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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9-13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중에 환대의 자리를 경험하셨습니까? 환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과 의미가 있다고 지난 주일 말씀드렸습니다.
환대의 자리는 단순히 친절만을 베푸는 자리가 아닙니다. 타인이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의 자리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의 자리입니다. ‘너는 나와 달라.’가 아니라 살아온 배경과 환경은 다르지만 ‘너와 나는 같아.’를 확인하는 안전한 자리입니다.
이런 안전한 자리, 사랑의 자리인 환대의 자리를 통해 ‘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셨던 환대로 바리새인 시몬과 세리 삭개오에게 일어난 변화와 같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대하는 타인의 시선과 태도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이전과는 다르게 또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와 타인이 만나는 환대의 순간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자신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을 뿐, 지금까지 경험한 환대가 이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상대방을 따뜻하게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환대를 경험합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환대를 경험합니다. 어떤 자리에 ‘사랑의 마음’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환대의 경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런 환대가 경험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이자 청년주일입니다. 지난 주일까지는 주현절로 지켰습니다. 지나가기는 했지만, 주현절은 주님의 현현, 주님이 나타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성탄절과 겹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의 전통으로 주현절은 예수님의 육신이 나타난 날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드러난 날, 주님이 공적으로 드러난 날입니다. 그래서 특정 국가들에서는 성탄절보다 주현절을 더 중요하게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사실 주현절이 시작되는 첫째 주일에 나누기 좋은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사순절 첫째 주일 그리고 청년 주일이 겹치는 이 주일에 이 본문을 성도님들과 나누는 이유는 이 본문을 통해 사순절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고, 청년의 때 사실은 연령과 상관없이 우리가 항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가 잘 드러나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셨습니까?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며, 성령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는 헬라어로 ‘호 아가페토스(ὁ ἀγαπητὸς)’입니다. 이 단어가 오늘 말씀 구절처럼 아들 혹은 딸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유일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너는 내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 세례를 통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으며 사랑받는 자, 하나님이 좋아하는 자라는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이 정체성이 다음 행보에서 아주 큰 힘을 발휘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신 이후 성령은 예수를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 할 수 있도록 일부러 광야로 내보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광야로 내보냄 받음으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시험은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는 시험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의 기록을 보면 총 세 번의 시험을 받으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여러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가 바로 성령 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깨닫게 된 자신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게 뭐라고 유혹을 이겨낼 정도인가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어떻습니까? 없다고 생각했던 용기가 나고, 힘이 나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절대자로부터 자신이 특별한 관계에 있고,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든다면 어떻겠습니까?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이 사순절 기간에 성도님들과 깊이 묵상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부터 고난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이 있습니다.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확인받는 시간에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으시면서 들었던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막9:7)
다시 예수님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분이신지 확인시켜 주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이 정체성의 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벌어진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이기실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의 이 정체성이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셨듯, 예루살렘에서 시험을 이기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이 정체성은 이제 제자들에게 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막10:35-3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구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확히 무엇을 받아야 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을 제자들도 겪게 될 것이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특별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은 신세가 될까 두려워 떨었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는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도 성령 세례를 통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 사랑받는 자녀임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 하시며, 예수님이 들으셨던 말씀 그리고 제자들이 들었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야,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야. 너는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어.”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정체성이 우리가 이 세상의 시험을 이기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스스로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이들 또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 사실은 사랑받고 싶어서 삶에 열심을 내며 살아갑니다. 사랑받을 자격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투성이인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은 이 정체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또한 우리도 이 정체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14:12)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나라가 이렇게나 혼란스러운데, 말씀이 너무 한가한 건 아닌가? 하지만 다시 오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시급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한 자신의 정체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셨듯,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이 세상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모른 채 행동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째 주일과 청년 주일을 맞아 더욱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으십시오. 깨닫는 건 수행이 아닌 받아들임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3월 도서로 선정된 <불완전함의 영성>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위대한 선승인 마조 선사의 청년 시절 일화입니다. 그는 몇 시간이고 고집스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그의 스승인 회양 선사가 그에게 그리 힘들게 참선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자 합니다.” 마조가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회양 선사는 바로 벽돌을 들고 와서 열심히 광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마조가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이 벽돌로 거울을 만들려는 것이다.” 회양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광을 낸들 벽돌이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회양 선사는 빙그레 웃었다. “아하! 이제야 네가 아무리 참선을 해도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겠느냐?”>
불도에 의하면 부처는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부처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기보다 고난을 능히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깨닫고, 우리가 능히 이겨가야 할 고난에 관해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께 반복되는 세 번의 묵상을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빚어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는 존재, 완전한 존재입니다. 부족하거나, 상실된(결핍된)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이 감각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아갑시다.(오전)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타인을 축복하는 삶을 마땅히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은 영향을 미치며, 타인과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갑니다.(오후)
오늘 하루 어떤 일을 겪고, 또 어떤 상황에 있었느냐와 상관없이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사랑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것만으로도 감사의 이유는 충분합니다. 감사의 고백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갑니다.(저녁)
하루 세 번, 우리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어떤 능력을 주셨는지를 기억하고, 받은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묵상합니다. 매일 이 의미들을 되새기면 삶에서 자연스럽게 감사와 축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아셨을 때, 어떤 시험도 능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정체성이 명확한 사람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하루 세 번씩 매일 성도님들께 묵상 글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그리고 청년 주일에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깊이 깨닫고 사랑받는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도, 세상을 능히 이기는 성도로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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