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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에세이 (1) 들어가면서
먼저 지면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됨을 대단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한 큰 짐을 등에 지고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무거운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부족한 제가 감당하기엔 사실 너무나 힘겨운 주제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도전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설렘 또한 갖고 이 글을 시작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수많은 정의들이 회자됩니다. 우리들도 서너 개 쯤은 듣고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등… 굳이 역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피하기로 하겠습니다. 짧은 소견으론 그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학문이 어떤 학문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라는 학문은 과학입니다. 역사는 문학과는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과거의 어떤 사실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역사 소설과는 다른 분야입니다.
과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역사는 이성을 중요시 합니다.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가 우리의 이성에 합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역사가는 끊임없이 역사 자료, 즉 사료를 발굴해 내고 그 사료의 진위를 검증하고, 확실한 토대 위에 한자 한획 씨줄과 날줄을 그려가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기는 논쟁은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이 중요한가?’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 서술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그 진위를 말해주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해 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시대에 따라 그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은 변화해 왔습니다. 역사가는 철저히 배제된 채 사료만을 메마르게 정리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바라보던 때도 있었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때도 있었습니다. 금세기에 와서는 그 둘이 조화를 이루는 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함께 보게 될 교회사도 큰 범주에서 이 역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교회사는 흔히 생각하는 신앙의 기록(?)이나 흔적 같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은 그리 아름답지도 또 거룩하지도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빠뜨릴 수 없는 하나는 ‘교회사의 특수성’입니다. 교회사는 인간적 삶과 기록의 흔적 위에, ‘하느님 섭리’라는 혼이 서려있는 역사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간 문명이 만들어 낸 역사와는 또 다른 시각을 갖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사람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것이 더해질 때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삶과 그들이 엮어낸 사건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하느님 섭리의 흔적을 함께 통찰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교회사’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교회사라는 ‘시간의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의 여행에 ‘에세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딱딱한 서류봉투와 같은 역사의 기록에 몇 개의 그림으로 수를 놓는 에세이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서류를 뒤적이는 지루함과 인내로운 작업을 조금은 덜기 위함이라 생각됩니다. 모쪼록 편안한 읽기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실은 위험한 시도(?)를 해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가 지닌 의미를 가볍게 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관심을 갖는 이유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기 위함’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어찌보면 ‘오래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오늘’을 바라보면서 ‘지금이란 오늘’을 우리가 지혜롭게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아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오래된 오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살아냈던 교회의 역사라는 유구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실까요?
교회사 에세이 (2) 출발의 상황 : 자기 인식
처음 교회의 모습은 나자렛 예수님의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추종자들로 이뤄진 유대교 내의 작은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승님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됩니다. 이 그룹의 특별한 점은 예수님의 죽음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스승의 절망적인 처형의 경험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공동체적 모습으로 선교활동의 공동체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런 활력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스승의 실패에 직면한 그들은 충격으로 모든 것이 마비되는 경험을 하고, 이런 실패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이 작은 그룹 전반에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근심 걱정’이 새로운 흥분으로 변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들이 증언하기를 ‘자신들의 스승이 나타났고, 그것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 새로운 존재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경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그룹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역사를 기술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 작은 그룹에게 중요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신앙 체험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 공동체의 자기 고백만을 갖고 있기에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흐른 1세기와 2세기 초에 다른 그룹의 저술가들이 등장하는데 소위 말하는 ‘교부’들입니다. 하지만 이들 그룹의 저술 목적도 ‘신앙 고백과 선교’이지 ‘역사적 저술’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쉽지만 우리는 그 엄청난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신학과 믿음에 관한 소식들을 통해 그 상황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 이 작은 그룹의 근본적인 분위기는 “hic et nunc”, 즉 ‘지금 여기’에서, 세상 구원의 새로운 소식에 대한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체험에 대한 흥분입니다. 그들은 이제 '마지막 날'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마지막 날이란 유다적 개념으로 본다면 '세상의 끝에 하느님께서 힘있게 개입하시고 새로운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기다림 속에 살았고 그 기다림의 시간은 인류적 그리고 우주적 전환을 기다리는 짧은 기간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곧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기는 지나가 버립니다. 1세기 말에 이르면 세상의 종말에 대한 실제적 기다림을 이 그룹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워집니다. 초기 이 작은 그룹과 2세기의 교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그들은 작은 그룹이었고 아직 본격적인 의미의 조직도 없었고 ‘조직과 체계’에 대한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삶의 회개와 우상을 버리는 것,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고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이시고 참된 하느님과의 통교를 통해 마지막 시대의 잔칫상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두 번째 오심(Parusia)과 구원을 위한 심판을 확신 속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공동체는 이 세상과 역사는 지나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남겨진 이 짧은 시간에 가능한 한 아직 오류와 무지에 빠져 있는 많은 이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 사명감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의식은 저항에 부딪치고 그들은 회개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 ‘거룩한 이’들을 박해하는 이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신화적 영향으로 마귀와 악마, 그리고 도덕적 악습과 죄 그리고 믿음 없음이라는 하느님의 적들의 개념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런 초기 교회의 자기 인식의 본질적 요소들은 그룹의 구성원들이 사회와의 비교 안에서 갖게 되는 태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소외’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작은 그룹으로 사회의 가운데 둥지를 틀게 되고,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이 공동체 구성원들은 세상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의 완성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뭉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절망적인 상황은 스승님을 통해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상황으로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자기 인식을 현실화해 가는지, 그것은 어떻게 교회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띄어 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3) 유다교 안에 둥지를 튼 교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다교는 그들 안에 많은 분파들이 있었습니다(바리새이, 사두가이, 에세네 등).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등장이 그들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성전 예식이나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관용할 수 있는 ‘새로운 분파’였으며 본질적으로 새로운 종교라는 인식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그룹은 자신들의 유일한 스승인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그룹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셰례식을 실천하고 있었고, 집에 따로 모여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참례할 수 있는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이 젊은 교회는 스스로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여겼고, 그들 안에서 이스라엘은 역사의 목적지와 시대의 마지막 완성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동족들에게 거부당하고,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반대로 빠른 전파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이 그룹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향하는 보편주의를 심어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 안을 살펴보면 이 작은 공동체는 실제 구별되는 더 작은 그룹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먼저 지역적으로 이스라엘과 그 외의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아람어를 쓰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다인들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유다교와 맺는 관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특히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모국의 유다인들과 꼭 같은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보면 서로를 ‘히브리인들’과 ‘그리스인’으로 호칭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전례적으로, 언어의 문제로 구별되었지만 애덕의 실천은 공동으로 하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다른 실천이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 사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테파노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스테파노가 속한 공동체는 ‘그리스계 공동체’로서 이들은, 성전과 율법에 관한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극복되었다고 믿었기에 유다인들로부터 이단자로 간주되어 축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들에게는 히브리 종교의 율법적 특징을 지키는 것보다 예수님을 닮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됩니다.
반면에 히브리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 종교적 실천의 준수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의 역할을 경시하고 그를 마치 율법의 파괴자요 민족의 반역자로 생각하는 경향마저 갖게 됩니다. 교회는 심각한 분열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분열적 상황에 으뜸 제자인 베드로 사도가 중재에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공의회’입니다(48-49년경). 이 공의회에는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대표들이 참여하였고 기본적인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유다의 전통에서 자유롭고, 히브리인들은 율법과의 관계 안에 남아 있기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교회는 다른 길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기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계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합니다.
한편 히브리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지만 그리스도교 안에 유다교적 색채를, 특히 기도와 전례 부분에 강하게 그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교회사 에세이 (4) 교회 선교의 첫 상황들과 특징들
탄생한 이후 첫 몇 십 년 그리스도교는 놀랍도록 빠르게 전파됩니다. 짧은 시간동안 소아시아와 치프로 그리고 그리스와 에집트 그리고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발견됩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전파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와 같은 순회 설교자들이 그 같은 그룹을 만들고 또 떠나감으로 가능했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다리던 '임박한 종말'에 기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아(현 유고슬라비아 지역) 그리고 스페인까지 도달합니다.(로마 15,24) - (초기 선교 상황 지도 첨부)
이런 초기 선교에 공헌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축출된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외 지역과 히브리인들이 아닌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공동체는 시리아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였고, 이들이 처음으로 제자들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렸다(사도 11,26).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은 율법의 사슬에서 자유로웠고 그리스어를 사용했기에 모든 도시와 시골 지역에서 이해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즉 율법에서의 자유로움과 그리스어의 사용은 그리스도교에게 보편적 세상으로의 서막이었고,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공동체에서는 이런 경향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결정적으로 유다교에서 독자적인 종교가 되기에 이릅니다.
예루살렘에서 450킬로미터가 떨어진 안티오키아의 선교는 지리적인 확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따른 그리스도교의 변화 또한 생각케 합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과 성찬례 그리고 세례 등의 개념들이, 신학과 설교에서 이방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새롭게 번역되고 설명되어져야 했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회적 영역에서 이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따른 그리스도교를 건설하는데 공헌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전파의 강렬함은 지리적 신학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전망에서도 흥미롭습니다. 과연 사회의 어떤 계층이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았을까요? 프롤레타이아 계층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되었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과 특수한 지위의 상류 계층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고, 모든 계층에서 골고루 선교의 공동체를 이룬 것은 항구 도시 ‘코린토’가 주목할 만 하였을 뿐입니다(1코린 1,26-27).
이런 지리적 전파의 결과는 몇 개의 주목할 만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의 공동체는 예외 없이 대도시와 상거래의 주요 거점들에 한정되었고, 공동체 간의 큰 지역적 거리가 있었습니다. 즉 교회 공동체는 성공을 이뤄갔지만 매우 고립된 공동체들이었던 것이죠. “지역 속에 사라진”(C. Andersen) 공동체였고, 소수로서 사회적으로보다 지역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이런 초기 교회의 작고 소외된 그룹의 상황은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근본적인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도덕과 세상에 대해 소수자로서의 세상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갖게 합니다. 즉 세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와 악으로부터의 구원 또는 세상 끝에서의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적 고립과 특성은 앞으로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논쟁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교회사 에세이 (5) 그리스도교 선교의 환경적 영향들 (1)
선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라고 아주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던 초기의 그리스도교 인들은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먼저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아무런 준비 없는 그들에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소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것은 가장 힘겨운 일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회는 그들과 대화해야 했습니다. 이런 대화는 상대를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역할도 했지만, 또한 선포하는 주체 또한 상대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 또한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하던 이들의 피할 수 없었던 역사적, 그리고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언급해야 할 것은 역시 팔레스타인의 유다이즘일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교는 그 자궁에서 자신들의 진리를 잉태하고 깨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의 깊숙한 곳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고대 근동의 문화, 즉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그 지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근동의 문화는 또한 그리스도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혼합주의’(mista)의 경향을 띠게 합니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이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다이즘과 그리스-로마의 이방문화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특징짓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원으로부터 유다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근동 지역의 여러 곳에서도 계속해서 헬레니즘의 유다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유다교의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로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수준으로 퍼져 있었기에 팔레스타인 유다교보다 더 큰 영향을 그리스도교에 끼칩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이 디아스포라 유다교는 이미 헬레니즘의 문화적 영향 아래 있었으며 언어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모습에서 팔레스타인 유다교와 구별되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시나고가는 제국의 모든 도시에서 만나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고, 서로 협력할 때도 있었지만 논쟁과 갈등의 관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와 회당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였던 것은 구약의 말씀에 대한 이방인들의 공격에 맞설 때였습니다. 이런 호교론적 임무들은 양자 모두에게 여러 이점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여러 관점에서의 반대와 공격에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은 이런 논쟁들에 공동으로 대응하며 호교적인 글들을 많이 생산해 내게 됩니다. 이런 공동 대응의 과정에서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에 일정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제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4월 26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이민의 날)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6) 그리스도교 선교의 환경적 영향들 (2)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이방인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많은 집필들이 이뤄졌음을 지난 호에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런 공동 대응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살펴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태동시기에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다교의 필요로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70인역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자산이 되는데, 이 번역서는 그리스도교의 전례와 교리교육, 그리고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이런 번역은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화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방법론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특히 1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Filone)의 은유적(allegorico) 성경해석은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런 성경해석은 바오로 사도에서 시작하여 근대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런 은유적 성경해석은 성경과 철학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다교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선교와 설교에도 영향을 주는데,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유다교가 이미 유일신 신앙과 참된 길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상황은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희망적 개막’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영역에 있어서의 영향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관습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전체주의 국가에 ‘봉사하는 종교’를 요구하던 ‘정치제도’ 위에 자신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이 자신의 제국이 ‘지구적이고 결정적이 것’이라고 선포하게 된, 즉 지중해 연안을 모두 정복하고 제국을 선포하던 그 즈음에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제국의 통일은 하나의 정치적, 종교적, 국가와 사회 조직 그리고 경제와 상업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란 거대한 흐름을 만들게 됩니다.
로마인들에게 종교는 정치적 사건들을 이해하게 하는 열쇠와 같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신적인 섭리가 실현된 것이었고, 로마 제국은 신들을 대리해서 세상의 조직을 이뤄가도록 맡겨진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은 황제를 중심으로한 강력한 전체주의를 이루었고, 그것은 종교적 영광으로 승화되었습니다(pax romana). 로마제국에서 황제는 신적인 대리인이었기에, 황제에게 영광을 드리는 종교 예식인 ‘황제예식’이 중요했고, 모든 신민은 이 예식에 참여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현세적 정치의 신성화였고, 이 황제 예식은 국가의 종교적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종교적 활력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해야 했습니다.
종교는 제국의 번영을 지켜주는 신들을 향한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며 종교 예식에 참여는 모든 신민들이 거행해야 할 첫 번째 임무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의 종교는 하나의 호국 종교였습니다. 국가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 종교적 경향은 그리스도교 선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제국 내에서 본격적으로 선교가 이뤄지면서 이런 종교적 요구는 갈등과 긴장의 관계로 변화되고, 훗날 그리스도교에게 큰 시련과 영광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교회사 에세이 (7) 선교와 개종의 역사 (1) 선교의 이유들과 그 시작
‘선교의 이유’라는 부제를 붙이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교회가 존립하는 이유이며, 교회는 태생적으로 온 세상 모든 백성의 구원을 위한 선교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직접적인 내용은 신학적인 배경과 이유뿐 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이유들을 일컫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의 기초가 되는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어느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유일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능성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나아가 초기 교회의 구성원들은 ‘임박한 종말’ 때문에 복음의 온전한 선포를 위해 짧은 시간이 주어졌음과 보편적 선교는 그 때가 되어야 완성에 이른다는 신념 안에서 기다림과 근심의 시간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인식들이 선교사들의 의식을 자극하고 공동체를 충동하였던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쩌면 행운스럽기도 하고 놀라운 확장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상을 비추고자 했던 목표는 세기를 거치며 종교역사에 있어 볼 수 없었던 탁월한 방법으로 실현되었고 이 성공은 ‘구원의 종교’라는 그리스도교만의 특징적 기초를 갖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선교는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성장에서 기인하였지만 보편적 선교를 향한 실질적인 첫발은 ‘헬레니스트’(ellenisti)라 불리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어 설교를 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충동과 열정은 사도들과 초기 공동체에 의해 준비되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쫓겨나면서 생긴 결과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돌이킬 수 없고 동시적인 이런 확장의 주체들은, 즉 전달자들은 헬레니스트들이었습니다.
필립보와 바르나바 그리고 바오로로 대표되었지만 대부분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과는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세계적인 선교의 책임은 사도들에게 맡겨졌고, 선교는 오직 사도들의 임무로 그려지며 계속된 교회의 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그러므로 이 사명을 끝까지 수행합니다. 즉 “복음을 세상을 끝까지 전하게 된다.”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졌고 세상은 복음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종말을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역사적 사실과 초기 선교 상황에 공헌을 한 이들의 역사적 이름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초기의 성공적인 선교 이후, 그리스도교는 퇴보나 곤란 없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성공적인 선포 시기중의 하나는 2세기 말경 코모도 황제(Commodo 180-192)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뛰어난 전파의 시기는 3세기 중반 경이 됩니다. 이 3세기경의 특징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제 집단적인 움직임을 일컫게 되고 이를 통해 교회는 커다란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 시대의 어느 종교도 이루지 못한 풍요로운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2015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8) 선교와 개종의 역사 (2) 전파와 지리적 경계
지리적인 선포에 대한 큰 그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차례로 완성되어진 이런 성장들의 여러 국면들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료는 부정확하고, 사료는 광범위하며 우연적이므로 재구성에 있어서 어려움과 헛점을 갖고 있음을 미리 말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확증할 수 있는 것은 1세기 말경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와 치프로 그리고 소아시아의 대부분,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반면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일리리아, 그리고 갈리아와 스페인에 그리스도교의 출현을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2세기 말경이 되면 마지막으로 언급했던 교회들을 포함한 중요한 교회들이 뿌리를 내립니다. 이때까지의 이런 그리스도교 전파의 중심은 로마가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2세기 말경이 되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트레비리(Treviri)와 쾰른(Cologna)에까지 이릅니다.
한편 2세기가 되면 ‘교회의 소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교회는 첫 번째 유다 전쟁을 계기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곧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고, 할례 문제로 다시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이것은 이 교회가 그 종말을 고함을 의미하였습니다.
4세기가 될 무렵 그리스도교는 외적으로 뿐 아니라 많은 지역에서 의미 깊은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그의 주교뿐 아니라 교회가 그 지역 내에서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되고, 이집트의 농촌에서는 독자적인 그리스도교인 콥트 교회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시리아에서는 지역 시노드가 열리는 등 활기를 띠고,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갖게 됩니다. 4세기가 되면 아르메니아에서도 강력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보게 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우리는 정치적 직능을 맡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에 백성들의 전 계층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 지역과 다뉴브 지역에서도 그리스도교가 빠르게 선포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반대로 구분되는 양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로마는 이미 10만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지만 이탈리아의 중부와 남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미미했습니다. 또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출현은 몇몇 도시 즉 라벤나 아퀼레이아 밀라노 등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스페인 등에서도 교회가 발견되지만 실제 앞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숫자는 몇몇 지역에서는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는 정도의 사실을 어렵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코스탄티노(Costantino) 황제 시대에 가면 제국 내의 소수자의 위치를 벗어나게 되고, 4세기경 그리스도교는 시골지역까지 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5세기가 되면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전체로 확산되고 오히려 이방인과 유대인이 소수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가 되면 교회는 이전보다 더 손쉽게 그리스도교 선교를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호의적인 상황아래 그리스도교로의 귀의는 집단적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목적인 문제도 야기하는데 이유는 이런 개종이 삶의 편의를 위한 것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 에세이 (9) 선교에 미친 사회적 영향들
선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적 행위라는 직접적인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선교가 ‘복음’이 하나의 상품처럼 소식을 듣는 이들에게 안겨지고 그들은 기호에 따라 그것을 선택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선교는 선포자와 그리고 그 선포의 내용이 그 시대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상호작용하는 사회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초기 설교자들 그리고 신앙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투신한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과 비교할 때 많은 점에서 달랐습니다. 당시의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때 우리는 좀 더 그리스도교 선교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헬레니즘 세상의 구조는, 통치와 기능에 있어서 가족(부족)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안정적이고 가족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조직에서 구성원 각자의 독립성은, 예를 들면 종교나 사회적 부문에 있어서의 개인의 선택은, 제도와 위계에 의해서 강력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이런 '사회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고 주로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였을까요?
성경에도 언급되듯이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18,8)라는 표현처럼 개인적인 개종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런 경우도 매우 일반적인 경우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특히 히브리인들에게서 흔하였고, 이방인들의 경우는 주로 개별적인 개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경우는 대부분 부녀들이 개종이 많았고, 나머지 가족은 그에 따른 결과로 점차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경우가 더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런 부녀들의 개종은 그 자신의 결혼 생활에 위기를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적 구조, 특히 가족과의 연관은 선교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즉 개인이 이런 사회 구조라는 사슬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 안에서 분명 큰 성공을 거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 중에서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알고 있던 이들이 교회로 쉽게 그리고 자주 넘어오게 됩니다. 유다교는 하나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고, 이들의 사회적 계층은 ‘중류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로마-헬레니즘의 도시들에서 그리스도교는 이방 사회의 상류층에서도 관심을 끌고 세례를 주기에 이릅니다. 선교에 관한 사료들을 보면 그리스도교는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그 출현을 보게 되는데, 부자, 가난한 이 그리고 사회의 주요인사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그리스도교가 발견됩니다. 코스탄티노(costantino) 황제 이전에 이미 정치적, 행정적 위치에서 중상의 계층에서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수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눈에 띠는 점입니다. 또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 철학자들, 그리고 역사가들도 일찍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주된 계층은 중인들과 도시의 하층민들, 즉 장인들, 상인들 그리고 노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있어서 의미깊은 점은 이런 사회적 계층의 다양성에서 오는 부조화의 문제를 교회가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잃지 않고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를 혼란의 길로 이끌기도 하지만, 이런 신분의 다양성은 노예나 부녀는 물론 누구나 평등한 권한을 인정받는다는 ‘새로움’으로 성공적 선교의 밑받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 에세이 (10) 선교의 우호적 상황과 그 반대 상황
그 첫째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와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로마제국의 힘은 백성들의 삶에 안정을 주었고, 로마 제국의 그물망 같은 도로는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이는 상업과 문화적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안정된 정치사회적 기반과 편의를 선교에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로마라는 ‘하나의 제국’은 제국에 속한 모든 부족과 문화들에게 단일성을 갖게 합니다. 즉 헬레니즘 문화는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 다양한 나라들과 부족들에게 단일성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 드러나는 문제들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했고, 또한 이것은 손쉽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단일한 문화, 같은 정신세계에 같은 어조로 그리스도교를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언어입니다. 제국에 통용되던 상업 언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같은 언어로 설교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전파에 호의적이었지만, 그 점은 한계도 노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언어가 도시의 상업지역에서만 이해되는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주로 도시 지역에 국한되게 됩니다.
언어적인 면에서 2-3세기 경이되면 라틴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 라틴 언어와 문화 안에서 자신을 특징지어 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이 언어에 너무 의존하게 되고 오히려 다른 언어들과의 소통과 교환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은 시골 지역의 선교에 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 성공의 이유들 중의 또 다른 하나는 유다이즘이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다교는 선교 활동에 열정적이었고 성공을 거두는데, 유다이즘은 현실의 문제들에 응답할 수 있는 철학으로 자신들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성공은 그리스도교가 자신들을 이런 민족적인 종교가 아닌, 모든 인류가 지켜야 할 도덕률인 새 계명을 제시하는 보편적 종교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성경에 대한 전이해는 유다교 개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넘어오게 하는 ‘가교’역할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또한 로마제국이 종교에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3세기경의 세계적인 위기, 즉 전염병과 경제적 곤궁 등은, 현실적 불확실성과 고난 앞에 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역사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주는 희망의 종교로 비쳤다는 점입니다.
비호의적인 상황 :
특기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정치적인 박해와 백성들의 만행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활동에 무거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귀의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교인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는데 약함을 드러냅니다. 특히 전통주의자들과의 충돌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성전도 제단도 신적인 이미지도 없는, 종교의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고 비판당하게 되고, 이는 박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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