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덕화를 파급한 혜택이 적지 않으나, 쇄국시대의 전제정치와 계급사회와 상고(尙古)주의의 유물이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0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대한제국기에는 서양의 근대 학문과 사상인 신학을 수용하자는 것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에 따라 신학을 어떠한 범위로 수용하고 구학(舊學)인 유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진화한 박규수는 1870년대에 초기 개화파의 주요 인물을 양성하였는데, 개화파는 1880년대 전반 동도서기파와 변법개화파로 갈라졌다.
이 중 동도서기파는 유교 도덕을 기본으로 삼고 근대 기술을 도입하자는 ‘유교근대화론’으로, 변법개화파는 제도의 포괄적 개혁을 추구하여 ‘유교비판론’으로 이어졌다. 유교근대화론의대표적 인물이 김윤식이다.
김윤식
김윤식은 1881년 영선사로서 기술유학생 등을 인솔하여 중국에 갔고, 그가 가져온 각종 기계와 서적은 1883년 기기창의 창건과 한성순보의 발간에 이바지했다. 김윤식은 갑신정변 후 요직에 있으면서 각종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외교정책에도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또 ‘호부론(護富論)’에서 부자를 옹호하고 산업 육성을 주창했다 “서양에서는 인민이 부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m 우리나라 습속은 인민이 부자가 될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김윤식은 갑오개혁기에 외무대신으로 발탁되었다가, 그 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탄핵을 받아 종신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907년 사면되었다.
김윤식은 대동학회 월보의 창간호(1908)에서 “학자는 인의도덕을 근본으로 삼아 이용후생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의도덕은 전 세계가 모두 숭상하는데, 유교에 상세히 규정되어 있어 달리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김윤식은 또 ‘신학육예설(新學六藝說)’에서 “정치 경제 법률 음악 등 신학문도 결국 예날 성인이 가르친 육예, 곧 예의 음악 활쏘기 말몰기 글쓰기 산수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문의 수용을 주장했다.
기독교를 배척한 위정척사파와 달리 김윤식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국민 교화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김윤식은 박은식·장지연 등과 함께 1909년 창립한 대동교(大同敎)의 총장이 되었다.
1884년 민씨 세력의 견제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변법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훗날 김윤식은 “관직에 있어서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정변 세력과 서로 속마음을 통하여 그들이 애국심에서 그런 것이지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정변ㄴ 세력이 유럽을 높이 받들고 유교를 깎아내린 점은 비판했다.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었고, 근대화 세력은 일반적으로 유교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중시관과 강한 가족유대는 유교문화와 관련이 깊으며, 이는 근대 경제발전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또 유교 윤리는 정부정책에 대한 협력, 경제활동에서 인간관계의 고려, 기업 조직목표와의 일체화 등의 풍토를 조성했다. 그래서 오늘날 ‘유교자본주의’ 또는 ‘아시아적 가치’라는 용어가 대두했다.
[이헌창 고려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