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세간에는 중국과 관련한 두 가지 말들이 오갔다. 바로 ‘재스민 혁명’과 ‘상하이 스캔들’이다.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아랍을 흔들다가 중국으로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재스민 혁명을 중국어로 바꾸면 말 그대로 ‘茉莉花革命(재스민 혁명)’이 된다. 반면에 우리 나라를 떠들썩했던 ‘상하이 스캔들’은 그 중심 인물이 덩신밍(鄧新明)이란 여성인데다 대한민국 상하이총영사관을 무대로 한 치정에 이어 스파이 사건 연루 의혹까지 낳았다.
이들 두 단어 중에 어느 것이 중국 내에서 더 위태로울 것인가. 사람들은 별 고민없이 ‘재스민 혁명’을 꼽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도 머지 않아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동운동 등 사회변혁 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분명히 맞는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 5천 달러를 전후로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의 검색엔진들에서 ‘茉莉花革命’으로 검색해 보라. 그럼 수많은 기사들이 검색된다. 우리 언론에서는 이 단어가 금기가 됐다고 했는데 정보통신 거르기에 상식화된 중국에서 이렇게 쉽게 이 단어를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의 중국에 대한 상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그대로 방증한다.
우선 중국에서 ‘재스민 혁명’은 상당히 먼 이야기다. 재스민 혁명을 말하고 그런 시위를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서구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의 관점이다. 중국은 공안이나 안전부 등 수많은 장치를 통해 정보를 통제하고 사회를 콘트롤한다. 미국 안에 중국 간첩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안에 외국 간첩이 활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누구나 인정하듯 중국은 아주 오래된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통한 변혁은 우리의 바램일 수 있지만 중국의 현실과는 멀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기에는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조직과 정치경제적 환경도 성숙해야 한다. 또 시민들의 의식안에도 그런 의식이 잠재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 정보당국은 아직 그렇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요한 곳에서 몇몇이 주도하는 시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전체의 혁명으로 가기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상대적으로 이 단어에 대해서 별로 긴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소셜 커뮤니티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페이스북 등 통제가 불가능한 외국 커뮤니티는 접근 자체를 막아버린다. 물론 시나나 소이 같은 중국내 포털의 블로그 등은 열어 둔다. 하지만 외국의 소셜 커뮤니티는 가능한 통제한다. 또 베이징 시민 전체의 휴대전화를 감시한다고 할만큼 정보통신에 대한 감독은 강화한다. 이러니 굳이 아랍식의 시민 혁명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반면에 ‘鄧新明’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어떨까. 중국 최대 검색엔진의 뉴스란에서 검색하면 3개 정도의 기사가 뜨는데 두 개는 한 신문의 한국 특파원이 쓴 것이고, 하나는 이 신문을 인용한 보도다. 한주일 동안 한국을 휩쓴 뉴스가 중국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은 셈이다. 사실 이 기사를 쓴 한국 특파원도 중국 언론의 관행을 잘 모른 채 쓴 듯하다. 이말은 중국 언론이 이 여성에 관한 기사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랬을까.
바로 이 단어에는 그만한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덩신밍이라는 여성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태어난 때가 1978년이니 정말로 그녀가 전 지도자의 숨겨진 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지금 지도자들의 아킬레스 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혹자는 중국 공산당이 소수의 특권층이 다스리는 폐쇄된 집단으로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으로 이들 안에서는 철저한 논리와 검증을 거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다. 또 치명적인 약점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개인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있는 세력에도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철저하게 단속을 한다.
대부분의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현 중국 지도층을 잇는 역할을 했는데, 결국 이건 권력이든 돈이든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중국 정치 상부에서 만만치 않은 바람이 불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유야무야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실 지난 수년간 한중관계는 외줄타기라고 표현할 만큼 난관을 걸어왔다. 그런 흐름은 여전한데 이번 사태도 그런 상황의 심각성을 다시 일깨워준 셈이다.
1999년 중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 돌아올 때까지 필자도 다양한 일들을 했다. 중국 10대 일간지에 들어가는 신문이 한국을 비하하는 칼럼을 실었을 때, 필자는 당시 만들던 한글신문을 주축으로 활동해 그 신문에 사과 기사를 싣게 한적도 있다. 또 수많은 기사를 썼고, 방송 만드는 일에 관여했다. 그런데 필자가 왜 그 선에서 한번도 떨어지지 않았는가를 지금도 생각해 본다.
가장 큰 것은 필자가 그저 순수한 열정으로 중국을 알아가고 글을 쓰는 글쟁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적인 글도 많았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이 중국에 관해서 소개했고, 때로는 그런 문제를 짚어줬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
특히 티벳 문제나 천안문 사건 같은 경우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스스로 진보적인 성향이라고 하면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말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쉽게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거리를 두었전 것이다. 반면에 티벳 여행기 같은 기사를 쓸 때는 그들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감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말할 때 흔히 역린(逆鱗)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한비자(韓非子)의 글에 나오는 이 말은 용의 목 아래에 있는 한 자쯤 되는 비늘을 가리킨다. 등용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용은 곧 권력을 말한다. 사람들은 용을 잘 길들여 타고 권세를 얻을 수 있지만 이 비늘을 건드리면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말에서 유래됐다.
실제로 중국사에서도 수많은 이들에 간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현명한 자라면 굳이 이런 선을 넘지 않고, 현명하게 용을 부릴 수도 있다. 사실 중국은 이미 거대한 용이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역린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조선생은 그런대로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중국통 논객인 것 같아 보입니다. 문제에 지적도 의미잇고 날카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왜 티벳문제를 거론하는 그 자체를 '역린'이라고 생각해서 몸을 사리는지는 좀 그렇습니다. 달라이라마 방한문제에 대해 한마디 안하셨는지, 못하셨는지 모르겟습니다만,... 그냥 평화지도자를 우리나라에 초청하는것도 중국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눈치를 봐야합니까? 우리는 왜 아직도 우리민족를 중국에다 꼽사리 붙혀 가지고 우리 스스로 '종' 노릇을 자초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역린'이란 말자체는 좀 거북한 말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첫댓글 조창완 선생은 개인적으로 아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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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逆鱗)이라~~
조선생은 그런대로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중국통 논객인 것 같아 보입니다. 문제에 지적도 의미잇고 날카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왜 티벳문제를 거론하는 그 자체를 '역린'이라고 생각해서 몸을 사리는지는 좀 그렇습니다. 달라이라마 방한문제에 대해 한마디 안하셨는지, 못하셨는지 모르겟습니다만,... 그냥 평화지도자를 우리나라에 초청하는것도 중국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눈치를 봐야합니까? 우리는 왜 아직도 우리민족를 중국에다 꼽사리 붙혀 가지고 우리 스스로 '종' 노릇을 자초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역린'이란 말자체는 좀 거북한 말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