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눈사람 / 김애양
어릴 적에는 겨울 한 철 동안 서너 개의 눈사람과 사귀곤 했다. 그림 속에선 주로 중절모를 쓴 모습이고, 내가 만들면 언제나 대머리였기 때문에 나는 눈사람을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수호신마냥 대문 앞에서 밤낮없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남자였다.
한번은 아버지의 고급 실크 넥타이를 눈사람에게 매어줬다가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을 정도로 눈사람 치장에 골몰하곤 했다. 겨울이 온통 눈사람과의 추억으로 아롱졌던 것이 언젠가부터 이 도시에 눈이 잘 내리지 않았고, 눈이 온다 해도 뛰어나가 놀 만큼 여유가 없어져버려 한동안 그 존재를 잊고 지냈다. 어쩌면 눈사람의 핵심인 연탄재가 없어진 점이 그와 소원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지도 모른다.
지난겨울엔 100년 만의 폭설이라며 며칠이나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잠시라도 눈 쌓이는 꼴을 참지 못하는 자동차를 위해 도로에는 염화칼슘이 뿌려졌지만 골목사이사이엔 백설기 마냥 푸짐한 눈이 보존되어 있었다. 병원건물 옥상 위로 올라가 보니 거기는 그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순백의 설원지대였다. 그 즉시 권위의 징표인 가운을 벗어젖히고, 또 어른이란 체면도 던져버리고 눈밭으로 달려들었다. 날이 너무 추운 탓에 좀처럼 눈덩이가 불어나질 않았다. 그새 눈 굴리는 요령을 잃어버린 것일까? 손발이 꽁꽁 얼어붙도록 오랜 시간 실랑이를 한 후에야 간신이 두 덩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무거운 걸 낑낑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싣고 내려와 주차장 한 구석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조물주가 된 기분으로 나뭇가지 눈썹을 붙여주고, 영양제 뚜껑을 꽂아 코를 만들어 주었다.
다행히 추운 날씨가 길어져 눈사람의 수명이 오래 지속되었다. 날마다 눈웃음을 치는 모습이 다정하고도 친근했다. 출근하여 제일 먼저 반기는 그의 인사에 하루가 더 기쁘게 시작되었고, 우리 환자를 비롯하여 오가며 쳐다보는 이들도 저마다 귀엽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도록 사랑받던 눈사람은 차츰차츰 작아지더니, 어느 날 감쪽같이 보이질 않게 되었다. 누가 집어가기라도 한 것 같아 호들갑을 떨며 경비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슬며시 웃음 짓던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만화 영화 <은하철도 999>에서 주인공 철이가 엄마를 찾아 떠나듯이 확 사라졌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눈사람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장렬한 최후 때문이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지만 눈사람은 녹아내리기보다는 곧장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다. 그걸 화학용어로 승화昇華라고 부른다. 고체가 액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기체로 변하는 현상을 말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드라이아이스와 나프탈렌 좀약이다.
그리고 승화란 용어는 정신분석에서도 사용된다. 프로이트가 자아의 방어기전을 설명하면서 본능의 힘 특히 성적, 공격적 에너지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돌려쓰는 기제를 승화라고 했다. 예를 들어 대변으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유아기의 항문기적 충동을 진흙을 빚는 예술로 바꾼다거나 성적 충동을 체육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경우이다. 자신이 겪은 슬픔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곡가나 불행을 극복하고 명작을 탄생시킨 소설가 등을 종종 고난을 승화시킨 작가라고 말하곤 한다.
프랑스의 시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7개월짜리 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면서도 5개월 만에 철학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나, 스승의 아내를 연모한 브람스가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운 선율을 작곡한 것이 승화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주로 예술가들에게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 승화는 능률적이며 창조적인 방어기제인 한편 인간의 숭고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힘이다. 영어로 승화를 뜻하는 서블리메이션sublimation과 숭고함을 의미하는 더 서브라임the sublime이 결국 같은 어원이 아니겠는지….
사실 눈사람이 질펀하게 녹지 않고 바람 속으로 승화되는 화학현상은 스스로의 노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역경에 굴복하거나 좌절해버리고 불행을 핑계로 생을 망쳐버리기가 십상인 걸 돌아 볼 때 눈사람의 모습에서 어떤 일깨움을 얻는다. 그래 아무리 힘이 들어도 흐트러지거나 망가지지 말고 최후까지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지. 비단 역경이나 고난 뿐 아니라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축복 같은 사랑이 만일 내게 찾아온다면, 손쉬운 애정놀음이 아닌 승화된 사랑을 이루겠노라 꿈꾸는 나는 오늘도 내안의 눈사람을 간직하며 산다. *
≪책과 인생≫(‘98)으로 등단. 제4회 남촌 문학상 수상(2008년).
작품집 ≪초대≫, ≪의사로 산다는 것≫ 은혜산부인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