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외 2편)
정철훈
러시아식 이름에 부칭(父稱)이란 게 있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계질서로 드러내는 작명법
이른바 오뜨쩨스뜨바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가 뿌린 한 종지 정액에서 시작되었다는 부계사회의 권위가 이름 위에 얹혀 있다
그 작명법의 유래를 나는 모른다
모른다 했거늘 누런 황색 거죽을 입은 내 이름의 작명법 역시 러시아식 부계질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 보기에 러시아는 겉으로만 부계사회일 뿐 속알맹이는 모계의 품안에서 자유로웠다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으므로
국토의 정맥이라 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주역은 여자들이었다
영하 50도 속에서 철도를 고정시키기 위해 침목에 망치질하는 어머니들의 옛 사진을 본 적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철도를 건설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태어났으니
여자들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저 씨 뿌리는 기계였던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가는 남편을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새댁은
동네 여성 강자(强者)에게 뺨을 맞았다
남자 같은 건 버려라
남자는 쓰레기다
남자는 미완성이다
남자의 아랫도리에 달린 종은 눈속임이다
남자는 그럴듯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인생은 여자들의 음습하게 갈라진 틈새에서 싹트는 법
여자들이 철도를 건설하면 그건 남자를 건설하는 것이다
새댁은 눈물을 훔치며 강자를 따라나선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이들은 감자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의 귀가 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했다
한 존재의 작명법에 대한 러시아적 모순은 지상의 보편으로 자리잡았고 황색 거죽의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두렵다는 거다
내가 남자라는 게
내가 누구의 아버지라는 게
이름은 모순된 문명이다
내가 이름을 버려야 할 이유가 모성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버지도 부칭도 아니다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내가 누구의 자식인 동시에 누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어색하다
하나이면서 둘인 이 정체성은 두 줄기 철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
암컷과 수컷의 기능이 무수한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
나는 그 구조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 구조를 부정하는 것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칭에 섞여 있는 모순에 반응하는 것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쓴다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로맹 가리를 읽는 밤
로맹 가리를 읽는 밤에 비가 내린다
번역본 「그리스 사람」을 읽는 밤
그러니까 밤비가 무언가를 번역하는 몸짓으로 느껴진다
밤비가 번역하는 것이 불귀(不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나는 눈치챈다
내가 오래도록 지병처럼 앓아온 의문이 싹 가시는 것 같다
내 지병은 내 피의 과거와 현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다가
발목을 잡히고 마는 실패한 탈주의 악몽이다
날이 밝으면 큰아버지가 공항에 도착하는 아침이다
그는 오래전 소련으로 망명했으니 그 국가가 패망해 사라졌다 해도 그는 소련에서 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를 읽는 밤에
내가 번역하고 있는 건 큰아버지의 귀환이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끄바에서 태어나 빠리로 건너간 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1923년 광주에서 태어나 모스끄바로 건너갔으며 첫 상봉 이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돌아오고 있다
로맹 가리는 돌아오지 않는 수영법에 대해 쓰고 있다
헤엄을 치다가 너무 멀리 나아가면
다시는 육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위험한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고
그는 그걸 바다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다가 장난치는 거라고 썼다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귀환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번역하고픈 것은 귀환하지 않는 삶에 관한 가능성이다
이른바 로맹 가리 식 귀결
나 역시 너무 멀리 나와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집은 내가 추구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캄캄한 밤과 광활한 대양에서 별빛만을 믿고 스스로 귀환하지 않을 일에 골몰해 있는 것이다
이때 큰아버지가 귀환하는 것이다
벌써 아홉 번째 귀환
귀환은 진부하다
진부해진다는 건 죽음이다
실제로 그는 죽음을 준비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정 그가 이국땅에서 운명하길 바란다
내 피에도 불귀의 유전자가 흐른다는 걸 그가 증명해주길
이 시대에 고향에 뼈를 묻는 일은 사치에 가깝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낯선 납골묘원에 뿌려진다
겨우 납골당 서랍 하나를 차지하는 게 상식이 된 시대에
귀환의 명분은 퇴색한다
귀환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로맹 가리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행에 옮겼다
내가 불안한 것은
큰아버지의 귀환이 나의 귀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이다
귀환할 때와 귀환하지 않을 때를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것이 밤비가 내게 들려주는 번역이다
큰아버지 같은 사람은 세 줌 네 줌씩 되지만
로맹 가리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살아 있을 때 대지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로맹 가리 식 실존이라고 부를 만하다
로맹 가리를 읽으면서 날이 샌다
스탠드등을 끄는데 로맹 가리의 마지막 숨결이 미명 속으로 툭 떨어진다
사랑 너머까지 사랑을 끌고 갔던 로맹 가리의 마지막 총소리가 이 새벽을 화약냄새로 흥건히 적신다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
자장가는 왜 이리 슬플까
그건 꿈에서 왔기 때문이지
이루지 못한 꿈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전생에서 오는 것
세상이란 슬픈 곳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지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때문이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태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
바늘이 운명의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리
하늘의 별도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소멸한다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아기의 귀에 수면의 묘약을 흘려보내며 말하지
세상 같은 거 잊으라 잊으라
지구는 회전하고
세상의 모든 자장가는 그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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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 에 「백야」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 『카인의 정원』 『소설 김알렉산드라』, 에쎄이 및 전기『뒤집어져야 문학이다』 『소련은 살아 있다』 『김알렉산드라 평전』 『옐찐과 21세기 러시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