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생각까지도 깨닫게 하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인간의 지혜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와 힘에 찬사를 보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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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지만,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말씀 속에 사는 사람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마련이다(제1독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 주신다. 마귀는 그를 내동댕이치며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하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는 못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예수님의 권능에 찬사를 보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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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간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이웃, 자연,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유다교의 종교 철학자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 삶의 근본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 만남의 관계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물질적인 관계나 거래와 이해타산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에 반하여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대의 기계 문명과 산업 사회는 인간을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가면서 이웃과 단절된 채 고독하게 지냅니다. 이 고독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만남 가운데 최고의 만남은 주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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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마귀의 영이 어떤 사람 안에서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어떻게 회당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시고, 그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주십니다. 마귀는 누구입니까? 마귀는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를 단절시키는 못된 세력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갈라질 때, 거기에는 분명히 못되고 더러운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증오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 가운데 마귀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마귀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습니다. 혹 나에게 공동체를 이간질시키는 못된 습성이 있다면, 그 ‘나’가 바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깨어서 주님의 이끄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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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에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행동에서 ‘천상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판을 깨는’ 소리를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보십니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신 말씀에 그는 순간적으로 나동그라집니다. 마귀는 그를 내동댕이치며 ‘그에게서 나간 것’입니다. 군중은 놀라 바라봅니다. 눈앞의 기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당시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명한 힘이 있습니다. ‘악한 영’을 제압하는 능력입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가 듣는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못 깨닫지만 그때마다 ‘말씀의 힘’은 우리 내면에도 확실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숨은 가르침입니다. 얼마나 경건하게 말씀을 들어야 할는지요? 악한 영은 ‘악한 생각’으로 몰고 갑니다. ‘선한 생각’으로 돌아서고 싶어도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악한 영을 몰아내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그토록 많이 들었지만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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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영을 대표하는 ‘사탄’은 마귀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끔 사람들에게 들어가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탄을 몰아내시며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사탄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사탄을 제압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러한 능력과 힘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그러한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힘과 권능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탄의 손짓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사탄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은총을 청합시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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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악령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과 악령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천이 악령과 그리스도인을 구별해 줍니다. 우리는 입으로 고백한 것을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저의 양쪽 팔뚝을 보면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무슨 줄일까요? 누가 심심풀이로 낙서한 것일까요? 팔뚝 아래로는 햇볕에 의해 검게 그을린 것이고, 반대로 팔뚝 위로는 입고 있던 티셔츠 때문에 해를 보지 못해 하얀 것입니다. 따라서 멀리서 보면 특이하게 줄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이 구분은 운동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자전거를 타다 보니 자전거 옷을 입은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새까맣게 탄 것이지요. 이러한 저를 보고 사람들은 이 더운 날에 무슨 자전거를 타냐고 묻습니다.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날씨가 아니냐고 반문하곤 하지요. 그러나 집에 가만히 있다고 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을까요? 아마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다면 절대로 시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자전거를 탈 때에는 오히려 더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맞바람으로 인해 시원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지요.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일기예보에나 관심 갖는 사람들이 더위와 추위에 약합니다.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도 추위도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신문과 방송에서 올 여름이 몇 십 년 만에 가장 무더운 날이라고 떠들어대는 그 말 때문에 더 힘들어 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더위 속에서도 온 힘을 기울여 일하는 사람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더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며,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렇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마귀의 역할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지 못하게 방해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사실 마귀는 온갖 거짓말과 악으로 우리를 유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귀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틀린 말이 있나요? 분명 정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정답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과 인간의 간격을 더욱 더 멀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득 내 자신도 이 마귀의 유혹에 쉽게 그리고 자주 빠졌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정의를 내세워 일치를 깨뜨렸으며, 공평함을 내세워 사랑을 짓눌렀던 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더욱 더 밀착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은 좋은 친구다.(이언)
참된 권위
-김민수 신부-
최근 우리 사회에 전화사기가 극성입니다. 일명 ‘보이스 피싱’이라고 하는데, 공공기관을 사칭해서 개인 정보를 요구하거나 현금지급기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 깜빡 속아 넘어가 돈을 내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개인 신상 정보를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정보가 힘이고 권력인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더러운 마귀의 영이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귀는 먼저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을 향해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드러냅니다. 앎의 권력을 휘두를 때 보통 지배당하거나 통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마귀에게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마귀는 물러나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하느님 말씀의 실천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산도 옮길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고, 수백 배의 풍성한 인생 수확을 거둘 수 있으며, 진정한 평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더러운 영이 우리 마음에 심어 놓은 ‘육의 욕망과 행실’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
세상은 선하지만 세속은 악하다.
-김찬선신부-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지난 주 피정에서 피정 강사는 경계를 깨뜨리는 것에 대해 많은 시간, 아니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과 속의 구분을 깨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모든 경계를 깨야 하지만 특히 성과 속의 경계를 깨야 합니다.
교회는 성스럽고 교회 밖은 그렇지 않다는 그런 성과 속의 경계, 결혼을 안 한 성직자, 수도자는 성스럽고 결혼을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그런 성과 속의 경계,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성스럽고 잘 노는 사람은 속되다 하는 그런 성과 속의 경계, 욕쟁이는 속되고 고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성스럽다는 그런 성과 속의 경계, 자선 사업은 성스럽고 장사는 속되다 하는 그런 성과 속의 경계, 이런 도식적인 성과 속의 경계는 깨야 합니다.
그리고 너는 속되지만 나는 성스럽다는 자기 우월감 만족을 위한 성과 속의 구별, 나는 성스러운데 너는 왜 그렇지 않으냐 하면서 남을 공격하기 위한 성과 속의 구별, 이런 인간관계 중심적인 성과 속의 구별은 더 더욱 깨야 합니다.
이렇게 도식적인 성속의 구별과 구별을 넘어 차별을 위한 성속의 경계는 깨야 하지만 굳이 있다면 하느님 중심적인 관계에서 성속의 구별은 있을 뿐입니다.
악령은 오늘 주님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고 합니다.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존재는 거룩하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존재는 거룩하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전에 악령은 주님께서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자기들을 멸망시키려 왔느냐고 하며 주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상관없는 것들이 속되고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거부하는 것들이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상관없는 것들이 어디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에 모든 것이 다 하느님과 상관이 있고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그런 악한 의지에서 비롯된 속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世上은 선하지만 世俗은 악하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거룩하지만 세속적인 모든 존재와 일들이 속될 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늘 하느님과 함께 있는 존재지만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俗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거룩한 창녀라고 하듯 우리도 거룩한 창녀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탄이 바로 내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인천교구 서품 동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면서 술도 좀 마셨지요. 그런데 좋은 모임을 마친 뒤에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사제관 들어오는 열쇠가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창문을 깨고서 사제관에 들어갈 수 없고, 집 놔두고 여관에서 잘 수 없지요. 결국 늦은 시간이지만 본당 수녀원에 전화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휴대전화를 방에 놔두고 외출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전화를 찾기 시작했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공중전화박스인데, 막상 필요할 때에는 찾기가 힘드네요.
잠시 뒤 힘들게 공중전화 박스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두 대의 공중전화가 모두 고장이네요. 한참을 걸어서야 간신히 또 다른 공중전화를 찾았고, 이 전화로 수녀원에 전화를 걸어서 사제관 안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지요.
휴대전화를 주로 쓰니 공중전화가 중요한 지를 잘 몰랐지요. 그러나 이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모르지만, 조금만 더 떨어지면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하지요. 따라서 내가 지금 소홀히 하는 것들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 2,000년 전의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도 자기와 함께 있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반대자라고 할 수 있는 마귀 들린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도 알아보는 예수님인데 사람들은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보다 쓸데없는 것들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요.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앉으려는 교만과 욕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그 분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우신 분임을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쁘게 살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주님을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예수님을 마귀보다도 더 잘 알릴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한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비 파트낭).
내 삶의 마지막 순간처럼
- 김석인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의 삶과 일치되는 것이기에 그 누구의 가르침보다 권위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모든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의 처지를 보시고, 함께 느끼며 함께 아파하면서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낫게 해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힘이 있고 모든 권위를 지닌다. 한마디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러운 영들도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며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는 날이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삶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다. 순교 당시 그분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답지 못한 처우를 받고 배교하라는 수많은 유혹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오로지 하느님 안에 두었기에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어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위해 바치셨다. 그들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며 언행 일치를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함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삶과 순교자들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다짐을 하는가? 우리의 매일의 삶이 기쁘기도 하고 활력이 넘치기도 하지만 또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굴곡 없는 삶으로 밋밋함을 느끼게도 한다. 때로는 영웅적인 삶을 지향하기도 하고 가끔은 난 어쩔 수 없어 하면서 포기 아닌 포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새 달을 시작하는 날이므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을 다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 하루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 곁에 한 이웃이 있다면 그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이웃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랑해 드리고, 순교자의 믿음으로 그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이것이 오늘 나의 마지막 순간이다.’라고 말이다.
사랑을 귀찮다 하지 않기를!
-김찬선신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말하기를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멸망시키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고작 사람들을 괴롭히고 미주알고주알 간섭이나 하고 성가시게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멸망시키려 오셨다니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오래 고민하다가 찾아갔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찾아갔습니다. 용기 내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냐고, 무슨 상관이 너와 나 사이에 있냐고 누가 단 칼에 잘라 버린다면. 아, 정말! 저는 기가 막히고 기절할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제가 이메일을 막 배워 하기 시작할 때 얘기를 떠올리셨습니다. 저에게 이메일을 해도 되냐고 그분이 물으셨을 때 업무적인 것 외에는 답장을 기대하지 말라고 답했다 합니다. 아마 제가 충분히 그랬을 것입니다. 제 딴에는 답장을 기대했다가 실망하실까봐 그렇게 얘기한 것이지만 한의학을 하시는 그분이 그때 느낀 것, 그것은 바로 기절(氣絶), 즉 기가 단절되는 느낌이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의 관계가 아닌 일의 관계는 악마적입니다. 별 볼 일 없어지면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마니 말입니다. 제가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람 사이가 우리처럼 정이 없고 매우 사무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친절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일로써, 즉 Busyness 차원에서 대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살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관계, 즉 사랑을 부정하고 일로서만 대하며 사랑으로 다가감을 마치 자신을 파괴하러 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 악령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 때문에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면 주님께 우리는 사실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할 일이 없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하고 너무도 고약하여 우리를 파괴하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의 이유로만 오시고 사랑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악령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악에 천착하지만 주님은 악령을 보지 않고 악령에 사로잡힌 우리를 정 조준하여 보십니다. 악마처럼 상관없다고 우리는 매정하게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해도 사랑이 얼마나 많으신지 그분은 물러서지 않으시고 상관있다고 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종 우리게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늘 죄송합니다.
오늘, 사랑을 귀찮다 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기도합니다.
말씀의 권위와 힘
-전삼용신부-
제가 한 선교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그 소재를 얻기 위해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평신도로서 목사님 4분을 세례 받게 하신 것을 비롯하여 일 년에 적어도 10분 이상은 선교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다소 김빠지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전 성당 나오라고 안 그럽니다. 그것이 강요해서 되는 일인가요? 그냥 식사 전후에 성호경을 정성스럽게 긋고 기도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서 세례를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느냐고 저를 찾아옵니다. 그러면 교리에 인도해 주고 도와 줄 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출신 본당 선교 왕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옷가게를 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뿐인데도 어떤 때는 일 년에 40분이나 선교를 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뿐인데, 천주교에 관심이 있어도 기회가 없던 사람들에게 좋은 연결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단순한 ‘성호경’과 ‘찬미예수님!’이라고 인사하는 것이 그렇게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그 단순함 안에, 누구와 함께 있건 자랑스럽게 “성호”를 그을 수 있는 당당함, 또 기분 나빠서 옷을 사지 않고 나가건 말건, “찬미 예수님!”이라고 인사할 수 있는 믿음이 보통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의 힘은 다 같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마귀보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소리친다고 마귀가 도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말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엔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도 저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하며 놀라워합니다.
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는 분들도 특별한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단순한 말이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와 힘”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위와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와 힘을 물려받는 데는 ‘믿음’만한 것이 없습니다.
같은 성호를 그어도 믿음으로 긋는 성호와 그냥 건성으로 하는 성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분은 성호 안에 가톨릭의 모든 신비가 다 들어있는 신앙고백이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성호를 긋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배교’행위라고 말합니다. 그 분에겐 성호 긋는 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의 권위와 힘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신앙에 따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만칼라를 하고 다닐 때와 하지 않고 다닐 때의 저의 마음가짐은 사뭇 다릅니다. 로만칼라를 하고 다니면 길도 함부로 못 건너고 말도 조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한 사제만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 살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믿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마귀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지만 예수님은 그 말문을 막아버리십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예수님을 위해 하는 증언은 예수님이 마귀 친구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올바로 사는 사람만이 올바른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말보다도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삶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고 율법 교사들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겐 박사 딱지만 있지 삶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의 권위와 힘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로써 하느님과 일치되고 그 분으로부터 영적인 권위와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변화되고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마귀가 도망치는 것입니다.
정직한 부모님만이 자녀들에게 정직하라고 할 때 그 말에 힘이 있게 됩니다. 부모님이 매일 싸우면서 형제들에게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은 하나마나입니다.
권위를 위해 거만하고 무섭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내가 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신앙과 그것을 실천하는 삶,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말에 권위와 힘을 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더군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들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는 그곳에 발을 담가서 한참을 놀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를 보더니만 세숫대야에 담긴 자신의 발을 넣고 놀았던 물을 건네주면서 “아빠! 씻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발 담근 물이 더럽다는 것을 아이에게 말하기 시작했지요.
“얘야, 이 발에는 얼마나 많은 병균이 살고 있는지 몰라. 따라서 이 물을 가지고서 얼굴이나 몸을 씻어서는 안 돼.”
그런데 갑자기 이 어린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말합니다.
“아빠, 그런데 아빠는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욕탕에 들어가잖아. 그리고 그곳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시원하다’를 외치면서 세수도 하고 때로는 온 몸 전체를 담그기도 하잖아.”
아이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정말로 이상했을 것입니다. 잠시 자신이 발을 담그고 놀았던 그 물은 더럽다고 말하면서,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 발을 담근 물은 그 누구도 더럽다고 말하지 않으니까요.
아마 “이 물은 제가 발 담근 물이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주면 화를 엄청나게 낼걸요? 반대로 “이 물은 저기에 있는 욕조에서 받은 물이에요.”라고 말하면, “감사합니다.”를 외칠 것입니다. 하지만 잠시 발을 담근 물보다는 욕조 속의 물이 더 오랫동안 발을 담근 더러운 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들 속에서 우리들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고정관념일 뿐 실제로는 옳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해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렇게 행동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영광과 사랑에 감사하는 찬미의 기도를 바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마귀 들린 사람만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혹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단순히 나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해결해야 하시는 분으로만, 또한 주님께서는 나에게 편하고 좋은 것만을 내려주시는 산타클로스 같은 분으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바로 이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우리들은 더욱 더 주님과 멀어집니다.
빠다킹신부
주인
-김인한 신부-
사제로 살아가는 시간들이 더해갈수록 부딪히는 시간들보다는 타협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삶의 치열함보다는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들이 더해져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내 편한 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아닌 내가 내 모든 삶의 주인인 양 교만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있는 대로 제가 살게 내버려달라’는 오늘 악령 들린 사람의 말은 또 다른 저의 목소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 숨쉬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 양 떠들어댑니다.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은 내게 치워두어야 할 방해물로만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입 다물라!” 하시며 더 이상 거짓된 말을 중단하고, 거짓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끊임없이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우리의 삶을 봉헌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립니다.
예수와 악령은 상관이 크다
-박기호 신부-
복음에 치유와 함께 악령을 추방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사회적 불균형과 혼란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압도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사회적 무질서는 육신의 질병과 정신질환을 동시에 일으킨다. 창세기는 본래의 창조성을 이탈시키는 작용을 악마의 짓으로 파악했고(창세 3,1-5)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와 악령과는 공존불가로 여겨 악령을 추방하고 정화하셨다. 가정 경제 향상은 소비가 살아나는 경기부양에 있다며 화려한 상품 소비를 부추겼다. 사람마저 하나의 상품처럼 여겨 능력만을 사고팔고 퇴출하고 폐기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도 인간도 없다. 민주주의, 경제발전, 문화생활 향상, 기술시대, 여성의 지위향상, 올림픽, 월드컵`…. 우리 사회는 하고 싶은 많은 것을 이루어 보았으되 남은 것은 이기주의와 넘치는 쓰레기와 생태계의 파괴와 악성종양(암)과 잘못 달려와 되돌아가야 할 길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뿐이다. 거짓 이정표로 우리 사회를 인도해 온 것이 무엇인가? ‘문화생활의 행복’이란 믿음이다.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은 화려한 영상과 정보력으로 오는 마케팅의 실체를 우리 시대의 악령으로 파악한다. 소비를 부추기고 의식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으로 예수 님의 제자한테는 합당치 못하다. 예수님은 불호령을 내려 마케팅의 악령을 추방하신다. 삶의 필수처럼 여겨진 쇼핑을 두고 그것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자는 악령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신앙과 소비생활은 큰 상관이 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양승국신부-
<봄밤의 수수꽃다리 향기보다 그윽한 사람>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납치극을 바라보며, 그리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섬뜩한 사건사고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인간이로구나’하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무참하게 살상하는지, 마치 놀이하듯 사람 생명을 침해하는지, 어찌 그리도 쉽게 인권을 유린하는지, 무섭기만 합니다. 사람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인간의 본능에 자리하고 있는 선과 악은 천사와 악마처럼 서로 충돌하면서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의 존재를 위태롭게 합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추악한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흉악범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조직폭력배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본래 인간 그 자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 작가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우며, 봄에 올라오는 여린 잎의 연둣빛보다도 곱고, 봄밤의 수수꽃다리 향기보다 그윽하다.”
봄날, 우리의 후각을 황홀하게 만드는 수수꽃다리의 아름다운 향기는 단 며칠간의 따뜻한 봄 햇살을 받고 급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혹독한 한파를 이겨내며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그런 향기이기에 더욱 그렇겠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두드러진 일 하나는 죄와 폭력으로 훼손되고 오염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복원시켜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악령과 병,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시달려 갈 데 까지 간 사람들에게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신 일이었습니다.
최선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십니다.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기를 쓰고서라도 최선의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사랑의 태양이신 하느님께서 그대를 향해 활짝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때로 스토커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외면할 때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정면으로 대들면서 막살아도 우리 곁을 맴도십니다. 고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지라도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악령이 들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다녀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하느님만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낼 때, 언젠가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느님,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마귀의 영이 한 가련한 사람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련한 인간 안에 들어가, 그의 영혼은 물론, 육체와, 정신, 품위를 완전히 훼손시킨 악령, 그 악령의 활동으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도달한 한 가련한 인간의 고통 앞에 사람들은 다들 서둘러 피해갔습니다. 다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들 악령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본래의 고귀한 성품을 되찾아주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십니다.
고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 그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오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겹다면, 오늘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면, 오늘 비참으로 흐려진 눈을 들 수 없다면,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환한 얼굴로 그대에게 다가올 순간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혼란과 어둠을 몰아내는 그 분의 권위
-이기양 신부-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안정되지 않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시끄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가는가 하면 기러기 같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까지 외국 유학을 보내고자 애를 쓰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면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틈만 나면 총장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초중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야단 한번에 경찰을 출동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한 형편입니다. 또 회사를 운영하는 많은 기업인들은 이런저런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사업하기가 벅차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떠난다고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나라의 지도자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안은 외화 반출이나 유출등 여러 부작용을 계속해서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육하는 사람들, 경제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 또 정치하는 사람들 등 모든 지도자들이 국민을 안심시키고 각자의 분야에서 권위 있게 일을 해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권위가 서지 않으면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고, 회사가 발전할 수 없으며 나라는 강대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혼란의 시대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권위 부재의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각계각층이 흔들리고 불안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각 분야에 지도자로 있는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실력과 권위를 가지고 끌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독재 정권 시대를 살아오면서 잘못된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모든 권위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고, 실제로 그 시대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오류를 청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는 혼란 또한 이 사회를 흔드는 요인이 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권위 부재의 상황은 시대적인 환경의 소산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대를 이어 농경 문화와 대가족 제도 아래 살아왔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경험이 부모 세대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다시 그 자식들에게 대물림됨으로써 부모 세대의 가르침과 경험은 새롭게 시작하는 자손들에게는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농경 문화와 대가족 제도가 산업화로 밀려나고 특히 요즘같이 첨단 과학 시대로 접어들면서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경제 현안 속에서 농경 문화는 첨단 산업으로 바뀌고 대가족 제도 또한 핵가족으로 변화되었으며 그나마 이제는 핵가족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져 가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모 시대 경험이 자식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 알고 지내는 한 형제님에게는 수재인 자녀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공부를 잘 하였던지 고등학교, 대학교를 월반하고 미국의 유명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자녀가 아버지께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컴퓨터 인공 지능을 전공하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생각을 어떠신지요?”
그때 그 형제는 할 말이 없더라는 겁니다. 과거 경험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첨단 과학이 낯설기만 했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자식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상황이지요. 형제님은 솔직히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전공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그러나 부모로서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은 힘껏 해주겠다.”
이 형제님의 자녀는 외국에서도 최연소자로 학위를 받고 지금은 대기업의 유능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 세대의 경험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생각지도 못한 변화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지요. 혼란하면 할수록 교육도 어렵고 경제는 불안하며 정치 또한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 복음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에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보인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마다 그 가르치심에 경탄하여 마지않았다.”(루가4,32)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놀라 수군거렸습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루가4,36)
예수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계셨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볼 수 있지요. 그 당시 사회 지도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지닌 커다란 힘은 지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성서 주석가였으며, 법률 관리와 교육 전문가 대우를 받고 있었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 또한 엄격한 율법 준수와 기도와 단식으로 백성들을 지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고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아무런 세력도 없는 예수라는 사람의 권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며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궁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그토록 권위를 가지고 유대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자 애를 썼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권위를 잃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 께 바쳤다' 고 말만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는 바로 너희를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마태15,5-9)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가르치지 않고 사람의 것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쳤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3장에 보면 그것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하느님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행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고 말만 할 뿐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가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권위는 결코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말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권위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육하는 데에 참된 진리가 있습니다. 경제에도,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에도 진리가 있지요. 이 진리를 바탕에 두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불안정한 이유는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기적인 출세지향에만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편애하고 촌지에 눈을 돌리는 교사들의 모습이 교육의 현장을 권위 부재의 상황으로 만들어간 것이지요. 정치가 어지러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 바른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온갖 부당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기업 또한 왜 그렇게 노동자들의 불신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몇 사람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독점욕과 불법적인 부의 세습 등의 문제가 노사간의 갈등을 불러온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하고 헌신하면서도 원하는 열매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권위 있는 모습으로 참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후에 여러분들이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의 효도를 받을 수 있을 지의 여부는 다음 질문의 답변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자식을 위해서 100 만큼을 헌신한다고 할 때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는 얼만큼 헌신하고 있습니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은 당연히 부모보다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헌신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만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부모에 대한 효를 성심 성의껏 실천해 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을 성심껏 모시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하면서도 낳아주신 부모님들에게는 소홀합니다. 그러면서 자녀에게는 덕과 효를 가르치지요. 이런 모순된 모습이 부모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지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요즘 부모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바른 권위는 진리에 바탕을 두며, 참 진리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혼란의 시대를 수습하고 더욱 성숙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리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모들은 진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살아 있는 참교육을 이루고, 선생님 역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진리에 따른 바른 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 또한 권력과 재물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부단히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혼란의 수습은 간단합니다. 새로운 권위와 질서, 또 안정은 참 진리이신 하느님께 바탕을 둘 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경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는 마귀들도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이 혼란스러운 여러 모습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 앞에서 수습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담고 실천하는 곳에 참 권위가 살아 움직입니다. 혼란 중에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참 진리를 심어나가는 여러분이 계시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고 아름답습니다.
권위
- 최종수 신부-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사라진다고 걱정입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주어진 맹목적이고 봉건적인 권위는 물론이고, 올바른 권위마저 사라져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사제관에서 신학교 동아리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후배 신학생이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익산 부근의 초등학교 아이들이었어요. 비행기를 처음 탔다며 창가에 앉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바꾸어주었더니 얼마나 시끄럽게 떠드는지요. 두 녀석의 사이에 앉아 있던 제가 참다참다 못해 물었어요” “어디에서 왔지?” “○○초등학교요.” “무슨 일로 왔다 가는 거야?” “아람단에서 왔어요.” “아람단에서 왔으면 공중질서를 잘 지켜야지 왜 이렇게 떠드는 거지?”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려고요. 으하하!” (갑자기 터져 나온 어이 없는 웃음소리) … “더 이상 할말이 없었어요. 계속해서 떠들면 너희 부모님과 선생님이 욕을 얻어먹게 된다고 했더니 뭐라고 대꾸한 줄 아세요?” “부모님은 우리의 거울이지요.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일부러 선생님이 들으시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부모님이 가정에서 교육을 잘 시켰다면, 자녀들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범을 보였다면, 선생님이 학교에서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면 부모와 스승의 권위는 바로 설 것입니다.
- 김정수 신부-
복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짜릿했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감동했다, 이런 표현은 없고 오늘 말씀대로 “그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마다 그 가르침에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루가 4,32)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마음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율법학자들, 요즘 말로 하자면 대학원 교수 이상쯤 되는 이런 분들, 또는 원로, 사회 경력과 학력이 높은 위치에 계신 연세가 많은 어른들보다도 젊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훨씬 권위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권위가 어떤 권위냐 하면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진리를 가르쳐주는 힘의 권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율법학자들보다도 더 큰 권위를 가졌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썩 나가거라.”(루가 4, 35)하고 꾸짖으시자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악령의 힘도 무력화시킬 수 있고, 멸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힘이었고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하느님의 권위였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 설득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악령까지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셨지만 근본적으로 하신 일은 악의 원천을, 악의 뿌리를 흔들어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느님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원칙이 세상을 이끌어 가고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고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수군거렸다.”(루가 4, 3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혁명가나 정치가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병자를 고쳐주셨더라도 병을 치료하러 오신 것만도 아닙니다. 결국은 인간에게 믿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당신의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하느님 말씀에 의한 실천이었습니다. 세상과 인간관계도 하느님을 앞세우고 하느님 정신으로 바꾸어 놓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속에 있는 악의 요소를 처 부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였고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한 가지 반성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예수님 정신으로 얼마만큼 우리가 무장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런 느낌이 없으면 우리의 빈 마음은 세상의 정신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여러 가지가 하느님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귀찮아지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바뀐다는 생각을 이제 교정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바뀌어지고 또 하느님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악의 원칙을 멀리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오늘을 살면서 예수님 말씀 따라 악을 멀리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시기를 빕니다. 하시는 일을 예수님과 상의해서 하시면서 그분의 말씀도 듣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를 쳐 이기시면서 또 하나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거기서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한적한 데 가셔서 기도를 하시고 사람들이 몰려 올 때 그 사람들에게 매어 있지 않고 즉시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몰려와도 우선 기도를 하는 것을 앞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는 것 자체가 우선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우선한다는 것을 아시고 기도를 하러 가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계시지 않고 다른 곳에 가셔서 역시 그들의 필요한 것을 다 해결해 주셨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한 곳에 모여 있는 병자, 몰려오는 백성, 마귀가 붙은 사람을 떼어내시는 등의 일은 하시고 그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필요한 곳을 찾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가 마음을 두는 그 곳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더불어 폐쇄적인 삶을 산다는걸 아시고 떠나셨습니다. 인간이 어느 한 곳에 안주하고 그곳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곳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타락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도록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한곳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곳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알아듣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승환 신부-
오늘 예수님은 갈릴레아의 마을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셔서 가르치시면서 우리 평화공동체를 초대합니다. 우리 다 함께 허리에 띠를 두르고 주님이 베푸시는 말씀의 식탁에로 나아갑시다. 가파르나움에서 주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이들은 그 교리에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처럼 궤변을 늘어놓거나 결의론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권위를 가지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명확하며 모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이의 지능을 초월합니다. 부드러우며 독선적이지 않기에 청중들은 그 말씀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그 자리에 마귀 들린 사람이 무대로 나오게 됨을 주목하십시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 날 회당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영으로 알아본 사람은 악령 들린 사람하나였던 것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이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어 대항을 시도합니다.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 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4장 3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놀라운 구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사람의 입을 다물도록 명령하시고, 마귀에게 썩 나가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또 한번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아보고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제 암흑의 나라가 빛의 나라인 예수님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4장 36절)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선과 악의 싸움을 보았고,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말에도 "등불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고 했듯이 빛이신 그리스도 앞에 악령은 결코 더 이상 그 세력을 확장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사탄은 예수님과의 대적에서 번번이 지기는 하지만 완전히 떠나가지는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싸움은 오늘 가파르나움 회당을 거쳐 공생활 내내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싸움의 궁극적 종말은 묵시록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마지막에 이르면 사탄의 권한은 완전히 그 힘을 잃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능도 완전히 주님께 굴복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귀처럼,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는 악의 세력이 끝없는 유혹의 모습으로 그리고 쾌락의 모습으로 간단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외칠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리더십
-최혜영 수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도 하는데, 제 생각으론 후자의 의견에 더 신뢰가 갑니다. 남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일도 역량이 있는 사람이 맡게 되면 금세 중요한 일이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품위가 느껴지지 않고 믿음직스럽지 못해 걱정만 끼치니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 분수대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쓸데없이 어떤 자리를 탐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거나 행동하시는 데 권위가 있으셨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왔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비전이 있으셨고, 당신의 정체성이나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왔기에 생각과 행동에 갈라짐이 없이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뚫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현대 리더십에서 리더는 과거 리더가 가졌던 통제와 관리의 기능보다는 가치와 관계성을 중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고 개인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리더의 권위는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잠재력을 발휘하여 창의적으로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데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으로 요약되는 섬김의 리더십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한만옥 신부-
◆양심성찰을 할 때 혹은 피정 때 자신의 죄를 살피거나 묵상할 때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좀더 성실하게 잘살 것을…’ 하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왜 이 모양일까? 왜 주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어렸을 적 주일학교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러분 한쪽에는 천사가 있고 한쪽에는 마귀가 있어요. 그런데 둘이 늘 싸운답니다. 누가 이길까요?” 우리는 모두 “천사요” 하고 외쳤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천사의 말을 들으면 천사가 이기고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가 이기는 거예요” 했다. 사제수품 때 독신과 순명을 약속하고 청빈의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했고, 수없이 그 약속과 다짐을 되뇌이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욕심이 가득함을 발견한다. 진정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어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주일학교 선생님 말씀대로 매순간 천사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더러운 마귀의 영이 끊임없이 악으로 이끈다는 것을 체험한다. 주님 은총이 아니면 한순간도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기 어렵다. 더러운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금 주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예수께서는 똑같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죄로 이끄는 그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하실 것이다.
예수의 간섭
-오상선신부-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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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아는 자매가 하나 있다.
최근 그 자매는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받고 있다.
이유인즉
그 자매와 그 자매의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애써 아끼고 저축한 돈을
한꺼번에 사기당하여 날려버리고
덧붙여
빚까지 떠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하느님께서는 하셔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내치실수가...
어떻게들 살아왔는데...
남들 잘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옷 살 때 사지 않고
남들 집 살 때 전세집에서 살고
아끼고 또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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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가끔 이렇게
너무 하신다고 하실 정도로
선한 사람을 내치실 때가 있다.
오늘 악령들린 사람 안에 들어있던
마귀가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반문하듯이
때로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 왜 이러십니까?
왜 당신 자녀가 잘 되는 꼴을 못봐주십니까?> 하고 싶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내침이 필요하다.
그 악귀를 그 사람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초죽음이 될 정도의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예수님께서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악령이 완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마귀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기 위해서
때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미워하실 리가 없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며 치유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내치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힘이 워낙 강력하여
잘 안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보면 안다.
그분은 우리를 죽지 않을 정도로 내치신다.
우리는 악령이 떠나간 후에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게 되고
영적으로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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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아는 자매에게 말해주어야 겠다.
하느님께서는 자매를 정말로 사랑하신다고...
그래서 아프지만 내치셨다고...
자매를 내치신게 아니라
자매 안에 있는 자매가 의식하지 못하는 악령을 내치신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주님
당신의 뜻을 알아채리기가 이렇게도 힘든단 말입니까???
동물나라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거북이 한마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백조 두 마리가 찾아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경치 좋은 호수에 사는 거북이 당신이 너무나 부러워요.”
그러나 거북이는 오히려 하늘을 멋지게 나는 백조가 부끄럽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백조의 집에 놀러 가고 싶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에 백조는 한 가지 약속만 지켜준다면 자신의 집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는 “어떤 약속인데요? 저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지요. 백조는 말합니다.
“저희 집에 가는 동안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키실 수 있습니까?”
이 정도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북이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이제 백조 두 마리가 나뭇가지를 가져와 거북이에게 가운데를 물게 하고, 백조들은 양쪽 끝을 문 채 하늘 높이 날았습니다.
거북이는 신이 났습니다. 땅에서만 살다가 이렇게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지요. 그런데 이렇게 나무 끝을 물고 공중을 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땅위의 온갖 짐승들이 백조에게 거북이가 잡혀 간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거북이는 이 소리를 듣고는 백조와의 약속을 잊고 높이 떠있는 상태에서 “그게 아니야.”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순간 물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거북이는 땅에 떨어져 죽게 되었답니다.
말이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반대로 죽이기도 합니다. 힘과 용기를 심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과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선을 부르는 말을 쓰기도 하고, 반대로 악을 부르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써야 할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와 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더러운 마귀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권위와 힘이 있었기에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는 은총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따르기로 다짐한 우리 역시 이러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과 정반대의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나를 드러내는 욕심 가득한 말과 남을 판단하는 말로써 권위와 힘이 전혀 보이지 않는 쓸데없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되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예수님처럼 권위와 힘이 가득한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망과 고통을 주는 말이 아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을, 악을 부르는 말이 아닌 선을 부르는 말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모습에 한걸음 다가서는 우리들이 될 것입니다.
말을 잘 합시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맑음, 따뜻함, 편안함, 부드러움>
며칠 전 어떤 미사에서 신학교를 같이 다닌 한 후배 신부를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찬찬히 보니 분명했습니다.
후배 신부를 만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세월이 벌써 많이 흐른 탓이 있겠지만, 옛날의 장난꾸러기 신학생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만만치 않은 본당 사목생활의 흔적이 확연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슬슬 배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 숫자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기뻤습니다. 어찌 그리도 얼굴이 편안해 보이던지 놀랐습니다. 눈길은 따뜻했습니다. 겸손과 온유가 몸 전체에 배어있었습니다. 온 몸에 성덕의 향기가 풀풀 풍겼습니다. 충실한 영성생활의 결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배 신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크나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악령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악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갖춰야할 조건이 있습니다. 영을 보기 위해서, 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적인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입니다. 삶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바처럼 어린이들입니다. 또는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어린이들이 지닌 맑음, 영혼의 순수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대조적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눈빛은 더욱 맑아집니다. 인품이 더욱 고결해져만 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는 점점 따뜻해져만 갑니다. 주변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줍니다. 지극히 겸손해서 적당한 때 물러날 줄 압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이 시대 최고의 권위는 순수함입니다. 맑음입니다. 정직함입니다. 겸손함입니다. 따뜻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는 세상 사람들이 권위와는 철저하게도 그 맥을 달리 합니다.
그분의 권위는 경직, 뻣뻣함, 강요, 힘, 법에 의한 권위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친절과 온유, 겸손과 인내, 연민과 측은지심,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배경으로 한 권위입니다.
이런 사랑의 권위였기에 악령조차도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참된 권위-서북원 신부-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권위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지도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권위를 가지고 싶어 하고 권위적인 삶을 살고자 하며, 권위를 내세웁니다. 사제도 예외는 아니지요. 사실 신학교 은사님들은 신부가 되면 제발 목을 너무 뻣뻣하게 세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즉 겸손하라는 말씀이지요. 권위적인 행동들이 가지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제든 누구든 지도자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참된 권위를 지녀야 합니다. 참된 권위는 예수님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서 나옵니다. 삶과 유리된 말을 한다면 그 말은 그 누구에게도 가슴 깊이 강하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진실된 삶을 통해 나오는 권위야말로 진정한 권위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회사에서 상사로서, 교회에서 봉사자로서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참된 권위가 필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날숨에 실린 말씀
- 이종진 신부-
수도공동체의 삶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존경할 만한 동료나 선배들이 늘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닮은 분들, 곧 살아 숨 쉬고 있는 하느님의 표징을 보는 것은 자신을 작게 만들기는커녕 나의 내면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사실 존경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영혼은 그 내면이 얼마나 빈곤하겠는가? ‘내적인 권위’를 지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분들을 관찰하노라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생명력’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의 말은 한마디로 듣는 이들의 ‘기’를 북돋아 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권위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귀의 영마저 몰아내는 그 힘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을 담은 것임을 입증해 준다. 창세기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의 호흡, 그분의 날숨에서 비롯된 것이다. 들숨을 통해서 이 생명을 선사받은 영혼은 이제 날숨을 통해서 그것을 전달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말들이 날숨과 함께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생명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렇게 듣는 이에게 용기와 격려, 내적 생명을 선사할 때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참된 권위를 발휘하는 말씀이 있다. 생명권을 지키려는 국민 편에 서서 침묵하지 않고 ‘발언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한 본보기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씀은 곧바로 단식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에 비해서 그저 체면과 직무를 유지하는 데만 골몰해 있거나 힘에 기대는 사람들의 말은 아무런 권위도 없다. 힘에 기대고 하는 말은 하나의 위협으로 사람들의 심리적 생명을 해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의 말을 돌아보게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일 테니까.
거저 받은 성령의 행복-김찬선신부-“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여기서“하느님의 깊은 비밀”“하느님의 생각”“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그리스도의 마음”을 열거하면서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하느님에게서 온 영으로만 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성령론을 얘기하자면 매우 어렵고 복잡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어린 아이에게 죽을 먹이듯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얘기합니다.쉬운 말씀이지만 더 풀이하자면모든 존재는 각기 영(spirit)을 지니고 있고그 영은 존재의 안팎을 넘나드는데그 속을 알 수 있는 것은 존재의 그 속까지 가본 영뿐입니다.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영이 있으신데 하느님의 성령만이 하느님 깊은 속까지 아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깊은 비밀과 하느님의 생각과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고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려면주님의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데아주 다행히도주님의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우리는 주님의 성령을 선물로 거저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권위
-강영구신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고 권위 있는 사람은 대통령(大統領)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대통령은 권위를 잃고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가 권력욕(權力慾)에 휘둘리지 않고 사심 없이 나라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권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권위는 힘입니다. 사람의 몸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재력(財力), 폭력(暴力), 무력(武力), 권력(權力) 따위입니다. 사람들은 돈의 힘이나 주먹의 힘, 권력의 힘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지식(知識)이나 학력(學力) 따위입니다. 선후(先後)를 조리 있게 설명하여 설득하면 사람의 머리와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머리와 마음을 다함께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힘으로 강제하거나 합리적으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와 몸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마귀들도 사랑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나자렛 예수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랑이자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 안에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과 해방의 권위가 있습니다.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참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一明)
† 루가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
-박상대 신부-
오늘복음으로 이어지는 루가복음 4,16-30에서 보았듯이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절대적인 인류구원 계획과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그 증거로 봉독하셨고, 이것으로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안다는 근거로 한 발짝 물러난다. 예수께서는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시지만,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기원전 850년경)에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언급하시면서(1열왕 17,7-16; 2열왕 5,1-14), 하느님의 손길이 이스라엘을 떠났음을 지적하셨다.
화가 치밀어 오른 고향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예수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죽이려 했으나, 글쎄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한 가운데를 지나 가야할 길을 계속 가신다.(30절)
마르코복음(1,21-28)에서와 마찬가지로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 즉 구마기적을 보도한다. 나자렛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오신 예수께서 가르침을 내리신 후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이 구마기적인가? 왜 마르코와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첫 번째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치유를 보도하는 것일까?
오늘날 마귀나 귀신에 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요즘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다가 엑소시스트 영화의 제목이나 소재로나 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등 사람 안에서 나오는 온갖 악(惡)에 관하여 얘기한다면, 아마 웃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마귀나 귀신에 관하여 얘기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요즘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다가 엑소시스트 영화의 제목이나 소재로나 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등 사람 안에서 나오는 온갖 악(惡)에 관하여 얘기한다면, 아마 웃는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마귀나 악의 기운을 실존(實存)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고, 사람과 결탁된 이런 기운을 몰아내는 일이 예수님의 일상적 소관(所關)만은 아니었다. 마귀나 악은 비인격적으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세력일수도 있고, 인격적으로 사람에게 속한 개성일수도 있다. 우리가 ‘나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런 나쁘고 악한 기운과 세력에 습관화된 사람을 말한다. 이 습관이 행동으로 성취되면 죄(罪)가 되는 것이다.
성서(聖書)는 마귀에 대한 어떤 정확한 정의도 내리지 않고 있다. 다만 마귀가 사람과 결탁하였을 때의 현상을 보여준다. 마귀 들린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보다 더 이상한 현상을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마귀 들린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셈이다. 모든 가치와 규칙과 기준이 고유한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간에서 훌륭하게 풀어 가는 ‘마음의 법칙과 육체의 법칙’의 관계에 참으로 공감한다. 바울로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善)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惡)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罪)입니다”(로마 7,15.19-20) 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오로가 죄(罪)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과는 별개(別個)인 하나의 대상(對象)이다. 그것도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이 아닌 대상인 셈이다. 그런데 이 죄라고 하는 대상이 사람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善)이 모자라면 악(惡)이요, 악(惡)이 행동하면 죄(罪)가 되고, 악(惡)이 될 수 있는 생각은 이미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 있다. 그런 생각을 태도로 보이거나 행동으로 옮기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마음에 들어 있는 악한 생각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루가 4,31-37)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하신 이후에 곧 이어서 루가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말한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위엄을 갖추신 가르침이란 말인가? 외적으로 화려하고 품위 있고 높은 지위에 앉아서 가르치는 권위를 말하는 것인가? 외적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란 희랍어로 "엑수시아"(Exusia)라고 하고 그 뜻은 "힘"이라는 뜻으로 오직 하느님께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하느님의 힘이 담겨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무슨 힘인가? 창조의 능력, 치유의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 등이 담겨져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오늘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총의 말씀이다. 그래서 탄복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다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고 그 말씀은 그 때나 지금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힘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어부들을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했던 그 권위 있는 말씀은 오늘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요, 오늘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며 수단인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루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에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잡혀간 이들이 해방되고, 눈먼 이들이 보게 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이다. 성령을 "푸네우마"라고 하는데 "입김, 힘, 기운"이라는 뜻이다.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이 성령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의 활동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이 후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우리 가운데에서 구원 사업을 이끌어 가시는 주체이시며, 우리 안에서 놀라운 역사를 주도해 나가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현존하시고 역사 하신다. 말씀에는 성령이 담겨져 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은 가시적인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역사 하신다. 그러니까 말씀은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곳이며 어떻게 역사 하시고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시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성령이 담겨있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담겨져 있는 이 말씀대로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인 기쁨, 평화, 사랑, 온유, 절제, 겸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이 곧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삶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즉 말씀이 하느님의 힘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면 왜 내 안에서는 이런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가? 내가 매일 말씀을 읽고 들어도 내 안에서 아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느님의 권위는 위엄 있는 권좌에 앉아서 선포하는 권위가 아니다. 높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권위가 아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기 위한 권위가 아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봉사하기 위한 권위이고 힘이다. 즉 봉사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기 때문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려면 나 또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시는 말씀이 내 안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맡겨드려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처럼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거부한다면 그리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로만 또는 교만한 마음으로 또는 머리로만 아는 척 하는 이들 안에서는 절대로 역사하지 못하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가르치셨다."는 동사는 반 과거이다. 반과거는 가르치는 것이 끝났다는 것을 말하는 과거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가르침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2천년 전에 가르치기 시작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때에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다면 오늘은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말씀을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치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권위 있는 가르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신다. 말씀 앞에서 무성의한 마음, 교만한 마음, 목마름이 없는 마음으로 머무는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