선생과 장세후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련 선생이 가져온 빵을 하나씩 나누어 먹고 바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강창 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고, 그 아래가 화원유원지, 그리고 강 너머 고령 쪽으로 아파트들이 보인다. 금호강 너머로 다사가 보이고 그곳 역시 아파트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락서당 앞에 세워놓은 자연석 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伊洛書堂은 朝鮮 正朝 戊午(1798)에 寒樂淵源의 後裔 南州 九門 11鄕의 서른 君子가 儒學中興에 때맞추어 經典의 硏究 講論을 통한 爲己之學으로 人格陶冶에 힘쓰고 山水가 고루 갖춘 빼어난 景觀에서 詩文唱酬(시문창수)로 浩然之氣를 기르며 아울러 子姓訓誨(자성훈회)에 그 目的을 두고 創建 하였다.
堂은 伊水와 洛江의 合流之處요 寒老樂翁의 杖屢之所(장루지소)인 巴山의 絶景에 諸賢의 合謀鳩財로 세우고 慕寒景彌로 淵源을 밝히니 가까이는 退陶에 이르고 멀리는 伊洛에 다다라 千年歲月과 萬里相距에 도 時空을 超越 若合 符節하니 이름하여 伊洛書堂 이다.
伊洛書堂 規約前文에서
辛卯年(2011年 5月)
이락서당
인터넷에서 이락서당을 찾아보면, 이 서당은 寒岡 鄭逑(한강 정구)와 樂齋 徐思遠(낙재 서사원) 兩先生(양선생)의 講學所(강학소)이다. 寒岡(한강, 1543-1620)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1580년(宣祖 13, 선조)에 昌寧(창녕) 縣監(현감)이 되어 宣祖(선조)의 引見時(인견시) 大學工程(대학공정)과 三綱八條(삼강팔조) 및 天德王道(천덕왕도)를 進言(진언)하니 縣(현)의 四方(사방)에 書齋(서재)가 세워지고 또한 鄕飮酒(향음주) 鄕射(향사), 養老(양로)의 禮(예)를 행하니 郡民(군민)이 生祠堂(생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한다. 持平(지평), 承旨(승지), 觀察使(관찰사)를 거쳐 大司憲(대사헌)에 이르렀다. 1633년(仁祖 11, 인조)에 贈吏曹判書(증이조판서), 諡文穆(시문목), 1657년(孝宗 8, 효종)에 領議政(영의정)으로 追贈 (추증)되었다.
樂齋(낙재, 1550-1615) 역시 조선 중기의 학자로 寒岡 鄭逑(한강 정구)의 門人(문인)으로 朱子學(주자학) 및 李滉(이황)의 文集(문집)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壬亂時(임란시)에는 대구 지역에서 최초로 倡義(창의)하여 八公山(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刑曹正郎(형조정랑), 戶曹正郎(호조정랑) 등이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伊洛書堂(이락서당)은 위 兩先生(양선생)을 추모하며 正祖(정조)때 대구, 달성, 칠곡 등 인근 9門中(문중)의 儒生(유생) 31名(명)이 人材(인재)양성과 禮學(예학)숭상을 위해 금호강과 낙동강이 合水(합수)되는 속칭 江倉(강창)을 택하여 방2칸, 대청 2칸을 누각처럼 지으니 朝暉夕陰(조휘석음)에 萬千氣像(만천기상)이 大觀(대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궁산 등산로
주변에 아파트가 많아 사람들이 이 산을 운동 삼아 걷는 모양이다. 산길 중간 중간에 목책 계단을 설치해놓아 산길을 오르기 쉽도록 잘 정비해 놓았다. 이락서당 뒤편에 강 쪽으로 높은 낭떠러지가 있고 그곳에는 ‘배꼽덤’이라는 설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청산과부가 삶을 버리고 강으로 떨어졌는데, 중간에 있는 나무에 배꼽이 걸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배꼽이 걸려 살았다면 이야기가 될 터인데 죽었다는데 그리 기념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호강의 푸른 물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백척 높이의 깎아지른 듯 한 바위 위에서서 내려다보고 있던 이영환 선생 하는 말이 “중국 적벽보다 훨씬 장엄하다”고 한마디 던진다. 중국 사람들의 과장된 표현으로 쓴 문장을 읽고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가 실제로 그 장소에 가보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다. 이백의 ‘망여산폭포’에서도 “飛流直下三千尺”라 했는데 떨어지는 물줄기가 1km가 된다고 한 것이니 뻥이라 하면 그만이지만 詩想으로 치자면 저렇게 볼 수 있는 안목이 과연 이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이영환 선생이 적벽부를 좔좔 외어서 읊으니 새로 지은 금호강 푸른 물결 깎아지른 절벽에 ‘궁산적벽부’가 다시 생겨 나오는 것 같다. 천하의 문장가 소동파의 적벽부 마지막 부분은 다시 읽어 보아도 심금을 울린다.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경치를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못하게 할수도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강창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 이름이 江倉이 되었다. 지금은 주변이 아파트나 고층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미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이런 인공물들이 세워지기 전에는 매우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서거정이 600년 전에 대구 10경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첫수가 ‘금호에 배 띄우는 것[琴湖泛舟]’라는 시이다.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란주)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목란 배를 띄우고
取次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차츰차츰 한가로이 백구 곁으로 다가가네
盡醉月明回棹去(진취월명회도거) 달 밝은 밤 한껏 취해 노 저어 되돌아가니
風流不必五湖遊(풍류불필오호유) 반드시 오호에 노닌 것만 풍류가 아니로다.
앞에서 본 동파의 적벽부의 풍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현대에 사는 우리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이 써놓은 시 한수를 읽으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AI시대가 도래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갖게 한다.
동네사람들이 평소에 산보하는 길이라고 우습게 볼 산이 아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계단도 있고 아슬아슬한 절벽 옆으로 난 오솔길이 오금을 저리게 한다. ‘노는 바위’라 표시된 바로 옆 벤치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히며 휴식시간을 가진다.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계단이 불편하다고 숲길로 올라오고 있던 일행인 이재철 교수가 보이지 않아 권 산행대장과 함께 아래로 찾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다 생각하니 처음 오는 산이지만 깊은 산이 아닌 야산이어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올라갔다.
배꼽덤에서 다사 세천교 세천공단
궁산을 향해서
궁산 정상 근처에서 서북방향으로 내려다보이는 금호강변의 풍광이 일색이다. 팔달교를 지나 급하게 굽이쳐 세천공단 옆을 지나서 궁산에 가로 막힌 물줄기가 강창방향으로 돌아 넓은 강폭을 만든 다음 드디어 낙동강에 들어간다. 멀리 가까이 대나무 숲처럼 솟아 있는 아파트들이 우리나라가 아닌 마치 외국의 풍광처럼 보여 환영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힘을 다해 이룩하고 있는 성공했다는 결과물들이 저러한 것인가? 따뜻하고 차분한 우리의 감정과는 걸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생소하다는 생각에 문득 섬짓해 진다.
궁산 정상에서
우리는 궁산이라 적은 정상에 세워진 돌비를 빙 둘러서서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고, 찍사 장세후 박사는 방향을 잡고 삼각대를 세우고 그 위에 75mm 니콘렌즈를 장착한 값비싼 카메라를 올려 셀프타이머를 맞춘 다음 셔트를 누르고 그 긴 다리로 번개처럼 달려 같은 편에 포-즈를 잡자마자 찰칵하고 셔터 음이 들린다. 역광이어서 사진이 괜찮을까 염려했는데 찍사 말씀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12시가 다된 시간에 계명대 기숙사 쪽 길로 내려간다. 약 1km를 내려가면 우리가 점심을 먹기로 예약해놓은 ‘숯불갈비 봄날에’라는 식당이 있다.
주반장이 앞장을 서서 내려가는데,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낙제 서사원의 묘소가 있다. 잘 만들어진 묘소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영환 선생 말로는 봉분이 능에 버금가게 크고, 봉분 바로 한가운데 흰 대리석으로 된 묘비명이 서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흰 대리석 비의 중간 곳곳에 총알 흔적으로 보이는 푹 파인 곳들이 한국전쟁 때 산물인가? 아니 그때 대구에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는데, 언제 때 흔적인지 알 수가 없다. 낙제 선생은 1600년대 대구 유생들의 대부였다고 하는데 장중한 모습이 그에 걸맞는 묘소인 것같이 느껴졌다.
서사원선생 묘소
산행의 즐거움도 먹는데 있는 것인데 드디어 ‘봄날에’라는 식당에 도착하여 방안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방안에는 조인숙 사무국장도 동참하여 15분이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주 반장님이 가져온 포도주 두병이 동이 나고 오랜만에 참석한 이영환 선생님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져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숲과문화반 이번 학기 종강 날이다. 1년 열두 달 쉬지 않고 산행을 했고 오늘 2019년 마지막 산행을 궁산 산행으로 마쳤다. 일 년간 산에 갈 적마다 빠지지 않고 동참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올해도 건강했던 것처럼 내년에도 건강하게 산행을 계속하게 되길 기대했다. 그래서 내년에 백두산을 가자고 했더니 다들 그러자고 찬동을 해주신다. 어느 달이 가장 좋은가? 하는 질문에 스스럼없이 7월이 좋다고 했다. 내가 가본 7월 1일 청명한 날씨 덕분에 천지가 깨끗하게 잘 보였기 때문이다.
깨알처럼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 숲과문화반의 2020년의 행복은 ‘백두산을 오르자‘고 하는 기대감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건강하게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바라면서 금년 마지막 산행기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