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의 철학
지금의 세계는 경제적으로 혼란스럽고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기침하면 감기 걸리 듯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시점에 놓여있다.
너도나도 어렵다는 3D 업종은 외면한 체 편한자리만 고수하다가 개인으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직장에서는 데모를 하면 회사는 손해를 볼지 몰라도 개인은 절대 손해가 없다는
이기적 주의가 우리의 환경을 더욱 어렵게 부채질하는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기업이나 정부도 돈이 있다고 자만하는 것인지 아니면 권력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그들에겐 주인의식은 없고 자기들 조직만 편하면 된다는 고통 분담의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도 느끼게 한다.
세태가 이렇게 어지러울 때는 역사를 들추며 교훈을 얻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가운데는 반드시 존경할 만한 철학을 가진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인터넷으로 인물을 탐색하면서 이런 본보기가 바로 경주 최부자 집 이야기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최부자집은 최치원의 17대손인 최진립(1568년~1636)과아들 최동량, 손자
최국선에 이르러 재물이 싸이면서
진사이상 벼슬금지등과 같은 가훈을 실천해 28대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12대에걸치는 300년간 존경받는 부자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에서는 일대에만 부자로 사는 집안은 귀족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삼대가 넘어가도 재산과 명성을 유지해야 귀족의 반열에 설 수 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집은 1600년부터 1900년에 걸쳐서 12대에 이르기까지 만석군을
유지하였으니 귀족중의 귀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부자집이 특히
존경받는 이유는 이들이 쌓아놓은 부의 쓰임새와 부자로서의 도덕성에 있다.
경주 최부자 집에는 독특한 철학이 있다. 정리해 보면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부는 명문가의 필수조건이다.
부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명문가로 부상한 가문은 흔치않다.
부를 축척한 다음에는 대부분 명예나 권력을 뒤쫏는 패턴으로 명가로 진화한다.
이때 자칫하면 명가는 이기에 처할 수가 있다.
우리는 명예와 권력은 함께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는 예외라고 착각하고
모두 가지려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많이 본다.
권력을 잡으면 욕심이나서 부도 함께 잡으려다 감옥소에 간 위대한 자제분들이나
형님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둘째,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려면 더불어 사는
세상임을 자각하고 그에 따른 의무를 실현하여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의식주는 필수사항이기에 자기의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배려가 되어야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졸부와 존경받는 부자의 차이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고 사느냐? 못사느냐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최부자 집 가훈에는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 환원을 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 당시 그의 혜택을 입고 사는 사람은 그가 부자가 되면 될 수록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수혜의 량의
많아질 것이기에 누구나 그가 더 많이 벌게 해달라고 바랄 것임에 틀림없다.
셋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천, 수만 명이 굶어 죽고 땅을 헐값으로 내놓는 상황에서 가난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땅을 마구 사들이는 것은 원성을 사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산이 파탄되어 경매된 물건을 사주는 것이 그사람을 돕는다고하면서
경매가가 더 내려가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자 집은 매년 쌀 1000석을 과객들의
대접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채에는 항상 손님들이 들끌었다고 한다.
과객은 단순히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다.
그 당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학덕 높은 선비, 풍류객, 협객, 또는 잔반 등이었다.
이들은 세상소식에 밝은 일종의 정보전달자로서 경주최부자 집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세나 중요한 정보 창구 역할을 했을 것이고,
또한 반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최부자 집의 이야기를 전파하고 다녔을 것이다.
다섯째로, 주변 100리 안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현종때인 1671년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최부자집은 곳간을 헐고 그 집 마당에 큰솥을 걸어놓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는데 지금도 그 자리가 활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여섯째로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이는 살림을 맡아야하는 며느리들에게 근검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기위해서이다.
이렇게 최부자집이 300년이나 지속해온 것은 정당하게 부를 축척하고 부를 사회에 환원
하도록 한 정신이면에 며느리들에게 가르친 이것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