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님 잘~ 하셨습니다.
테니스 님과 테니스 님의 아드님을 만나보셨군요!
(향기 님의 글에 꼬리글을 붙이니 글이 없어진 관계로 글의 순서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어제는 저도 전화 통화라도 할 요량으로 백방으로 노력 했습니다.
테니스 님의 소식을 안 시간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아침에도 전화를 시도는 해 보다가
아침 시간이라 내 사정이 여의치않아 그만둬 버렸습니다.
테니스 님 가는 곳 연락처를 남기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제이 주 님과의 인연의 끈인 글입니다.
영도다리 (수필)
-안명수-
2001년 시월에 영도다리가 헐릴 것이라고 한다. 민족의 애환이 서린 영도다리는 1934년부터 1966년까지에는 가수 김상국의 노랫말 그대로 하루 두 번씩 '끄덕끄덕' 머리를 치켜들었던 동양 최초의 도개교였다. 이 다리 곳곳에는 부산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던 즐거운 추억과 식민치하의 슬픈 과거사, 심지어는 해방 후 좌우익의 소용돌이 쳤던 정치의 부스럼까지도 고스란히 스며들어있다.
6·25 전쟁의 비극이 극에 달했던 수난의 시절에는 생활에 지친 이산가족들이 영도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던 슬픈 역사가 단조처럼 슬픈 가락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영도다리의 탄생은 우리민족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영도가 군사 전략적인 가치가 아주 높음을 알고, 섬 전체를 일본 침략군의 요새로 만들기로 했다.
이 음흉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육지와의 연결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7,008,000원을 투입키로 결정했다고 한다. 봉래동과 영선동을 군마의 주둔지 혹은 사육지로 만들고, 태종산은 대륙으로 진출하는 관동군의 휴양지로 조성하며, 청학동 일대에는 고사포기지와 군함의 지하 벙커를 만들 작정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영도다리의 출현은 비록 아름답지 못한 정서로 시작되긴 했어도, 길고 긴 연륜이 쌓이는 과정에 흥미진진한 많은 사연들이 비늘처럼 엉켜 있다.
한 시인에 얽힌 에피소드도 영도다리의 재미있는 삽화 가운데서도 백미라 하겠다.
시인 천상병은 서울상대 재학시절 부산에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동아대학교 여학생에게 반하여 시인다운 기개를 마음껏 펼쳐 보였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싶었지만 미모의 여성에 관하여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영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환상의 여인이 언젠가는 이 영도다리를 지날 때가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장장 한달 동안 다리 목을 지켰다는 사랑의 불꽃은 아름다운 낭만으로 기옥될 만하다. 시인 천상병은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몇 번이나 읊었을까.
미라보 다리 아래 쎈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외로움에 이어
온다.
천상병은 이 시에서 '미라보 다리'와'쎈강'을 어떤 단어로 바꾸어 읊었을까.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가사가 들어 있는 유행가는 끼니를 굶고 찬물을 끼니를 굶고 들이켰던 전쟁피해자들의 애창곡이었다. 많은 소시민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흘린 눈물은 한 시대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노래말가지 거의 다 잊었지만, 젊은 시절 밤늦게 한잔 술에 취하여 영도다리를 도보로 건너면서 목살에 핏대를 세워 이 슬픈 노래를 간드러지게 불렀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그날의 기분을 살려 눈물 많은 여류문사의 손을 잡고 추억 어린 영도다리를 단 한번만이라도 걸어볼 수 있었으면….
내가 최초로 영도다리와 조우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밀양촌놈인 나는 4학년 당시까지 내가 본 대처라고는 밀양읍이 고작이었다. 여름철에는 또래의 아이들이 경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밑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할 때가 많았다. 목욕을 하는 사이에 열차가 지나가면 차창밖을 내다 보고 있는 신사숙녀들에게 주먹치기 욕을 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머리통까지 활용하면서….
불특정 다수 여객들을 향하여 그런 불경스런 짓거리를 한 것은, 기차를 타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자의 심통 같은 것이. 욕구불만을 어렴풋이 느꼈던 4학년 무렵, 나의 역마살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역마살은 기차 타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무단 가출을 결행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였다.
날씨가 화창한 늦은 봄 책 보따리를 뒷산 바위 밑에 감취두고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상동역 화장실로 숨어들어 부산행 완행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차표 조사를 하는 여객전무의 눈을 피하여 부산(본)역에 도착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고, 스릴 만점이었다. 정해진 행선지가 없었으므로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였고, 영도다리에 도착한 것은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신세계의 경이로움이 나의 의식을 후려쳤다. 기차를 처음 타본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다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바다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바다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해도 바다에 대한 이미지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떠오를 분이다. 내 앞에 펼쳐진 바다는 그림책에서 본 조용한 호수 같은 경치가 아니었다.
감격적이었다. 역동적인 파도가 철썩이는 장관은 상상을 초?? 하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때맞추어 오포가 울고 영도다리가 '끄덕끄덕' 올라가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구경하기 위하여 먼 시골에서 온 촌로들은 감탄을 연발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릴 때의 감격은 가슴속에 대못으로 박힌다.
종일토록 끼니를 굶고, 도둑승차를 하기 위하여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계속했지만 전혀 l로를 느끼지 않았던 것은 그날의 감격이 너무 컸기 때문 일 것이다. 몰래 준비한 누룽지를 먹는 처지이면서도 가슴이 터질듯한 환희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감격이 장면들을 내 짧은 문학으로 기술하는 것은 족탈불급이다.
가출해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나는 학급의 영웅이 되었다. 내 경험담은 나날이 과장을 더하였고, 동급생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선망의 시선을 보내곤 했다. 몇 달 후 용기 있는 몇몇 악동들이 나의 가출을 교훈으로 삼아 모험심을 발동한 사건은 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대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그 전말은 영도다리와 관계가 없기에 생략키로 한다.
67년 긴 세월 동안 민중의 애환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 많은 영도다리가, 그 육중한 노구가 부산 앞 바다의 푸른 물결 속에 주검이 되어 수장될 것이라 한다. 안락사의 순간을 위하여 애달픈 시편 하나 지어 파도에 실어 보내야만 될 것 같다. 영도다리에는 내 소년 시절의 가출에 얽힌 꿈과 모험과 치기가 아롱져 있기 때문이다. 부산 앞 바다에 파도가 철썩이듯이 내 작은 가슴에 열병처럼 앓고 있는 과거를 수장하기 위하여 시편 하나 지어 애절하게 읊어보리라.
환상의 영도다리가 허물어지는 날, 한평생 내 몸에 독버섯처럼 자라면서 내 의식을 괴롭혔던 역마살도 종언을 고하고 사라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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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는 옛부터 목마장으로 유명한 곳으로 지명 또한 말과 연관된 것으로 그림자조차 없을 만큼 빨리 달리는 명마, 즉 절영명마를 생산한 섬이란 뜻의 절영도가 줄어진 이름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 태종대, 신선바위 등 수많은 전설이 함께하는 관광의 고장으로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어제, 어방놀이 등 전통 문화가 어우러진 조화의 삶터입니다.
이번 방문으로 아름다운 섬 영도의 추억을 가슴깊이 간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부산 영도 구청 홈페이지 설명입니다.
저도 부산에 오래 살았지만 갑자기 영도를 한문으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며 들어간 곳이네요.
오늘은 풀빵(붕어빵, 국화빵) 생각부터 시작하여 이 풀빵을 잘 사주던
큰집 언니 생각이 내 어렸을 때 큰집으로 추억의 여행을 시키누나.
큰집은 봉래산 기슭 아치섬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가을이면 대국의 향기가 유난히 짙은 꽃밭을 지닌 아담한 기와집으로 기억한다.
마당은 바닷가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까맣고 회색 빛나는 차돌이 박혀 있었지?
언덕배기에 하얀나무 십자가가 유난히 빛났던 교회가 있던 곳
산등성이 넘어면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고
성묘 마치고 바람부는 언덕 따라 태종대로의 가족나들이는
그저 꿈이런가 생시련가 한다.
가는 길에 겨울잠 자던 뱀들의 또아리도 얼핏 떠오르고
촛대바위 자살바위의 그 경관이며 백색등대 소나무....
집에서 심심하면 내려가 놀던 자갈 밭에서 발견한 문어와
놀란 나와 쏜살같이 잡던 언니들의 솜씨며
섬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의 도시락엔 멸치, 이쪽 아이들은 고추장이라던
전설 같았던 이야기도 생각나고
자라선 호젓한 데이트 코스로 안성마춤이었던 곳
아치섬 해양대학생 유니폼도 동경의 대상이었나?
어린이 날이면 문을 개방하는 해양대학에서 그림그리기로
대상을 차지한 내 딸 생각도...
더 어렸을 때 영도다리 들리던 때도 생각도 나고
해안을 끼고 아슬아슬 덩컹덜컹 신났던 태종대행 버스유람!!
언젠가 추억을 더듬어 꼭 순례를 해보리라!!
비록 그 차르락 고운 소리 들려주던 차돌들은 시멘트에 갖혀
소리를 잃고 봉래산 꼭대기까지 아파트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도
자갈치 가서 배를 이용해 영도로 들어가 보리라!!
태종대 높은 곳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가슴을 넓게 펴고 심호흡을 하고 돌아오리라!!
첫댓글야.. 옛생각이 절로 납니다. 영도, 타박 고구마가 유명 했지요. 샛빨갛고 알이 작았지만 맛이 꼭 밤 같았습니다. 영혜님은 참 글을 잘씁니다. 작가로 한번 출세를 해보심이 여하? 늦다고 생각될때가 제일 빠른때? 각설... 향기님 글엔 꼬리글을 달수가 없네요. 상봉추카. 제가 만난만큼 기쁩니다. 미주 노친네들중에 제일
저는 부산 태생이 아니라 영도다리에 대한 추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영도다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는군요. 글도 좋고 이렇게 올려 주시는 언제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향기님의 멋진 해후, 축하 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그런 행운이 있으려나.....?
첫댓글 야.. 옛생각이 절로 납니다. 영도, 타박 고구마가 유명 했지요. 샛빨갛고 알이 작았지만 맛이 꼭 밤 같았습니다. 영혜님은 참 글을 잘씁니다. 작가로 한번 출세를 해보심이 여하? 늦다고 생각될때가 제일 빠른때? 각설... 향기님 글엔 꼬리글을 달수가 없네요. 상봉추카. 제가 만난만큼 기쁩니다. 미주 노친네들중에 제일
늙은이를 보냈는데 총각 같더라꼬예? 테니스님 머리칼 염색 절대 안햇심데이. 윌빙실장 아입니꺼. ㅋㅋ
이주님 덕택으로 연극과 기적같은 상봉을 하였읍니다 우째든 섭섭한 마음 눈녹듯이 사라졌읍니다 수고하심에 늘 감사드리는 향기의 마음 잊어주시기 바람니다 안사랑해요^*^*^
저는 부산 태생이 아니라 영도다리에 대한 추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영도다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는군요. 글도 좋고 이렇게 올려 주시는 언제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향기님의 멋진 해후, 축하 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그런 행운이 있으려나.....?
토카타님 삼호관광에 전화하십시오,,,,가이드의 말론 올해 10월부터 영도다리의 확장 공사가 시작된다네요,,,,개인 적으로 이번 부산 방문은 저를 50년 전으로 돌아 갔다 오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