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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8일 연중 1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2,1-5
복 음 :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의 묵상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안식일 논쟁에 뒤이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셨지만,
몰려든 많은 군중을 고쳐 주시는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이른바 ‘함구령’이라고 알려진 이 말씀을 여기서 되풀이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실마리를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이기시고 승리하실 때까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을 감추셔야 하셨습니다.
자칫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여 그분의 존재 의미가
다만 ‘기적을 행하는 치유자’로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만 오해하고 따르던 이들은
결국 그분 곁을 떠나거나 심지어 그분을 적대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언뜻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발걸음은
오늘도 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군중의 흥분과 과장된 소문은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지만
그분께서 실제로 걸어가신 길의 끝에는 승리와 희망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희망의 빛이 너무 빨리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타고 다니는 승용차 전에 15년 넘게 운전했던 차가 있었습니다.
워낙 튼튼했고 아무런 사고 없이 잘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운전 중에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백미러로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글쎄 제 차에서 검은 무엇인가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계기판 오일 게이지에 빨간색 위험 경고등이 표시되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의 뒤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닛을 열어 보았습니다. 또 차 아래도 살폈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발견했을까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했지만,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차에 익숙할 뿐, 차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당에 매일 미사 나오고, 매일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주님을 제대로 알까요?
각종 봉사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주님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주님께 익숙할 뿐,
주님에 대해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도 어렵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어기는 것을 예수님께서 용인하셨다고 고발하고,
스스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 사랑은 전혀 보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마태 12,15 참조).
비겁한 도망일까요? 아닙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묵묵히 이어가시려는 신중하고 주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를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들과 백성에게 메시아의 역할이 무자비한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를 통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갈등으로 오해받을 때,
똑같이 맞서 싸우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게 됩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조용히 물러서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에 집중한다면 그 지혜로 이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희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합니다.
형제들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누르기도 합니다.
또한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쁩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희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희를 구해 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저희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희를 꺾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희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십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저희에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아니, 저희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십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십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십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아멘.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준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없앨까 모의하는 것을 아시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가신 장면은, 단순히 두려움이 아닌,
인류 구원과 사랑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행동임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이사 42,3)고 하셨다.
이는 그분이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파멸시키지 않고,
언제나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꺾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참으시며 인내하신다.”
(Enarrationes in Psalmos 33,2 요약)라고 말하였다.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사명은 단순히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을 회개로 이끄는 사랑의 사명”(545, 1846항 참조)이라고 밝힌다.
우리 자신도, 주님께서 참으시듯이 서로에게 관대하고 인내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서를 말씀하신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참조)
이는 예수님의 구원 업적이 완성되는 때,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시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한다.”(Summa Theologiae, III 요약)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정의와 사랑이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구체적 교훈을 준다.
공동체 안에서, 혹은 직장과 가정에서,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그대로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처럼 즉각적 심판보다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라는 선언은
예수님의 완벽한 아버지 뜻 수행을 보여 준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일상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고통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 불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와 인내의 종, 하느님께 사랑받는 종으로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약하고 연약한 이들을 존중하고,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서 뉴스를 검색합니다.
세상의 소식이 손안으로 들어오는 시대입니다.
뉴스를 검색하다가 제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삼성전자 미국 본사, 텍사스 플레이노 이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성전자의 미국 본사는 뉴저지에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에 살 때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저지로 가면서
삼성전자 건물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 본사가 달라스 인근 플레이노 쪽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2027년 말까지 이전한다는 보도입니다.
이 소식을 보면서 저는 단순히 기업의 이전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과 가족들이 달라스 지역으로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면 우리 본당에도 새로운 교우들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본당은 2027년 설립 5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0주년을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를 바라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새 신자분과를 중심으로 전입해 오는 교우들이 본당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동북쪽으로 도시가 계속 확장되면서 성당에 오기 어려운 교우들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본당 분가를 위한 위원회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구장님과 면담을 추진하고, 미국 성당 안에 한인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세상은 넓어지고, 도시는 커지고, 기업은 이동하고,
사람들은 더 좋은 기회와 더 높은 자리를 찾아 움직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찾는 것은 단지 성공인가? 내가 바라보는 것은 단지 숫자의 증가인가?
내가 준비하는 것은 단지 건물과 조직인가? 아니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버드와 예일 같은 대학에서 가르쳤고, 많은 명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자리를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슈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자리를 떠나서 힘들고 낮은 곳으로 가셨습니까?”
그때 신부님은 이런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때보다,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갈 때 더 잘 보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진리의 보물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리, 많은 소유, 성공의 꼭대기에서만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 아픈 자리, 실패의 자리, 눈물의 자리에서
더 분명하게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는 악을 꾸미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도 악을 계획하고, 아침이 되면 그것을 실행합니다.
남의 밭을 탐내고, 남의 집을 빼앗고, 힘없는 사람의 재산을 차지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욕망으로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을 향해 날아가는 사람에게 가난한 이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시고, 사람을 살리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눈앞에 진리가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자비가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계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왔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쓸모없다고 버릴 수 있지만, 주님은 다시 세워 주십니다.
세상은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은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 주십니다.
우리 본당이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건물이 넓어지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본당이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 오는 교우들이 낯설지 않게 맞아 주는 공동체,
신앙이 약해진 교우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동체,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를 얻는 공동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께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스마트폰은 충전하지 않으면 꺼집니다.
컴퓨터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의 힘이 약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하느님께 접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욕망과 걱정과 두려움에 끌려갑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께 몸을 맡기면 좋겠습니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우리 각자의 마음이
주님께서 머무시는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청소년, 청년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게임을 위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삐까 번쩍, 휘황찬란합니다.
뭐든 내가 다 할 수 있는 분위기,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합니다.
그러나 화면을 끄자마자 너무나 다른 암담한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경제나 무역, 교육 등등
다른 지표는 상위를 달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감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목숨 걸고 올라가야 할 에베레스트산 정상일까요?
아니면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 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만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 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빈자들의 사제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밤새 내리는 비가 위로와 치유의 하느님의 생음악처럼
마음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합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강론을 쓰는 천복의 시간입니다.
‘수도자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이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예나 이제나 우리가 물어야할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마침 <한 번 뿐이 없는 삶인데>와 <넉넉하고 둥글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옛 자작시 두 편이 반갑게 눈에 띄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처럼
자유로운 새처럼
노래하는 시냇물처럼 살 수는 없을까
시처럼 노래처럼 그림처럼 춤처럼
멋있고 맛있게
사랑과 자유를 살 수는 없을까
한 번 뿐이 없는 삶인데”<1998.12.4.>
“수도자처럼 성인처럼 사셨다는 그분
절제와 극기의 사람
그러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의문
꼭 그렇게 각박하고 삭막하게 목표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살아야 하나
선물 받은 인생 풍요롭게 살 수는 없을까
낭만, 꿈, 감성, 그림, 노래, 춤, 여행, 사랑, 가정, 꽃...
넉넉하고 둥글게
소박하고 단순하게
인위가 아닌 무위의 자유인으로 살 수는 없을까”<1998.12.6.>
“어떻게?”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적 자유는 능력입니다. 자유의 힘도 키워야 합니다.
내적힘의 능력이 없으면 소박하고 단순한 삶은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 있고 무엇을 위한 자유가 없으면
반쪽의 자유요 그 자유마저 잃습니다.
이래서 종과 섬김의 영성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을 같이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뿐입니다.
참된 자유는 섬김을 위한 삶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성 베네딕도는 당신 수도공동체를 <섬김의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를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
봉사란 말보다 순수한 섬김이란 우리말이 반갑고 정답듯,
학원이란 말보다 배움터란 우리말이 반갑고 정답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섬김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바로 구도자다운 삶입니다.
무엇보다 평생 배워야 할 종과 섬김의 영성입니다.
이런 종과 섬김의 영성의 결여의 산물이,
바로 기원전 8세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동시대의 미카 예언자가 지탄하는 무지하고 잔인한 착취자들입니다.
내적 자유를 누릴 능력이 전무한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재앙을 선포하니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의 심판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하다.”
약육강식, 문명의 야만시대, 오늘날 세계에서도,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란의 전쟁을 통해서도
역설적 불의의 현실은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참 자유를 누릴 내적힘이 없으면
밖의 성취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소유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편리와 효율, 신속함을 추구하며 불편과 느림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괴테의 말은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내적 자유의 능력이 결핍되기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없애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바리사이들도 똑같습니다.
탐욕과 질투에 자신만을 위한 안위에 집착하는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당대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주님의 종을 발견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살려는 이들에게 주시는 참 좋은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의 겸손한 섬김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주님의 종의 면모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예수님만 주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자유와 섬김의 삶을 원하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종입니다.
이어 우리가 영원히 <삶의 롤모델>로 삼아야 할 참 자유인의 모습을,
고요하고 섬세하며, 겸손하고 온유하며, 친절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우며,
항구한 사랑의 참 영성가, 관상가, 신비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이자 우리가 평생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바로 절망의 어둔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빛.
희망의 표징이 된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요,
우리가 지향해야할 궁극의 목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종과 섬김의 영성>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시편107,8). 아멘.
승리와 심판의 침묵
최 빠코미오 수사
1. 탐욕의 소음
기원전 8세기 유다의 권력자들은
침상에 누워서도 이웃의 재산을 빼앗을 악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아침이 밝자마자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한 이들의 밭과 집을 강탈하고 그 생존 기반을 유린하였습니다.
이에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일삼는 기득권층을 향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미카 2,3)
이처럼 구약의 전반부는 인간의 죄악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필연적인 재앙과 인과응보적 벌을 강력하게 고발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더 많이 차지하려는 자들의 거친 소음과
불의한 승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 고난과 대속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인과응보의 논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욥기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를 거치면서, 하느님 백성의 신학은
무죄한 이들이 겪는 고통과 대신 속죄하는 대속의 신비로 그 의미가 심화됩니다.
불의한 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전능한 힘으로 그들을 파멸시키는 대신 조용히 그곳에서 물러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며
당신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이는 세상의 무력이나 큰소리로 군림하지 않고,
가난하고 상처 입은 이들의 고통을 몸소 짊어지시는 메시아의 길입니다.
미카서가 고발한 세상의 악과 비루함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시는
십자가상의 제사, 곧 파스카 신비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3. 침묵의 조화
예수님의 비폭력적 침묵은 단순한 도피나 소극적 저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성품과 주권을 가장 강력하게 선포하는 거룩한 신학적 신비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불의한 권력을 향한 하느님의 거룩한 진노와 상한 갈대를 돌보시는 무한한 자비는
그리스도의 이 침묵 안에서 모순 없이 결합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반된 것들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통치 안에서는 구원 역사를 완성하는 완벽한 조화입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머무르며,
세속의 완고한 가치관에 함몰되지 않고
주님의 평화로운 질서를 세상에 증언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라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바보처럼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흐름과 질서를 잘 살피면서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고
순수한 영혼을 돌보는 이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유혹은 강력합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은
석⋅박사들이 연구해서 만들어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유혹 안에 잠기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키는 이들은
이 유혹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절제하기에
바보 같은 삶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을 해치려는 바리사이들을 피했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 함부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고
더 중요한 복음 선포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방해하는 이들에게 유혹이 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직접 찾아와 깨달은 이들만이
그분께 더 깊은 믿음으로 응답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간직하고
눈에 보이는 연약함에 실망하기보다
그분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붙잡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