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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산책 민족 대이동과 기후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목차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베니스(베네치아)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도시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 5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에 침입하자 몇몇 주민들이 아드리아해 해안가의 척박한 석호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었다. 야만족들이 바다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도시가 커졌고 7세기에는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자치를 시작했다. 이후 베네치아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민족 대이동을 일으킨 기후변화“유럽에서의 민족 대이동은 날씨 때문이었다.” 헌팅턴(Ellsworth Huntington)은 1907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아시아의 맥박(The Pulse of Asia)>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시아 유목민들이 살던 중앙아시아의 목초지가 말라버린 것이 야만인 부족들을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하게 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고기후 연구에 의하면 4세기 초반 카스피 해의 해수면 변동, 간헐천(間歇川)과 호수들, 중앙아시아의 방치된 취락을 기초로 분석한 결과 매우 극심한 건조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기온이 낮은 시기와도 겹쳐졌다. 헌팅턴은 이런 기후변화가 유목민족들을 서쪽으로 이동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서쪽인 유럽으로 이동해 온 민족이 훈족이다. 훈족은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 민족이었다. 로마의 역사가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훈족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훈족은 황야에서 살아가는 다른 모든 야만인들을 능가한다. 그들은 모두 신체가 건장하고 강하며 목이 튼튼하다. 하지만 불길할 만큼 추악하고, 두 발 달린 짐승으로 여겨질 만큼 등이 휘어있다. 어려서부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목마름에 견딜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다. 이들은 밤낮없이 말 등에서 살 정도로 말을 잘 탄다. 공격 동작은 말할 수 없이 빠르고 갑작스러워, 어느 순간 흩어졌나 싶으면 벌써 다시 느슨한 전열로 모여 있다. 이들만큼 두려울 정도로 민첩한 용사는 없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게르만족은 상대하기 싫은 흉측하고 무서운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보다 더한 강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훈족이었다. 용맹한 게르만족도 서진해 오는 훈족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훈족에 쫓겨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갈리아 지역으로 밀려 들어왔다.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로마 제국의 영토 안으로 도망쳐와 정착하면서 부족 왕국들을 건설했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200여 년 동안 일어난 이 과정을 역사에서는 민족 대이동이라 부른다. 한무제의 공격과 훈족의 이동아시아에서 시작된 민족의 이동은 유럽을 뒤흔들었다. 흉노 또는 훈족이라 불리는 아시아의 몽골족은 왜 이동을 시작한 것일까? 기마족인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의 골칫거리였다. 툭하면 중국으로 쳐들어와 약탈을 거듭했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훈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한나라 때까지 훈족은 끊임없이 중국을 괴롭혔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훈족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하고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훈족의 힘은 거기까지였다. 추위와 가뭄이 번갈아 닥치면서 훈족의 경제 사정은 어려워졌다. 이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더욱 빈번히 한나라를 침입해왔다. 이에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로 꼽히는 한무제가 국력을 총동원해 훈족을 징벌하기로 결심한다. 훈족의 정벌 없이는 평화와 번영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무제는 50년이 넘는 오랜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만든 탁월한 군주였다. 연호와 역법을 만들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해 내실을 기한 그는 정복 전쟁에 나섰다.
한무제는 고비 사막을 넘어 훈족의 본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훈족은 한무제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한나라의 공격력도 강했지만 몇 년간 계속된 가뭄과 추위로 전력이 약화된 탓도 있었다. 결국 훈족은 살아남기 위해 서쪽인 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후변화로 인한 한무제의 훈족 정벌은 생각지도 않았던 엄청난 소득을 가져왔다. 바로 실크로드의 발견이다. 한무제는 훈족의 포로에게 서역 이야기를 듣고 장건에게 군사를 주어 서역까지 가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장건에 의해 알려진 동서 교통로는 이후 당나라 시대에 실크로드라는 무역로로 쓰이게 된다. 한무제에 의해 몽골 고원에서 쫓겨난 훈족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대월씨국(박트리아)을 밀어낸다. 대월씨국은 남쪽으로 쫓겨나 인도에서 쿠샨 왕조를 열었다. 서쪽으로 계속 이동한 훈족은 발칸 반도 북부를 거쳐 중부 유럽까지 왔다. 당시 야만 지역이었던 중부 유럽의 게르만족은 흉노를 훈(Hun)이라 불렀다. 훈족의 일원이었던 마자르족이 헝가리에 눌러 앉으면서 헝가리(Hungary)의 국가 이름에 ‘hun’이 쓰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훈족의 위대한 왕 아틸라를 그린 영화가 2001년에 개봉한 ‘검투사 아틸라’이다. 그는 민족 대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지로 동쪽의 카스피해에서 서쪽의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훈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용맹스럽고 잔인했으며 흉측했다. 영화에서 훈족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일찍이 그렇게 생긴 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키는 작고, 눈은 찢어지고 누런 얼굴에는 끔찍한 흉터도 있었다. 몸집이 작고 날쌘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잠자는 것도, 회의도, 모두 말을 타면서 했다. 이들은 미친 듯이 달리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르며 공격했고 구름떼 같은 화살을 적에게 쏘아 댔다. 그들은 잽싸고, 교활했으며, 피에 굶주려 있었다.” 게르만족의 침입과 로마의 몰락민족 대이동은 좁은 의미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어난 200년간의 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은 이미 기원전 10세기부터 원래 그들이 살던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와 발트 해 연안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오랜 세월 이동을 반복해왔다. 이들은 라인 강 동쪽, 도나우 강 북쪽의 게르마니아에서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다. 200년간의 민족 대이동은 넓은 의미의 민족 이동 중에서도 이동의 규모나 속도 등이 매우 컸을 때를 말한다. 소규모의 이동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대이동은 헌팅턴의 말처럼 기후변화로 인한 훈족의 압박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민족 대이동의 출발점은 375년 동고트 제국을 격파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네 갈래로 나뉘어 로마 제국을 침입한 사건이었다. 훈족에 쫓긴 서고트족은 376년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와 전투를 벌이고 418년 아키텐 지방(프랑스 서남부)에 자리를 잡는다. 두 번째는 406년 반달족이 로마 제국 영토인 갈리아 지방을 대대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406년 12월, 현재의 서부 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에 모진 한파가 몰아닥쳤다. 이 추위는 유럽의 운명을 좌우했다. 강추위가 닥치면서 라인 강이 얼어붙은 것이다. 라인 강은 로마 제국의 갈리아를 지켜주는 천혜의 방벽이었다. 라인 강이 얼어붙으면서 강은 마인츠 시로 통하는 도로로 변해 버렸다. 훈족의 압박과 가뭄과 추위로 고생하던 반달족은 라인 강이 얼어붙자 섣달그믐날 밤, 약 1만 5,000명의 병력으로 갈리아 지방을 침공해 들어갔다. 게르만족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세력을 뻗쳐 남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로마 제국은 도처에서 무너졌고, 갈리아 지방은 폭력과 파괴의 피로 물들었다. 게르만족은 가족과 짐을 꾸려 삐걱거리는 손수레를 타고 와서 싸움을 벌였다. 로마가 간신히 이들을 물리치면 또 다른 부족이 뒤따라왔다. 수천 명이 죽어간들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또 다른 수만 명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보라, 죽음이 얼마나 재빨리 이 세상에 오고, 난폭한 싸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박살냈는지를… 어떤 자는 쓰러져 개의 밥이 되고, 어떤 자는 집을 태워 없애는 불길 속에서 죽어 간다. 마을에, 시골집에, 길이란 길마다 죽음과 비애, 살육과 화재, 통곡이 넘친다. 갈리아 전역이 하나의 거대한 화장터로 화했다.” 로마의 시인 오리엔티우스중세로의 전환점이 된 민족 대이동서고트족은 아테네를 침략하고 약탈한 다음 콘스탄티노플까지 나아갔다. 그 후 알라리크 왕의 지휘 아래 전 부족이 이탈리아로 이주해갔고 알라리크가 죽자 스페인으로 이동해 그곳에 정착했다. 반달족이 서유럽을 가로지르며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는 동안 게르만족의 일원인 부르군트족이 보름스와 슈파이어 사이에, 알라마니족이 알자스에 정착한다. 수에비족은 409년 스페인 북서부에 나라를 세웠다. 최초로 이동을 시작했던 반달족은 429년에서 439년 사이에 북아프리카에, 이어 455년과 468년 사이에 서부 지중해의 섬들에 국가를 건설했다. 다른 게르만족보다 반달족의 약탈과 파괴가 더욱 심해 문화 파괴라는 뜻의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로(489~493), 앵글족 · 주트족 · 색슨족은 브리튼 섬으로 옮겨갔다. 클로비스가 이끄는 프랑크족은 486년과 511년 사이에 갈리아를 정복했으며, 507년 서고트족을 스페인으로 몰아냈다. 이 와중에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용병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에 멸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민족들이 각각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 왕국을 건설했다. 로마는 게르만족의 침입에 너무 무기력했다. 이 모습을 본 한 성직자는 그 원인을 로마의 타락으로 결론지었다.
“거의 모든 야만족 국가가 로마의 피를 빨고 우리들의 내장을 잡아 찢고 있는데도,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신은 로마인을 더없이 겁쟁이였던 원수에게 넘겨, 혹독한 심판을 받게 하실까. 대체 무슨 이유일까. 모든 사태는 신이 우리의 일, 반달족의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수는 날마다 늘고 우리는 감소한다. 그들은 세력을 떨치고 우리는 몰락한다. 그들은 번영하고 우리는 쇠퇴한다. 나는 힘껏 큰 소리로 부르짖어 세상 구석구석까지 알리고 싶다. 여러분, 로마인들이여, 수치를 아시오. 여러분의 생활을 부끄러워하시오. 그들이 우리를 정복한 것은 우리의 방종한 생활에 깃들인 악덕 때문인 것이오.” - 그리스도교 저술가 살비아누스 민족 대이동의 역사적 의의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민족 대이동을 통해 문명과 역사는 변화되었다. 첫째, 국가체제의 원리적인 변화가 있었다. 화석화된 고대국가의 틀을 벗어난 중세적 의미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의 보편화이다. 훈족과 게르만족의 이동을 통해 비참한 운명을 체험한 사람들이 세속생활에 불안을 느끼면서 신에게 귀의하게 되었다. 셋째, 봉건귀족층이 형성되면서 중세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도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열려있는 세계에 같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글로벌적인 공간 개념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민족 대이동 이후이다. 발행일 : 2017. 06. 21. 제공처 정보지구과학산책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 대이동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지구과학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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